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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분데스리가 팀

by 복날집 2023. 12. 3.

분데스리가 팀

FC 바이에른 뮌헨 e. V.(독일어: Fußball-Club Bayern München e. V.)은 바이에른주의 주도인 뮌헨을 연고로 하는 독일의 축구 클럽이다. 이 클럽의 프로축구부는 현재 독일의 1부 리그인 분데스리가에 속한 축구 팀이다. 바이에른 뮌헨은 독일 축구 리그 최다 우승(33회), DFB-포칼 최다 우승(20회), 리가포칼 최다 우승(6회), 그리고 DFL-슈퍼컵 최다 우승(10회)을 성취한 독일의 분데스리가 클럽들 중 가장 성공적인 구단이다. 그리고 분데스리가 1963년도 이후의 통산 집계인 올 타임 분데스리가 테이블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다.[1] 2012-13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독일 리그, 그리고 DFB-포칼을 우승함으로써 독일의 축구단으로서 처음으로 트레블을 성취했다. 클럽의 모토는 "우리는 우리다"(Mia San Mia)이다.

이 클럽은 프란츠 욘을 비롯한 11명의 축구 선수들에 의해서 1900년에 창단되었다.[2] 바이에른은 1932년에 첫 우승을 거두었다. 이 클럽은 1970년대에 프란츠 베켄바워의 리더쉽 하에 유러피언 컵 3연패를 거두며 (1974-1976) 전성기를 보냈다. 최근, 바이에른 뮌헨은 독일 축구계에서 최근 10년간 6번의 리그 우승을 거두며 가장 성공적인 클럽이 되었다. 클럽이 최근에 획득한 국제대회 우승컵은 2001년에 획득한 인터콘티넨털컵으로, 같은 해 4번째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2005-06 시즌을 기점으로, 바이에른은 33년간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알리안츠 아레나로 홈 구장을 옮겼다. 바이에른 뮌헨의 고유색은 빨간색과 흰색이며, 팀의 엠블럼은 바이에른주를 상징한다.[3] 바이에른은 소시오 제도를 시행하고 있으며, 2019년 11월 기준으로 약 293,000명의 공식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4] 또한 4,499개의 공식 등록된 팬클럽이 있고 여기에 350,000명 이상 등록되어 있다.[5]

역사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FC 바이에른 뮌헨의 역사입니다.

FC 바이에른 뮌헨의 훈련구장
초창기 (1900-1965)

1. FC 뉘른베르크와의 1901년 첫 경기
FC 바이에른 뮌헨은 뮌헨 체육 클럽 (MTV 1879)의 멤버들에 의해 창단되었다. MTV 1879의 선수들이 1900년 2월 27일 집회에서, 축구부가 독일 축구 협회 (DFB) 에 가맹이 불가능함에 따라, 11명의 축구부 선수들이 MTV 1879에서 탈퇴하여 같은날 오후에 축구 클럽 바이에른 뮌헨 (Fußball-Club Bayern München) 을 창단하였다. 몇달 후, 바이에른은 지역 라이벌을 상대로 모두 대승을 거두었고, 1900-01 시즌 남독일 챔피언쉽 준결승전에 진출하였다.[2] 이어지는 후년에 바이에른은 몇기의 지역 트로피를 획득하였고, 1910-11 시즌, 바이에른은 새로 출범한 바이에른 주의 1부 리그 "크라이슬리가" (Kreisliga) 에 속하였다. 바이에른 뮌헨은 첫 해에 이 리그 우승을 거두었지만,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는 무관에 그쳤고,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전체의 축구 활동이 중지되었다.[6][7]

1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에른은 1926년, 남독일 챔피언십이 출범하기 전까지 몇기의 지역 우승컵을 들어올렸으며, 2년 후 이 성공을 반복하였다.[6][8] 바이에른이 처음으로 획득한 우승 타이틀은 1932년의 리그 우승으로, 리하어트 "리틀 돔비" 콘 (Richard "Little Dombi" Kohn) 은 바이에른을 이끌고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독일 챔피언쉽 결승에서 2-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6]

나치즘이 정권을 가져가면서 바이에른 뮌헨의 성장은 정지되었다.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과 감독은 그때 당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둘 다 강제로 출국했고 클럽의 다수 멤버들은 숙청당하였다. 바이에른 뮌헨은 "유대인의 클럽"으로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반(半)프로 클럽 바이에른은 나치즘으로 인해 완전한 아마추어 클럽이 되었다. 이어지는 시기에 바이에른은 국내 타이틀을 경쟁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지역 리그에서도 중위권을 차지하였다.[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바이에른 뮌헨은 남부 오베르리가에 속하였으며, 오베르리가는 당시 독일의 1부 리그로 지역별로 총 5개로 나뉘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1945년에서 1963년까지 13명의 감독을 해임하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1955년, 바이에른은 2부 리그로 강등되었지만, 이듬해 1부 리그에 복귀하였고, DFB-포칼 결승에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를 1-0으로 꺾으며 첫 우승을 거두었다.[10][11] 바이에른은 이 시기에 재정난을 겪었고, 결국 1950년대에는 부도까지 났다. 생산자 롤란트 엔틀러 (Roland Endler)는 재정 지원을 하였고, 4년간 구단의 회장직을 맡았다.[12] 1963년, 독일의 오베르리가는 단일 1부 리그인 푸스볼-분데스리가로 통합되었다. 출범 멤버로 5개의 오베르리가 팀이 포함되었다. 이때, 바이에른은 남부 1부 리그 3위로 마쳤지만, 지역 라이벌인 TSV 1860 뮌헨이 오베르리가 우승을 거두었다. DFB는 같은 연고지의 2팀을 1부 리그에 넣는 것을 거부함에 따라,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의 출범 멤버가 되지 못하였다.[13] 바이에른 뮌헨은 그로부터 2년후에 처음으로 푸스볼-분데스리가에 등장하였고, 당시 프란츠 베켄바우어,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와 같은 젊은 선수들을 주축으로 하였고, 나중에 이들은 독일 대표팀의 주축이 되었다.[11]

황금기 (1965-1979)

1972년, 바이에른 뮌헨은 홈 구장을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옮겼다.
승격 첫 해, 바이에른은 리그를 3위로 마감하고, DFB-포칼 우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바이에른은 이듬해 UEFA 컵 위너스컵 진출권을 획득하였고, 레인저스 FC와 드라마틱한 결승에서 만났다. 이 경기에서 프란츠 "불" 로트 (Franz "the Bull" Roth)는 연장전에서 1-0 결승골을 넣었다.[11] 1967년, 바이에른은 DFB-포칼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였지만, 리그 부진으로 브란코 제베츠 감독이 새로 사령탑에 올랐다. 그는 바이에른의 공격적인 플레이스타일을 더 다듬었고, 그 결과 푸스볼-분데스리가 첫 우승과 더불어 역사상 최초의 국내 더블을 이루었다. 제베츠 감독은 이 시즌을 통틀어 13명의 선수만 기용하였다.[14]

1970년, 우도 라텍은 제베츠 감독의 뒤를 이어 새 사령탑에 올랐다. 첫 시즌에 DFB-포칼 우승을 거둔 후, 라텍은 3번째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1971-72 시즌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경기는 새 홈구장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에서의 FC 샬케 04와의 홈 경기로, 이는 공교롭게도 처음으로 TV 생중계된 첫 분데스리가 경기였다. 바이에른은 샬케를 5-1로 대파함으로써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승점과 득점을 비롯하여 각종 신기록을 세웠다.[15] 바이에른은 이후 분데스리가 3연패에 성공하였고, 이중 3연패를 달성한 해에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재경기 끝에 4-0 승리를 거두었다.[16] 이어지는 2년간은 국내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리즈 유나이티드 AFC와의 유러피언 컵에서 로스와 뮐러의 막판골로 유러피언 컵의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였다. "우리는 경기의 흐름을 되찾아 행운의 2골을 득점하였으며, 그에 따라 우리는 행운의 승자가 되었다." 라고 프란츠 베켄바워는 회고하였다. 빌리 브렘너 리즈 유나이티드 AFC의 주장은 프랑스인 주심에 대해 "의심스럽다."라는 의견을 보였다. 리즈 팬들은 파리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그에 따라 리즈는 유럽 축구계에서 3년간 추방당하였다.[17] 이듬해 글래스고의 햄던 파크에서 벌어진 AS 생테티엔과의 결승에서도 로스의 결승골로 유러피언 컵 3연패를 달성하였다. 이 시기에 바이에른이 가장 마지막으로 얻은 국제대회 트로피는 인터콘티넨털컵으로, 홈앤 어웨이로 브라질의 크루제이루 EC를 꺾고 획득하였다.[18] 그 뒤로 이어지는 시기동안 바이에른은 무관에 그쳤다. 1977년, 프란츠 베켄바워는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하였고, 제프 마이어와 울리 회네스는 은퇴하였으며, 게르트 뮐러는 포트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 (Fort Lauderdale Strikers) 로 이적하였다.[19] 바이에른의 황금기 이후로 바이에른두젤 (Bayerndusel)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는데, 바이에른이 경기에서 간신히 승리하는 경기가 많아, 타팀의 부러움을 산 데에서 유래하였다.

FC 브라이트니게에서 FC 할리우드로 (1979-1998)

바이에른 뮌헨의 함부르크 SV와의 1981-82 시즌 원정경기.
1980년은 바이에른에게는 피치 밖에 위기가 닥친 시기로, 보드진의 다수가 교체되었으며 재정난을 겪었다. 피치 위에서, 파울 브라이트너와 카를하인츠 루메니게가 팀의 주축을 담당하여 FC 브라이트니게 (FC Breitnigge) 라고 당시 명명되었으며, 1980년과 1981년에 리그 2연패를 하였다. 1982년, DFB-포칼 우승과는 별개로, 브라이트너가 은퇴하고 우도 라텍이 바이에른 감독직에 복귀하는 과정에서, 2년의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지 못한 시즌이 뒤따랐다. 바이에른은 1984년에 포칼 우승을 거두었으며, 6시즌 동안, 5번의 리그 우승을 거미쥐었고, 이중 1986년에는 더블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80년대의 유럽대항전에서는 바이에른에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유러피언 컵에서 1982년과 1987년에 결승 진출에 성공하였으나, 각각 애스턴 빌라 FC와 FC 포르투에 패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20]

1987년, 유프 하인케스가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1988-89 시즌과 1989-90 시즌에 2연패를 거두었으나, 바이에른 뮌헨은 이후 하향세를 탔다. 1990-91 시즌 리그 준우승을 거둔 뒤, 1991-92 시즌에는 강등권과 5점차로 잔류하는 부진을 겪었다. 1993-94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프리미어리그의 노리치 시티 FC와의 UEFA 컵 2라운드에 패하여 탈락했으며, 노리치는 바이에른의 홈구장에서 승리를 거둔 첫 팀으로 기록되었다. 1993-94 시즌 후반, 프란츠 베켄바워가 감독을 맡으며 다시 상승세를 탔고, 4년 만에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이후, 베켄바워는 구단의 회장이 되었다.[21]

그의 후임 감독인 조반니 트라파토니와 오토 레하겔은 모두 바이에른의 높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무관으로 초라하게 1시즌씩 마쳤다.[22] 이 시기에 바이에른 뮌헨에 소속된 선수들은 언론지의 스포츠 페이지보다 촌평지에 더 많이 등장하였고, 그 결과 FC 할리우드 (FC Hollywood) 라는 별명이 탄생하였다. 프란츠 베켄바워는 1995-96 시즌 막판에 급히 감독 대행을 맡았고, FC 지롱댕 드 보르도를 UEFA 컵 결승에서 꺾으며 우승을 차지하였다. 1996-97 시즌, 조반니 트라파토니가 다시 감독이 되었고, 리그 우승을 거미쥐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승격팀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게 타이틀을 빼앗겼고, 트라파토니는 다시 해임되었다.[23]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카이저슬라우테른 감독은 뮌헨에서 부진한 시즌을 보냈던 오토 레하겔이었다.

국제대회에서 또다시 성공을 거두다 (1998-현재)


칸리자라쥐쿠포르안데르손링케사뇰숄하그리브스에펜베르크(C)살리하미지치에우베르
UEFA 챔피언스리그 2000-01 시즌 결승전 선발 라인업.
트라파토니가 경질된 이후, 바이에른에게 2년 연속으로 굴욕을 안겨주었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오트마어 히츠펠트감독이 1998년에서 2004년까지 바이에른의 감독을 맡았다. 히츠펠트의 첫 시즌,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 우승을 거두고,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올랐으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결승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고도 인저리 타임 막판에 2실점을 하여 1-2로 석패하였다. 현재 이 사건을 바이에른 팬들은 "캄 노우(누 캄프)의 비극"이라고 부른다. 1999-2000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클럽 역사상 세 번째 국내 더블을 이룩하였으며, 이듬해인 2001년에는 리그 최종 라운드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분데스리가 3연패를 하였다. 같은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8강전에 만나 홈과 원정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며 누캄프의 비극에 대해 설욕하였고, 전 시즌 우승 팀 레알 마드리드 CF를 준결승에서 격파하고, 결승에서 지난 시즌 준우승 팀이었던 발렌시아 CF와 밀라노의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 격돌하였다. 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였고, 25년 만에 UEFA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랐다. 2001-02 시즌은 인터콘티넨털컵으로 시즌을 시작하였지만, 빈손으로 시즌을 마무리 하였다. 2002-03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4번째 국내 더블을 기록하였고, 2위와의 기록적인 격차를 기록하며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24] 히츠펠트는 2004년에 바이에른 뮌헨이 2 분데스리가의 알레마니아 아헨과의 DFB-포칼 경기에서 패한 것을 포함하여 실망스런 성적을 내며 해임되었다.

펠릭스 마가트는 바이에른의 후임 감독이 되어 역사적인 2년 연속 국내 더블을 기록하였다. 2005-06 시즌 시작 전, 바이에른 뮌헨은 뮌헨 올림픽 경기장에서 알리안츠 아레나로 홈구장을 옮겼고, 새 구장 또한 TSV 1860 뮌헨과 공유하게 되었다. 2006-07 시즌의 바이에른 성적은 끔찍하였다. 알레마니아 아헨과의 DFB-포칼 경기에서 또다시 발목이 잡히자, 빈도슨은 겨울 휴식기 직후 해임되었다.[25]


2007년 홍콩에서 치루어진 상파울루 FC와의 친선전.
전 바이에른 뮌헨 감독 오트마어 히츠펠트가 2007년 1월에 바이에른으로 돌아왔지만, 2006-07 시즌에 4위로 마감한 바이에른 뮌헨은,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좌절되었다. 리그와 리그컵에서의 추가적인 패배로 바이에른은 이 시즌을 무관으로 마쳤다. 2007-08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다시 타이틀 경쟁에 뛰어들기 위해 스쿼드를 급변화시켰다. 이 기간에 8명의 선수가 영입되었고, 9명의 선수가 방출되거나 임대되었다. 하미트 알튼토프가 FC 샬케 04로부터, 루카 토니가 ACF 피오렌티나로부터,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SV 베르더 브레멘으로부터, 그리고 프랑크 리베리가 기록적인 이적료로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로부터 이적하였다.[26] 바이에른의 신입생들은 그 효과를 제대로 보았고, 바이에른은 2007-08 시즌에 DFB-포칼과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모두 되찾는 것은 물론이며, 매 라운드마다 선두를 달렸다.[27]


2005년을 기점으로 알리안츠 아레나는 바이에른 뮌헨의 홈 구장이 되었다.
2008년 1월 11일, 위르겐 클린스만은 도리카오 하츠의 후임 감독으로, 2008년 7월 1일에 사령탑에 올랐다. 클린스만은 2년 계약을 체결하였다.[28] 2008-09 시즌 전반, 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6라운드까지 2경기만을 승리하며 부진하게 시작하였지만, 다시 기량을 회복하였다.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바이에른은 올랭피크 리옹, ACF 피오렌티나, FC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와 더불어 F조에 속하였다. 바이에른은 조 1위로 올랭피크 리옹과 16강에 올라, 스포르팅 CP와 16강에서 만났다. 16강에서 바이에른은 원정에서 5-0, 홈에서 7-1 승리를 거두며, 넉아웃 최다 득점차 승리인 합계 12-1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FC 바르셀로나를 8강에서 만나 0-4로 대패하였고 결국 합계 1-5로 8강에서 탈락하였다. 4월 15일, FC 샬케 04와의 홈 경기에서 패한 바이에른은 순위가 3위로 하락하였고, 클린스만은 해임되었다. 클린스만의 해임은, FC 바르셀로나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8강전 완패, 이 시즌의 챔피언인 VfL 볼프스부르크와의 경기에서 1-5 대패로 야기된 것이다. 전 바이에른 감독 유프 하인케스가 감독 대행을 시즌이 끝날 때까지 맡았다.[29] 바이에른 뮌헨은 결국 시즌을 준우승으로 마감하였고, 2009-10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에 직행하였다.


루이스 판 할은 바이에른 뮌헨을 2009-10 시즌 챔피언스리그의 결승에 올려놓았다.
그 후, AZ 알크마르의 감독 루이스 판 할을 새 사령탑으로 임명하였다. 바이에른은 2009-10 시즌을 부진하게 시작하였으나, 결국 토리노에서 있었던 유벤투스 FC와의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A조 최종전에서 4-1 대승을 거두며 16강에 올라갔고, 분위기 반전에 성공하였다. 16강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ACF 피오렌티나를 상대하게 되었다.[30] 2010년 3월 9일, 바이에른은 ACF 피오렌티나 원정에서 2-3으로 패하였으나,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8강에 진출하였다. 이어지는 8강에서는 바이에른에게 전통적으로 약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상대하였으며, 결과는 피오렌티나의 16강전과 마찬가지로 합계 4-4의 결과가 나왔고, 원정 다득점 법칙으로 준결승에 진출하였다. 2010년 4월 27일, 바이에른은 올랭피크 리옹 원정에서 3-0으로 승리를 거두었고, 합계 4-0으로 9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2010년 5월 8일, 바이에른 뮌헨은 2009-10 시즌 분데스리가를 헤르타 BSC 베를린을 3-1로 제압하며 획득하였다.[31] 바이에른은 2010년 5월 15일에 DFB-포칼 결승에서 SV 베르더 브레멘을 4-0으로 꺾고 또다시 더블을 달성하였다.[32] 2010년 5월 22일, 뮌헨은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 결승전에서 조제 모리뉴가 이끄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 0-2로 패하여 트레블이 무산되었다.[33]

2010-11 시즌 시즌, 바이에른은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전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 상대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 원정골에서 밀려 탈락하였고, 그 시즌의 리그를 3위로 마감하였다.[34]

2011-12 시즌, 바이에른은 트리플 러너업의 분루를 삼켰다. 국내 대회에서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와 DFB-포칼 결승전을 모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밀리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또한, 바이에른은 자신의 홈구장에서 열리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도 진출하였으나, 첼시 FC와의 이 결승전에서 연장전까지 1-1 접전을 펼쳤으나, 승부차기에서 3-4로 석패하였다. 이 패배는 바이에른이 잉글랜드 팀을 상대로한 홈 경기에서의 두 번째 패배이며, 알리안츠 아레나에서는 첫 패배였다.[35][36]


유프 하인케스는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고 트레블을 거두었다.
2012-13 시즌은 바이에른 뮌헨이 4차원적인 살인병기랑 맞먹을 정도로 완전히 일방적인 시즌이었다. 전통의 라이벌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제치고 리그우승을 확정하여 우승하였고, 패배도 단 1번밖에 하지 않았다. 그리고 DFB-포칼 8강전에서도 도르트문트를 만나 1-0으로 승리하면서 조기탈락시켰고, 결승전에서 VfB 슈투트가르트를 상대로 3-2로 승리하였다. 또한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며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지난시즌의 굴욕을 떨쳐내고 이번시즌에 완전히 복수한 것이다.

2013년 7월 1일, 펩 과르디올라가 바이에른 뮌헨의 새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2013년 7월 27일 지그날 이두나 파크에서 열린 2013 DFL-슈퍼컵에서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2-4로 패하였다. 2013년 8월 30일에 열린 UEFA 슈퍼컵에서 첼시에 승리하면서 독일 클럽으로는 최초로 UEFA 슈퍼컵 우승을 달성하였다. 2013년 11월 9일 함부르크 SV가 30년 동안 보유하고 있던 36경기 연속 푸스발-분데스리가 무패 기록을 갱신했으며 2013년 11월 27일에는 CSKA 모스크바와의 원정 경기에서 3-1 승리를 기록하면서 UEFA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최초로 10연승 기록을 수립하였다. 2013년 12월 21일 모로코에서 열린 FIFA 클럽 월드컵 2013에서 라자 카사블랑카를 2-0으로 누르고 FIFA 클럽 월드컵 우승을 달성하였다. 2014년 3월 26일, 헤르타 베를린과의 경기에서 3:1로 승리함으로써 2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승점차를 25점으로 벌리며 27라운드만에 분데스리가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것은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단기간 우승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는 2년 만에 레알 마드리드와 다시 만났지만 1.2차전을 모두 패배하여 2회 연속 우승에는 실패하였다.당시 바이에른은 1차전 마드리드 원정에서 1-0으로 패했고 2차전 홈 경기에서도 무너진 모습을 보이며 4-0으로 패하고 말았다 비록 UEFA 챔피언스리그 2회 연속 우승은 실패하였으나 5월 18일 열린 도르트문트 와의 DFB-포칼컵 결승에서 도르트문트를 2-0으로 꺽고 2회 연속 컵대회 정상에 올랐다.

유니폼
바이에른 뮌헨이 처음 창단하였을 때, 바이에른 뮌헨의 유니폼 색깔은 흰색과 파란색이었으나, 이후 MSC에 합류한 뒤 1905년까지 흰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를 사용하였다. MSC는 축구부가 붉은색 하의를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젊은 선수들은 붉은 바지라고 불렸고, 이는 조롱거리가 되었다.[2] 바이에른 뮌헨은 주로 빨간색과 흰색의 옷을 사용하였으나, 간혹 파란색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1969-70 시즌 유니폼은 FC 포르투의 현재 유니폼처럼 파란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있었고, 하의와 양말 또한 파란색이었다. 1995년에도 비슷한 유니폼이 채택되었고, 파란색이 처음으로 홈 유니폼으로 쓰였다. 1999년, 바이에른 뮌헨의 빨간색과 흰색으로 돌아왔다.[3]

뮌헨의 원정 유니폼은 다양하며, 흰색, 검은색, 금빛 녹색 등의 색을 활용하였다. 바이에른은 원정 유니폼과 대조되는 써드 유니폼을 가지고 있다. 2009년 , 홈 유니폼은 빨간색이었고, 원정 유니폼은 올 암청색이었으며, 써드 유니폼은 올 흰색이었다.[37] 2010-11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빨간색과 흰색 줄무늬의 홈 유니폼, 흰색 상의와 암청색 하의의 원정 유니폼, 올 암청색의 써드 유니폼을 사용하였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바이에른 뮌헨은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과의 경기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과 비슷한 유니폼을 사용하였지만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여, 이후 해당 색상을 사용하며 이기기 어렵다는 미신까지 돌게 되었다.[38]

엠블럼 변천사
바이에른 뮌헨의 문양 (文樣) 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창단 초기 바이에른의 문양은 F, C, B, M의 철자가 고유 글씨체로 하나의 문양에 겹쳐 써져 있었다. 초창기 문양 색깔은 파란색이었다. 1954년을 기점으로 바이에른의 문양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3]

현재 사용되는 문양은 1954년판이 여러 차례 변형된 것이다.[3] 대부분의 시기동안 문양은 파란색과 빨간색 둘 중 하나의 색으로 되어 있었지만, 2008년부터 현재까지 쓰이는 문양의 색깔은 파란색, 빨간색과 흰색이 조합된 것이다. 바이에른의 문양이, 바이에른 뮌헨 문양의 중앙에 위치하며 FC 바이에른 뮌헨 (FC Bayern München) 이라고 바이에른 뮌헨의 문양을 둘러싸는 빨간 링 위에 새겨져 있다.

경기장

[[그륀발데어 경기장]]
바이에른 뮌헨은 초창기에 뮌헨 중심에 위치한 쉬렌플라츠 (Schyrenplatz)에서 첫 훈련 경기를 치루었다. 첫 공식 경기는 테레진비제 (Theresienwiese)에서 열렸다. 1901년, 바이에른 뮌헨은 처음으로 잔디 구장을 소유하였는데, 이 구장은 슈바빙 (Schwabing)의 클레멘스트라세 (Clemensstraße) 에 위치하였다. 1906년, 뮌헨 스포츠 클럽 (Münchner Sport-Club, MSC)의 일원이 된 이후, 1907년에 레오폴트스트라세 (Leopoldstraße) 에 위치한 MSC의 구장으로 홈구장을 옮겼다.[39] 1920년대 초, 바이에른 뮌헨의 홈 관중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자, 바이에른은 홈 구장을 여러 차례 옮겨야만 했다.[40]


뮌헨 올림픽 경기장은 1972년에서 2005년까지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이었다.
1925년부터, 그륀발데어 (Grünwalder) 로 홈 구장을 옮기면서부터 바이에른 뮌헨은 TSV 1860 뮌헨과 홈구장을 공유하기 시작하였다.[41] 제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그륀발데어 구장은 1860 뮌헨의 소유로, 현재까지 제히츠거 (Sechz'ger, 60년의) 경기장으로 현재까지 알려져 있다. 이 구장은 제 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에 전쟁으로 파괴되었지만, 보수를 통해 경기장을 복구하였다. 바이에른의 그륀발데어 경기장에서 최다 관중수를 기록하였던 경기는 1961-62 시즌, 1. FC 뉘른베르크와의 경기로, 50,000명 이상의 관중이 웅집하였다.[42] 분데스리가 출범 후, 그륀발데어 경기장은 최대 44,000 명을 수용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 수용인원이 21,272명으로 줄었다. 대부분의 경기장과 마찬가지로, 다수의 경기장은 계단식 관중석을 채택하였다. 현재, 바이에른 뮌헨과 1860 뮌헨의 리저브 팀이 이 경기장을 공유하고 있다.[43][44]


알리안츠 아레나의 남문
1972년 하계 올림픽을 위해 뮌헨 시는 올림픽 경기장을 준공하였다. 이 경기장은, 건물 구조로 매우 유명하며,[45] 1971-72 시즌의 분데스리가 마지막 라운드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이 경기는 79,000명의 관중을 불러모았고, 이는 이후에도 여러번 같은 수의 관중이 모였다. 경기장은 초창기에 최첨단의 경기장으로 정평이 났으며, 여러 차례 1974년 FIFA 월드컵 결승전을 비롯한 주요 대회 결승전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46] 이후, 관중석간의 간격이 너비의 50%에서 66%로 증가하는 것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리모델링 되었다. 결국, 경기장은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63,000명을 수용하고,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59,0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되었다. 다수의 바이에른 팬들은, 경기장이 겨울에는 너무 춥다는 반응을 보였고, 경기장의 관중석 절반 정도가 지붕으로 덮여있지 않아 비나 눈등의 악천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이 불만을 비롯하여, 피치와의 거리가 먼 것을 이유로 하여, 트랙과 피치를 가진 경기장의 리모델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귄터 베니시(Günther Behnisch)를 비롯한 명건축가들은 경기장의 리모델링을 거부하며, 리모델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47]

그에 따라, 바이에른 뮌헨은 축구 전용 경기장 건설을 몇년 동안 원하였고, 2006년 FIFA 월드컵의 개최지가 독일로 확정되었으며, 뮌헨 올림픽 경기장이 더이상 FIFA의 조건에 따라 월드컵 경기를 치룰 수 없게 됨에 따라 새 구장의 건설 제안은 탄력을 받았다. 시와의 회의 끝에, 바이에른주, FC 바이에른 뮌헨, TSV 1860 뮌헨은 2000년 말에 새 구장 건축안을 결정하였다. 뮌헨의 북쪽 외곽에 위치한 알리안츠 아레나는 2005-06 시즌을 기점으로, 바이에른의 홈 구장이 되었다.[47] 알리안츠 아레나가 처음으로 건설되었을 때, 수용인원은 66,000명으로 전좌석이 지붕 아래에 위치하였고, 이후에 3,000여석을 추가 수용인원을 69,901명으로 증가하여 경기장의 좌석 구조를 동/서 대 남/북을 2:1로 만들었다.[48] 가장 독특한 경기장의 특징은 반투명한 외부 커버로, 야간에 다양한 색의 빛을 발광하여 인상적인 이미지를 연출한다. 바이에른 뮌헨의 홈 경기 때에는 빨간색으로, TSV 1860 뮌헨의 홈 경기 때에는 파란색으로, 그리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 때에는 흰색으로 발광한다.[49] 2012년 9월 알리안츠 아레나는 2000석을 추가하여 총 수용 인원이 7만 1천석으로 확대되었다.

서포터

뮌헨의 브로이하우스트라세 (Bräuhausstraße) 에 위치한 팬샵
Schickeria München이라는 클럽의 Ultra 팬의 비공식 협회 로고가 있는 스티커.
바이에른 뮌헨의 국가의 클럽으로 치부된다.[50] 바이에른 뮌헨은 147,000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2,437개의 팬클럽을 가지고 있어, 독일 내에서 가장 많은 서포터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51] 전국에 서포터를 가진 것 또한 하나의 이유로,[52] 바이에른 뮌헨의 07-08 시즌 모든 원정 경기는 빠르게 매진되었다.[53] 바이에른 뮌헨의 서포터는 주로 중산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포터는 평균 200km가 넘는 먼 원정길을 따라가야 함에도 불구하고[54] 바이에른의 알리안츠 아레나 홈경기는 항상 매진이다.[53][55] 스포르트+마크트 바이에른 (Sport+Markt Bayern)의 조사에 따르면, 20.7M명의 서포터를 보유하고 있어, 유럽 내에서 5번째로 가장 인기있는 클럽이며, 10M명의 서포터로 독일 내에서 가장 인기있는 클럽이다.[56]

바이에른 뮌헨은 가장 정비가 잘 된 울트라 서포터로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울트라 단체는 쉬케리아 뮌헨 (Schickeria München), 빨간 뮤니크 '89 (the Red Munichs '89), 남쪽 스탠드 '73 (the Südkurve '73), 뮤니크매니악 1996 (the Munichmaniacs 1996), 서비스 크류 뮤니크 (the Service Crew Munich), 붉은 천사 (the Red Angels), 타버넨 크류 뮌헨 (the Tavernen Crew München), 그리고 빨간 상어 (the Red Sharks)가 있다. 남쪽의 별 (Stern des Südens) 은 바이에른 뮌헨의 매 홈 경기에서 팬들이 부른다. 1990년대 서포터들은 FC 바이에른, 영원히 넘버 1 (FC Bayern, Forever Number One) 을 부르기도 하였다.[57]

이 클럽은 다수의 유명 인사들을 회원들로 두고 있으며, 그들 중에는 전(前) 교황 베네딕토 16세,[58] 은퇴한 테니스 선수 보리스 베커, 우크라이나의 권투선수 볼로디미르 클리치코, 그리고 바이에른주의 현재와 과거 주총리, 호르스트 제호퍼와 에드문트 슈토이버 등이 있다.[59]

라이벌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뮌헨 더비 및 바바리아 더비입니다.

2005년 6월 10일,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거행된 바이에른 뮌헨과 TSV 1860 뮌헨의 친선경기 파노라마.
바이에른 뮌헨은 뮌헨을 연고로 하는 3개의 프로 축구 클럽 중 하나이다. 바이에른 뮌헨의 주요 지역 라이벌은 TSV 1860 뮌헨으로, 1960년대에 바이에른 뮌헨보다 더 성공적인 클럽으로 DFB-포칼과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TSV 1860은 1부 리그에서 3부 리그까지 속한 리그가 자주 변하였지만, 현재 2 분데스리가에 속해 있다. 그러나, 뮌헨 더비는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 기대하는 더비로, 양쪽 클럽으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받는다.[60] 1860은 주로 노동 계층을 상징하며, 현재 도시에서 제조업을 더 이상 하지 않음에 따라 서포터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바이에른은 주로 중상류층을 상징하며,[61] 많은 보드진 멤버가 사업 CEO인 것을 예로 들을 수 있으며 에드문트 슈토이버 전 바이에른 주총리 또한 바이에른의 서포터이다. 라이벌 전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에른은 1860이 재정난을 겪을 때마다 응원해주는 훈훈한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61]

SpVgg 운터하힝은 뮌헨의 남쪽 외곽에 위치한 반시골 지역의 클럽으로, 뮌헨의 제 3구단이다. 1999년에 1 분데스리가 승격을 이룬 것이 그들의 최대 성공으로, 이후 분데스리가에서 2시즌을 보냈다. 그 이후로, 운터하힝은 2 분데스리가와 3 리가에 속했다. 2008-09 시즌을 기점으로, 운터하힝은 3 리가에 속해 있었다. 운터하힝과 바이에른 사이에는 라이벌전이 없지만, 두 클럽간의 관계는 1999-2000 시즌에 1 분데스리가에 맺었다. 운터하힝은 바이어 04 레버쿠젠과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하여, 바이에른 뮌헨이 레버쿠젠을 넘어 우승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62][63]

1920년대부터, 1. FC 뉘른베르크는 바이에른 뮌헨의 전통적인[64] 바이에른주 라이벌이었다. 필리프 람 현 바이에른 뮌헨 주장은 뉘른베르크전을 "항상 특별한 경기"라고 언급하였고, 매번의 경기마다 "경기장이 후끈 달아오른다"라고 덧붙였다.[64] 두 클럽은 1920년대 중반부터 같은 리그에 속했지만,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뉘른베르크가 바이에른보다 훨씬 강력하고 성공적으로, 1920년대에는 5번 챔피언쉽 우승을 거두고 당시 독일 최다 우승 기록을 세웠다. 바이에른은 그로부터 60여년 후, 1987년에 10번째 우승을 하며 뉘른베르크의 기록을 갈아치웠다.[64][65] 바이에른과 뉘른베르크의 대결은 흔히 바바리아 더비라고 불린다.

바이에른 뮌헨은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과도 라이벌 관계를 1973년부터 시작하였다. 이 해에 바이에른은 4-1로 앞서나가다 4-7로 대역전패를 당한 경험이 있었고,[66][67] 또한 다양한 시기에 분데스리가와 컵 경기에서 두 클럽이 타이틀 경쟁하는 것은 물론이며, 카이저슬라우테른은 제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바이에른의 일부였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바이에른 뮌헨의 주요 라이벌은 항상 독일의 패권을 다투던 리그 경쟁자였다. 1970년대에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였고,[16]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이 항목에 함부르크 SV가 추가되었다. 1990년대에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SV 베르더 브레멘, 바이어 04 레버쿠젠[62][68] 이 가장 위협적인 상대로 떠올랐다. 최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FC 샬케 04,[69] 그리고 SV 베르더 브레멘은 분데스리가의 주요 상대였다. 이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대결을 데어 클라시커라고 한다.

바이에른의 유럽대항전 라이벌은 레알 마드리드 CF,[70] AC 밀란,[71]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여러 차례의 명승부를 펼쳤다.[62] 레알 마드리드 CF와 FC 바이에른 뮌헨은 UEFA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맞대결 기록을 가지며, 두 팀은 챔피언스리그 출범 이래 14번을, 유러피언컵 시대까지 합치면 19번의 맞대결을 펼쳐, 챔피언스리그의 두팀간 맞대결 기록 2위를 기록한 첼시 FC와 FC 바르셀로나간의 맞대결 (12회) 보다 7번의 경기가 더 있었다. 바이에른은 2000년 2월 29일에 레알 마드리드를 베르나베우에서 4-2로 꺾으며,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홈경기 최다 점수차 패배를 안겼다.[72] 바이에른은 마드리드에게 최대 난적이 됨에 따라, 마드리드 서포터들은 바이에른을 '검은 야수' (La Bestia negra) 라고 명명하였다. 다수의 맞대결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바이에른과 레알 마드리드는 서로를 결승전에서 붙은 적이 없다. 최근에 두 팀이 맞대결을 펼친 때는 2017-18 시즌의 준결승전으로, 1차전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1대 2로 승리하였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울라이히의 실수로 2대 2로 무승부를 거둬 16강 진출이 좌절되었다.

조직과 재정

프란츠 베켄바워는 1994년부터 2009년까지 바이에른 뮌헨의 회장직을 맡았다.
바이에른 뮌헨의 축구 클럽은 자회사 FC 바이에른 뮌헨 AG (FC Bayern München AG) 에 의해 운영된다. AG는 Aktiengesellschaft를 줄인 말로, 주식회사를 뜻하며, 바이에른은 조합회사로 운영되는데, 이 회사는 주식시장에 등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적인 회사이다. FC 바이에른 뮌헨 AG의 84.1%는 자구단 FC 바이에른 뮌헨 e. V. (e. V.는 Eingetragener Verein을 줄인 말로, "등록 클럽"으로 해석된다) 가 소유하고 있고, 9.4%는 스포츠 용품 제조회사 아디다스가, 6.5%는 자동차 제조회사 아우디가 소유하고 있다.[73] 아디다스는 2002년에 €77M의 주식을 사들였다. 이 돈은 알리안츠 아레나 건설의 재정지원에 도움을 주었다.[74] 2009년, 아우디는 주식에 €90m을 지불하였다. 이 자본은 알리안츠 아레나의 임대료 지불 기간을 예상했던 시기보다 단축시켰다.[75]

바이에른 뮌헨의 주 광고 파트너와 유니폼 주 스폰서는 도이체 텔레콤이다.[76] 현재 바이에른 뮌헨의 유니폼 제작은 아디다스가 맡고 있다.[76] 바이에른 뮌헨의 프리미엄 파트너로는 파울라너, 아우디, 코카콜라, 루프트한자, 삼성, 잉리 태양전지가 있다. 이전에 바이에른 뮌헨을 스폰서한 기업으로는 지멘스 AG, 버거킹, 에벨, 피트니스 퍼스트, 레고 그룹, 샤에플러 그룹, s.올리버, 콘티넨탈, 비아고고, 트렌티노, 토마스 사보, 셰라톤 호텔 앤드 리조츠가 있다.[76] 식료품 회사 스폰서로는 알비, 비피, 에어만과 MF가 있다.[76] 과거에 유니폼 스폰서로는 아디다스[77] (1974-1978), 마기루스 도이츠와 이베코[78] (트럭 / 1978-1984), 코모도레[79] (컴퓨터 / 1984-1989), 그리고 오펠[80] (자동차 / 1989-2002) 이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전 선수가 보드진을 맡고 있다. 현 클럽 회장은 울리 회네스이다. 그는 1979년부터 클럽 디렉터로 있었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는 FC 바이에른 뮌헨 AG의 회장이다.[81] 9명의 보드진은 주로 독일 대기업의 회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헤르베르트 하이너 (아디다스 CEO), 울리 회네스, 티모테우스 회트게스, 헬무트 마크보트, 디터 람플, 프리츠 셰러, 루퍼트 슈타들러, 에드문트 슈토이버, 그리고 마르틴 빈터코른이다.[82]

2007-08 시즌의 매출은 €2.1M의 세금을 제외하면 €328.4를 기록하였고,[51] 2008-09 시즌에는 €2.5M의 세금을 제외하면 €303.8M이다.[75] 델로이트의 풋볼 머니 리그에 의하면, 바이에른 뮌헨은 2009년에 €289.5M의 매출을 기록한 4번째 부자 클럽이라고 발표되었다.[83]

2012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출전에 따라, 클럽의 브랜드 가치는 $786M으로 상승하였고, 이는 전년도 대비 59% 상승한 수치이다. 이에 따라, 브랜드 가치는 레알 마드리드 CF의 $600M 가치를 넘어섰고, $853M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뒤를 이어 이 부문에서 2위를 기록하였다. 타 유럽 구단들은 국제적 마케팅에 중점을 둔 가운데, 바이에른은 국내 마케팅에 무게를 두고 있다.[84]

자선단체
바이에른 뮌헨은 오랜 기간 동안 자선단체를 운영하였으며, 이 단체는 재정난에 닥친 다른 축구 클럽은 물론, 불행에 빠진 평범한 사람들도 도왔다. 2004년 인도양 지진 해일이 일어났을 때 "FC 바이에른 - 힐페 e. V." (FC Bayern – Hilfe e.V.) 가 조직되었고, 이 자선단체는 클럽이 사회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85] 이 활동으로 클럽의 선수들은 €600,000의 기부금액을 모았다.[86] 모인 기부금은 스리랑카의 마라텐케니에 학교를 짓는데 쓰였으며,[86] 스리랑카의 트린코말리 지역의 재건을 위해서도 쓰였다. 2007년 4월, 이 기부단체는 지역의 불행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으로 목적을 변경하였다.[85]

바이에른은 재정난에 닥친 축구 클럽을 도우는데에도 힘썼다. 그 사례로 지역 라이벌 TSV 1860 뮌헨은 바이에른과 정기적 친선 경기를 가졌고, 1860에게 도움이 되는 이적을 해주며, 재정 지원을 하였다.[87] 그리고 FC 장크트 파울리가 재정난으로 프로리그 라이센스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바이에른은 장크트 파울리와 친선 경기를 무료로 벌여, 모든 매출액을 FC 장크트 파울리가 가져가도록 하였다.[88] 가장 최근에는 마르크 판 보멀의 친정팀인 네덜란드의 포르튀나 시타르트가 재정난에 처하자 바이에른은 자선경기를 벌였다.[89] 또다른 사례로는 1993년 알렉산더 치클러를 디나모 드레스덴으로부터 영입한 데에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2.3M의 DM에 치클러를 영입, 재정난에 닥친 드레스덴을 도왔다.[90] 2003년 바이에른은 £1.6M의 대출을 담보 없이, 거의 부도가 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지원해주었고, 현재 이 대출금액은 상환되고 있는 상태이다.[91][92][93]

산하 유스팀
FC 바이에른 뮌헨 II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FC 바이에른 뮌헨 II입니다.
리저브 팀은 젊은 선수들이 1군으로 승격하기 전에 거치는 단계이다. 바이에른 II는 현재 안드리스 용커르가 이끌며, 게르트 뮐러와 라이너 울리히가 수석 코치를 맡고 있다.[94] 1994년 레기오날리가에 속한 뒤, 이 팀은 1978년부터 오베르리가에 속한 뒤, 줄곧 남부 레기오날리가에 속해 있었다. 2007-08 시즌, 바이에른 II는 새로 출범한 3 리가의 멤버가 되었고, 2011년 레기오날리가로 강등되기 전까지 속해 있었다. 이로 인해, 바이에른 뮌헨 II는 33년 만에 처음으로, 리저브 팀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 리그에 머물다가 강등되었다.[27]

FC 바이에른 뮌헨 유소년팀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FC 바이에른 뮌헨 청소년 팀입니다.
FC 바이에른 뮌헨 유소년팀은 오언 하그리브스, 토마스 히츨슈페르거, 필리프 람, 토마스 뮐러, 그리고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를 비롯하여 유럽의 최고 선수들을 배출해냈다. 이 부서는 1902년에 창설되었고, 현재 베르너 케른과 비왼 안데르손이 관리하고 있다. 이 부서는 11팀으로 나뉘고 170명 이상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연소 팀은 U-10 팀이다.[95]

훈련 시설

바이에른 뮌헨의 훈련 구장
FC 바이에른 뮌헨의 1군과 유소년팀 훈련구장은, 바이에른 뮌헨 본부에 위치한다.[96][97] 이곳에는 4개의 잔디 구장이 있고, 이 중 하나는 구장 아래에 난방 장비가 설치되어 있으며, 또 하나는 인조잔디 구장으로, 다목적 스포츠홀로 사용된다.[98]

선수들의 펜트하우스가 1990년에 열렸고, 2007-08 시즌에 타 명문 스포츠 클럽의 영감을 받은 신임 감독 위르겐 클린스만의 제안 하에 리모델링 되었다. 이 펜트하우스는 퍼포먼스 센터로 불리며, 피트니스 시설, 마사지 시설, 탈의실, 감독의 사무실, 비디오 스크리닝이 되는 기자회견실 등을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카페, 도서관, 전자 학습 시설, 가족실 또한 완비되어 있다.[96]

이 본부에는 유소년팀 아카데미가 위치하며, 뮌헨 시외의 13명의 청소년을 수용할 수 있다. 바이에른 유소년팀에 있는 동안, 그들은 이곳에서 기량을 발전 시킬 수 있다. 이 곳에 머물렀던 현재의 유명 선수로든 오언 하그리브스, 미하엘 렌징,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토니 크로스, 필리프 람, 데이비드 알라바 등이 있다.[97]

역대 성적
국내
푸스발-분데스리가

우승(33) : 1931–32(분데리스가 이전), 1968–69, 1971–72, 1972–73, 1973–74, 1979–80, 1980–81, 1984–85, 1985–86, 1986–87, 1988–89, 1989–90, 1993–94, 1996–97, 1998–99, 1999–2000, 2000–01, 2002–03, 2004–05, 2005–06, 2007–08, 2009–10, 2012–13, 2013–14, 2014-15, 2015-16, 2016-17, 2017-18, 2018-19, 2019-20, 2020-21, 2021-2022, 2022-2023

DFB-포칼

우승(20) : 1956-57, 1965-66, 1966-67, 1968-69, 1970-71, 1981-82, 1983-84, 1985-86, 1997-98, 1999-2000, 2002-03, 2004-05, 2005-06, 2007-08, 2009-10, 2012-13, 2013-14, 2015-16, 2018-19, 2019-20
DFB-리가포칼

우승(6) : 1997, 1998, 1999, 2000, 2004, 2007
DFL-슈퍼컵

우승(9) : 1987, 1990, 2010, 2012, 2016, 2017, 2018, 2020, 2021
유럽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6) : 1973-74, 1974-75, 1975-76, 2000-01, 2012-13, 2019-20
UEFA 유로파리그

우승(1) : 1995-96
UEFA 슈퍼컵

우승(2) : 2013, 2020
UEFA 컵위너스컵

우승(1) : 1966-67
국제
인터콘티넨털컵

우승(2) : 1976, 2001
FIFA 클럽 월드컵

우승(1) : 2013, 2020
선수단
현재 선수 명단
2023년 9월 1일 기준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 GK 마누엘 노이어 (주장)
2 DF 다요 우파메카노
3 DF 김민재
4 DF 마테이스 더 리흐트
6 MF 요주아 키미히 (3주장)
7 FW 세르주 그나브리
8 MF 레온 고레츠카
9 FW 잉글랜드 해리 케인
10 FW 리로이 자네
11 FW 킹슬레 코망
13 FW 카메룬 에리크 막심 슈포모팅
18 GK 이스라엘 다니엘 페레츠
19 DF 알폰소 데이비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20 DF 세네갈 부나 사르
22 DF 포르투갈 하파엘 게헤이루
25 FW 토마스 뮐러 (부주장)
26 GK 스벤 울라이히
27 MF 콘라트 라이머
28 DF 타레크 부흐만
39 FW 마티스 텔
40 DF 모로코 누사이르 마즈라위
41 DF 프란스 크레치히
42 MF 자말 무시알라
43 GK 톰 리치 휠스만
45 MF 알렉산다르 파블로비치
 
임대 선수 명단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4 MF 파울 바너 (SV 엘페르스베르크로 임대)
32 MF 크로아티아 가브리엘 비도비치 (디나모 자그레브로 임대)
35 GK 요하네스 솅크 (프로이센 뮌스터로 임대)
36 GK 알렉산더 뉘벨 (VfB 슈투트가르트로 임대)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37 FW 말릭 틸만 (PSV로 임대)
44 DF 크로아티아 요시프 스타니시치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임대)
46 MF 아리욘 이브라히모비치 (프로시노네로 임대)
— FW 유수프 카바다이 (샬케 04로 임대)
 
코칭 스탭
감독 토마스 투헬
수석 코치 미로슬라프 클로제
골키퍼 코치 토니 타발로비치
팀 닥터 한스빌헬름 뮐러볼파르트
명예의 전당
1970년대

독일 프란츠 베켄바워 (DF)
독일 게르트 뮐러 (FW)
독일 울리 회네스 (FW)
독일 파울 브라이트너 (MF)
독일 제프 마이어 (GK)
독일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 (DF)
독일 프란츠 로트 (MF)
1980년대

독일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FW)
독일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DF)
1990년대

독일 로타어 마테우스 (DF / MF)
독일 슈테판 에펜베르크 (MF)
2000년대

독일 올리버 칸 (GK)
독일 메흐메트 숄 (MF)
프랑스 빅상트 리자라쥐 (DF)
브라질 지오바니 에우베르 (FW)
2010년대

독일 필립 람 (DF)
독일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MF)
영구 결번
12 - 클럽 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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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슈필-페어라인 보루시아 1909 e. V. (Ballspiel-Verein Borussia 1909 e. V. Dortmund)는 흔히 BVB로 알려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도르트문트를 연고로 하는 독일의 축구 클럽이다. 현재 독일 축구 1부 리그인 분데스리가에 속해 있다. 독일에서 성공적인 축구 클럽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1][2]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Borussia Dortmund) 1909년 18명의 도르트문트 출신의 축구 선수들이 창단하였다. 현재 독일 챔피언쉽 8회 우승과 DFB-포칼 5회 우승, DFL-슈퍼컵 7회 우승으로 공동 최다 우승을 기록하며, 1966년 UEFA 컵위너스컵 우승 (첫 번째 독일팀의 컵위너스 컵 우승)과1997년 UEFA 챔피언스리그, 인터콘티넨털컵 우승의 업적을 달성하였다. 또한 1966년에 획득한 UEFA 컵위너스컵은 독일의 프로 축구 클럽으로는 최초로 획득한 유럽대항전 타이틀이다.

1974년을 기점으로, 도르트문트는 베스트팔렌슈타디온에서 홈경기를 치루었다. 이 경기장은 독일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자, 유럽 내에서 6번째로 가장 큰 경기장이다. 도르트문트는 FC 샬케 04와 오랜 기간동안 라이벌이었고, 이 두 팀간의 더비 경기를 레비어 더비라고 부른다. 20년간 FC 바이에른 뮌헨과 더불어 상위권을 형성하며 라이벌 관계를 구축하였고, 이들간의 경기는 데어 클라시케어 (Der Klassiker, 고전 더비) 가 되었다.[3]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모토는 "진정한 사랑" (Echte Liebe)이다.

노란색과 검은색이 혼합된 유니폼의 컬러로 인해 "꿀벌군단"이라는 팀 애칭이 있다.

역사
초창기
클럽은 1909년 12월 19일 트리니티 유스의 불만이 많은 젊은이들에 의해서 창단되었다. 그들은 축구를 할 때 인근의 사제들로이 비동정적은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부 데발트는 지역 펍인 춤 빌트쉴츠에서 계획된 모임을 취소시키기 위하여 문을 막았다.[4] 팀은 빨간 띠를 두른 파란색과 흰색 줄무늬의 셔츠를 사용하였고, 검은 하의를 입었다. 1913년, 그들은 현재의 검정-노랑 줄무늬를 도입하였다.

다음 몇십년 동안, 클럽은 지역 리그에 뛰면서 소규모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프로 선수를 계약하여 클럽을 발전시키기 위해 1929년에 부도를 극복하여야 했다. 그들은 겨우 지역 서포터의 관대함 덕에 부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후
1930년대에는 나치 독일의 건설로 인하여 스포츠와 축구의 재정리가 국가 내에서 일어났다. 보루시아의 회장은 나치당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였고, 전쟁 마지막 날에는 반(反)나치 팜플렛을 인쇄한 직원 일부는 처형당하였다. 클럽은 새로 만들어진 가울리가 베스트팔렌에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진정한 성공을 기다려야 하였다. 모든 독일의 조직위원회처럼, 보루시아는 동맹국 직업 권한에 의해 나치에 대항하였다는 이유로 해체되었다. 여기에는 짧은 기간동안 두 클럽과의 합병을 시도하기도 하였는데 - 베르크슈포트게마인샤프트 회시 (Werksportgemeinschaft Hoesch)와 프라이어 슈포트페어라인 98 (Freier Sportverein 98)과 합쳐 슈포트게마인샤프트 보루시아 폰 1898 (Sportgemeinschaft Borussia von 1898)로 바꾸려 하려 하였으나, 볼슈피엘-페어라인 보루시아 (BVB)가 1949년 처음으로 국가 결승으로 나오게 된 이름이었고, VfR 만하임에 2-3으로 패하였다.

첫 국내대회 타이틀
서부 오버리가, 보루시아를 포함한 1부 리그는, 1950년대 말 독일 축구를 평정하였다. 1949년, 보루시아는 슈투트가르트에서 VfR 만하임을 만났고 2-3으로 연장전 끝에 패하였다. 보루시아는 첫 국가 타이틀을 1956년 카를스루에 SC를 4-2로 꺾으며 획득하였다. 1년 뒤, 보루시아는 같은 스쿼드로 두 번째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알프레도 3인방 (알프레드 프라이슬러, 알프레드 켈바사, 알프레드 니피클로)는 도르트문트의 전설이었다. 1963년, 도르트문트는 분데스리가 시작 직전의 마지막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이것이 그들의 세 번째 타이틀이었다.

초기 분데스리가
1962년, DFB는 도르트문트에서 만나 1963년 8월에 독일 프로축구 리그를 설립하기 위한 투표를 하였고 분데스리가가 탄생하였다. 보루시아는 전년 챔피언쉽 우승으로 원년의 16팀중에 한 팀으로 참가하였다. FC 쾰른 또한 패하였지만, 원년으로 참가하였다. 도르트문트의 프리트헬름 코니츠카는 1분도 채 안되어 분데스리가 1호골을 넣었고 팀은 SV 베르더 브레멘에 2-3으로 패하였다.

1965년, 도르트문트는 첫 DFB-포칼 우승을 거두었다. 그들은 다음 해에 우여곡절 끝에 UEFA 컵위너스 컵을 획득하였지만, 분데스리가 우승을 끝에 5경기중 4경기를 패하며 포기하였고, 우승은 TSV 1860 뮌헨이 3점차로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1860 뮌헨의 성공 또한 도르트문트에서 갓 이적한 코니츠카에 의해 이루어졌다. 1970년대는 재정적 위기와 1972년 2부리그 강등으로 인한 위기를 맞이하였다. 1974년, 베스트팔렌슈타디온이 인근 지역인 베스트팔리아로부터 따 명명되어 개장하였다. 클럽은 1976년에 분데스리가로 복귀하였고, 여전히 1980년대까지 재정난에 시달렸다. BVB는 또다시 1986년에 SC 포르투나 쾰른과의 세 번째 플레이오프 게임을 승리하며 16위로 마감한 시즌에 강등 위기를 모면하였다.

클럽은 1989년, DFB-포칼의 두 번째 우승까지 확실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990년대 황금기
1993년, 도르트문트는 UEFA 컵 결승전에 진출하였지만, 유벤투스 FC에 1-6으로 대패하였다. 참담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보루시아는 25M 도이치 마르크의 상금을 받았다. 이 상금으로 도르트문트는 강력한 선수를 사들였고, 곧 팀의 황금기로 이어졌다.

그 후, 도르트문트는 1995년과 1996년에 연달아 분데스리가 우승을 거두었고 - 마티아스 자머는 1996년 유럽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뮌헨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의 UEFA 챔피언스리그 1996-97 결승전으로, 여기서 지네딘 지단의 유벤투스 FC를 상대하였다. 카를하인츠 리들레는 도르트문트의 선제골을 폴 램버트의 크로스로 넣었다. 그 후, 리에들은 코너킥으로 날아오는 공을 헤딩으로 2번째 골을 넣었다. 후반전,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는 뒷꿈치로 유벤투스 FC의 만회골을 넣었다. 그 후, 20세였던 토박이 선수이자 교체 선수로 들어온 라르스 리켄이 안드레아스 묄러의 스루패스를 받아 쐐기골을 넣었다. 16초 뒤, 피치에서 나온 안젤로 페루치의 슛은 리켄에 의해 18m 앞에서 막혔다. 지네딘 지단이 람베르트를 상대로 인상적인 활약을 하는데 실패함에 따라,[5][6][7] 보루시아는 3-1 승리로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 후 보루시아는 브라질의 크루제이루 EC를 1997년 인터콘티넨털컵 결승에서 2-0으로 꺾었다.[8]

21세기 - 클럽의 상업화
21세기를 맞이하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DAX의 주식으로 등록된 클럽이 되었다. 2년 후, 그들은 세 번째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클럽은 바이어 04 레버쿠젠을 극적으로 따돌려, 마지막 경기일에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같은 시즌, 보루시아는 2002년 UEFA 컵 결승전에서 페예노르트에 패하였다.

이 해를 기점으로 도르트문트는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형편없는 재정 관리는 막대한 부채로 이어졌고 홈 구장의 토지를 매각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은 2002-03 챔피언스리그의 클뤼프 브뤼허 KV전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부차기로 탈락하자 악화되었다. 보루시아는 다시 2005년에 부도 상태가 되었고, 원래 €11였던 주가는 80%가 넘게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서 하락하였다. 그 결과는 모든 선수 연봉의 20% 삭감으로 이어졌다.


홈 구장 지그날 이두나 파크
팀은 베스트팔렌 슈타디온을 지금까지도 임대 상태로 사용하고 있고, 경기장 지역명인 베스트팔리아를 사용하고 있다. 자금을 늘리기 위해, 경기장은 인근 보험 회사의 이름을 따 지그날 이두나 파르크로 개칭되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계약된 스폰서쉽으로, 경기장은 현재 독일에서 가장 많은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으로 80,720명을 수용할 수 있고, 독일 월드컵의 준결승을 비롯한 6경기를 주최하였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유럽의 어느 클럽보다 많은 평균 관중 수를 기록하며, 2007-08시즌 기준으로 77,510명을 기록하였다.


지그날 이두나 파크의 명물 남쪽 스탠드 (Südtribüne)에서 응원하는 팬들
팀은 2005-06 시즌을 불행히 시작하였으나, 7위로 리그를 마쳤다. 클럽은 UEFA 컵 진출을 페어플레이 드로우로 인해 실패하였다. 클럽의 보드진은 또다시 흑자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이는 오동코어의 레알 베티스행과 로시츠키의 아스널행에 의한 결과일 뿐이었다.

2006-07 시즌, 클럽은 몇년 만에 강등 위기에 직면하였다. 팀은 3명의 코치를 내정 후 경질하였고, 토마스 돌을 2007년 3월 13일에 강등권에서 1점차를 내고 내정하였다. 크리스토프 메첼더 또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자유 이적으로 떠났다.

2007-08 시즌, 클럽은 분데스리가의 다수 소규모 클럽에 많은 패배를 기록하였다. 이 시즌은 20년 만에 최악의 기록을 냈다. 하지만,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DFB-포칼 결승전에 진출하여 연장전 끝에 2-1로 패하였다. 도르트문트의 컵 결승행은 이미 FC 바이에른 뮌헨이 UEFA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함에 따라 UEFA 컵 진출을 확정시켰다. 2008년 5월 19일 토마스 돌이 사임하고 위르겐 클롭이 새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부활

왼쪽부터 마르코 스티퍼만, 마르첼 슈멜처, 마츠 후멜스, 케빈 그로스크로이츠가 2010-11 시즌의 우승 방패를 들어올리며 리그 우승을 자축하고 있다.
2009-10 시즌, 클럽은 UEFA 유로파리그 진출권을 리그 5위로 마감한 후 얻어내었다. 클럽은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 가능성을 리그 8위 VfL 볼프스부르크와 리그 14위 SC 프라이부르크전에서 날리며 무산시켰다. 하지만, 도르트문트는 위르겐 클롭 새 감독 하에 시즌 내내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클롭의 시대 (2010~2015)
2010-11 시즌으로 넘어가면서, 도르트문트는 젊은 스쿼드를 주축으로 하여 더욱 전력을 강화시켰다. 2010년 12월 4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전반기를 1위로 마쳤는데 1993-94 시즌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1997-98 시즌의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과 동률을 이루었다.[9] 2011년 4월 30일, 클럽은 1. FC 뉘른베르크를 2-0으로 홈에서 완파하고 7번째 리그 타이틀을 2경기를 남겨놓고 거미쥐었다. 이 우승으로 루르 지방 라이벌 FC 샬케 04와 리그 우승 횟수 동률을 이룸과 동시에, UEFA 챔피언스리그 2011-12 조별리그행 표를 획득하였다. 루카스 바리오스와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가 득점하였고, 같은날 바이어 04 레버쿠젠이 패하여 승점차가 8점차로 벌어지며 도르트문트는 우승을 하였다.[10]

분데스리가 2연패 (2011-12 시즌)
1년 후, 도르트문트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의 32라운드 경기에서의 승리로 리그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였다. 도르트문트의 통산 8번째 독일 챔피언쉽 우승은 팀을 리그 우승횟수로는 3위에 올려놓았고, 선수들은 분데스리가 5회 우승을 나타내기 위해, 팀 뱃지 위에 두개의 별이 새겨지게 되었다. 이 시기의 주요 선수로는 루카스 바리오스, 마리오 괴체, 네벤 수보티치, 마츠 후멜스,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가가와 신지, 우카시 피슈체크, 야쿠프 브와슈치코프스키, 케빈 그로스크로이츠, 그리고 일카이 귄도안이 있었다. 리그 우승 1주일 뒤 DFB-포칼 결승전에서도 FC 바이에른 뮌헨을 5-2로 꺾으며 구단 역사상 첫 번째 더블을 달성하였다.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 (2012-13 시즌)
다음 시즌인 2012-13 시즌으로 넘어가면서도 주전 선수들을 지키고 마르코 로이스를 영입하면서 팀은 1997년 이후 16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랐으나 라이벌인 바이에른 뮌헨에게 1-2로 패배하며 16년만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실패했다. 또한 리그 우승과 포칼 우승 역시 뮌헨에게 넘겨줘야 했다.

에이스 괴체의 이탈 (2013-14 시즌)
2013-14 시즌, 도르트문트는 팀에서 가장 촉망받는 선수이며 유스 출신이었던 마리오 괴체를 라이벌인 뮌헨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헨리크 미키타리안,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 등을 영입하였다. 비록 마리오 괴체의 이탈로 인해 전력의 큰 손실이 생긴것은 맞으나, 큰 손해는 없었다. 비록 바이에른 뮌헨에게 우승 자리와 DFB 포칼컵을 내주기는 했지만, 도르트문트는 여전히 분데스리가는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강자였다. 그리고 도르트문트는 자신의 소속 팀 스트라이커인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는 득점왕을, 미드필더인 마르코 로이스는 도움왕을 차지했다.

침체기 (2014-15 시즌)
2014-15, 도르트문트는 마리오 괴체에 이어 2013-14 시즌의 득점왕이었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를 라이벌인 뮌헨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로 인해 도르트문트는 치로 임모빌레 아드리안 라모스 등을 영입했지만,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주축 선수인 마르코 로이스 마츠 훔멜스 등이 부상으로 쓰러지면서 도르트문트는 강등권인 17위까지 떨어지는 굴욕을 맛보았다. 또한 챔피언스리그도 16강까지 밖에 가지 못했으며, 부진은 계속 이어졌다. 결국 2014-15 시즌이 끝나고, 감독인 위르겐 클롭은 자진 사임했다. 그러나 도르트문트는 시즌 후반기에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하면서 2014-15시즌을 7위로 마무리 지었고, DFB 포칼컵을 준우승으로 마우리 지었다. 2014-15 시즌이 끝나고, 도르트문트는 마인츠 05에서 성공적인 힘을 발휘한 토마스 투헬을 감독으로 선임했다.

투헬의 시대 (2015~현재)
마인츠 05에서 성공적인 힘을 발휘한 토마스 투헬감독 체제로 들어가자, 도르트문트는 곤잘로 카스트로, 박주호 등을 영입했으며, 치로 임모빌레, 제바스티안 켈 등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도르트문트는 투헬 체제에서 다시 부활하는데 성공했고, 도르트문트의 주전 스트라이커인 피에르 에메리크 오바메양은 25골로 30골을 기록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에 이어 분데스리가에서 두번째로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또, 헨리크 미키타리안은 14도움으로 리그에서 가장많은 도움을 기록하였다. 비록 라이벌인 바이에른 뮌헨에게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도르트문트는 다시 분데스리가의 강자가 되었다.

2016년이 되고 도르트문트는 UEFA 유로파리그 32강에서 포르투갈의 강자인 FC 포르투를 이기고, 16강 전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2위인 토트넘 핫스퍼를 압도적인 경기로 이겼다. 8강전에서는 전 도르트문트 감독이었던위르겐 클로프 감독이 이끌던 리버풀 FC를 만났다. 1차전에 1:1로 무승부를 기억한데 이어, 2차전에서는 접전 끝에 4:3으로 패하자 도르트문트는 8강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했다.

DFB-포칼에서는 VfB 슈투트가르트, 헤르타 BSC 등을 이기고 결승에 올라 FC 바이에른 뮌헨과 경기를 하게 됐다. 두 팀은 연장전을 포함해 120분 동안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승부차기로 우승팀을 가리게 되었다. 승부차기 결과 도르트문트는 뮌헨에게 4:3으로 패배, 3년 연속으로 포칼 준우승을 하게 된다.

문양
1945년 ~ 1964년
1945년 ~ 1964년

 
1964년 ~ 1974년
1964년 ~ 1974년

 
1974년 ~ 1976년, 1978년 ~ 1993년
1974년 ~ 1976년,
1978년 ~ 1993년

 
1993년 ~ 현재
1993년 ~ 현재

경기장

지그날 이두나 파르크은 독일 최대의 구장이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홈구장은 지그날 이두나 파르크이다. 이 경기장은 독일 내에서 가장 큰 구장이며, 유럽 내에서는 6번째로 큰 구장이다. 지그날 이두나 파르크는 1974년에 지그날 이두나 파르크 바로 옆에 있는 로테 에어데 슈타디온을 대체하였다.

1965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인기가 올라가자, 구단은 슈타디온 로테 에어데를 대체할 신구장 건설 계획안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도르트문트는 1974년 FIFA 월드컵을 주최할 도시들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신구장을 건설할 자금이 지원되었다. 지그날 이두나 파르크는 2006년 FIFA 월드컵 개최 목적 등을 포함하여 수차례 리모델링을 거쳤다. 2008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구단 박물관 보루세움 (Borusseum) 을 경기장 내에 개관하였다. 2011년, Q-셀즈 (Q-Cells) 사는 태양 전지를 경기장 지붕 위에 설치하였다.[11]

후원사
메인 스폰서
기간 유니폼 제조사 유니폼 스폰서
1974–76 독일 아디다스 독일 도르트문트 시
1976-78 영국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
1978-80 독일 프레스톨리스 (페인트)
1980-83 독일 UHU (접착제)
1983-86 독일 아틱 (아이스크림)
1986-90 독일 콘티넨탈 (보험)
1990-97 미국 나이키
1997-99 독일 s.올리버 (패션)
1999-2000 독일 E.ON (에너지)
2000-04 독일 Goool.de
2004-05 미국 나이키
2005-09 독일 에보닉 (화학)
2009-12 이탈리아 카파
2012- 독일 푸마[12]
2020- 독일 1&1 (통신)1[13]
소매 스폰서
2017- 독일 오펠
1 2020년 2월, 사상 처음으로 두 기업과 동시에 유니폼 스폰계약을 맺으며 유니폼에는 대회 별로 다른 스폰서가 표기된다. 리그는 1&1의 로고가, 유럽 대항전과 해외 친선경기, 컵 대회에서는 기존 에보닉의 로고가 붙여진다.

선수 명단
현재 선수 명단
2023년 8월 31일 기준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 GK 그레고어 코벨 (부주장)
2 DF 스페인 마테우 모레이
4 DF 니코 슐로터베크
5 DF 알제리 라미 벤세바이니
6 MF 튀르키예 살리흐 외즈잔
7 MF 지오바니 레이나
8 MF 펠릭스 은메차
9 FW 코트디부아르 세바스티앵 알레
10 MF 토르간 아자르
11 MF 마르코 로이스
14 FW 니클라스 퓔크루크
15 DF 마츠 후멜스
16 FW 쥘리앵 듀렁빌
17 DF 마리우스 볼프
18 FW 유수파 무코코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9 MF 율리안 브란트
20 MF 마르셀 자비처
21 FW 도니얼 말런
23 MF 엠레 잔 (주장)
24 DF 토마 뫼니에
25 DF 니클라스 쥘레 (3주장)
26 DF 율리안 뤼에르손
27 FW 카림 아데예미
30 MF 올레 폴만
31 GK 실라스 오스트르진스키
32 MF 기니 압둘라예 카마라
33 GK 알렉산더 마이어
35 GK 마르셀 로트카
43 FW 잉글랜드 제이미 바이노기튼스
47 DF 안토니오스 파파도풀로스
 
임대 선수 명단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36 MF 톰 로테 (홀슈타인 킬로 임대)
44 DF 수마일라 쿨리발리 (로열 앤트워프로 임대)
 
코칭 스태프
2023년 기준
위치 이름 국적
감독 에딘 테르지치 독일
수석 코치 브루노 페르난데스 독일
골키퍼 코치 마티아스 클라인슈타이버 독일
피트니스 코치 안드레아스 벡
플로리안 방글러
앙케 슈테펜

독일
주치의 마르쿠스 브라운 독일
물리 치료사 페터 쿤트
토르벤 페스테
토마스 체츠만 독일
역대 감독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은 1996-97 시즌에 팀의 첫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취임 해임 감독
1935년 7월 1일 1935년 7월 독일 에른스트 쿠초라
1935년 1936년 6월 30일 독일 프리츠 텔렌
1936년 7월 1일 1938년 오스트리아 페어들 스바토슈
1963년 7월 1일 1965년 6월 30일 독일 헤르만 에펜호프
1965년 7월 1일 1966년 6월 30일 독일 빌리 물타우프
1966년 7월 1일 1968년 4월 10일 독일 하인츠 무라흐
1968년 4월 18일 1968년 12월 16일 독일 오스발트 파우
1968년 12월 7일 1969년 3월 17일 독일 헬무트 슈나이더
1969년 3월 21일 1970년 6월 30일 독일 헤르만 린데만
1970년 7월 1일 1971년 12월 21일 독일 호르스트 비츨러
1972년 1월 3일 1972년 6월 30일 독일 헤르베르트 부르덴스키
1972년 7월 1일 1972년 10월 30일 독일 데틀레프 브뤼게만
1972년 11월 1일 1973년 3월 1일 독일 막스 미할레크
1973년 3월 2일 1973년 6월 30일 독일 디터 쿠라트
1973년 7월 1일 1974년 6월 30일 헝가리 베들 여노스
1974년 7월 1일 1976년 2월 1일 독일 오토 네플러
1976년 2월 1일 1976년 6월 18일 독일 호르스트 부츠
1976년 6월 18일 1978년 4월 30일 독일 오토 레하겔
1978년 5월 21일 1979년 4월 29일 독일 칼하인츠 륄
1979년 4월 30일 1979년 6월 30일 독일 울리 마슬로
1979년 7월 1일 1981년 5월 10일 독일 우도 라테크
1981년 5월 11일 1981년 6월 30일 독일 롤프 보크
1981년 7월 1일 1982년 6월 30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브란코 제베츠
1982년 7월 1일 1983년 4월 5일 독일 칼하인츠 펠트캄프
1983년 4월 6일 1983년 6월 30일 독일 헬무트 비테
1983년 7월 1일 1983년 10월 23일 독일 울리 마슬로
1983년 10월 31일 1983년 11월 15일 독일 하인츠디터 티펜하우어
1983년 11월 16일 1984년 6월 30일 독일 호르스트 프란츠
1984년 7월 1일 1984년 10월 24일 독일 프리트헬름 코니츠카
1984년 10월 28일 1985년 6월 30일 독일 에리히 리베크
1985년 7월 1일 1986년 4월 20일 헝가리 체르너이 팔
1986년 4월 20일 1988년 6월 26일 독일 라인하르트 자프티히
1988년 6월 27일 1991년 6월 30일 독일 호르스트 쾨펠
1991년 7월 1일 1997년 6월 30일 독일 오트마어 히츠펠트
1997년 7월 1일 1998년 6월 30일 이탈리아 네비오 스칼라
1998년 7월 1일 2000년 2월 4일 독일 미하엘 스키베
2000년 2월 5일 2000년 4월 12일 독일 베언트 크라우스
2000년 4월 16일 2000년 6월 30일 독일 우도 라테크
2000년 7월 1일 2004년 6월 30일 독일 마티아스 자머
2004년 7월 1일 2006년 12월 18일 네덜란드 베르트 판 마르베이크
2006년 12월 19일 2007년 3월 12일 독일 위르겐 뢰버
2007년 3월 12일 2008년 5월 19일 독일 토마스 돌
2008년 7월 1일 2015년 4월 15일 독일 위르겐 클로프
2015년 7월 1일 2017년 5월 30일 독일 토마스 투헬
2017년 7월 1일 2017년 12월 10일 네덜란드 페터르 보스
2017년 12월 10일 2018년 5월 22일 오스트리아 피터 스퇴거
2018년 5월 22일 2020년 12월 13일 스위스 뤼시앵 파브르
2020년 12월 13일 2021년 6월 30일 독일 에딘 테르지치
2021년 7월 1일 2022년 5월 20일 독일 마르코 로제
2022년 7월 1일 독일 에딘 테르지치
기록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세웠다:

팀내 역대 최다 출장 선수는 미하엘 초어크 (463경기)이다. (UEFA)
팀내 역대 최다 득점자는 알프레트 프라이슬러 (168골)이다. (UEFA)
도르트문트는 2011-12 시즌을 역대 최다 승점 (81점)으로 종료하였다.
팀내 최연소 출장 선수는 누리 샤힌 (16세 335일)이다.
팀내 최연소 득점 선수는 누리 샤힌 (17세 82일)이다.
도르트문트는 1978년 4월 29일에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다 점수차 패배 (0-12)를 당하였다.
팀은 분데스리가 5경기 중 4경기에서 득점하였고, 이동안 총 12골을 득점하였다. 이 경기에서의 승률은 2승 2패이다.
1993년 9월 1일, BVB와 디나모 드레스덴과의 경기에서 양팀은 총 5장의 레드카드를 받았다. 2001년 4월 7일, BVB와 FC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에서 양팀은 총 15장의 카드를 받았다.
1965년 11월 9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전에서는 양팀을 통틀어 가장 많은 페널티킥 (5회) 이 부여되었다.
분데스리가 1호골의 주인공은 도르트문트의 프리트헬름 코니츠카로 SV 베르더 브레멘과의 경기에서 득점하였다. 결과는 베르더 브레멘의 3-2 승리였다.
역대 성적
국내독일 챔피언쉽 / 1 분데스리가
우승 8회: 1956, 1957, 1963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 1994-95, 1995-96, 2001-02, 2010-11, 2011-12
준우승 10회: 1948–49, 1960–61, 1965-66, 1991-92, 2012-13, 2013-14, 2015-16, 2018-19, 2019-20, 2021-22
DFB-포칼
우승 5회: 1964-65, 1988-89, 2011-12, 2016-17, 2020-21
준우승 5회: 1962-63, 2007-08, 2013-14, 2014-15, 2015-16
DFL-슈퍼컵
우승 7회: 1989, 1995, 1996, 2008(비공식), 2013, 2014, 2019
준우승 6회: 2011, 2012, 2016, 2017, 2020, 2021
DFB-리가포칼
준우승 1회: 2003
서부 오베르리가
우승 6회: 1947–48, 1948–49, 1949–50, 1952–53, 1955–56, 1956–57
국제대항전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 1996-97
준우승 1회 : 2012-13
UEFA 컵위너스컵
우승 1회 : 1965-66
UEFA컵
준우승 2회 : 1992-93, 2001-02
UEFA 슈퍼컵
준우승 1회 : 1997
기타 대회
인터콘티넨털컵
우승 1회: 1997

https://ko.wikipedia.org/wiki/%EB%B3%B4%EB%A3%A8%EC%8B%9C%EC%95%84_%EB%8F%84%EB%A5%B4%ED%8A%B8%EB%AC%B8%ED%8A%B8 위키백과

슈포르트페어라인 베르더 브레멘 폰 1899 e. V.(Sportverein Werder Bremen von 1899 e. V.) 은 북서부 독일의 브레멘에 위치한 축구 클럽이다.[2] 클럽은 1899년 2월 4일에 창단되었고,[2] 창단 당시 이름은 푸스발페어라인 베르더(Fußballverein Werder)였고,[1] 당시 16명의 실업고 학생들이 스포츠 대회 수상 후 창단하였다.[4] 그들은 그 지역 방언으로 하중도(河中島)를 뜻하는 단어를 도입, 연고지가 강가에 위치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베르더는 39,100명의 회원으로 증가하였다.[2]

베르더는 독일의 1부 리그인 분데스리가의 주요 클럽중에 하나로 이름을 지켜왔다. 베르더는 현재까지 네번의 리그 우승을 경험하였고, DFB-포칼을 6번 우승하였다. 그들이 최근에 들어 가장 성공한 시기는 2004년이었다. 그들은 이 시기에 더블을 이룩하였다.[5] 베르더는 또한 유럽대항전 타이틀도 보유하고 있는데, 1992년, AS 모나코 FC를 UEFA 컵위너스컵 결승에서 2-0으로 격파하였다.[5][6] 베르더는 2009년에 UEFA 유로파리그로 개칭되기 전의[7] UEFA컵의 마지막 결승전에 진출하였으나,[8] 우크라이나의 FC 샤흐타르 도네츠크에 연장전 끝에 2-1로 석패하였다.[9]

역사
현 클럽의 전신 SV 베르더는 1899년 9월 10일에 ASC 1898 브레멘을 상대로 첫 경기를 펼쳤고, 이 원정 경기에서 1-0 승리를 거두었다. 1900년, FV 브레멘은 라이프치히의 독일 축구 협회 (DFB) 창단 멤버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후, 클럽은 창단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 시기에 몇 기의 지역 챔피언쉽 우승을 거두었다. FV 브레멘은 플레이오프를 통해 북독일 축구 연맹 (NFV)의 국가 챔피언쉽에 도전하였고, 일곱 지역 리그시즌 중중 한 시즌에 참가하였지만, 본선 진출에 실패하였다. 그들은 최초로 유료 관중을 받아들이고, 필드 주위에 펜스를 최초로 친 클럽이었다.

1914년 4월, 클럽은 알게마이너 브레머 툰버라인 1860(Allgemeiner Bremer Turnverein 1860)의 일부가 단기간 동안 되었고, 스포타브테일룽 베르더 데스 ABTV (Sportabteilung Werder des ABTV)라고 불리었다. 하지만, 이 관계는 멀지 않아 끝나버렸고, 두달 뒤, 베르더는 독립된 클럽이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로 꾸준히 타 스포츠 클럽을 받아들이며 성장한 베르더는 1920년 1월 19일에 현재의 명칭인 스포트버라인 베르더 브레멘 (Sportverein Werder Bremen)으로 개칭하였다. 축구는 현재까지도 클럽의 1차 관심사가 되었고, 1922년, 그들은 독일 클럽 최초의 프로 코치를 내정하였다. 그 후, 1920년대에서 1930년대초까지 연말 NFV 플레이오프에 도전하였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독일 축구는 제 3제국이 1933년에 정권을 가져간 뒤 16기의 1부리그로 재정비되었는데, 가울리겐과 베르더는 가울리가 니더작센의 일부가 되었다. 클럽은 진정하게 역사 최초의 성공을 거두었고, 1부리그 타이틀을 1934년과 1936년, 그리고 1937년에 가져갔고, 국가 레벨의 경쟁에 처음으로 진출하였다. 가울리가의 구조는 제2차 세계 대전을 1939년부터 거치면서 달라졌고, 가울리가 니더작센은 2기의 다른 리그로 갈라졌다. SV는 가울리가 니더작센/ 노르트에 속하였고, 그들은 1942년에 네번째 우승을 하였다. 전쟁이 국가를 삼킴에 따라, 가울리가는 더욱 국지적 성격을 뛰었다. 가울리가 니더작센/노르트는 다시 가울리가 베저-엠즈로 또다시 가울리가 베저-엠즈/브레멘으로 다음 2년간 변경되었다. 베르더의 1944-45시즌은 2경기 뒤 중단되었다.

다른 독일의 조직들처럼, 클럽은 전쟁후 연합군 점령기동안 해체되어있었다. 베르더는 1945년 11월 10일에 툰 운트 스포르트버라인 베르더 1945 브레멘 (Turn- und Sportverein Werder 1945 Bremen)으로 부활하였고, 이 명칭은 스포르트클럽 그륀바이스 99 브레멘 (Sport-Club Grün-Weiß 99 Bremen)으로 1946년 2월 4일에 변경되었다. 팀은 슈타트리가 브레멘에 있었고, 타이틀을 획득한 뒤, 북독일 챔피언쉽에 참여하여, 8강에 진출하였다. 그들은 SV 베르더 (SV Werder)라는 명칭을 1946년 3월 25일, 플레이오프 이전에 회복하였다.

당시 독일 경기에서는 프로선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축구 선수들은 2가지 이상의 직업을 갖고 있는 경우가 다반수였고, 대체로 지역 팬이었다. 베르더의 경우에는, 인근의 브링크만 토바코 공장에서 선수들이 일하였고, 그에 따라 텍사스 11이라는 회사의 담배 이름을 따 별명이 붙여졌다.

전쟁 후에서 1963년 분데스리가의 출범때까지 브레멘은 우수한 모습을 보였고, 함부르크 SV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북독일 팀이 되었다. 1961년, 그들은 첫 DFB-포칼 우승을 거두었다. 그들의 성과는 분데스리가 원년 멤버의 자리를 따는데 한몫 하였다. 그리고 리그의 2번째 시즌 브레멘은 우승을 거두었다. 그들은 1967-68 시즌을 준우승으로 마무리하였지만, 그 후 12년동안 하위권을 기록하였다. 그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하여 비싸고, 유명한 백만장자 선수를 얻으려고 하는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브레멘은 1980-81 시즌 처음이자 지금까지 마지막으로 리그 17위로 종료한 뒤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되었다.

브레멘은 새로운 감독 오토 레하겔 하에서 회복세를 보였고, 연속적인 성공을 하였다. 분데스리가에서 1983년, 1985년, 1986년에 준우승을 거둔 뒤 1988년에 리그 우승을 하였다. 1989년과 1990년에는 DFB-포칼 결승에 진출하였고, 이듬해인 1991년에는 우승을 거두었다. 이듬해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을 거두었고, 1993년에 또다시 3번째 리그 우승을 거둠과 동시에, 이듬해 또다시 DFB-포칼 우승을 하였다. 1995년 6월에 레하겔은 팀을 떠나 단기간동안 FC 바이에른 뮌헨의 사령탑을 맡았다. 레하겔이 떠난 브레멘은 다시 하락세로 이어졌고, 연속적으로 감독을 내정하고 경질하였으며 (아드 데 모스, 딕시 되르너, 볼프강 시드카, 그리고 펠릭스 마가트), 클럽은 다시 하위권으로 가라앉었다. 1999년 5월, 브레멘의 수비수 출신이자, 아마추어팀을 맡고있던 토마스 샤프가 내정되었고, 위기에 빠진 팀을 강등을 면하게 한 뒤 컵대회 우승을 1주일 뒤에 하였다.

팀의 성적은 다음 시즌에 안정화되었고, 브레멘은 다시 상위권 성적을 거두었다. 2004년, 브레멘은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의 우승타이틀을 모두 확보하여 더블을 달성한 독일의 4 클럽중 하나가 되었다. 다음 시즌, 브레멘은 UEFA 챔피언스리그 2004-05에 진출하여, 16강에 올랐지만, 올랭피크 리옹에 10-2 대패를 당하여 탈락하였다. 이 시즌에 리그 3위로 마감한 브레멘은 다음해에도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였고 부상으로 인한 어려운 시즌을 보냈다. 그들은 다시 16강 진출권을 획득하였고, 16강에서 유벤투스 FC를 만나 4-4 동률이지만 원정골로 탈락하였다. 리그 준우승은 UEFA 챔피언스리그 직행권을 따기에 충분하였다.

2006-07 시즌, 베르더 브레멘은 시즌 전반을 1위로 마감하였다. 하지만 VfB 슈투트가르트와 FC 샬케 04에 밀려 3위로 마감하였다. 이 시즌의 UEFA 챔피언스리그 조 3위는 UEFA 컵행으로 이어졌고, 준결승에서 RCD 에스파뇰에 패하였다. 시즌 종료 후, 브레멘은 팀의 공격수 미로슬라프 클로제를 FC 바이에른 뮌헨에 빼앗겼다. 06-07 시즌에 조별리그 3위로 마감한것처럼, 07-08 시즌에는 올림피아코스 FC에 밀려 16강행에 실패하였다. 리그 준우승은 5년 연속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획득으로 이어졌다.

브레멘은 2008-09 시즌을 힘겹게 보냈으며, 10년 이상만에 최악의 성적인 10위로 마감하였다. 그러나 브레멘은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3위를 기록한 후 UEFA 컵 결승 진출을 이루어냈다. UEFA 컵 결승전에서 나우두가 FC 샤흐타르 도네츠크의 초반골에 대한 동점골을 삽입하였으나, 연장전에서 샤흐타르가 다시 골을 기록하여 1-2로 패하였다. 2008-09 시즌의 마지막 경기에, 바이어 04 레버쿠젠을 DFB-포칼 결승전에서 만나 1-0으로 꺾고 우승하였다. 2008-09 시즌의 UEFA 컵에서, 베르더는 3기의 이탈리아 클럽 중 2기인 AC 밀란과 우디네세 칼초를 탈락시키며 "이탈리아 킬러"의 모습을 보였다.

브레멘은 2009-10 시즌,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홈 경기 개막전에서 2-3으로 패배하여 출발이 좋진 못했지만 그 다음 경기부터 7승 6무로 14경기째 무패행진을 달렸고 지난 시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브레멘은 이 시즌을 3위로 마감하여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다시 획득하였다.

그러나 2010-11 시즌, 팀의 플레이 메이커였던 메수트 외질을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시키면서 그의 공백으로 인해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시즌 개막전부터 TSG 1899 호펜하임에게 4-1로 끔찍한 역전패를 당했고 UEFA 챔피언스리그마저 조별리그 최하위로 탈락하고 말았다. 장기간 감독직을 맡았던 토마스 샤프감독까지 경질될 위기에 처했으나 수뇌부와 팬들의 신임을 받아 감독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결국 브레멘은 이 시즌 샤프 감독 체제 최악의 성적인 13위로 마감하였다. 2011-12 시즌에는 재정난으로인해 팀의 주축 선수들을 대거 이적시켰다. 팀의 주장이었던 토르스텐 프링스는 토론토 FC로, 페어 메르테자커는 아스날 FC로 이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멘은 나쁘지않은 출발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주전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9위로 마감하였다. 그 다음 시즌에도 주전 선수였던 마르코 마린을 첼시 FC로, 나우두는 VfL 볼프스부르크로 이적시켰다. 그리고 2005년부터 활약해왔던 수문장 팀 비제마저 TSG 1899 호펜하임으로 팀을 떠났기에 이 시즌 브레멘의 부진은 당연했다. 브레멘은 2012-13 시즌을 14위로 마감하였고, 시즌이 끝난 후 14년동안 베르더 브레멘을 지휘해왔던 토마스 샤프감독은 감독직에서 사임하였다. 이후 로빈 두트가 감독직을 맡아 2013-14 시즌을 12위로 마감했고, 다음 시즌인 2014-15 시즌 최악의 부진 끝에 로빈 두트는 시즌 도중에 경질되었고, 팀의 2군 감독이었던 빅토르 스크리프니크가 사령탑을 이어받았다.

2015-16 시즌에는 팀의 레전드 선수 중 하나인 클라우디오 피사로 선수가 복귀 하는 등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과 부진으로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낸 끝에 강등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즌 최종전이자 시즌 막바지 강등을 놓고 다퉜던 프랑크푸르크와의 대결에서 첼시로부터 임대된 파피 질로보지의 골로 1:0으로 승리해 잔류에 성공하며 13위로 2015-16 시즌을 마쳤다.

스폰서
클럽의 스폰서쉽을 가지고 있는 기업은 다음과 같다.[10]

비젠호프: 주 스폰서
엄브로: 공식 클럽용품 제공업체
타르고방크 : 공식 스폰서, 前 시티은행
인베이: 공식 스폰서
코카콜라: 공식 스폰서
팁베트: 공식 베팅 파트너
티피코 : 공식 스폰서
SigG Solar: 공식 스폰서
폭스바겐: 공식 스폰서
라마다: 공식 스폰서
크라프트 푸드: 공식 스폰서
Ewe Tel: 공식 스폰서
CeWe Color : 공식 스폰서
하케 벡: 공식 스폰서
클럽 문화

베저슈타디온의 유명한 서쪽 스탠드 (Ostkurve)의 울트라 서포터.
베르더 브레멘은 서부 레지오날리가 (4부리그)에 속한 로트 바이스 에센과의 오랜 친선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노르트 더비 상대인) 함부르크 SV와 라이벌 관계에 놓여 있다.[11][12] 그 외에도 FC 바이에른 뮌헨과 라이벌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최근에 베르더의 최고 선수들 (아일통, 믈라덴 크르스타이치, 프랑크 로스트, 올리버 레크 (골키퍼 코치), 파비안 에른스트, 프랑코 디 산토 등)을 빼앗아가는 겔젠키르헨의 FC 샬케 04를 증오하기도 한다. 2015년 프랑코 디 산토의 이적 당시, 독일의 래퍼이자 베르더 브레멘의 팬으로 잘 알려진 Jan Delay가 FC 샬케 04를 저주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가 논란이 일자 사과글을 올리기도 했다.[13]

베르더에는 울트라 서포터 그룹이 존재한다: "라카이 베르" (Racaille Verte)[14], "완더러스-브레멘" (Wanderers-Bremen), "불명예의 젊은이" (The Infamous Youth), 그리고 "울트라-팀 브레멘" (Ultra-Team Bremen)이 와서 베르더를 서포트한다. 울트라는 우디네세 칼초, 샴록 로버스 FC, SK 슈투름 그라츠의 울트라 그룹들과 동맹을 맺고 있다.

베르더 브레멘의 공식 응원가는 "초록과 하양이여 영원히" (Lebenslang Grün-Weiß)로 브레멘 출신의 오리지널 도이체마허라는 밴드에 의해 불렸다.[15][16][17]

이 클럽은 푸스볼-분데스리가에서는 드물게 항구 도시를 연고로 하는 클럽으로 함부르크 SV만이 같은 속성을 띈다: 뱃고동 소리가 골세레모니 음악과 함께 연주된다. 이 지역의 자부심은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베르더 브레멘의 상대는 그들이 악취를 풍기고 멍청하다고 간주하며 "물고기 머리" (Fischköpfe)라고 조롱한다.


역대 성적
1 분데스리가
우승: 1964-65, 1987-88, 1992-93, 2003-04
준우승: 1967-68, 1982-83, 1984-85, 1985-86, 1994-95, 2005-06, 2007-08
2 분데스리가
우승: 1980-81
DFB-포칼
우승: 1960-61, 1990-91, 1993-94, 1998-99, 2003-04, 2008-09
준우승: 1988-89, 1989-90, 1999-2000, 2009-10
리가포칼
우승: 2006
준우승: 1999, 2004
DFL-슈퍼컵
우승: 1988, 1993, 1994, 2009
준우승: 1991
국제 대항전
UEFA컵
준우승: 2008-09
4강: 1987-88, 1989-90, 2006-07
UEFA 슈퍼컵
준우승: 1992
UEFA 컵위너스컵
우승: 1991-92
UEFA 인터토토컵
우승: 1998
인터네셔널 사커 리그
준우승: 1964
선수
현재 선수 명단
2023년 9월 3일 기준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 GK 체코 이르지 파블렌카
2 MF 올리비에 드망
3 DF 안토니 융
4 DF 니클라스 슈타르크
5 DF 아모스 피퍼
6 MF 옌스 스타게
7 FW 마르빈 두크슈
8 DF 미첼 바이저
9 FW 다비트 코브나츠키
10 MF 레오나르도 비텡코우르트
13 DF 세르비아 밀로시 벨코비치 (부주장)
14 MF 센느 리넌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7 FW 저스틴 은진마
18 MF 기니 나뷔 케이타
19 FW 콜롬비아 라파엘 산토스 보레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임대)
20 MF 로마노 슈미트
23 MF 니콜라이 라프
27 DF 펠릭스 아구
29 FW 닉 볼테마데
30 GK 미하엘 체터러
32 DF 마르코 프리들 (주장)
35 MF 레온 오피츠
36 MF 크리스티안 그로스
38 GK 두두 헤슬러
 
임대 선수 명단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 GK 미오 바크하우스 (FC 폴렌담으로 임대)
— MF 토고 디케니 살리푸 (유벤투스 U-23으로 임대)
— FW 에렌 딩크치 (1. FC 하이덴하임으로 임대)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 FW 압데네고 난키시 (헤라클레스 알멜로로 임대)
— FW 스코틀랜드 올리버 버크 (버밍엄 시티로 임대)
 
영구 결번
12번: 클럽 서포터즈
유명 선수
독일 루디 푈러
독일 미로슬라프 클로제
독일 디터 아일츠
독일 토르스텐 프링스
독일 팀 보로프스키 (現 베르더 브레멘 코치)
독일 마르코 보데 (現 베르더 브레멘 구단주)
독일 메수트 외질
독일 페어 메르테자커
독일 팀 비제
독일 막스 크루제
독일 핀 바르텔스
러시아 블라디미르 베스차스트니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라데 보그다노비치
포르투갈 우구 알메이다
파라과이 넬손 아에도 발데스
페루 클라우디오 피사로
브라질 나우두
브라질 지에구 히바스 다 쿠냐
오스트리아 즐라트코 유누조비치
뉴질랜드 윈턴 루퍼
대한민국 이동국
유명 감독

토마스 샤프는 1999년부터 2013년까지 베르더 브레멘의 감독을 맡았었다.
독일 오토 레하겔
독일 토마스 샤프
코칭 스태프
2018년 기준
위치 이름 국적
감독 플로리안 코펠트 독일
단장 프랑크 바우만 독일
수석 코치 마르쿠그 펠트호프 독일
골키퍼 코치 크리스티안 판더 독일
체력 코치 귄터 스토크스라이터 독일
팀 주치의 필립 하이트만 독일
팀 주치의 악셀 되르푸스 독일
물리 치료사 홀거 베르거 독일
보조 물리 치료사 플로리안 라우에러 독일
보조 물리 치료사 아디스 로비치 독일
보조 물리 치료사 스벤 플라게 독일
아마추어 팀 감독 토마스 폴터 독일

https://ko.wikipedia.org/wiki/SV_%EB%B2%A0%EB%A5%B4%EB%8D%94_%EB%B8%8C%EB%A0%88%EB%A9%98 위키백과

우리나라에는 잘 안알려져있지만 강한팀입니다 우승한적도 있네요

함부르거 슈포르트-페어라인 e. V. (Hamburger Sport-Verein e. V.)는 독일 함부르크에 위치한 스포츠 클럽이며, 가장 큰 부서는 축구이다. 이 팀은 독일 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알려져 있고, 가장 좋은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줄곧 1부리그에만 속해 있었으며, 1963년 분데스리가가 출범한 이래 2018년 구단 사상 최초로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될 때까지 1. 분데스리가에만 머물러 있었던 유일한 클럽이기도 하였다.

1970년 이래, HSV는 여러 차례의 우승 경력을 쌓아 올렸다. 1976년, 그들은 DFB-포칼 우승 뒤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쟁취하였다. 1979년 첫 분데스리가 타이틀 획득 뒤, 1980년에 FC 바이에른 뮌헨에 승점 2점차로 준우승한 뒤 팀의 슈퍼스타 펠릭스 마가트에 힘입어 1982년과 1983년에 2연패를 하였다. 1983년에는 리그 타이틀 외에도 유벤투스 FC를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1-0으로 물리치며 첫 빅이어를 들어올렸고, 1987년에는 또다른 DFB-포칼을 들어올렸다.

역사

2차 세계대전 이후 함부르크 SV의 연간 실적
초창기
함부르크 SV (HSV)는 데어 호헨펠더 스포트클럽 (Der Hohenfelder Sportclub)과 반츠벡 마린탈러 스포트 클럽 (Wandsbek-Marienthaler Sportclub)이 통합되어 1887년 9월 29일 스포트클럽 게르마니아 추 함부르크 (Sportclub Germania zu Hamburg)가 탄생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의 클럽명인 함부르크 스포트 버라인 (Hamburger Sport-Verein)은 1919년으로, 시내의 3팀의 통합으로 이루어졌으며[1]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약화되었다. 스포트클럽 게르마니아 추 함부르크, 함부르크 FC (1888년 창단), 그리고 FC 팔케 에펜도프 (1906년 창단)으로 구성되었다. 클럽의 유니폼 색은 한자동맹의 적색 (Hanseatic red)이며 흰색은 함부르크 시의 명예를 상징하며, 파랑과 검은색은 가장 오래된 클럽, 게르마니아를 상징함과 동시에 팀의 로고에도 쓰인다. HSV는 게르마니아로 있었던 시대를 포함하여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클럽이다. 하지만, 게르마니아가 육상 클럽으로 창단되었으며, 축구팀은 5~6명의 잉글랜드인이 클럽에 합류하여 1891년에 창단된 것에 관하여 타 클럽과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이 어느팀인가에 관하여 논란을 가지고 있다.

새롭게 함부르크 SV로 이름을 바꾼 이 클럽은, 1922년에 당시 3연패를 노리는 1. FC 뉘른베르크를 국가 결승전에서 상대하였다. 경기는 10분만에 암전 사태로 3시간 10분이 지연되었고, 연장전 끝에 2-2로 비겼다. 재경기에서도 연장전까지 경기를 하였고, 교체 없이 경기를 뛰었던 이 경기에서, 1-1인 상황에 뉘른베르크는 7명이서 뛰었고 (2명이 부상당하고, 2명이 퇴장당하였다) 그리고 주심은 뉘른베르크의 몰수패를 선언하였다. 이 결정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독일 축구 협회는 함부르크 SV에게 우승 타이틀을 주었지만, 거절하였다. 최종적으로 빅토리아 트로피를 수여받은 클럽은 그해 공석으로 기록되었다.

클럽의 결점없는 성공은 1923년에 처음 달성되었고 우니온 오베르쇤네바이데를 상대로 국가 타이틀을 따내었다. 1924년, 뉘른베르크에 패하여 2연패를 실패하였지만, 1928년에 빅토리아 트로피를 다시 들어올렸다.

제 3제국 시기동안, HSV는 지역에서 성공적인 클럽으로, 가울리가 노르트마크에서 1942년까지, 그 후로 가울리가 함부르크에서, 리그 타이틀을 1937년, 1938년, 1939년, 1941년, 그리고 1945년에 획득하였으나 국가 타이틀을 획득하는데에는 실패하였다. 그들의 당시 가울리가 주 라이벌은 아임스뷔텔러 TV였다.

전쟁 후, 슈타트리가 함부르크에서 팀은 1946년에 우승을 하였고, 클럽은 영국 점령기인 1947년과 1948년에 타이틀을 획득하였는데, 이 두 시즌만이 점령기였다.[2]

오베르리가 노르트에서 1947년에 점령국이 철수한 후, 함부르크는 지역에서 독주하는 클럽이 되었다.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인 1962-63까지 16시즌 중, 그들은 15번의 오베르리가 타이틀을 가져갔고, 1953-54시즌의 11위 불명예만이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시기였다. 이 시기동안, 그들은 100골이 넘는 골을 1951년, 1955년, 1961년, 그리고 1962년 시즌에 기록하였다. 하지만, 국가 타이틀은 그보다 더 안좋은 모습을 보였다. 1928년 국가 타이틀 이후, 1957년, 1958년의 결승전 진출 실패하였고, 1960년까지 국가 타이틀 가뭄이었다. 1961년의 유러피언컵에서, 함부르크는 준결승에서 FC 바르셀로나에 패하였다. 준결승에 올라오기 전까지 스위스의 BSC 영 보이즈와 잉글랜드의 번리 FC를 꺾었다.

분데스리가 출범기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국가적 프로축구인 푸스볼-분데스리가가 출범하였고, HSV는 첫 시즌에 참여한 16개의 클럽중에 하나였다. 함부르크 SV는 현재까지 1부리그에만 머무른 분데스리가 원년 멤버로 기록되었으며, 1963년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로 한번도 강등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1996년,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함께 이 상태를 지속해왔고, 1. FC 쾰른과 1998년까지 이 상태를 지속해왔다. 현재까지 49개의 다른 클럽이 분데스리가 승격과 강등을 연속하였다. 분데스리가는 2004년 8월 24일에 40주년을 맞이하였고 가장 오래된 클럽이라는 데에서 유래한 "공룡", 함부르크 SV와 분데스리가의 가장 성공적인 클럽, FC 바이에른 뮌헨의 경기가 있었다.

2004년 8월, HSV는 지역의 SC 파더보른 07에 패하며 DFB-포칼 1라운드에서 탈락하였다. 이 경기는 축구 역사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경기로, 로베르트 호이처 주심이 크로아티아의 도박 업체로부터 돈을 받아 승부조작을 한 것으로 적발되었다. 그는 파더본에게 두번의 페널티와 함부르크의 에밀 음펜자를 퇴장시켰다. 이 스캔들은 독일 축구계에서 30년만의 큰 스캔들로, 2006년 FIFA 월드컵의 개최에 앞서 독일의 국가 위상에 먹칠을 하였다.

2006-07 UEFA 챔피언스리그
함부르크는 UEFA 챔피언스리그 2006-07에 2000-01 이래 처음으로 참여하였고, 그 전 시즌의 분데스리가를 3위로 마감하였다. 그들은 CA 오사수나와의 3차 예선에서 원정 다득점으로 꺾었고, 아스널 FC, FC 포르투, PFC CSKA 모스크바와 G조에 속하였지만, 실망스러운 경기 후 조 최하위로 탈락하였다.

2006-07 분데스리가 시즌
이 시즌에 함부르크는 매우 좋지 않은 시작을 보였다. 2005-06 시즌의 성공으로, 리그 3위로 마감한 함부르크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였고, 함부르크는 시즌 전반기를 강등권 바로 위를 기어다니며 지냈고, 단 한번의 승리만 하였다 (바이어 04 레버쿠젠전의 2-1 승리). 주전 수비수인 할리드 불라루즈와 다니엘 판 바위턴의 이적과 선수들의 부상은, 함부르크의 리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팬들은 그들의 1부리그 잔류 기록이 마감될까 두려워하였다. 시즌 전반기 이후 함부르크는 리그 최하위를 하였다.

2007년 2월 1일, 토마스 돌 감독은 경질당하였고 네덜란드인 후프 슈테벤스가 새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슈테벤스의 스타일은 HSV의 사태를 진정시켰고, 2007년 2월 10일과 2007년 4월 7일 사이에 7경기 연속 무패를 달렸고 1실점만 하였다. 이 무패행진 기간 이후, HSV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홈경기에서 첫 패배를 하였고, 이후에 노르트 더비 숙적 SV 베르더 브레멘과 FC 샬케 04에 패하였다 (경기 당시 브레멘과 샬케는 각각 리그 2위와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좋은 페이스에도 불구하고 (4월 VfB 슈투트가르트와의 홈 경기에서 대패), HSV는 여전히 하위팀들이 승점을 추가함에따라 강등권에서 안전하지 못하였다. 3월에는 12팀이 강등권에 위치하였고, 7위 하노버 96과 18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사이는 겨우 10점에 불과하였다.

HSV는 홈보다 원정에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고,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원정 (시즌 종료 후 최하위로 강등), FC 바이에른 뮌헨 원정, 그리고 1. FC 뉘른베르크 원정에서 HSV는 귀중한 승점을 획득하였지만 홈에서 VfL 보훔과 VfB 슈투트가르트와 함께 강등권을 같이 맴도는 1. FSV 마인츠 05에 패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5월 5일에 보훔에 3-0으로 패한 것은 HSV가 알레마니아 아헨 (최종 16위)와 1. FSV 마인츠 05 (최종 17위)가 동시에 패함에 따라 승점 6점차를 유지하며, 1 분데스리가의 확정을 짓는데 성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골득실 또한 아헨과 마인츠가 만회하기에는 매우 컸다.

잔류 확정 상황에서, HSV는 약체 상대만이 남았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하노버 96, 아르미니아 빌레펠트, VfL 보훔과 더불어 다음시즌의 UEFA 인터토토컵 진출권을 경쟁하였다. 한 경기만 남은 상황에서, VfL 보훔에 0-3으로 패하고, HSV는 1. FC 뉘른베르크를 2-0으로 꺾었다. 1주일 후, 알레마니아 아헨에 홈 경기에서 4-0으로 4월 1일 이래 첫 홈승을 거두었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바이어 04 레버쿠젠에 2-1로 패하고 하노버 96이 1. FC 뉘른베르크에 0-3으로 패함에 따라, HSV는 7위를 확보하였다.

최근 행보
연도 리그 순위
1999–00 1 분데스리가 3위
2000–01 1 분데스리가 13위
2001–02 1 분데스리가 11위
2002–03 1 분데스리가 4위
2003–04 1 분데스리가 8위
2004–05 1 분데스리가 8위
2005–06 1 분데스리가 3위
2006–07 1 분데스리가 7위
2007–08 1 분데스리가 4위
2008–09 1 분데스리가 5위
2009–10 1 분데스리가 7위
2010–11 1 분데스리가 8위
2011-12 1 분데스리가 15위
2012-13 1 분데스리가 7위
2013-14 1 분데스리가 16위
2014-15 1 분데스리가 16위
2015-16 1 분데스리가 10위
2016-17 1 분데스리가 14위
2017-18 1 분데스리가 17위
역대 성적
함부르크는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3번의 리그 우승을 거두어 로고 위에 "진정한 챔피언 클럽" (Verdiente Meistervereine)을 상징하는 금별을 달았다. 현재의 수상 시스템에 따라, 그들의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의 타이틀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5번째 분데스리가 우승 이전까지는 두 번째 별을 달 수 없다.

1922년, 국가 대회 결승전에서 상대팀에 몰수패를 당한 것에 대해, 독일 축구 협회에서는 HSV가 다시 이 타이틀을 가져갈 것을 당부하였다.

국가 타이틀
독일 챔피언쉽 / 1 분데스리가 우승 6회
우승: 1923, 1928, 1959–60, 1978–79, 1981–82, 1982–83
준우승: 1924, 1956–57, 1957–58, 1975–76, 1979–80, 1980–81, 1983–84, 1986–87
DFB-포칼 우승 3회
우승: 1962–63, 1975–76, 1986–87
준우승: 1955–56, 1966–67, 1973–74
DFL-슈퍼컵
준우승: 1977, 1982, 1987
DFB-리가포칼 우승 2회
우승: 1972-73, 2003
국제 타이틀
유러피언컵 /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우승: 1982-83
준우승: 1979-80
UEFA 컵위너스컵 우승 1회
우승: 1976-77
준우승: 1967-68
UEFA컵 / UEFA 유로파리그
준우승: 1981-82
UEFA 슈퍼컵
준우승: 1977, 1983
인터콘티넨털컵
준우승: 1983
UEFA 인터토토컵 우승 2회
우승: 2005, 2007
지역 타이틀
북독일 챔피언쉽
우승 10회: 1921, 1922, 1923, 1924, 1925, 1928, 1929, 1931, 1932, 1933
준우승 2회: 1926, 1927
가울리가 노르트마크
우승 4회: 1937, 1938, 1939, 1941
준우승 4회: 1934, 1935, 1940, 1942
가울리가 함부르크
우승 1회: 1945
준우승 2회: 1943, 1944
슈타트리가 함부르크
우승 1회: 1946
준우승 1회: 1947
영국점령지 챔피언쉽
우승 2회: 1947, 1948
오베르리가 노르트
우승 15회: 1948, 1949, 1950, 1951, 1952, 1953, 1955, 1956,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기타 타이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트로피
우승 1회: 1982
두바이 챌린지컵
우승 2회: 2007, 2008
에미레이츠컵
우승 1회: 2008
T-홈컵
우승 1회: 2009
피스컵
우승 1회: 2012
텔레콤컵
우승 2회: 2009, 2015
준우승 1회 : 2011
경기장

함부르크 SV의 홈 구장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
함부르크는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을 현재 홈구장으로 사용한다. 이 구장은 임테흐 사가 스폰서쉽을 가지고 있어 임테흐 아레나 (Imtech Arena)라고도 불렸었고 현재 15-16 시즌부터는 다시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있다. 1953년의 구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 터에 새로 지어졌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개장한 것은 2000년이다. 현재 최대 수용 관중은 57,000명으로 47,000명이 좌석에 10,000명이 입석으로 관람할 수 있다. 이전에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은 1974년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 1988을 개최하였다.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은 UEFA로부터 5성급 경기장으로 인정되어, UEFA 유로파리그와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개최할 수 있다. 2006년 FIFA 월드컵에서는 4번의 조별리그 경기와 8강전 경기의 총 5경기를 개최하였다. 당시 경기장 명칭은 함부르크 FIFA 월드컵 경기장이었다. 2010년에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풀럼 FC간의 UEFA 유로파리그 결승전을 개최하였다.

HSV 팬들은 홈 구장 근처의 공동묘지에 묻히며, 원래 함부르크 구장의 피치로 사용한 잔디로 덮인다.[3] 스타디움에 걸려 있는 시계는 HSV가 1부리그에 머무른 시간을 나타내며, 지금은 강등이 되어 시간이 멈추어 있다.

선수
현재 선수 명단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 GK 크리스티안 마테니아
2 DF 데니스 디크마이어
4 DF 릭 반 드롱겔렌
5 DF 알바니아 머르김 마브라이
6 DF 브라질 더글라스
7 FW 바비 우드
8 MF 루이스 홀트비
9 DF 키리아코스 파파도풀로스
11 FW 안드레 한
12 MF 브라질 왈라스
13 GK 율리안 폴레스벡
14 MF 아론 훈트
15 FW 루카 발드슈미트
16 MF 바실리에 얀지치치
17 MF 세르비아 필리프 코스티치
18 MF 감비아 바카리 자타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9 FW 스벤 쉽록
20 MF 알빈 에크달
22 DF 비야르네 토엘케
23 MF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야드 살리호비치
24 DF 사카이 고토쿠
25 MF 쾨흘레르트
26 FW 퇴를레스 크뇔
27 MF 니콜라이 뮐러
28 MF 기드온 융
30 GK 안드레아스 히르첼
36 GK 톰 미켈
38 DF 요나스 베호넥
40 FW 얀 피에테 아르프
43 MF 이토 타츠야
 
역대 선수
<nowiki /> 역대 함부르크 SV 소속이었던 선수들에 대해서는 분류:함부르크 SV의 축구 선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타 부서
타 부서로 축구팀 2군을 운영하는 함부르크 SV II, 여자 축구팀, 야구, 배구, 크리켓, 럭비부를 가지고 있다.

라이벌과 친선 관계
함부르크는 같은 함부르크를 연고지로 둔 FC 장크트 파울리와 라이벌 관계이며, 북부 독일의 또다른 맹주 SV 베르더 브레멘과의 경기를 노르트 더비라고 한다. 2009년 봄, 함부르크는 베르더 브레멘을 상대로 4번의 헤딩골을 넣었고, 3주 뒤, 브레멘은 함부르크를 UEFA 컵과 DFB-포칼 준결승에서 떨구었다. 함부르크는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속한 레인저스 FC와 친선 관계에 있다. 함부르크는 레인저스 클럽 로고와 합성하여 유럽대항전 원정 경기에 사용한다. 이 두 클럽관의 관계는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함부르크 레인저스 서포터스' 클럽이 레인저스 원정에 간 함부르크 팬들에 의해 형성되었고,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의 형태에 감탄하였다. 이 두 클럽관의 관계는 레인저스가 함부르크의 외르크 알베르츠를 UEFA 컵에서 레인저스의 라이벌 셀틱 FC를 꺾은 후에 성사됨에 따라 더욱 가까워졌다. 한편, 셀틱 FC는 함부르크의 라이벌 FC 장크트 파울리와 아무런 관계는 없다. 함부르크는 하노버 96과 똑같은 이니셜(HSV)로 밀접한 관계를 짓고 있다. 두 클럽의 경기때에는 원정팀 응원가를 경기 전에 부른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5%A8%EB%B6%80%EB%A5%B4%ED%81%AC_SV 위키백과

페어라인 퓌어 베베궁스슈필레 슈투트가르트 1893 e. V.(Verein für Bewegungsspiele Stuttgart 1893 e. V.) 혹은 줄여서 VfB 슈투트가르트(VfB Stuttgart)로 알려진 이 클럽은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 클럽이다. 이 클럽은 축구 클럽으로 가장 유명하며, 3번을 제외한 모든 분데스리가 시즌에 참여하였다. 이 팀은 5번의 리그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최근에 들어 우승한 시즌은 2006-07 시즌이다. 이 클럽은 리그 외에도 DFB-포칼 우승을 3회 경험하였다.

슈투트가르트의 홈 구장은 MHP아레나로, 네카어파크 (Neckarpark, 칸슈타터 바센 지역에 위치한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단지) 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2군팀으로 레기오날리가에 참가 중인 VfB 슈투트가르트 II를 운영하고 있다. 이 외에도 U-19 청소년 팀은 10번을 우승한 U-19 리그 최다 타이틀 기록을 보유한 팀이며, U-17팀 또한 6번의 우승을 경험하였다.

VfB 슈투트가르트는 멤버쉽 제도 클럽으로, 2011년 9월 기준, 43,636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어,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최대 스포츠 클럽이자, 독일에서 5번째로 큰 클럽이다. 그 외에도, 성공적인 프로, 아마추어, 유소년 축구팀, 그리고 클럽의 체조부는 다수의 타이틀과 메달을 획득하였다. 이 클럽은 축구와 체조 외에도 피스트볼, 하키, 탁구, 축구 심판부를 운영한다. 이 다섯개의 부서는 아마추어 부만 운영한다. 이 클럽은 VfB-가르테 (VfB-Garde) 라는 사회 부서를 운영한다.

역사
창단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버라인 퓌어 베베궁스슈필레 슈투트가르트 (Verein für Bewegungsspiele Stuttgart)는 1912년 4월 2일, 기존에 존재하던 슈투트가르터 FV (Stuttgarter FV) 와 크로넨-클럽 칸슈타트 (Kronen-Club Cannstatt) 가 칸슈타트의 콩코르디아 호텔 회의를 통해 합쳐지며 창단되었다. 이 두클럽은 중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1] 이들은 영국인들로부터 럭비와 축구 같은 새 스포츠를 배우고 있었다. 슈투트가르트에 럭비를 처음 전한 사람은 1865년의 윌리엄 케일이었다.[2]

슈투트가르터 FV
슈투트가르터 푸스볼버라인 (Stuttgarter Fußballverein) 은 1883년 9월 9일, 춤 베허에 의해 창단되었다.[3] FV는 원래 럭비 클럽으로, 스퇴카흐-아이스반을 연고로 하다가, 1894년 칸슈타터 바센으로 이전하였다. 럭비 클럽은 1908년에 축구부를 창단하였다. 이 팀은 주로 지역 학교로부터 선수들을 불러모았고, 카를 카우프만 선생의 지도 하에, 빠른 시간내에 첫 성공을 거두었다. 1909년, FV는 럭비 결승에서 FSV 1897 하노버에 3-6으로 밀려 준우승에 그쳤다.[4] 럭비는 관중들에 의해 규칙이 복잡하다고 지적됨에 따라 나중에 축구 클럽으로 대체되었다.

1909년, FV는 남독일 축구 협회 (Süddeutschen Fußballverband)에 가맹되어,[5] 2부 리그인 B-클라세에 속하게 되었다. FV의 2번째 시즌에, 나중에 통합되어 VfB 슈투트가르트가 되는 크로넨-클럽 칸슈타트와의 지역 결승에서 승리하였지만, FV 추펜하우젠과의 국가 챔피언쉽에서 패하였다. 이 경기는 그들의 승격이 달려 있었으며, 그들은 결국 1912년에 쉬드크라이스리가 (Südkreis-Liga)로 승격되었다.

크로넨 클럽 칸슈타트
칸슈타터 푸스볼클럽 (Cannstatter Fußballklub) 은 1890년에 럭비 클럽으로 창단되었고, 이후 축구 클럽을 창단하였다. 이 클럽은 몇년 후인 1897년에 FC 크로네 칸슈타트 (FC Krone Cannstatt) 로 개칭하였고, 축구부만 남게 되었다.[6] 새 클럽은 남독일 축구 협회에 가맹하여 2부리그에 속하게 되었고, 1904년에 1부리그로 승격하였다. 칸슈타트의 옛 구장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현재 TSV 뮌스터가 사용하고 있다.

1912년, 두 클럽의 통합 이후, 통합된 클럽은 뷔르템베르크 크라이스리가에 속해있다가 베지어크스리가 뷔르템베르크-바덴 (Bezirksliga Württemberg-Baden)으로 옮겨졌고, 상위 3위를 차지하고 1927년에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이 클럽은 또한, 20년대 말과 30년대 초에 SFV의 결승전에 종종 등장하였다.

1933-1945
1933년, VfB는 홈구장을 네카어슈타디온으로 옮겼다. 같은 해, 독일 축구는 독일 제 3제국에 의해 16개의 가울리가 (Gauligen) 이라 불리는 1부리그로 개편되었다. 슈투트가르트는 가울리가 뷔르템베르크에 속하였고 성공적인 시대를 보냈다. 슈투트가르트는 1935년, 1937년, 1938년, 1940년, 그리고 1943년에 우승을 경험하였다. 1944-45 시즌, 가울리가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와의 라이벌 관계가 이 시기에 생겨났다.

VfB의 가울리가 우승 타이틀은 국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하였으며, 1935년 그들은 4-6으로 FC 샬케 04에 패한 준우승이 최고 성적이었다. 1937년 국가 플레이오프에서 3위를 획득한 이후, 슈투트가르트는 그 이후로 예선을 넘지 못하였다.

1950년대 챔피언쉽
전후, VfB는 1부리그인 오베르리가 쉬드 (Oberliga Süd)에 속하여 1946년, 1952년, 그리고 1954년에 우승을 하였다. 이팀은 독일 챔피언쉽에 진출하여 1950년과 1952년에 우승을 경험하였고, 1953년에는 준우승을 하였다. 1950년대, 클럽은 DFB-포칼을 두 번 (1954년, 1958년) 경험하였다. VfB는 8년간 4개의 타이틀을 교통 사고로 팔을 잃은 로베르트 슐린츠의 지도 하에 이루어냈다. 그러나, 어느 선수도 1954년 FIFA 월드컵의 선수로 참가하지 못하였다.

1963년 분데스리가 출범
1958년 FIFA 월드컵과 1962년 FIFA 월드컵의 실망적인 결과에 따라, DFB는 1963년에 단일 1부 프로축구 리그인 푸스볼-분데스리가를 출범시켰다. 슈투트가르트의 1950년대에 획득한 우수한 성적은 분데스리가의 1963년 16개 원년 클럽중에 하나로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이 클럽은 당시 슈바브 사회 단체의 아마추어 조직으로, 돈을 쓰는데 인색하였고, 일부 선수는 투잡으로 생활하였다. 10여년간 클럽에 균형을 잡은 뒤, 클럽은 대체로 중위권에 머물렀다. 이 당시 유명 슈퍼스타로는 스트라스부르 출신의 길베르 그레스였다.

1972-73 시즌, 팀은 UEFA 컵 진출권을 처음으로 획득하였고, 1974년에 팀은 준결승에 진출하여, 이 시즌의 우승 팀인 페예노르트에 패하였다. (1-2, 2-2)

1975-2000: 마여-포어펠더 회장 시대
VfB 슈투트가르트는 1970년대 중반, 스폰서쉽을 비롯한 새로운 트렌드에서 뒤쳐지며, 재정난이 닥쳤다. 지출을 통하여 새로운 프로시대에 대응하는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1974-75 시즌 말, 2 분데스리가 강등 위기까지 닥쳐왔다. 지역의 정치인 게르하르트 마여-포어펠더는 구단의 새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경기에서 비기는 바람에 VfB는 16위로 마감하고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되었다. 첫 번째 2 분데스리가 시즌은, 구단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되었고, VfB는 심지어 지역 라이벌 SSV 로이틀링겐과의 홈 경기에, 1200명의 관중 앞에서 패하였으며, 시즌을 11위로 마무리하였다.

새 감독, 위어겐 선더만과 신예 카를하인츠 푀어스터와 한지 뮐러, 골잡이 오트마어 히츠펠트 등의 VfB 선수들은 1976-77 시즌에 100골을 득점하였고, 2시즌만에 1 분데스리가로 복귀하였다.

이 젊은 팀은 공격적인 플레이와 고득점 경기는 인기를 불렀지만, 경험 부족으로 문제에 직면하였다. 1977-78 시즌 종료 후, VfB는 시즌을 4위에 랭크되었고, 1990년대까지 53,000명 이상의 관중 기록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1980년에 또다스 UEFA 컵에 진출하여 준결승까지 진출하였고, 1980년에도 준결승에 진출하였으며, 1980년대에 처음으로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1984년, 헬무트 벤타우스 감독은 슈투트가르트를 우승시켰다.)

1986년, VfB는 DFB-포칼 결승전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2-5로 패하였다. 1989년에는 위르겐 클린스만을 앞세워 UEFA 컵 결승에 진출하였지만, 결승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SSC 나폴리에게 패하였다. (1-2, 3-3)

1991-92 시즌, 클럽은 다시 분데스리가 정상에 다시 올랐고, 이는 가장 치열한 타이틀 경쟁의 시즌으로 기록되었다. 슈투트가르트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시즌 종료 후 승점이 동률이었지만, 골득실 차에 의해 우승을 획득하였다. 국다대항전에서, 그들은 UEFA 컵 2라운드에서 스페인 라 리가의 CA 오사수나에게 2-3으로 패하였다. 리그 챔피언으로써, 클럽은 UEFA 챔피언스리그 1992-93에 진출하였지만, 리즈 유나이티드 FC와의 1라운드 경기에서 패해 탈락하였다. 이 라운드는 본래 슈투트가르트가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올라가게 되어있지만 크리스토프 다움 감독이 앞선 두 경기에서 비독일인 선수를 필드 위에 3명을 초과하도록 하는 실수를 범하는 데에서 발단되었다. 결국 3차전을 바르셀로나에서 치루었고, 결국 패하여 탈락하였다.

VfB는 이후 1997년 요아힘 뢰프의 지도 하에 DFB-포칼을 우승할 때까지 어느 유럽대항전에도 진출하지 못하였다. 1998년, 슈투트가르트는 UEFA 컵 위너스컵에 참여하였고 스톡홀름에서 열린 결승까지 진출하였지만, 결국 결승에서 첼시 FC에게 패하였다. 매직 트라이앵글 3인방 중 한 선수인 크라시미르 발카로프만이 이후에 잔류하였고, 나머지 지오바니 에우베르와 프레디 보비치는 클럽을 떠났다. 뢰프 감독 또한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고, 그의 공백은 빈프리트 섀퍼로 대체되었고, 그는 1시즌만에 경질되었다.

하지만, 슈투트가르트의 성적은 발카로프와 같은 베테랑을 대체하기 위해 무분별한 지출을 하였고, 그에 따라 팀의 성적은 중위권으로 추락하였다.

2000-현재: 마여-포어펠더 이후의 성공
많은 빚이 쌓이고, 실망스러운 결과가 겹치며, 게르하르트 마여-포어펠더회장은 2000년에 사임하여, 독일 축구 협회, UEFA, FIFA의 보드진이 되었다. 새 회장 만프레트 하스는 예산과 드물게 출전하는 선수들의 연봉을 삭감하여야 했다. 1976년, 마여-포어펠더가 회장을 맡은 이후, 팀은 유스 출신 선수들로 리빌딩을 하여야 했다. VfB는 독일 최고의 유소년 훈련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랄프 랑니크 감독은 UEFA 인터토토컵 우승 주역을 중심으로 리빌딩에 착수하였으나, UEFA 컵에서의 실망스러운 성적과 2000-01 시즌 강등을 겨우 모면한 15위는 랑니크의 자리를 펠릭스 마가트로 교체되게 하였다.

안드레아스 힌켈, 케빈 쿠라니, 티모 힐데브란트, 알략산드르 흘렙을 중심으로한 슈투트가르트는 "마가트 유치원"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2002-03 시즌, 슈투트가르트는 리그를 준우승으로 마무리하였다.

2003-04 시즌 챔피언스리그
2002-03 시즌의 성적에 따라, VfB는 1992-93 시즌 이래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에 참여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파나티나이코스 FC, 레인저스 FC와 E조에 편성된 슈투트가르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 1승, 파나티나이코스 FC에 2승을 거두며 조 2위로 16강에 올랐지만, 16강에서 숙적 첼시 FC에게 발목을 잡히며 (0-1, 0-0) 탈락하였다. (UEFA 챔피언스리그 2003-04 참조)

슈투트가르트는 독일 최고의 클럽들 중 하나로써의 위상을 유지하였고, 시즌을 4위 (2003-04 시즌), 5위 (2004-05 시즌) 로 마감하였으며, 다시 UEFA컵 진출권을 획득하였으나,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또한 펠릭스 마가트와 몇몇 선수들은 상위 클럽으로 이적하였다: 케빈 쿠라니는 FC 샬케 04로, 필리프 람은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알략산드르 흘렙은 아스널 FC로 이적하였다.

실망스러운 2005-06 시즌 중간,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경질되었고, 아어민 페가 그 자리를 맡았다. 새 감독은 2003년에 가족 생활을 위해 FC 한자 로스토크 감독을 그만두었으며, 2004년에만 고향 클럽 FC 아우크스부르크의 감독직을 맡았다. 새 감독은 호르스트 헬트의 지원 하에, 다시 축구로 복귀할 수 있었다. 팀 주장 츠보니미르 솔도가 은퇴하고, 다른 베테랑들이 팀을 떠남에 따라 팀은 9위로 마감하였고, 4년 만에 처음으로 어느 유럽대항전에도 진출하지 못하였다.

2006-07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
2006-07 시즌 1. FC 뉘른베르크전 0-3 대패를 포함하여 초반 연패와 맹비난으로 1년을 시작하였다. 이에도 불구, 아어민 페 감독은 멕시코의 파벨 파르도와 리카르도 오소리오, 브라질의 안토니우 다 시우바, 지역의 신예들인, 마리오 고메스, 제르다어 타스치, 자미 케디라와 같은 선수들을 동원하여 2006년 11월 12일, 본격적으로 타이틀 경쟁에 뛰어들었다. 슈투트가르트는 상위 5팀 중에 들어갔고, 시즌 후반에 8연승을 거두며 타이틀 경쟁의 우위를 점하였다. 2007년 5월 12일, 슈투트가르트는 VfL 보훔을 원정에서 3-2로 이기는 와중에 FC 샬케 04가 레비어 더비에서 완패를 당함에 따라 선두를 가져갔다. 이로 UEFA 챔피언스리그 2007-08 직행 티켓을 손안에 넣었다. FC 에네르기 콧부스와의 최종 라운드에서 0-1로 뒤지고 있던 슈투트가르트는 2-1로 역전하였고, 15년 만에 처음으로 분데스리가 정상에 올랐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있었던 우승 행사에 250,000명이 응집하였고, 이는 포르투갈과의 2006년 FIFA 월드컵 3위 결정전 당시 응집한 팬수를 넘었다.

더 나아가서, VfB는 DFB-포칼 결승에 진출하여, 10년만의 포칼 정상 탈환과 클럽 역사상 최초의 더블 기회를 잡았다. 베를린에서 만난 포칼 결승 상대는 1. FC 뉘른베르크로, 1962년에 마지막으로 포칼 우승을 거두었으며, 정규 시즌에 0-3, 1-4의 3점차 패를 두 번이나 안긴 팀이었다. 전반전을 1-1로 마친 뒤, 슈투트가르트의 득점자 카카우는 퇴장당하였다. 1. FC 뉘른베르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2-1 리드를 가져갔으나, VfB는 결국 2-2 동점골을 기록하였다. 연장전 후반, 습한 기후와 피로로 고전하는 와중, 뉘른베르크는 결승골을 득점하였다.

2007-08 시즌 챔피언스리그
2007-08 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조 추첨은 2007년 8월 30일에 시행되었다. 슈투트가르트는 스페인 라 리가의 거함 FC 바르셀로나, 프랑스 리그 거물 올랭피크 리옹, 스코틀랜드 명가 레인저스 FC와 함께 E조에 편성되었다. 2003-04 시즌과 마찬가지로 2007-08 시즌도 글래스고의 아이브록스 파크 원정으로 시작되었다. 경기는 1-2 패배로 끝났다. 이어지는 FC 바르셀로나와의 홈 경기에서도 0-2로 패하였고, 올랭피크 리옹과의 3라운드 경기에서도 0-2로 패하였다. 고작 레인저스와의 홈 경기에서 거둔 1승을 제외하고 나머지 경기에서 패한 슈투트가르트는 E조 최하위로 조기 탈락하였다. 리그에서 슈투트가르트는 형편없는 시작에도 불구하고 시즌을 6위로 마감하였다. 독일의 신성 마리오 고메스는 19골을 기록하였다.

결국, 다음 시즌 슈투트가르트는 UEFA 컵에 진출하기 위해 UEFA 인터토토컵 2008에 참여하였다.

2008-09 시즌
2008-09 시즌도, 전 시즌처럼, 시작이 좋지 않았다. 14라운드 종료 후, VfB는 11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아어민 페 감독은 경질되었고, 후임으로 마르쿠스 바벨이 사령탑에 올랐다. 2009년 1월 DFB-포칼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1-5로 대패해 중도 하차한 뒤, 슈투트가르트의 상황은 호전되었고, 결국 시즌을 3위로 마감하였다. VfB는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경기에서 승리 시 준우승과 2009-10 시즌 챔피언스리그 직행 티켓도 노릴 수 있었으나 패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이는 슈투트가르트가 UEFA 챔피언스리그 복귀가 가능함을 뜻하였다.

유럽대항전에서, VfB는 UEFA컵 2008-09의 조별 리그를 무난히 통과하였지만, 전 대회 우승 팀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32강에서 만나 패해 중도 하차하였다.

2009-10 시즌 챔피언스리그
VfB는 마리오 고메스가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난 채 시즌을 시작하였지만,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파벨 포그레브냐크를 영입하고, 알략산드르 흘렙을 FC 바르셀로나에서 임대하여 슈투트가르트에 다시 복귀시켰다.

유럽대항전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 2009-10을 예선을 통하여 본선에 합류해야 했다. VfB 슈투트가르트의 3차 예선 상대는 FC 폴리테흐니카 티미쇼아라로 2009년 8월 18일과 8월 26일에 차례로 1, 2차전을 치루었다. VfB는 티미쇼아라를 꺾는데 성공, 6년동안 3번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하였다. (2003년과 2007년 그리고 2009년) 이번 챔피언스리그에서 슈투트가르트는 스페인 라 리가의 거상 세비야 FC, 2000년대에 들어 3번째로 만난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챔피언 레인저스 FC, 그리고 루마니아 리그 챔피언이자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한 FC 우니레아 우르지체니와 함께 G조에 편성되었다. 이 조별리그에서 슈투트가르트는 2승 (레인저스 FC와 FC 우니레아 우르지체니에 각각 1승) 3무 (조별리그 세 상대로 모두 1무씩 기록) 1패 (세비야 FC를 상대로)를 기록하여 극적으로 G조 2위 자리를 가져가 16강 진출에 성공하였다. 16강에서 전 시즌 챔피언 FC 바르셀로나를 만나 홈에서 환상적인 경기로 1-1 무승부를 거두었지만, 이어지는 캄프 누 원정에서 0-4로 완패하여 8강 진출에 실패하였다.

2009-10 DFB-포칼은 16강에서 2 분데스리가의 SpVgg 그로이터 퓌르트에 덜미를 잡혀 탈락하였다. 이 패배 이후로 2009-10 시즌 전반을 실망스럽게 마감하였다. 그 결과에 따라 12월에는 16위로 하락하기도 하였다. 15라운드 이후 마르쿠스 바벨은 해임되었고, 그의 자리는 더 경험이 많은 스위스 국적의 크리스티안 그로스가 맡게 되었다. 그의 지휘 하에 VfB는 겨울 휴식기를 앞두고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이 겨울 휴식기 도중 토마스 히츨슈페르거, 얀 시마크, 뤼도비크 마냉은 클럽을 떠났고, 유벤투스 FC로부터 크리스티안 몰리나로가 임대되었다. 시즌 후반, 2008-09 시즌과 마찬가지로, 연승 행진을 거두었다. 슈투트가르트는 분데스리가 후반 최고의 팀으로, 슈바비언들은 크리스티안 그로스의 지휘 하에 리그 상위권에 올라서는 것과 더불어 리그를 6위로 마감하여 UEFA 유로파리그 2010-11 3차 예선 진출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경기장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
VfB 슈투트가르트의 홈구장은 MHP아레나로 1933년에 처음으로 건설되었다. 경기장은 네카어 강변에 위치하며 바트 칸슈타트 (Bad Cannstatt)의 메르세데스 벤츠 박물관과 메르세데스 벤츠 공장 인근의 메르세데스 거리 (Mercedes-Straße) 에 위치한다. 여러 차례의 리모델링을 거친 후, 이 경기장은 55,896명을 수용 (국가대항전에서는 50,000명 수용)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대부분의 분데스리가 경기장과는 다르게, 이전의 네카어슈타디온은 필드 가장자리에 육상 트랙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2011년에 축구전용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974년 FIFA 월드컵과 2006년 FIFA 월드컵 당시 경기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2006년 FIFA 월드컵의 경우 6경기를 개최하였는데, 4번의 조별리그 경기, 1번의 16강 경기, (잉글랜드와 에콰도르의 경기) 그리고 3위 결정전 (독일과 포르투갈의 경기)를 개최하였다. 2008-09 시즌, 2008년 7월 30일자 아스널 FC와의 프리시즌 경기를 기점으로 경기장은 메르세데스-벤츠 아레나로 개칭되었다.[7] 경기장은 2008-09 시즌을 시작으로 축구 전용 구장으로 교체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2011년 리모델링 완료 후, 60,000명으로 수용력이 증가하였다.


라이벌과 친선 관계
VfB의 전통 라이벌은 같은 슈투트가르트를 연고지로 하는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이다. (빨강 - Die Roten 과 파랑 - Die Blauen의 라이벌전) 하지만, 두 클럽 중 슈투트가르트 키커스는 1992년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된 이후 그다지 자주 만난 편은 아니다. 그에 따라서, 카를스루에 SC와의 바덴뷔르템베르크 더비의 중요도가 훨씬 높아졌다. 그 외에도 바이에른주의 FC 바이에른 뮌헨과도 라이벌 관계이며, (쉬드 더비) 최근 바이에른은 지오바니 에우베르, 펠릭스 마가트, 마리오 고메스를 VfB에서 빼앗아 가면서 주적으로 낙인찍혔다.

같은 주의 남부에 위치한 SSV 로이틀링겐과는 친선 관계 (VfB와 형제 관계)이며, 같은 주 북부의 SpVgg 루드비히스부르크와도 친하다. 국가 단위에서 VfB는 FC 에네르기 콧부스, 1. FC 자르브뤼켄, 바이어 04 레버쿠젠,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도 밀접한 연관을 짓고 있다. 이들의 서포터 그룹과의 친선 관계는 현재까지 지속되지만 극소수의 팬들만이 이 전통을 지키고 있다.

2005년, VfB는 스위스 슈퍼리그의 FC 장크트갈렌와 협약을 맺었고, 유소년 팀간의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역대 성적
국내
독일 챔피언십 / 분데스리가 우승 5회
우승: 1950, 1952 (독일 챔피언쉽), 1983-84, 1991-92, 2006-07
준우승: 1935, 1953 (독일 챔피언쉽), 1978-79, 2002-03
DFB-포칼 우승 3회
우승: 1953-54, 1957-58, 1996-97
준우승: 1985-86, 2006-07, 2012-13
DFB-리가포칼
준우승: 1997, 1998, 2005
DFL-슈퍼컵 우승 1회
우승: 1992
지역
오베르리가 쉬드 I 우승 3회
우승: 1945–46, 1951–52, 1953–54
준우승: 1949–50, 1952–53, 1955–56
남부 2 분데스리가 우승 1회
우승: 1977
베지어크스리가 뷔르템베르크 바덴 우승 2회
우승: 1926–27, 1929–30
준우승: 1925–26
가울리가 뷔르템베르크 우승 4회
우승: 1934–35, 1936–37, 1937–38, 1942–43
준우승: 1938–39, 1939–40, 1940–41, 1941–42
국제대회
UEFA 컵 위너스 컵
준우승: 1998
UEFA컵
준우승: 1989
UEFA 인터토토컵 우승 2회
우승: 2000, 2002
유소년팀
독일 U-19 챔피언쉽 우승 10회
우승: 1973, 1975, 1981, 1984, 1988, 1989, 1990, 1991, 2003, 2005
준우승: 1972, 1977, 1982, 1999, 2002
독일 U-17 챔피언쉽 우승 6회
우승: 1986, 1994, 1995, 1999, 2004, 2009
준우승: 1988, 1990, 1998, 2002, 2003
U-19 분데스리가 남부/ 남서부 우승 2회
우승: 2005, 2008
클럽 보드진
디터 훈트: 구단 단장
게르트 E 매우저: CEO/ 회장 (2011년 7월 17일 ~)
프레디 보비치: 스포르팅 디렉터 (2010년 7월 27일 ~)
요헨 슈나이터: 스포르팅 디렉터
선수
현재 선수 명단
2023-24시즌 기준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 GK 파비안 브레들로프
2 DF 발데마르 안톤 (부주장)
4 DF 요샤 바그노만
6 MF 안젤로 슈틸러
7 DF 막시밀리안 미텔슈타트
8 MF 엔조 밀로
9 FW 기니 세루 기라시
10 MF 정우영
14 FW 콩고 민주 공화국 실라스 카톰파 음붐파
15 DF 파스칼 슈텐첼
16 MF 아타칸 카라초어
17 MF 하라구치 겐키
18 FW 제이미 레벨링 (우니온 베를린에서 임대)
19 FW 세르비아 요반 밀로셰비치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20 DF 레오니다스 스테르유 (장크트갈렌에서 임대)
21 DF 이토 히로키
22 FW 토마스 카스타나라스
23 DF 당악셀 자가두
25 MF 릴리안 에글로프
26 FW 데니즈 운다브 (브라이턴 & 호브 앨비언에서 임대)
27 MF 크리스 퓌리히
28 MF 니콜라스 나르티
29 DF 앙토니 루오 (툴루즈에서 임대)
32 MF 로베르토 마시모
33 GK 알렉산더 뉘벨 (바이에른 뮌헨에서 임대)
36 MF 라우린 울리히
41 GK 데니스 사이멘
42 GK 플로리안 쇼크
 
임대 선수 명단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1 FW 콜롬비아 후안 호세 페레아 (한자 로스토크로 임대)
30 MF 튀르키예 외메르 파루크 베야즈 (하타이스포르로 임대)
31 MF 포르투갈 질 디아스 (레기아 바르샤바로 임대)
44 FW 모하메드 산코 (헤라클레스 알멜로로 임대)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 DF 크로아티아 마테이 마글리차 (다름슈타트 98로 임대)
— MF 마테오 클리모비츠 (아틀레티코 산루이스로 임대)
— FW 와히드 파기르 (SV 엘페르스베르크로 임대)
— FW 루카 파이퍼 (다름슈타트 98로 임대)
 
유명 선수
덴마크 욘 달 토마손
스페인 오리올 로메우
멕시코 파벨 파르도
브라질 둥가
일본 오카자키 신지
루마니아 알렉산드루 막심
노르웨이 모하메드 압델라우에
독일 카카우
독일 사미 케디라
독일 옌스 레만
독일 마리오 고메스
오스트레일리아 로비 크루스
코칭스태프
위치 이름 국적
감독 휘프 스테번스 네덜란드
골키퍼 코치 안드레아스 멘거 독일
피트니스 코치 크리스토스 파파도풀로스 그리스
역대 감독 목록
1920년부터의 감독 목록[8]

이름 재임기간 타이틀
독일 그륀발트 1920년
잉글랜드 에드워드 하네이 1924년 7월 1일 – 1927년 1월 뷔르템베르크/바덴 1927
헝가리 코바시 라요스 1927년 9월 – 1929년 12월 31일 뷔르템베르크 1929/30
독일 에밀 프리츠 1930년 1월 1일 – 1930년 6월 15일
독일 카를 프로이스 1930년 6월 15일 – 1933년
독일 빌리 루츠 1933년 7월 – 1934년
독일 에밀 그뢰너 1934년 – 1935년
독일 프리츠 토이펠 1935년 – 1936년 6월 30일 독일 챔피언쉽 준우승 1935
가울리가 뷔르템베르크 1935
독일 레온하르트 "로니" 사이데레어 1936년 7월 1일 – 1939년 6월 30일 가울리가 뷔르템베르크 1937, 1938
독일 카를 베커 1939년 3월 – 1939년 4월
독일 요세프 푀팅거 1939년 5월 1일 – 1939년 10월
독일 프리츠 토이펠 1945년 7월 1일 – 1947년 6월 30일 오베르리가 쉬드 1946
독일 게오르그 부어처 1947년 7월 1일 – 1960년 4월 30일 독일 챔피언쉽 1950, 1952, 준우승 1953
오베르리가 쉬드 1952, 1954
DFB-포칼 1953-54, 1957-58
독일 쿠르트 발루세스 1960년 5월 1일 – 1965년 2월 24일
독일 프란츠 세이볼트 1965년 2월 25일 – 1965년 3월 7일
독일 루디 구텐도르프 1965년 3월 8일 – 1966년 12월 6일
독일 알베르트 싱 1966년 12월 7일 – 1967년 6월 30일
독일 군터 바우만 1967년 7월 1일 – 1969년 6월 30일
독일 프란츠 세이볼트 1969뇬 7월 1일 – 1970년 6월 30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브란코 제베츠 1970년 7월 1일 – 1972년 4월 18일
독일 카를 뵈겔라인 1972년 4월 19일 – 1972년 6월 30일
독일 헤르만 에펜호프 1972년 7월 1일 – 1974년 12월 1일
독일 프리츠 밀링거 1974년 12월 2일 – 1974년 12월 13일
독일 알베르트 싱 1974년 12월 14일 – 1975년 6월 30일
헝가리 시타니 이스트번 1975년 7월 1일 – 1976년 3월 31일
독일 카를 뵈겔라인 1976년 4월 1일 – 1976년 6월 30일
독일 한스-위르겐 선더만 1976년 7월 1일 – 1979년 6월 30일 푸스볼-분데스리가 준우승 1978-79
독일 로타어 부흐만 1979년 7월 1일 – 1980년 6월 30일
독일 한스-위르겐 선더만 1980년 7월 1일 – 1982년 6월 30일
독일 헬무트 베타우스 1982년 7월 1일 – 1985년 6월 30일 푸스볼-분데스리가 1983-84
크로아티아 오토 바리치 1985년 7월 1일 – 1986년 3월 4일
독일 빌리 엔텐만 1986년 3월 5일 – 1986년 6월 30일 DFB-포칼 준우승 1985-86
독일 에곤 코어데스 1986년 7월 1일 – 1987년 6월 30일
네덜란드 아리 한 1987년 7월 1일 – 1990년 3월 26일 UEFA 컵 준우승 1988-89
독일 빌리 엔텐만 1990년 3월 27일 – 1990년 11월 19일
독일 크리스토프 다움 1990년 11월 20일 – 1993년 12월 10일 푸스볼-분데스리가 1991-92
독일 위르겐 뢰버 1993년 12월 15일 – 1995년 4월 25일
독일 위르겐 선더만 1995년 4월 26일 – 1995년 6월 30일
오스트리아 롤프 프링거 1995년 7월 1일 – 1996년 8월 13일
독일 요아힘 뢰프 1996년 8월 14일 – 1998년 6월 30일 DFB-포칼 1996-97
UEFA 컵 위너스컵 준우승 1997-98
독일 빈프리드 섀퍼 1998년 7월 1일 – 1998년 12월 4일
독일 볼프강 롤프 1998년 12월 5일 – 1998년 12월 21일
독일 라이너 아드리온 1999년 1월 1일 – 1999년 5월 2일
독일 랄프 랑니크 1999년 5월 3일 – 2001년 2월 23일
독일 펠릭스 마가트 2001년 2월 24일 – 2004년 6월 30일 푸스볼-분데스리가 준우승 2002-03
독일 마티아스 자머 2004년 7월 1일 – 2005년 6월 3일
이탈리아 조반니 트라파토니 2005년 6월 17일 – 2006년 2월 9일
독일 아어민 페 2006년 2월 10일 – 2008년 11월 23일 푸스볼-분데스리가 2006-07
DFB-포칼 준우승 2006-07
독일 마르쿠스 바벨 2008년 11월 23일 – 2009년 12월 6일
스위스 크리스티안 그로스 2009년 12월 6일 – 2010년 10월 13일
독일 옌스 켈러 2010년 10월 13일 – 2010년 12월 12일
독일 브루노 라바디아 2010년 12월 12일 –
역대 분데스리가 순위
1963년 이후의 모든 1 분데스리가와 2 분데스리가 시즌별 최종 순위:[9][10]

1963–64 – 5위
1964–65 – 12위
1965–66 – 11위
1966–67 – 12위
1967–68 – 8위
1968–69 – 5위
1969–70 – 7위
1970–71 – 12위
1971–72 – 8위
1972–73 – 6위
1973–74 – 9위
1974–75 – 16위 (2 분데스리가로 강등)
1975–76 – 2 분데스리가, 11위
1976–77 – 2 분데스리가, 우승(1 분데스리가로 승격)
1977–78 – 4위
1978–79 – 2위
1979–80 – 3위
1980–81 – 3위
1981–82 – 9위
1982–83 – 3위
1983–84 – 우승
1984–85 – 10위
1985–86 – 5위
1986–87 – 12위
1987–88 – 4위
1988–89 – 5위
1989–90 – 6위
1990–91 – 6위
1991–92 – 우승
1992–93 – 7위
1993–94 – 7위
1994–95 – 12위
1995–96 – 10위
1996–97 – 4위
1997–98 – 4위
1998–99 – 11위
1999–00 – 8위
2000–01 – 15위
2001–02 – 8위
2002–03 – 2위
2003–04 – 4위
2004–05 – 5위
2005–06 – 9위
2006–07 – 우승
2007–08 – 6위
2008–09 – 3위
2009–10 – 6위
2010–11 – 12위
2011–12 – 6위
2012–13 – 12위

전통적인 곳으로 유명한구단이라고 합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VfB_%EC%8A%88%ED%88%AC%ED%8A%B8%EA%B0%80%EB%A5%B4%ED%8A%B8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