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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축구 유럽 프리미어리그 구단

by 복날집 2023.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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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유럽 프리미어리그 구단에는 여러 유명한팀들이 많다 

과거 0세대로는 차붐이 있고 1세대로는 박지성 2세대로는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 등이 있다

첼시 FC(영어: Chelsea Football Club)는 잉글랜드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축구 클럽이다. 1905년에 창단했으며 현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소속되어 있다. 더 블루스(The Blues)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구단 명칭은 런던 남서부 첼시 지역명을 사용하지만, 홈 구장은 첼시 인근 풀럼에 위치한 40,341석 규모의 스탬퍼드 브리지이다.[1]

첼시는 프리미어리그 6회, FA컵 8회, 리그컵 5회, FA 커뮤니티 실드 4회, UEFA 챔피언스리그, UEFA 유로파리그, UEFA 컵위너스컵, UEFA 슈퍼컵에서 각 2회씩 우승을 기록하였다.[3] 또한 첼시는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을 거둔 런던의 유일한 축구팀이며,[4] UEFA가 주관하는 3개의 주요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거둔 4개의 구단 중 하나이다.[5][6]

첼시의 홈 유니폼은 로열 블루 색상의 상·하의와 흰색의 양말로 구성되어 있다.(상대가 흰색 유니폼을 입을경우 양말은 로열 블루도 함께 입는다. 구단의 문양은 파란색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현재의 문양은 2005년에 도안한 것이다.[7] 2014-15시즌의 홈 평균 관중 수는 41,546명으로, 이는 프리미어리그에서 7번째에 해당한다.[8] 2016년, 포브스지의 조사에 의하면 첼시의 자산 가치는 약 16억 달러로, 이는 전 세계 축구 클럽 중 7위에 해당하는 수치이다.[9] 첼시의 소유권은 2003년 7월에서 2022년 5월까지 러시아 출신의 억만장자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있었다.[10]

현재 감독은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이며, 주장은 리스 제임스, 부주장은 벤 칠웰 이다.

역사
초창기

1905년의 초창기 첼시 선수들.

1929년의 첼시 선수들.
1904년, 영국의 사업가 거스 미어스는 런던의 풀럼에 위치해 있던 한 운동장을 구입하여 이를 축구장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미어스는 근처의 풀럼 FC에 이 구장을 양도하려 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이 경기장에 새로운 팀을 창립하기로 마음먹었고, 구단의 이름을 정하는 과정에서 기존 지역 구단과의 중복을 피하여 옆 구역인 첼시의 명칭을 따 새 구단의 이름을 지었다. (이 과정에서 켄징턴 FC, 스탬퍼드 브리지 FC, 런던 FC등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하였다.)[11]

첼시는 1905년 3월 10일 라이징 선이라는 술집에서 정식으로 결성되었으며,[12] 이 술집은 오늘날 런던의 풀럼 로(路, Fulham Road) 입구 반대편에 있었다. 초창기 첼시의 설립자들은 팀을 2부 리그에 참가시켰다. 초기 30여 년간 팀은 승격과 강등을 반복하였다. 첼시는 1915년 FA컵 결승전에 진출하기도 했는데, 비록 셰필드 유나이티드에게 패하여 준우승에 그쳤지만,[13] 이로 인해 첼시는 이름 높은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14] 그러나 이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다.

1950-1960년대
1952년, 전 잉글랜드 대표팀의 센터 포워드인 테드 드레이크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드레이크 감독은 “첼시 펜셔너”(Chelsea pensioner)라고 불리는 오래된 문양(文樣, Crest)을 새롭게 교체하고, 유소년팀에 대한 지원을 증진시켰으며, 기존의 훈련 방식을 고쳤다.[15] 그는 1954-55시즌, 팀의 첫 1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16] 1955년 UEFA가 유러피언 컵을 만들자 첼시는 리그 우승 팀으로써 출전 자격이 주어졌지만, 풋볼 리그와 잉글랜드 축구 협회의 반대로 참가를 철회해야만 했다.[17]

1950년대 후반, 첼시는 리그 중위권에 머물렀고, 1961년 드레이크 감독은 해임되었다. 그 자리는 선수 겸 감독인 토미 도허티가 대신하게 되었다. 도허티의 지휘 아래 첼시는 1964-65시즌에 리그, FA컵, 리그 컵에서 트레블(treble)을 달성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첼시는 리그컵에서 우승을 거두었을 뿐 다른 두 개의 대회에서는 모두 쓴맛을 봐야 했다.[18][19]

1970-1980년대

스탬퍼드 브리지의 동쪽 스탠드 공사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첼시에 심각한 재정난을 안겨 주었다.
도허티의 후임으로 부임한 데이브 섹스턴의 지휘 하에, 첼시는 1970년 FA컵 결승에서 리즈 유나이티드를 2-1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였다.[20] 1971년에는 UEFA컵 위너스컵 결승에서 재경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2-1로 승리를 거두어 창단 최초로 유럽 대회 우승을 거두게 되었다.[21]

그러나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는 첼시에게 있어 격변의 시대였다. 홈구장인 스탬퍼드 브리지의 재건축은 구단에 재정적인 충격을 가져다주었고,[22] 이로 인한 스타 선수들의 매각은 팀의 위상과 성적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일부 서포터의 훌리건 행위는 향후 10년간 팀에 있어 큰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였다.[23]

첼시의 재정은 바닥을 치게 되었고, 결국 켄 베이츠에게 명목상의 금액인 1파운드에 매각되었다. 또한 스탬퍼드 브리지가 택지 개발업자들에게 자유 보유 부동산으로 팔리게 되자 구단의 명성은 더욱 떨어지게 되었다.[24]

1980년대에 첼시는 처음으로 디비전 2로 강등되었다. 1983년 존 닐이 감독으로 부임함과 동시에 첼시는 여섯 명의 선수를 영입하였고, 이에 힘입어 1983-84시즌 디비전 2에서 우승하여, 다시 디비전 1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25] 1988년, 첼시는 디비전 2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 디비전 2에서 우승을 거두며 디비전 1로 다시 승격되었다.[26]

1990-2000년대 초
한편 과거의 이사들 중 일부가 스탬퍼드 브리지의 소유권을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양도하였다. 회장인 켄 베이츠가 경기장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자, 긴 법정 공방이 시작되었다. 1992년 긴 법정 공방 끝에, 켄 베이츠는 부동산 시장의 붕괴로 파산한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소유권을 매수함으로써 경기장 내의 자유 보유 부동산 부지를 다시 첼시 소유로 합치게 하였다.[27]

1994년 첼시는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최초로 FA컵 결승에 진출하였다. 1996년, 전 유럽 올해의 선수인 루드 굴리트가 선수 겸 감독이 되어서야 팀은 안정이 되어갔다. 이에 힘입어 첼시는 1997년 FA컵에서 우승하였다.[28] 그러나 굴리트는 팀의 재정을 압박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대신 그 자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선수 겸 감독 이었던 잔루카 비알리에게로 돌아갔다. 첼시는 1998년 리그 컵과 UEFA컵 위너스컵,[29][30] 2000년 FA컵에서 우승을 거두었다.[31]

2000년 9월, 첼시는 비알리를 경질하고 이탈리아 출신인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를 감독에 임명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 시대

이 차트는 1906년부터 현재까지 첼시가 리그에서 거둔 성적을 보여준다.

2012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 수여식. 이는 첼시의 대회 첫 번째 우승이기도 하다.
2003년 6월, 첼시는 러시아의 석유 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1억 4천만 파운드에 매각되었다.[10] 매각 이후 선수단의 개편을 위해 1억 파운드의 돈이 쓰였지만, 팀이 무관에 그치자 라니에리는 경질되었다.[32] 대신 그 자리는 FC 포르투를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으로 이끌었던 포르투갈 출신의 감독인 조세 무리뉴에게 돌아갔다.[33]

무리뉴의 지도 하에서 첼시는 2004-05시즌과 2005-06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2년 연속 우승을 거두었다.[34][35][36] 특히 2004-05시즌에는 최다 클린시트(25경기), 최소 실점(15실점), 최다 승리(29승), 최다 승점(95점) 부문에서 새로운 기록을 수립하기도 하였다.[35]

이외에도 2007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연장 접전 끝에 1-0으로 누르고 FA컵에서 우승하였고,[37] 2005년과 2007년에는 각각 리버풀과 아스널을 꺾고 리그 컵에서 우승을 거두었다.[38][39]

그러나 2007년 9월 20일, 무리뉴 감독은 아브라모비치와의 불화설이 나도는 가운데 첼시와의 계약을 끝냈고, 그 자리는 이스라엘 출신의 감독인 아브람 그랜트가 대신하였다.[40] 2007-08시즌, 첼시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승부차기 끝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배하였다.[41] 경기에서 패배한 후, 아브람 그랜트는 즉시 계약 해임되었다.[42]

2008-09시즌, 첼시는 루이스 펠리피 스콜라리를 새 감독으로 영입하였으나, 반 시즌만에 경질하였고,[43] 곧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던 거스 히딩크가 시즌의 남은 기간 동안의 임시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44] 히딩크의 지휘 하에 첼시는 2009년 FA컵에서 우승을 거두었다.[45]

2009년, 구단에서는 히딩크의 후임으로 카를로 안첼로티를 내정하였다. 안첼로티 체제 하의 첼시는 리그에서 승점 86점으로, 리그에서 4년만에 우승을 차지하였다.[46][47] 첼시는 FA컵에서도 우승을 거두며, 창단 이후 처음으로 "리그-FA컵 더블"을 달성하였다.[48][49] 그러나 2010-11시즌, 팀이 무관에 그치자 구단 측에서는 안첼로티 감독을 경질하였다.[50]

2011년 6월, 첼시는 새 감독으로 FC 포르투의 젊은 감독인 안드레 빌라스-보아스를 내정하였지만, 성적 부진이 이어지자 8개월 만에 해임하였다.[51] 뒤이어 전 선수 출신인 로베르토 디 마테오가 직무를 대행하였다. 디 마테오 감독 하의 첼시는 2011-12 FA컵에서 우승을 거두었으며,[52][53]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하여 승부차기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4-3으로 꺾고 구단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스리그 타이틀을 획득하였다.[54][55] 이는 런던의 축구 팀이 거둔 최초의 대회 우승이기도 하다.[54]

그러나 2012-13시즌 도중, 첼시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디 마테오 감독을 경질하였다.[56] 후임 감독으로는 라파엘 베니테스가 시즌 종료까지 감독 대행 자격으로 부임하였다. 베니테스의 첼시는 UEFA 유로파리그 결승에 진출하여 SL 벤피카를 2-1로 물리치고 우승 타이틀을 차지하였다.[57]

2013년 6월 3일, 첼시는 조세 무리뉴가 다시 팀으로 복귀했다는 소식을 타진하였다.[58] 2014-15시즌, 첼시는 8년만에 풋볼 리그 컵에서 우승하였고,[59] 리그에서도 승점 87점으로 우승을 거두었다.[60] 그러나 다음 시즌, 부진이 장기화되자 구단 측은 결국 무리뉴 감독을 경질했고, 거스 히딩크가 임시 감독의 자격으로 다시 부임하였다.[61]

그의 후임으로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안토니오 콘테가 선임되었다. 콘테의 지휘하에 첼시는 2016-17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이듬해 FA컵 우승을 차지하였다.

2018-19시즌, 콘테가 해임되자 그 자리는 또 다른 이탈리아 출신의 감독인 마우리치오 사리에게 돌아갔다. 사리는 리그 3위와 유로파리그 우승을 달성하였으나, 1년 만에 팀을 떠났다. 첼시는 과거 선수 출신인 프랭크 램퍼드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하지만 램파드는 2020-21시즌 도중 경질되었고, 2021년 1월 27일 토마스 투헬이 첼시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투헬의 부임 이후, 첼시는 FA컵 준우승,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1-0으로 꺾고 구단 역사상 2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듬해 UEFA 슈퍼컵과 FIFA 클럽 월드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였다.

경기장

1905년 9월 23일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열린 첼시와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의 경기. 경기는 첼시가 1-0으로 승리하였다.
첼시는 창단 이래로 스탬퍼드 브리지 이외에 다른 경기장을 사용한 적이 없다. 스탬퍼드 브리지는 1877년 4월 28일 처음 개장했으며, 28년 동안 런던 애슬레틱스 클럽(London Athletics Club)의 종합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사업가인 거스 미어스와 그의 형제인 조셉 미어스는 운동장과 주변 51,000 m²의 부지를 매입하여 이 곳에 축구 경기를 열고자 했다.[62] 미어스 형제는 셀틱 파크를 디자인한 건축가인 아치볼드 리치에게 새 경기장의 디자인을 부탁하였다.[63] 대부분의 축구팀이 창단을 먼저 한 뒤 경기장을 구하는 것과는 달리, 첼시는 스탬퍼드 브리지를 위해 팀을 창단한 것이다.

초기 스탬퍼드 브리지는 그릇 모양의 둥근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오직 한 쪽면만 지붕으로 덮여있었다. 수용인원은 10만 명이었다.[62] 1930년대 초반의 경기장은 남쪽 지붕의 1/5 가량이 테라스 형태로 둘러싸인 모습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 부분은 훗날 "셰드 엔드"("Shed End")로 불리게 되었다. 이 곳은 1960년에서 80년대 사이 일부 열성적인 서포터들이 요란한 응원을 펼친 곳이기도 하다.[62]

1970년대 초반, 구단은 클럽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5만석 규모의 경기장 개축을 계획하였다.[62] 사업은 1972년 동쪽 스탠드 개축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이는 결국 팀을 파산 위기에 봉착하게 했고, 일부 부지가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자유 보유 부지로 넘어가면서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경기장 현대화 작업은 1990년대 중반, 오랜 법정 공방 끝에 경기장 내 모든 부지들이 다시 구단의 소유가 된 이후에야 재개될 수 있었다.[62] 2001년 경기장의 북쪽, 서쪽, 남쪽 객석은 모두 좌석화되었으며, 필드에도 좀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켄 베이츠가 구단주로 취임한 이후 스탬퍼드 브리지는 좀 더 많은 시설을 갖추게 되었는데, 경기장 안에 두개의 호텔과 아파트, 바, 레스토랑, 첼시 메가스토어와 같은 편의 및 관광 시설이 들어섰다. 그러나 2003년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인수 이전까지 이러한 시설들을 통해 관련 수입을 올리려던 본래의 의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첼시 빌리지"를 건설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던 이 계획은 로만의 인수 이후 다시 "첼시 풋볼 클럽"에 초점을 맞춘 계획으로 변경되었다.

첼시의 연습 구장은 코범에 위치해 있는데 2004년부터 사용되었다. 해링턴에 위치한 전 연습 구장은 2005년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에 매각하였다.[64] 코범 연습 구장의 모든 시설물은 2007년에 완공되었다.[65]

한편 스탬퍼드 브리지는 여러 종류의 스포츠 경기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FA컵 결승 경기를 개최했고,[66] 10번의 FA컵 준결승, 10번의 채리티 실드 경기, 3번의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다.[67] 2013년에는 UEFA 여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치르기도 했다.[68]

1905년에는 럭비 경기를 위해 사용된 적이 있으며,[69] 1914년에는 뉴욕 자이언츠와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야구 경기를 개최한 적이 있다.[70] 이 경기장은 1918년 지미 와일드와 조 콘의 복싱 플라이급 챔피언전 대결을 치르기도 하였다.[71] 또 런닝 트랙은 1928년과 1923년 사이 더트 트랙 레이싱(자동차 경주의 한 종류)을,[72] 1933년부터 1968년까지 그레이하운드 경기를, 1948년에는 소형 자동차 경주 대회를 개최하였다.[73] 1980년, 스탬퍼드 브리지는 에섹스와 웨스트 인디의 국제 크리켓 경기를 개최하기도 하였다.[74]


경기장 서쪽에서 본 스탬퍼드 브리지.
현재 스탬퍼드 브리지의 부동산 자유 보유권, 축구장, 개찰구, 첼시의 구단 명칭에 관한 권리는 팬들이 주주로 공동 참여하는 비영리 단체인 첼시 피치 오너스(Chelsea Pitch Owners)가 소유하고 있다. CPO는 1993년 경기장이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다시금 넘어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또한 이들은 첼시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상 팀은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경기를 치러야하며, 만일 구장을 옮길 시 팀의 이름을 반납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75]

2011년 10월, 구단에서는 CPO 주주들이 소유한 스탬퍼드 브리지의 소유권을 매입 · 처분 뒤 새롭고 큰 경기장으로의 이전을 추진하였으나,[76] 이 제안은 CPO에서 거부되었다.[77] 2012년 5월, 첼시 구단측은 6만석 규모의 경기장 개발을 위하여 배터시 발전소 (Battersea power station) 부지 입찰을 제의하였으나,[78] 말레이시아의 한 컨소시엄으로 인해 무산되었다.[79]

2015년 7월, 구단에서는 스탬퍼드 브리지를 6만여 명 규모로 증축하는 방안을 발표하였다.[80]

문양과 유니폼
문양
첼시의 문양(文樣, Crest)은 역대로 4차례에 걸쳐 변경되었다. 1905년 초창기 첼시의 설립자들은 "첼시 펜셔너"("Chelsea pensioner")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문양을 그들의 첫 공식 문양으로 채택하였다. 첼시의 별명 중 하나인 "펜셔너즈"("The Pensioners")는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이 문양은 대략 반세기 동안 사용되었다. 1952년 테드 드레이크는 클럽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기존의 펜셔너 휘장을 대신할 새 문양의 채택을 건의하였고, 이는 곧 받아들여졌다.[81]

그러나 팀의 이니셜인 C.F.C.를 포함한 새 문양은 1년밖에 사용되지 못했다. 1953년 첼시의 문양은 다시 바뀌게 되었다. 새 문양은 수직으로 일어서 있는 파란색 사자가 뒤를 보면서 봉을 잡고 있는 모양이었으며, 이것은 약 30년간 사용되었다. 이 문양은 첼시 메트로폴리탄 자치구(런던 내의 메트로폴리탄 자치구는 1965년에 폐지되었다.)의 문장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사자는 클럽 회장이자 첼시 자작이었던 윌리엄 캐도건(William Cadogan) 백작의 문장에서, 지팡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대수도원장의 그것에서 따온 것이다. 3개의 장미는 잉글랜드를, 2개의 공은 축구를 상징한다.[82] 이 문양은 1960년대 초반부터 유니폼 위에 새겨졌다.[81]

1986년에는 새로운 문양이 채택되었다. 새로운 문양의 모습은 기존의 수직으로 일어선 사자의 모습 대신 C.F.C. 이니셜 위에 있는 사자의 모습을 형상화했다.[83] 또한 사자의 색깔도 파란색이 아닌 노란색 사자였으며. 이것은 19년간 첼시의 문양으로 지속되어 왔다.

창단 100주년인 2005년, 옛 문양을 되살리자는 다수 팬들의 요구에 힘입어 새 문양이 도입되었다. 이는 1953년의 그것을 개량한 형태이며, 2005-06시즌의 개막과 동시에 공식 문양으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84]

유니폼
첼시의 홈 유니폼은 파란색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창단 초기의 홈 유니폼은 지금과는 달리 밝은 청록색(당시 첼시의 회장이었던 캐도건 백작의 기수복 색)의 셔츠, 하얀색의 바지, 검은색 혹은 진청색의 양말로 구성되어있었다. 단 상대가 하얀색 유니폼을 입거나 양말이 하얀색이 같을경우 양말도 파란색을 착용한다.[85] 셔츠의 색은 1912년 로열 블루로 변경되었다.[86] 1960년대 초반 새로이 감독으로 부임한 토미 도허티는 첼시는 유니폼을 다시 한 번 바꾸었는데, 그는 상 · 하의를 모두 파란색으로 통일하였고, 양말은 하얀색으로 변경하였다. 그것은 팀의 특징을 더 돋보이게 해주었고, 이 유니폼은 1964-65시즌에 첫 선을 보였다.[87] 첼시의 이러한 홈 유니폼 형식은 파란 양말을 착용한 1985년부터 1992년에 이르는 기간을 제외하곤 줄 곧 유지되었다. 단 상대가 하얀색 유니폼 하얀색 양말이 같은경우 파란색 양말을 착용한다.

첼시의 원정 유니폼은 대체로 노란색 또는 파란 줄무늬가 가미된 하얀색을 바탕으로 한다. 최근에는 검은색이나 진청색의 원정 유니폼을 착용하기도 한다.[88] 다른 팀들과 마찬가지로 첼시에도 다소 특이한 색상이나 디자인을 지닌 원정 유니폼들이 있었다. 1966년 FA컵 준결승전에서 첼시 선수들은 도허티의 지령에 따라 파란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가미된 유니폼을 착용하였다. 이는 인테르 밀란의 그것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89] 1970년대 중반에는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의 1950년대 유니폼에서 영감을 받은 빨간색 · 하얀색 · 초록색의 원정 유니폼을 착용하기도 하였다.[90] 또 다른 원정 유니폼으로는 옥색 줄무늬가 있던 1980년대의 유니폼과 빨간색과 하얀색이 대조된 1990년대 초반의 유니폼, 탕헤르 오렌지색과 흑회색 줄무늬가 추가된 1990년대 중반의 유니폼, 그리고 노란색 야광빛을 띤 2007-08시즌의 원정 유니폼 등이 있다.[88]

서포터

2006년 3월 11일, 토트넘 홋스퍼전에서의 첼시 팬들.
첼시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서포터를 가진 축구 클럽 중 하나이다.[91][92] 첼시는 잉글랜드 내에서 다섯째로 많은 서포터를 보유하고 있다.[93] 2014-15시즌에는 경기당 평균 41,546명의 관중이 들어왔는데, 이는 프리미어리그에서 7번째로 높은 규모이다.[8] 첼시의 전통적인 팬 기반은 그레이터런던내의 대장장이와 같은 노동자 계급과 부유한 지역인 배터시, 첼시와 켄징턴, 그리고 홈 컨트리(런던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뜻한다.)로부터 오는 사람들이다. 현재는 여기에 영국 전역과 세계 각지의 팬들이 더해졌다.[94]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첼시의 유니폼 레플리카 판매량은 연평균 91만여 벌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은 판매량이다.[95] 첼시의 공식 트위터 팔로워는 600만 명 이상이며, 이는 세계에서 5번째로 높은 수치이다.[96]

첼시의 서포터들은 다른 팀과 마찬가지로 그들만의 응원가를 가지고 있는데, "캐어프리"("Carefree", "로드 오브 댄스"("Lord of the Dance")를 개사함)나,[97][98] "텐 맨 웬트 투 모우"("Ten Men Went to Mow"), "위 올 팔로우 더 첼시"("We All Follow the Chelsea", "희망과 영광의 땅"을 개사함), "지가 자가"("Zigga Zagga") 등이 바로 그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일부 첼시 서포터가 훌리건이 되기도 하였는데, 첼시의 훌리건은 “첼시 헤드헌터스”(Chelsea Headhunters)로 불리며,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인터 시티 펌”(Inter City Firm)과 밀월의 “밀월 부시워커스”(Millwall Bushwackers)와 함께 난폭한 행동으로 악명이 높았다.[99] 1980년대 이러한 훌리건 집단의 난동은 켄 베이츠 회장의 전기 담장 설치 제안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런던시 의회는 이 제안을 기각하였다.[100] 1990년 이래로 군중들의 난동이 거의 사라졌는데, 이는 경찰의 엄격한 통제와 경기장 내의 CCTV 설치 그리고 전 관중석의 좌석화가 주된 요인으로 보인다.[101]

홈 오피스 (Home Office)의 통계에 따르면, 2009-10시즌에만 126명의 첼시 팬이 구속되었는데, 이는 잉글랜드에서 3번째로 높은 수치이다. 이 중 27명이 경기장 입장을 금지 당하였는데, 이것은 또한 잉글랜드에서 5번째로 높은 수치이기도 하다.[102]

경쟁의식과 더비 매치
첼시는 북런던의 두 클럽인 아스널 및 토트넘과 경쟁의식을 갖고 있다.[103][104]

1960년대와 1970년대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경기는 항상 열기와 논쟁이 많았는데, 특히 1970년 FA컵 결승이 그러했다.[105] 최근에는 리버풀과의 경쟁의식이 성장하였는데, 이는 컵 경기에서 첼시와 리버풀이 자주 상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06][107] 이에 비해 서런던 더비라 불리는 첼시의 지역 더비는 머지사이드 더비나 북런던 더비와 같이 큰 규모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첼시와 풀럼, 퀸즈 파크 레인저스는 첼시와 오랫동안 다른 디비전에 속해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108]

2004년, Planetfootball.com의 조사에 따르면 첼시 팬들이 자신들의 주된 라이벌로 생각하는 팀은 아스널과 토트넘 홋스퍼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순서대로) 같은 조사에 따르면, 아스널 · 풀럼 · 리즈 · QPR · 토트넘 · 웨스트 햄의 팬들은 첼시를 그들의 주요 라이벌 중 하나로 꼽았다.[109]

우승 기록
국내 대회
리그
풋볼 리그 1부/프리미어리그[리그 1]
● 우승 (6): 1954-55, 2004-05, 2005-06, 2009-10, 2014-15, 2016-17
● 준우승 (4): 2003-04, 2006-07, 2007-08, 2010-11
풋볼 리그 2부/EFL 챔피언십[리그 1]
● 우승 (2): 1983-84, 1988-89
● 준우승 (5): 1906-07, 1911-12, 1929-30, 1962-63, 1976-77

FA컵
● 우승 (8): 1969-70, 1996-97, 1999-2000, 2006-07, 2008-09, 2009-10, 2011-12, 2017-18
● 준우승 (8): 1914-15, 1966-67, 1993-94, 2001-02, 2016-17, 2019-20, 2020-21, 2021-22
EFL컵
● 우승 (5): 1964-65, 1997-98, 2004-05, 2006-07, 2014-15
● 준우승 (4): 1971-72, 2007-08, 2018-19, 2021-22
FA 커뮤니티 실드
● 우승 (4): 1955, 2000, 2005, 2009
● 2위 (9): 1970, 1997, 2006, 2007, 2010, 2012, 2015, 2017, 2018
풀 멤버스 컵 (현재 폐지)
● 우승 (2): 1986, 1990
국제 대회
유럽 대회
UEFA 챔피언스리그
● 우승 (2): 2011-12, 2020-21
● 준우승 (1): 2007-08
UEFA 유로파리그
● 우승 (2): 2012-13, 2018-19
UEFA 슈퍼컵
● 우승 (2): 1998, 2021
● 준우승 (3): 2012, 2013, 2019
UEFA컵 위너스컵
● 우승 (2): 1970-71, 1997-98
세계 대회
FIFA 클럽 월드컵
● 우승 (1): 2021
● 준우승 (1): 2012
기록과 통계
<nowiki /> 첼시 FC의 기록과 통계 문서에 이 부분의 추가 정보가 있습니다.

프랭크 램퍼드는 첼시 선수 중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선수이다.
첼시에서 경기 출전 횟수가 가장 많은 선수는 1961년에서 1980년까지 795경기를 뛴 론 해리스이다.[110] 이 기록은 최근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골키퍼 중 가장 많이 경기에 출전한 선수는 해리스와 같은 시대에 729경기에 출전한 피터 보네티이다(1959-1979년). 프랭크 램퍼드는 첼시 선수 중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가장 많이 출전한 선수이다.(첼시 선수 시절에만 101 경기)[111]

프랭크 램퍼드는 또한 역대 첼시 선수 중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선수이다.(648경기 211골, 2001-2014년)[111] 이는 바비 텀블링이 1959년에서 1970년까지 370경기에 출전하여 202골을 기록한 것을 뛰어넘은 것이다.[112]

오직 9명의 선수만이 첼시에서 100골 이상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은 조지 힐스던(1906-12년)을 비롯하여 조지 밀스(1929-39년), 로이 벤틀리(1948-56년), 지미 그리브스(1957-61년), 피터 오스굿(1964-74년 및 1978-79년), 케리 딕슨(1983-92년), 디디에 드로그바(2004-12년과 2014-15년), 그리고 앞서 말한 프랭크 램퍼드와 바비 텀블링이다. 이 중 지미 그리브스는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다.(43골, 1960-61시즌)[113]

첼시의 한 경기 최다 점수 차 승리는 13-0으로 1971 UEFA컵 위너스컵에서 UN 카에렝 97과 경기를 치렀으며, 1-2차전 총합으로는 21-0을 기록하였다.[114] 리그에서는 2010년 위건과 2012년 애스턴 빌라를 8-0으로 이긴 전적이 있다.[114] 최다 점수 차 패배는 1953년 울버햄프턴 원더러스과의 경기로 결과는 1-8이었다.[114]

공식 기록상 스탬퍼드 브리지의 최다 관중 수는 1935년 10월 12일에 열린 아스널과의 디비전 1 경기에서 기록한 82,905명이다.[115] 그러나 비공식 최다 관중 기록은 1945년에 열린 디나모 모스크바와의 경기로 10만여 명이 입장하였다. 이 경기의 공식 관중 수는 74,496명이지만, 불법 난입으로 인해 수 천 명 이상의 관중들이 난입했다.[115] 현재 스탬퍼드 브리지의 공식 수용인원은 41,663명이다.[115]

첼시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에 해당하는 기록을 일부 보유하고 있다. 한 시즌 리그 최소 실점(15골),[114] 최다 클린시트(25경기),[116] 연속 클린시트(10경기)[116][117]를 2004-05시즌에, 리그 개막부터 6경기 연속 클린시트를 2005-06시즌에 기록했다.[116] 또한 첼시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긴 홈경기 무패 행진을 기록하고 있다. 첼시는 2007년 8월 12일, 리버풀이 1978년부터 1980년 사이에 세웠던 홈 63경기 무패 행진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첼시의 홈경기 무패 행진은 86경기까지 이어졌으며,[114] 이 기록은 2008년 10월 26일 첼시가 리버풀에게 1-0으로 패하면서 무너졌다.

2018년 8월,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영입한 케파 아리사발라가의 이적료는 7,160만 파운드로 이는 구단 내 최고 영입 금액이며, 구단 내 최고 방출 금액은 파리 생제르망으로 이적한 다비드 루이스의 이적료로 5,000만 파운드이다.

1928년 8월 25일, 스완지 타운전에서 첼시 선수들은 잉글랜드 최초로 등번호를 새긴 셔츠를 착용하고 경기를 치렀다.[118] (같은 날 아스널 선수들도 셰필드 웬즈데이전에 숫자를 새긴 셔츠를 입었다.[118]) 첼시는 1957년 4월 19일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잉글랜드 클럽 중 최초로 비행기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경기를 치른 팀이다.[119] 또한 첼시는 1999년 12월 26일, 사우스햄턴과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잉글랜드나 아일랜드 출신의 선수가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출전선수 명단을 내보낸 적이 있다.[120]

2007년 5월 19일 그들은 신(新) 웸블리 경기장에서 최초로 FA컵을 우승하는 팀이 되었으며 구(舊) 웸블리 경기장에서 마지막으로 이긴 팀이기도 하다.[121]

2007-08시즌의 종료 이후, 첼시는 UEFA 클럽 랭킹에서 가장 순위가 높은 클럽이 되었다. 이 또한 21세기 이후 잉글랜드 클럽이 차지한 최초의 타이틀이기도 하다.[122] 2012년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이는 런던의 축구팀으로서는 최초의 대회 우승이다.[4][123] 또한 다음 시즌 UEFA 유로파리그에서의 우승으로 첼시는 UEFA가 주관하는 3개의 주요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거둔 4개의 구단 중 하나가 되었다.[6]

재정 상태와 소유권
년도 셔츠 제작사 셔츠 스폰서 셔츠 스폰서 (슬리브)
1975–1981 엄브로 없음 없음
1981–1983 르꼬끄 스포르티브
1983–1984 걸프 항공
1984–1986 없음
1986–1987 첼시 콜렉션
1987–1993 엄브로 코모도어
1993–1994 아미가
1994–1997 쿨스
1997–2001 오토글래스
2001–2005 에미레이트 항공
2005–2006 삼성 모바일
2006–2008 아디다스
2008–2015 삼성
2015–2017 요코하마 타이어
2017–2018 나이키 앨리언스 타이어
2018–2020 현대자동차
2020–2023 3

첼시의 엠블럼을 새긴 자우버 F1팀 차량.
첼시는 1905년 거스 미어스에 의해 창단되었다. 1912년 거스 미어스가 사망한 이후, 그의 후손들이 클럽을 소유했으며, 이는 켄 베이츠가 거스 미어스의 종손인 브라이언 미어스에게 단 1파운드의 금액으로 클럽의 소유권을 사들인 1982년까지 계속되었다. 베이츠는 1996년 3월 구단의 지배지분을 런던주식거래소의 대체투자시장(AIM)에 상장하였다.[124]

2003년 7월,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베이츠의 지분 29.5%를 포함한 첼시 빌리지 plc의 주식자본을 3천만 파운드에 매수하고, 그로부터 수 주 동안 나머지 12,000여 명의 주주로부터 35%의 지분을 사들였다. 로만이 첼시를 인수하는 데 들인 총 금액은 1억 4천만 파운드로, 인수 당시 매튜 하딩의 부동산 (21%), BSkyB (9.9%), 그리고 다수의 국제 신탁 자산이 병존하였다.[125] 구단 지분의 90%를 소유한 이후, 아브라모비치는 구단을 개인 소유화했고, 2003년 8월 22일 AIM에서 상장 폐지 하였다. 그는 곧이어 구단의 빚 8천만 파운드의 대부분을 지불하였다.[126]

그 이후, 아브라모비치는 회사명을 "첼시 FC plc"로 변경하였고, 첼시는 그가 소유한 포드스탐 주식회사의 자회사로 들어가게 되었다.[127] 2008년 이후 구단 측은 더 이상의 외채는 없다고 발표하였다.[128] 2012년 11월, 첼시는 140만 파운드의 이윤을 내며 로만의 인수이후 최초로 흑자를 냈다고 발표하였다.[129] 2014년 11월, 첼시는 1,840만 파운드의 순이익을 기록하며 로만의 인수 이후 가장 큰 흑자를 기록하였으며, 2012년 흑자 때의 10배가 넘는 순이익을 달성하였다.[130]

2022년 5월 7일, 첼시 구단은 토드 보엘리, 마크 월터, 한스요르그 위스가 함께 하는 클리어레이크 컨소시엄에 매각되었다.[131] 5월 22일, 영국 정부는 42.5억 파운드에 토트 보엘리가 이끄는 이 컨소시엄의 첼시 인수를 승인하였다.[132] 5월 30일, 최종 매각이 완료되며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19년 경영권은 종료되었다.[133]

스폰서
현재 첼시의 유니폼 제작은 나이키가 맡고 있다. 아디다스는 2006년을 시작으로 2023년까지 첼시에 유니폼을 공급하기로 되어있었다.[134] 그러나 첼시는 아디다스와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하였고 2017-18시즌부터는 나이키의 유니폼을 착용하고 있다.[135]

첼시의 첫 번째 셔츠 스폰서는 걸프 항공이었고, 1983-84시즌에 선보여졌다. 이후 첼시는 그랜지 팜스, 바이 린, 이탈리아의 스포츠 용품 회사인 시모드 등과 함께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였다. 1989년에는 유니폼 위에 컴퓨터 제조 회사인 코모도어 인터내셔널의 개인용 컴퓨터인 아미가를 새기기도 하였다. 이후 첼시의 스폰서는 1995년에서 1997년까지의 쿨스 맥주, 1997년에서 2001년까지의 오토글래스, 2001년에서 2005년까지의 에미레이트 항공, 2005년에서 2015년까지의 삼성이 있었다.[136] 2015년 2월, 첼시는 요코하마 타이어와 메인 셔츠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였고, 이 계약으로 첼시는 요코하마 타이어로부터 연간 4천만 파운드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며, 이는 5천만 파운드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후원하는 쉐보레에 이어 잉글랜드에서 2번째로 높은 금액이다.[137]

첼시는 가즈프롬, 현대, 델타 항공, 카라바오, EA 스포츠 등과 스폰서십을 체결 중이다.[138]

첼시와 대중문화
1930년 첼시는 초창기 축구 영화 중 하나인 《위대한 게임(The Great Game)》에 모습을 비췄다.[139] 한 때 첼시의 중앙 공격수였던 잭 콕이 출연하였으며,(영화가 개봉될 당시엔 밀월 FC의 소속이었다.) 스탬퍼드 브리지의 필드를 비롯하여 이사회실과 탈의실도 이 영화에 잠시 나왔다. 또한 앤드류 윌슨, 조지 밀스, 샘 밀링턴 등의 당대 첼시의 선수들이 게스트로 출현하기도 했다.[140] 한편, 첼시 헤드헌터스(Chelsea Headhunters)의 높은 악명 때문에 첼시는 《풋볼 팩토리(The Football Factory)》와 같은 훌리건 관련 영화에 등장하는 불명예를 안기도 하였다.[141] 첼시는 또한 인도 영화인 Jhoom Barabar Jhoom에 등장하기도 한다.[142] 한편, 1980년대의 TV 시리즈인 《수사관(Minder)》에서는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열린 첼시와 프레스턴 노스 엔드와의 실제 경기를 극 중의 한 장면으로 활용한 적이 있다.[143]

1950년대까지 첼시는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낮은 성적은 조지 로비 같은 희극인에게 좋은 소재 거리가 되곤 했다.[144] 심지어 희극 배우 노먼 롱의 1933년 작 노블티송인 "그 날이 오면 첼시는 우승으로 갈 것이다" ("On The Day That Chelsea Went and Won The Cup")에서 첼시는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는데, 이는 사실 첼시의 낮은 성적을 역설적으로 조롱한 것이다.[14]

"블루 이즈 더 컬러"("Blue Is the Colour")는 1972년 리그 컵 결승전 경기를 앞두고 선수단이 직접 녹음한 곡으로 첼시의 첫 번째 공식 응원가로 지정되었다. 이 곡은 UK 싱글 차트 5위에 오르기도 하였다.[145][146] 1997 FA컵 결승전 경기를 앞두고 가수 석스와 일부 첼시 선수들이 발표한 블루 데이("Blue Day")는 UK 차트에서 22위를 기록하였다.[146] 가수 브라이언 애덤스는 첼시를 위해 자신의 앨범인 "18 Til I Die"에 수록된 "위 아 거너 윈"("We're Gonna Win")이라는 곡을 헌정하기도 하였다.[145]

역대 첼시 올해의 선수 (1967-2023)
연도 수상자
1967 잉글랜드피터 보네티
1968 스코틀랜드찰리 쿠크
1969 잉글랜드데이비드 웹
1970 잉글랜드존 홀린스
1971 잉글랜드존 홀린스
1972 잉글랜드데이비드 웹
1973 잉글랜드피터 오스굿
1974 잉글랜드게리 로크
1975 스코틀랜드찰리 쿠크
1976 잉글랜드레이 윌킨스
1977 잉글랜드레이 윌킨스
1978 잉글랜드미키 드로이
1979 잉글랜드토미 랭글리
1980 잉글랜드클리브 워커
 
연도 수상자
1981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페타르 보로타
1982 잉글랜드마이크 필러리
1983 웨일스조이 존스
1984 스코틀랜드팻 네빈
1985 스코틀랜드데이비드 스피디
1986 웨일스에디 니에즈위키
1987 스코틀랜드팻 네빈
1988 잉글랜드토니 도리고
1989 잉글랜드그레이엄 로버츠
1990 네덜란드켄 몬쿠
1991 아일랜드앤디 타운젠드
1992 잉글랜드폴 앨리엇
1993 자메이카프랭크 싱클레어
1994 스코틀랜드스티브 클락
 
연도 수상자
1995 노르웨이에란드 욘센
1996 네덜란드루트 굴리트
1997 웨일스마크 휴즈
1998 잉글랜드데니스 와이즈
1999 이탈리아잔프랑코 졸라
2000 잉글랜드데니스 와이즈
2001 잉글랜드존 테리
2002 이탈리아카를로 쿠디치니
2003 이탈리아잔프랑코 졸라
2004 잉글랜드프랭크 램퍼드
2005 잉글랜드프랭크 램퍼드
2006 잉글랜드존 테리
2007 가나마이클 에시앙
2008 잉글랜드조 콜
 
연도 수상자
2009 잉글랜드프랭크 램퍼드
2010 코트디부아르디디에 드로그바
2011 체코페트르 체흐
2012 스페인후안 마타
2013 스페인후안 마타
2014 벨기에에덴 아자르
2015 벨기에에덴 아자르
2016 브라질윌리앙
2017 벨기에에덴 아자르
2018 프랑스은골로 캉테
2019 벨기에에덴 아자르
2020 크로아티아마테오 코바치치
2021 잉글랜드메이슨 마운트
2022 잉글랜드메이슨 마운트
코칭 스태프

직위 이름
감독 아르헨티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수석 코치 잉글랜드 앤서니 배리
코치 스코틀랜드 빌리 리드
스웨덴 비에른 함부르크
스페인 브루노 살토르
수석 골키퍼 코치 포르투갈 엔리케 일라리우
잉글랜드 벤 로버츠
골키퍼 코치 잉글랜드 제임스 러셀
체력 코치 잉글랜드 맷 버니
잉글랜드 윌 튤렛
메디컬 디렉터 스페인 파코 비오스카
임대 선수 코치 이탈리아 카를로 쿠디치니
잉글랜드 앤디 미어스
테크니컬 멘토 프랑스 클로드 마켈렐레
수석 유스 담당관 잉글랜드 닐 베스
U-18팀 감독 잉글랜드 에드 브랜드
U-18팀 코치 스코틀랜드 앤디 로스

https://ko.wikipedia.org/wiki/%EC%B2%BC%EC%8B%9C_FC 위키백과

토트넘 홋스퍼 FC(영어: Tottenham Hotspur Football Club, 토트넘 홋스퍼 축구단, 문화어: 토텐햄 호츠퍼)는 잉글랜드 북런던 토트넘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 축구 구단이다. 현재 프리미어리그에 속해있으며, 간단히 줄여서 스퍼스(spurs)라고 부른다. 현재 홈 경기장은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으로, 이전의 홈 경기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을 철거한 자리에 60,000석 규모로 건립되었으며 2019년 4월 개장하였다. 1882년에 창단한 토트넘은 1901년 FA컵에서 첫 트로피를 들어 올렸는데, 이는 잉글리시 풋볼 리그 창립 이후 유일하게 논리그구단이 우승한 기록으로 남았다. 1950-51시즌과 1960-61시즌에 풋볼 리그 1부에서 우승하였고, 1961년 FA컵과 리그에서 동시에 우승하면서 20세기에 잉글랜드 구단 처음으로 더블을 기록하였다. 이듬해에도 FA컵에서 우승했으며, 1963년 잉글랜드의 축구 구단 중 첫 번째로 UEFA 컵위너스컵을 들어 올렸다. 1970년대에 리그컵에서 두번 우승하였으며, 1972년 UEFA컵 초대 우승팀이 되었다. 1980년대에 FA컵에서 5번, FA 커뮤니티 실드와 UEFA컵에서 각각 2번씩 우승하였다. 이후 1990년대에 FA컵과 리그컵에서 우승하고, 2008년 리그컵에서 한 번 더 우승함으로써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모든 연대에서 메이저 대회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기록을 세웠다.

구단의 상징은 축구공 위에 서있는 수평아리(싸움닭)이고, 모토는 라틴어인"Audere est Facere"로 실천이 곧 도전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같은 런던 연고의 팀들과 오랜 기간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라이벌은 북런던 더비에서 맞대결을 펼치는 아스날 FC이다.

현재 감독은 엔제 포스테코글루이고, 주장은 손흥민, 부주장은 제임스 매디슨과 크리스티안 로메로이다.

역사
형성 및 초기
토트넘 홋스퍼 FC는 1882년 9월 5일 바비 버클이 이끄는 남학생 그룹에 의해 창단되었다. 그들은 홋스퍼 크리켓 클럽의 회원이었고 이 축구 클럽은 겨울 동안 스포츠를 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1년 후, 소년들은 클럽의 첫 회장과 회계원이 된 올 할로우즈 교회의 성경 수업 선생님인 존 립셔에게 도움을 구했다. 립셔는 클럽의 형성기 동안 소년들을 돕고 지원했으며, 재정비하고 클럽의 구내를 찾았다. 1884년 4월, 클럽은 북런던으로 잘못 온 다른 런던 클럽인 홋스퍼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 "토트넘 핫스퍼 FC"로 개명하였다.

처음에, 소년들은 그들끼리 게임을 했고 다른 지역 클럽들과 친선 경기를 했다. 첫 번째 기록은 1882년 9월 30일, 홋스퍼가 0-2로 패한 라디칼스라는 지역 팀을 상대로 한 경기였다. 1885년 10월 17일, 런던 어소시에이션 컵에 처음 참가하여 세인트 앨번스라는 회사의 팀과의 첫 경기에서 5-2로 승리하였다. 그 클럽의 경기는 지역 사회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홈 경기 관중이 증가했다. 1892년, 그들은 처음으로 단명한 남부 동맹이라는 리그에서 뛰었다.

1895년 12월 20일 팀은 프로로 전향했고 1896년 여름에 남부 리그 디비전 1에 가입했다. 1898년 3월 2일, 클럽은 토튼햄 핫스퍼 풋볼 앤 애슬레틱 컴퍼니라는 유한회사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랭크 브레텔은 스퍼스의 첫 감독이 되었고, 그는 1년 후 브레텔이 떠났을 때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한 존 카메론을 영입했다. 카메론은 1899-1900 시즌에 스퍼스가 첫 번째 트로피인 서던 리그 우승을 하는데 도움을 주면서 스퍼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듬해인 1901년, 스퍼스는 셰필드 유나이티드를 결승전에서 첫경기는 2-2 무승부로, 재경기에서 3-1로 이기며 그들은 1888년 풋볼 리그가 결성된 이후 비리그 클럽으로서는 유일하게 FA컵을 우승한 팀이 되었다.

엠블럼
1910년 FA컵 우승 이후로 토트넘 홋스퍼의 엠블럼은 싸움닭이 그려진 문장이었다. 토트넘 홋스퍼는 그의 싸움닭 발목에 박차를 달곤 했는데, 이것이 클럽 문장에 반영된 것이다. 토트넘의 상징인 닭은 일명 게임콕(싸움닭) 또는 코크럴(싸우기를 좋아하는 젊은이)이라 불리는 닭이다. 1909년 이전 토트넘 선수인 윌리엄 제임스 스콧은 축구공 위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박차를 단 어린 수탉을 형상화한 청동 뱃지를 만들었는데, 그 후부터, 수탉과 축구공이 그려진 문양이 클럽의 주요한 상징이 되었다. 초기에는 방패안에 닭을 그려 넣었으며 1966년부터 현재까지 축구공 위에 서있는 닭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 엠블럼의 의미는 싸움닭처럼 공격축구를 하자는 뜻이다.

라이벌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북런던 더비입니다.
Duration: 36초.0:36
2010년 4월에 열린 아스널과 북런던 더비 경기를 치르는 토트넘. 토트넘 서포터들이 2001년에 토트넘을 떠나 아스널에 입단한 솔 캠벨에게 조롱의 응원가를 부르고 있다
토트넘 서포터들은 주로 런던 내에 있는 팀들과 라이벌 관계를 갖고 있다. 이 팀들 중에 가장 치열한 관계는 북런던의 경쟁 팀 아스널이다. 경쟁 관계는 아스널이 플럼스테드의 매너 그라운드에서 하이버리의 아스널 스타디움으로 옮겨온 1913년부터 시작되었고, 이 관계는 토트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퍼스트 디비전 무대를 아스널이 차지함으로써 예상치 못하게 퍼스트 디비전으로 승격한 1919년에 한층 강화되었다.[1] 토트넘 서포터들은 이웃한 런던 연고 팀들인 첼시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도 대단한 경쟁 구도를 지녔다.[2]

팀의 마스코트
토트넘의 전통적인 마스코트를 흔히 처피 코크럴(Chirpy the cockerel)라고 부르는데, 어린 수평아리 모양의 새이다. 취미는 축구, 요가 등이 있다. 어린아이들은 물론 전세계에 있는 모든 토트넘 팬들이 좋아하는 마스코트이며 토트넘 엠블럼에도 들어가 있다.

홈구장
토트넘 습지 (Tottenham Marshes)
토트넘은 그들의 첫 공식 경기를 토트넘 습지(Tottenham Marshes)에서 치렀고 6년 동안 이곳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정기적으로 늘어나는 관중을 수용하고 더 좋은 환경의 경기장을 사용하기 위해 새로운 경기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노섬벌랜드 공원 (Northumberland Park)
1888년 클럽은 좀더 많은 인원을 수용하고자 토트넘 습지에서 노섬벌랜드 공원으로 홈구장을 옮겼다. 클럽은 이곳에서 울위치 아스날을 상대로한 경기에서 14,000명의 폭발적인 관중수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토트넘은 훨씬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899년 4월 현재의 화이트 하트 레인이 있는 곳으로 홈구장을 이전했다.

화이트 하트 레인 (White Hart Lane)

토트넘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
화이트 하트 레인(White Hart Lane)은 1899년 9월 4일 개장한 이래 토트넘의 홈구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초기에는 길핀 파크(Gilpin Park)라고 불리었으나 점차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1905년부터 토트넘은 부지를 완전히 사들여 영구적으로 홈구장을 소유하게 되었다. 토트넘 최고의 레전드로 일컬어지는 빌 니콜슨의 이름을 딴 거리인 빌 니콜슨 웨이(Bill Nicholson way)에 위치해 있으며 총 수용인원은 한 때 7만여 명에 육박하였으나 축구장 전 지역을 좌석으로 바꾼 이후에는 36,284명으로 줄었다.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Tottenham Hotspur Stadium)
2007년 클럽은 홈구장의 수용인원을 늘리기 위한 경기장 신축안을 공개했다. 신축 경기장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의 수용인원은 62,062명이며, 기존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 옆에 건설되었다.

기존 계획과는 달리 2015년 7월 8일 신축 구장의 인원수를 61,000명으로 확대 하였고 발표하였다. 2017년 5월 6일 공사중인 신축 구장의 최대 수용인원을  61,559명으로 한 번 더 확대 하였다. 2018년 7월 27일 신축 구장의 명칭이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로 확정되었다.

역대 감독
1898 잉글랜드 호텔
1899 스코틀랜드 존 런
1907 잉글랜드 프레드 커크햄
1912 스코틀랜드 피터 매퀼리엄
1927 잉글랜드 빌리 민터
1930 잉글랜드 퍼시 스미스
1935 잉글랜드 월리 하딘지 (감독대행)
1935 잉글랜드 잭 트레사던
1938 스코틀랜드 피터 매퀼리엄
1942 잉글랜드 아더 터너
1946 잉글랜드 조 흄
1949 잉글랜드 아더 로우
1955 잉글랜드 지미 앤더슨
1958 잉글랜드 빌 니콜슨
1974 북아일랜드 테리 닐
1976 잉글랜드 키스 버킨쇼
1984 잉글랜드 피터 쉬리브스
1987 잉글랜드 데이비드 플릿
1987 잉글랜드 더글라스 리버모어와 잉글랜드 트레버 하틀리 (감독대행)
1987 아일랜드 테리 베너블스
1991 잉글랜드 피터 쉬리브스
1992 잉글랜드 더글라스 리버모어와 잉글랜드 레이 클레멘스

1993 아르헨티나 오스발도 아르딜레스
1994 잉글랜드 스티브 페리맨 (감독대행)
1994 잉글랜드 게리 프란시스
1997 아일랜드 크리스 휴턴 (감독대행)
1997 스위스 크리스티안 그로스
1998 잉글랜드 데이비드 플릿 (감독대행)
1998 스코틀랜드 조지 그레이엄
2001 잉글랜드 데이비드 플릿 (감독대행)
2001 잉글랜드 글렌 호들
2003 프랑스 자크 상티니
2004 네덜란드 마르틴 욜
2007 잉글랜드 클라이브 알렌 (감독대행)
2007 스페인 후안데 라모스
2008-2012 잉글랜드 해리 레드냅
2012-2013 포르투갈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2013 잉글랜드 팀 셔우드
2014-2019 아르헨티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2019-2021 포르투갈 조세 모리뉴
2021 잉글랜드 라이언 메이슨 (감독대행)
2021 포르투갈 누누 이스피리투 산투
2022-2023 이탈리아 안토니오 콘테
2023 이탈리아 크리스티안 스텔리니 (감독대행)
2023 잉글랜드 라이언 메이슨 (감독대행)
2023- 오스트레일리아 엔제 포스테코글루

팀을 사상 첫 UEFA 챔피언스리그로 진출시켰던 해리 레드냅 전 감독.
역대 순위
리그명 시즌 최종순위 경기수 승 무 패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비고
프리미어리그 1992-93 8 42 16 11 15 60 66 -6 59
1993-94 15 42 11 12 19 54 59 -5 45
1994-95 7 42 16 14 12 66 58 +8 62
1995-96 8 38 16 13 9 50 38 +12 61
1996-97 10 38 13 7 18 44 51 -7 46
1997-98 14 38 11 11 16 44 56 -12 44
1998-99 11 38 11 14 13 47 50 -3 47 풋볼 리그 컵 우승,
UEFA 컵 1회전 진출

1999-2000 10 38 15 8 15 57 49 +8 53
2000-01 12 38 13 10 15 47 54 -7 49
2001-02 9 38 14 8 16 49 53 -4 50
2002-03 10 38 14 8 16 51 62 -11 50
2003-04 14 38 13 6 19 47 57 -10 45
2004-05 9 38 25 8 5 83 27 +56 83 프리미어리그 우승
2005-06 5 38 18 11 9 53 38 +15 65 UEFA컵 1회전 진출
2006-07 5 38 17 9 12 57 54 +3 60 UEFA컵 1회전 진출
2007-08 11 38 11 13 14 66 61 +5 46 UEFA컵 1회전 진출,
풋볼 리그 컵 우승

2008-09 8 38 14 9 15 45 45 0 51
2009-10 4 38 21 7 10 67 41 +26 70 UEFA 챔피언스리그 플래이오프 진출
2010-11 5 38 16 14 8 55 46 +9 62 UEFA 유로파리그 플래이오프 진출
2011-12 4 38 20 9 9 66 41 +25 69 UEFA 유로파리그 진출
2012-13 5 38 21 9 8 66 46 +20 69 UEFA 유로파리그 플래이오프 진출
2013-14 6 38 21 6 11 55 51 +4 69 UEFA 유로파리그 플래이오프 진출
2014-15 5 38 19 7 12 58 53 +5 64 UEFA 유로파리그 진출
2015-16 3 38 19 13 6 69 35 +34 70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
2016-17 2 38 26 8 4 86 26 +60 86 프리미어리그 준우승,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

2017-18 3 38 23 8 7 74 36 +38 77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
2018-19 4 38 23 2 13 67 39 +28 71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

2019-20 6 38 16 11 11 61 47 +14 59 UEFA 유로파리그 2차예선 진출
2020-21 7 38 18 8 12 68 45 +23 62 카라바오 컵 준우승,
UEFA 유로파컨퍼런스리그 플레이오프 진출

2021-22 4 38 22 5 11 69 40 +29 71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
2022-23 8 38 18 6 14 70 63 +7 60
역대 시즌
토트넘 훗스퍼 FC/2022-23 시즌/리그
토트넘 훗스퍼 FC/2023-24 시즌/리그
우승 기록
국내 대회
리그
풋볼 리그 1부/프리미어리그[리그 1]
● 우승 (2): 1950-51, 1960-61
● 준우승 (5): 1921-22, 1951-52, 1956-57, 1962-63, 2016-17
풋볼 리그 2부/EFL 챔피언십[리그 1]
● 우승 (2): 1919-20, 1949-50
● 준우승 (2): 1908-09, 1932-33
서던 풋볼 리그
● 우승 (1): 1899-1900
웨스턴 풋볼 리그
● 우승 (1): 1903-04

FA컵
● 우승 (8): 1901, 1921, 1961, 1962, 1967, 1981, 1982, 1991
● 준우승 (1): 1987
EFL컵
● 우승 (4): 1970-71, 1972-73, 1998-99, 2007-08
● 준우승 (5): 1981-82, 2001-02, 2008-09, 2014-15, 2020-21
FA 커뮤니티 실드
● 우승 (8): 1920-21, 1951-52, 1961-62, 1962-63, 1967-68*, 1981-82*, 1991-92*
● 준우승 (1): 1919-20, 1981-82
국제 대회
유럽 대회
UEFA 챔피언스리그
● 준우승 (1): 2018-19
UEFA 유로파리그
● 우승 (2): 1971-72, 1983-84
● 준우승 (1): 1973-74
UEFA 컵위너스컵
● 우승 (1): 1962-63
선수
현재 선수 명단
2023년 9월 1일 기준[3]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 GK 위고 요리스
4 MF 잉글랜드 올리버 스킵
5 MF 피에르에밀 호이비에르
7 FW 손흥민 (주장)
8 MF 말리 이브 비수마
9 FW 브라질 히샤를리송
10 MF 잉글랜드 제임스 매디슨 (부주장)
11 FW 스페인 브리안 힐
12 DF 브라질 이메르송 로얄
13 GK 굴리엘모 비카리오
14 MF 크로아티아 이반 페리시치
15 DF 잉글랜드 에릭 다이어
17 DF 크리스티안 로메로 (부주장)
18 MF 조바니 로 셀소
19 DF 잉글랜드 라이언 세시니온
20 GK 잉글랜드 프레이저 포스터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21 MF 데얀 쿨루셰프스키
22 FW 웨일스 브레넌 존슨
23 DF 스페인 페드로 포로
27 FW 이스라엘 마노르 솔로몬
29 MF 세네갈 파페 마타르 사르
30 MF 우루과이 로드리고 벤탕쿠르
33 DF 웨일스 벤 데이비스
35 DF 잉글랜드 애슐리 필립스
36 FW 알레호 벨리스
37 DF 미키 판 더 펜
38 DF 데스티니 우도기
40 GK 잉글랜드 브랜던 오스틴
41 GK 잉글랜드 알피 화이트먼
42 MF 잉글랜드 하비 화이트
 
임대 선수 명단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3 DF 스페인 세르히오 레길론 (2024년 6월 30일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임대)
25 DF 잉글랜드 자펫 탕강가 (2024년 6월 30일까지 FC 아우크스부르크로 임대)
28 MF 탕기 은돔벨레 (2024년 6월 30일까지 갈라타사라이 로 임대)
24 DF 잉글랜드 제드 스펜스 (2024년 6월 30일까지 리즈 유나이티드 로 임대)
 
기록
과거 토트넘에서 뛰었던 선수
<nowiki /> 분류:토트넘 홋스퍼 FC의 축구 선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토트넘 출신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진한 글씨는 현재 토트넘 홋스퍼 FC에서 뛰는 선수들이다.

빌 니콜슨 (1938-1954)
테드 디치번 (1939-1958)
앨프 램지 (1949-1955)
바비 스미스 (1955-1964)
모리스 노만 (1955-1966)
지미 그리브스 (1961-1970)
앨런 길진 (1964-1972)
시릴 놀스 (1964-1975)
마틴 피터스 (1970-1975)
글렌 호들 (1975-1987)
레이 클레멘스 (1981-1988)
게리 스티븐스 (1983-1990)
크리스 워들 (1985-1989)
스티브 호지 (1986-1988)
테리 펜위크 (1987-1993)
폴 개스코인 (1988-1992)
게리 리네커 (1989-1992)
닉 밤비 (1992-1995)
테디 셰링엄 (1992-1997, 2001-2003)
솔 캠벨 (1992-2001)
대런 앤더튼 (1992-2004)
앤디 신턴 (1996-1999)
레스 퍼디낸드 (1997-2003)
레들리 킹 (1999-2012)
제이미 레드냅 (2002-2005)
마이클 브라운 (2004-2006)
폴 로빈슨 (2004-2008)
저메인 디포 (2004-2008, 2009-2014)
저메인 지너스 (2005-2013)
마이클 도슨 (2005-2014)
에런 레넌 (2005-2015)
대니 로즈 (2007-2021)
피터 크라우치 (2009-2011)
카일 워커 (2009-2017)
스콧 파커 (2011-2013)
해리 케인 (2009-2023)
에릭 다이어 (2014- )
키런 트리피어 (2015-2019)
델레 알리 (2015-2022)
조 하트 (2020-2021)
프레이저 포스터 (2022- )
제임스 매디슨 (2023- )
역대 올해의 선수
1987 잉글랜드 게리 매벗
1988 잉글랜드 크리스 워들
1989 노르웨이 에릭 토르츠베트
1990 잉글랜드 폴 개스코인
1991 잉글랜드 폴 앨런
1992 잉글랜드 게리 리네커
1993 잉글랜드 대런 앤더튼
1994 독일 위르겐 클린스만
1995 잉글랜드 테디 셰링엄
 
1996 잉글랜드 솔 캠벨
1997 잉글랜드 솔 캠벨
1998 프랑스 다비드 지놀라
1999 아일랜드 스티븐 카
2000 아일랜드 스티븐 카
2001 스코틀랜드 닐 설리반
2002 웨일스 사이먼 데이비스
2003 아일랜드 로비 킨
2004 잉글랜드 저메인 디포
 
2005-06 아일랜드 로비 킨
2006-07 불가리아 디미터르 베르바토프
2007-08 아일랜드 로비 킨
2008-09 잉글랜드 에런 레넌
2009-10 잉글랜드 마이클 도슨
2010-11 크로아티아 루카 모드리치
2011-12 잉글랜드 스콧 파커
2012-13 웨일스 가레스 베일
2013-14 덴마크 크리스티안 에릭센
 
2014-15 잉글랜드 해리 케인
2015-16 벨기에 토비 알데르베이럴트
2016-17 덴마크 크리스티안 에릭센
2017-18 벨기에 얀 베르통언
2018-19 대한민국 손흥민
2019-20 대한민국 손흥민
2020-21 잉글랜드 해리 케인
2021-22 대한민국 손흥민
UEFA 순위
클럽 계수
2022년 5월 16일 기준[4]
순위 팀 계수
14 잉글랜드 토트넘 홋스퍼 83.000
15 네덜란드 AFC 아약스 82.500
16 포르투갈 FC 포르투 80.000
17 잉글랜드 아스널 80.000
18 스페인 비야레알 CF 78.000
19 독일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78.000
20 프랑스 올랭피크 리옹 75.000

https://ko.wikipedia.org/wiki/%ED%86%A0%ED%8A%B8%EB%84%98_%ED%99%8B%EC%8A%A4%ED%8D%BC_FC 위키백과

아스널 FC[1][2](영어: Arsenal Football Club→아스널 축구단)는 런던 홀로웨이의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홈구장으로 하는 잉글랜드의 축구 클럽이다. 현재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에 속해 있다.

현재 감독은 미켈 아르테타이며 주장은 마르틴 외데고르이고 부주장은 제주스이다.

아스널 FC(이하 아스널)는 FA컵에서 14번의 우승으로 잉글랜드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지고있다.

아스널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70-71 시즌에 리그와 FA컵에서 우승하면서 20세기에 더블을 기록한 두 번째 팀이 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두 번의 리그와 FA컵 우승 더블, 한 번의 컵 더블, 그리고 프리미어리그 최초의 무패 우승을 기록하였다. 또한 2005-06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해, 런던 연고 축구단으로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한 첫 번째 팀이 되기도 하였다.

아스널의 홈 유니폼 색깔은 전통적으로 레드 앤 화이트(Red & White)였지만 이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점차 변해 갔다. 연고지도 클럽 창단시에는 켄트주 울위치였으나[3] 1913년 북런던의 하이버리 아스널 스타디움으로 옮겼다.[4] 2006년엔 다시 하이버리와 가까운 홀로웨이의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옮겼다.

아스널은 광대한 팬층을 보유하고 있으며, 몇몇 팀들과는 오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중에서도 토트넘 홋스퍼 FC와 강한 라이벌 관계이며 팬들은 이들간의 경기를 북런던 더비라고 부르고 있다. 역대 승리수는 아스날이 17경기 더 많지만 아스날은 2016년 이후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 경험이 없는 반면 토트넘은 동시기 19-20 시즌을 제외하고 2020년까지 전부 챔피언스리그에 진출, 18-19 시즌에는 준우승을 기록하는 등 토트넘에게 밀리고 있다. 또한 가장 최근 시즌인 2019-20 시즌에는 8위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했고 2020-21 시즌에는 11차전까지 치른 현재 14위라는 하위권으로 쳐져있다. 그리고 북런던더비에서 토트넘에게 2-0으로 패배하고 15위로 떨어져 강등권에 근접한 순위로 추락하였다. 21-22 시즌 아스날은 74년만에 승격한 브렌트포드에게 2:0으로 패하며 프리미어리그 1라운드를 치른 현재 리그 17위로 또 한번 위기이다. 또한 2라운드에서 첼시에 0:2, 3라운드에서 0:5로 패하면서 골득실 -9로 20위 최악의 시즌으로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 2022/2023 시즌에는 산뜻한 출발에 성공했다. 팰리스 레스터 본머스를 차례로 잡아내면서 개막 후 3연승을 달리고 있다. 이번 시즌 이적시장에서 영입한 맨시티 듀오 가브리엘 제수스와 올렉산드르 진첸코가 팀에 잘 녹아들어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이 달성한 위업은 영국 축구 문화에서 정기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팀의 애칭에는 거너스(Gunners)라고 불린다.

역사
아스널 풋볼 클럽의 창단, 북런던으로의 이전과 토트넘과의 악연
아스널 풋볼 클럽은 1886년에 다이알 스퀘어(Dial Square)라는 이름으로 창단된 것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런던 남동부에 있는 울위치의 왕립 무기고(Royal Arsenal, 로열 아스널)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이 축구 클럽은 1891년에 프로 구단으로 독립하였으며, 1893년 울위치 아스널(Woolwich Arsenal)로 이름을 바꾸고 풋볼 리그(Football League)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울위치 아스널은 그들의 연고지인 울위치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관중들이 다른 구단들보다 비교적 적었고, 이는 결국 구단이 재정적 문제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910년, 헨리 노리스가 구단을 인수할 때는 파산이 유력해 보였었지만[5] 노리스는 연고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고. 1913년 2부리그로 강등된 뒤 연고지를 북런던에 있는 하이버리의 아스널 스타디움으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듬해 구단 이름에서 울위치를 빼버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아스널 FC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6]

아스널은 1919년, 2부 리그에서 5위를 차지해 승격에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부 리그 팀 참가를 20개 팀에서 22개 팀으로 늘리는 과정에서 원래 1부 리그 19위로 2부 리그로 강등 예정이었던 첼시는 남게 되었고 2부 리그 1위와 2위가 1부 리그로 승격 되고 3위 반즐리나 4위 울버햄튼 중 한 팀이 승격할 예정이었으나, 아스널의 구단주 노리스는 아스널이 처음으로 풋볼 리그에 가입한 남부 클럽임을 강조해 풋볼 리그 역사에 기여한 점을 들어 풋볼 리그측을 설득하였고 풋볼 리그측은 이에 동의해 투표 방식으로 1부 리그 최하위 팀과 아스널 중 한 팀을 1부리그에 승격시키기로 결정을 한다. 결국 아스널이 선거에서 승리해 아스널이 1부리그로 승격되었다.

이때 아스널에게 패해 2부 리그로 강등된 그 1부 리그 최하위 팀은 바로 이웃의 토트넘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7][8] 이 행운의 사건 이후 아스널은 현재까지 단 한 번도 2부리그로 강등되지 않는 기록을 이어나가게 된다.

1930년대의 잉글랜드 축구 지배
1925년, 허버트 채프먼이 아스널의 감독이 된다. 채프먼은 이미 허더스필드 타운을 이끌고 1923-24, 24-25 두 시즌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제패한 바 있었고, 그는 아스널의 첫 번째 성공시대를 가져다 준 감독이기도 하다. 그의 혁신적인 전술과 훈련은 이적시장에서 데려온 알렉스 제임스와 클리프 바스틴 등과 함께 1930년대 잉글랜드 축구 지배 시대를 건설하게 된다.[9] 채프먼의 지도 아래 아스널은 1930년, 첫 FA컵 우승과 1930-31, 1931-32 시즌 리그 연속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거기에 채프먼은 1932년, 아스널 스타디움 근처에 있는 런던 지하철역인 '길레스피 로드역'을 '아스널 지하철 역'으로 바꾸는 데에 배후에 있었다고도 전해졌다.[10]

채프먼은 1934년 초,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고 남은 시즌 동안은 아스널의 코치이자 2군 감독이었던 조 쇼가 임시 감독으로 이끌어 간다. 명장 채프먼 감독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스널은 1933-34 시즌, 3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어 조지 앨리슨이 정식 감독으로서 아스널을 이끌게 되었고 부임 첫 시즌 만에 4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그 다음 시즌에는 두 번째 FA컵 우승, 37-38시즌 5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우승을 마지막으로 1930년대 말기에 아스널의 중흥기를 이끌던 주요 선수들의 은퇴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잉글랜드의 모든 축구 경기가 취소되어 아스널 FC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평범한 팀으로의 전락
전쟁이 끝난 뒤, 앨리슨의 후임인 탐 휘태커는 아스널에 두 번째 성공시대를 가져다 주게 되었다. 휘태커 감독의 지도 하 아스날 FC는 1947-48, 1952-53 시즌 두 번의 리그 우승을 또 차지하였고, 1949-50 시즌에는 3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 후 재정난에 시달려 1930년대 선수들과 같은 고급 선수들을 끌어오지 못했고, 결국 아스널은 5, 60년대 대부분을 트로피 없이 보낸 평범한 팀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심지어 1962년부터 66년까지 감독을 맡았던 전(前) 잉글랜드 대표팀 주장 출신인 빌리 라이트도 감독으로서 아무런 성공도 거두지 못하였다.

뜻밖의 인물의 성공과 준우승 팀
빌리 라이트 감독이 물러난 1966년, 당시 아스널의 물리 치료사인 버티 미가 뜻밖의 감독이 되면서 아스널이 다시 트로피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두번의 리그 컵 결승에서 준우승에 그친 뒤, 아스널은 1969-70 시즌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이라는 유럽 대회에서 우승하게 된다. 이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우승은 아스널의 첫 유럽 대회 우승이었다.[11] 이후 1970-71 시즌, FA컵과 리그 우승 더블을 일궈내게 되었다.

하지만 아스널이 그 시대에 최강 팀이라 하기엔 무리였던 것이 1970-71 시즌 후에는 준우승 팀이라 불릴 정도로 준우승이 많았다. 아스널은 1972-73 시즌 리그 2위에 머물렀고, 1971-72, 1977-78, 1979-80 시즌 세 번의 FA컵 결승에서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다. 1979-80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 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승부차기 끝에 준우승에 머물렀다. 1978-79 시즌에만 경기 종료 직전 골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고 5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 경기는 명승부로 널리 알려져 있다.[12]

조지 그레이엄의 성공과 비리
그 뒤로는 별달리 성적이 없다가 1986년, 조지 그레이엄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제3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그레이엄 감독 첫 시즌인 1986-87 시즌에 아스널은 처음으로 리그 컵 우승을 차지한다. 1988-89 시즌에는 막판 극적인 골로 리버풀을 제치고 18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90-91 시즌, 그레이엄의 아스널은 단 1패만 기록하고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1992-93 시즌에는 FA컵과 리그 컵을 우승하여 컵 더블을 기록하였고, 이듬해에는 아스널이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차지해 두 번째 유럽 대회 우승을 기록하였다. 그레이엄의 평판은 90년대초 노르웨이의 한 축구 에이전트인 르네 하욱이 자신의 소속 선수인 존 젠슨과 팔 라이더센을 아스널로 이적시키는 과정에서 그레이엄 감독이 뇌물을 받았다고 폭로하여 더럽혀지게 되었고,[13][14] 결국 1995년 그레이엄 감독은 해고 당하게 되며 1년간 감독직 자격을 박탈 당하게 된다. 그의 후임으로는 브루스 리오치가 오르게 되지만 한 시즌 만에 구단 운영진들과의 상호 합의하에 물러나게 된다.[15]

아르센 벵거의 시대

무패 우승 기록후 아스널 선수들과 팬들이 오픈 탑 버스를 타고 행진하는 모습

2006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아스널 선수들(왼쪽 노란 상의)과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정렬하고 있다.
브루스 리오치가 물러난 1996년, 훗날 아스널의 황금기를 이끌 구세주가 나타나게 되는데 그는 바로 프랑스의 아르센 벵거였다. 그는 아스널의 첫 번째 비영어권 감독이었다. 벵거 감독은 팀에 새로운 훈련 통치 및 몇몇 외국 용병 선수들과 잉글랜드의 재능있는 선수들을 잘 조합시킨 새로운 전술을 가져다 주었다. 아스널은 1997-1998 시즌,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으로 더블을 차지하였고, 그와 더불어 99-2000 시즌에는 팀 창단 후 처음으로 UEFA컵 결승에 진출하였지만 아쉽게도 승부차기 끝에 갈라타사라이 SK에게 패해 우승이 좌절되었다.

하지만 2001-02 시즌, 또다시 리그와 FA컵 더블을 차지하였다. 2002-03 시즌에는 9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듬해인 2003-04 시즌에는 프리미어리그 사상 첫 무패 우승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그동안 잉글랜드 1부리그 역사상 딱 한 번밖에 없었고 1889년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이후 115년 만에 1부리그에서 나온 대기록 이었다. 이때의 무패 우승을 가리켜 "더 인빈서블"(The Invincible)이라 부르기도 한다.[16] 이때 49경기 리그 연속 무패 행진도 기록하였는데 이는 영국 축구 최장기 무패 기록으로 남아 있다.[17]

2004-05 시즌에는 다시 FA컵 우승을 차지해 통산 10번째 FA컵 우승을 이뤄냈다. 아스널은 그동안 유럽 대회 우승과는 인연이 별로 없는 팀이었는데, 마침내 2005-06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해 창단 후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노리게 된다. 당시 아스널의 챔피언스리그 결승 첫 진출은 런던을 연고지로 하고 있는 축구 팀들의 역사로써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만큼 런던의 명문클럽 중 하나인 아스널이 자국에서는 우승을 많이 차지했었지만 그에 비해 유럽 대회와는 거리가 멀었던 셈이었다. 그러나 그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에게 패해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도 좌절되고 만다.[18] 벵거 지도 하의 아스널 FC는 처음 11 시즌 중에서 무려 여덞 시즌을 1, 2위를 벗어난 성적은 거두지 않았다.[19] 아스널은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리그를 우승한 여섯 팀 중 한 팀이며, 아스널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블랙번 로버스,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 FC 그리고 레스터 시티 FC이다. 아스널은 리그 우승을 차지할 때마다 다음 시즌 연속 우승에는 실패하고 있다.[20]

2006년 아스널은 93년간 홈 경기장으로 썼던 하이버리의 아스널 스타디움에서 바로 근처인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홈 경기장을 옮기게 된다. 아스널이 현재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올린 트로피가 2004-05 시즌 FA컵을 마지막으로 현재 8년째 무관에 그치고 있으며, 2012-13 시즌에는 4위로 리그를 마감했다. 안드레이 아르샤빈을 2009년에 1500만 파운드로 영입하면서 클럽 레코드를 기록했지만, 2013-14 시즌을 시작하고 2013년 8월 31일에 메수트 외질을 4000만 파운드로 영입하면서 클럽 레코드를 달성하였다. 반면, 이로 인해 아르센 벵거의 유명한 철학인 "다른 팀들은 슈퍼스타를 사지만, 우리는 슈퍼스타를 만든다."라는 말이 깨지게 된 것을 아쉬워하는 팬들도 있다. 아스널은 2013년 12월 말까지는 1위였으나 2014년에 들어서면서 성적이 떨어져 4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FA컵에서는 2014년 5월 18일 헐 시티와의 결승전에서 접전 끝에 이겨 9년 만에 우승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즌 맨체스터 시티 FC와의 FA 커뮤니티 실드 경기에서 3-0 승리를 거두고 10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였다.[21] 16/17 시즌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1차전에서 5:1 2차전에서도 5:1 로 총 합산 10:2 로 16강에서 떨어지면서 아쉬운 시즌을 보냈다.

2017-18 시즌 종료를 끝으로 22년 간 팀을 이끌어 온 아르센 벵거 감독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사임하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새로운 감독과 새 시작
2018-19 시즌부터 우나이 에메리가 벵거 감독의 뒤를 이어 아스널의 새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018년 6월 5일 유벤투스의 베테랑 수비수 슈테판 리히트슈타이너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하며 명가재건의 시작을 알렸다.

그 후 삼프도리아의 신예 중앙 미드필더 루카스 토레이라와 바이어 레버쿠젠의 골키퍼 베른트 레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수비수 소크라티스 파파스타토풀로스를 영입하여 그동안 팬들의 답답함을 해소하였다.

2018-19 시즌 리그에서는 5위를 기록했고,유로파리그는 준우승을 달성했다.

유니폼
아스널 역사에서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홈 유니폼은 대부분 흰 소매가 어우러진 밝은 적색 상의와 흰색 하의이다. 적색 계열의 유니폼은 1886년, 아스널의 창단 이름인 다이얼 스퀘어가 창단 될 당시 노팅엄 포레스트의 자선 기부에 의해 선택 되었다. 전 노팅엄 포레스트 선수이기도 했었던 프레드 베어즐리와 모리스 베이츠가 울위치로 일하러 이사를 오게 되어 다이얼 스퀘어의 창단 멤버가 되었는데 처음 창단 되었을 때는 유니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두 선수들이 고향에(이 두 선수의 고향이 바로 노팅엄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유니폼과 공을 받았다고 한다.[22] 유니폼은 암적색 상의와 흰색 하의, 그리고 파란 양말이었다.[23]

1933년, 허버트 채프먼은 아스널 선수들이 좀 더 눈에 띄는 유니폼을 입길 원했고, 결국 기존의 유니폼에 흰색 소매를 더하고 상의도 암적색에서 밝은 적색으로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흰색 소매란 것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고, 두 가지 영감을 받았었다고 한다. 하나는 관중석에 있는 서포터들이 흰색 상의 위에 빨간색 민소매 스웨터를 입었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채프먼의 골프 동료인 만화가 탐 웹스터와 함께 골프를 쳤을 때 웹스터가 그와 유사한 옷을 입었던 것에 영감을 받았던 것이었다고 한다.[24] 어느 쪽의 이야기가 진실이든 아니든 아스널은 이후 딱 두 시즌만 올 빨간색 상의 유니폼을 입고 나머지 시즌에는 이 빨간색과 흰색이 조합된 상의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그 두 시즌 중 첫 번째 시즌은 1966 - 67 시즌이었는데 별로 인기가 없었고 바로 다음 시즌부터 다시 빨간색 상의와 흰색 소매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두 번째 시즌은 2005 - 06 시즌, 아스널이 하이버리에서 뛰는 마지막 시즌일 때였는데 하이버리가 개장된 1913년, 아스널이 입었었던 예전의 암적색 상의 유니폼을 다시 입고 플레이를 하게 된다. 아스널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쓰기 시작한 2006 - 07 시즌에 다시 원래의 유니폼으로 돌아가게 된다.[24]

아스널의 홈 유니폼들은 세 개의 다른 팀들에게 영감을 주게 된다. 1909년, 스파르타 프라하는 아스널이 입었었던 암적색 색깔의 유니폼을 채택하게 되고,[24] 1938년, 하이버니언이 아스널이 입고 있던 소매 상의 유니폼을 디자인한 녹색 상의와 흰색 소매의 유니폼을 채택하게 된다.[25] 역시 1930년대에, SC 브라가의 감독은 아스널과의 경기 후 팀의 유니폼인 기존의 녹색 유니폼을 아스널의 빨간색 상의와 흰색 소매 그리고 흰색 하의를 그대로 복제해 바꾸고 팀의 애칭을 "오스 아스널리스타스"(Os Arsenalistas)로 짓게 된다.[26] 이 팀들은 이런 디자인의 유니폼을 오늘날에도 입고 있다.

아스널의 원정 유니폼은 전통적으로 옐로 앤 블루지만 예외인 적도 있었다. 아스널은 1982년부터 84년까지 녹색 상의와 짙은 감색 하의를 입었으며,[27] 1990년대 초반, 복제 유니폼이 시장에 돈이 되는 시기가 도래하자 원정 유니폼을 주기적으로 바꾸게 된다. 이 시대에는 기존의 노란색 상의에 파란색 하의 유니폼이 2색조 파란색으로 변화하게 되며 2001 - 02 시즌에는 메탈릭 황금색과 짙은 감색을 사용하기도 했었다.[28] 2005 - 06, 2006 - 07 시즌에는 노란색과 짙은 회색 유니폼을 입었었다. 현재 아스널은 아스널이 다음 시즌 상대하는 팀들이 선택하는 홈 유니폼에 따라 원정 유니폼이 세 번째 유니폼(3rd kit)으로 바뀌기도 하는 등 매년 바뀌고 있다.[29] 현재 아스널의 세 번째 유니폼은 2007 - 08 시즌 아스널이 원정 유니폼으로 입었던 흰색 상의와 암적색 하의, 그리고 흰색을 테두리로 한 암적색 양말의 유니폼이다.[30]

홈 구장

아스널 스타디움의 북쪽 스탠드
아스널이 런던 남동부의 울위치를 연고로 하고 있을 때에는 대부분 울위치의 근처인 플럼스테드의 매너 그라운드에서 경기를 벌였다. 1886년 창단 후 4년간 그곳을 사용하다가 1890년에 매너 그라운드에서 가까운 인빅타 그라운드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옮긴 지 3년 만에 다시 매너 그라운드로 돌아오게 된다. 매너 그라운드는 풋볼 리그에 가입한 1893년, 좌석식과 입석식 스탠드를 만들기 전까지는 그냥 필드였을 뿐이었다. 아스널은 1894 - 95 시즌 딱 두 차례 경기만 제외하고 1913년에 북런던으로 옮길 때까지 20년간 매너 그라운드를 홈 구장으로 쓰게 된다.

하이버리라고 널리 알려진 아스널 스타디움은 1913년부터 2006년까지 아스널의 홈 구장이 된다. 최초의 아스널 스타디움은 축구장 설계로 유명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아치볼드 리치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한쪽에만(아스널은 동쪽이었음) 지붕으로 덮인 좌석식 스탠드가 설치되고 나머지는 오픈된 입석식이라는 당시의 일반적인 영국에서의 축구장 설계를 많이 맡았었다.[31] 1930년대에 경기장 전체에 상당한 보수 공사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당시 192,30년대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디자인 운동인 아트 데코의 영향으로 서쪽과 동쪽에 좌석식 스탠드가 각각 1932년과 36년 설치가 된다.[32] 동쪽 같은 경우는 기존의 것을 허물고 새로 지은 것이었다. 거기에 북쪽의 입석 스탠드에도 지붕이 더해졌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때 폭탄을 맞게 되었고 1954년까지 재건되지 못했다.[33] 지붕은 56년에야 재건되었다. 남쪽 입석 스탠드도 1989년도에 재개조하여 지붕이 더해졌고, 사무실이 생겨나게 된다. 남쪽 스탠드에 시계가 있었다고 하여 '클락 스탠드(The Clock Stand)'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아스널 스타디움의 관중 수용규모가 최고일 때는 6만 명을 넘게도 수용할 수 있었고, 1990년대 초까지도 5만 7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테일러 리포트와 프리미어리그는 아스널의 하이버리를 완전 좌석식으로 바뀌도록 압박했고 결국 1993 - 94 시즌, 완전 좌석식 구장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때 아스널 스타디움의 수용규모는 38,419명으로 줄게 되었다.[34] 챔피언스리그의 광고판 추가 허용으로 챔피언스리그 때의 수용규모는 더 줄게 되어 아스널은 1998 - 99, 1999 - 2000 시즌 두 시즌 동안 챔피언스리그 홈 경기는 7만 명 규모의 구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치르게 된다.[35]


현재 아스널의 홈 구장인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아스널 스타디움의 증축은 제한되었는데 그 이유는 동쪽 스탠드가 잉글랜드의 주요 건물 평가에서 2등급(총 3등급 중에 2등급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물에게 부여됨)을 받았고 나머지 세 개의 스탠드는 주거지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33] 결국 이러한 한계는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까지 수입을 극대화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였고, 그 당시의 축구 열기와는 동떨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36] 여러 가지 선택을 고려해 본 뒤, 2000년, 아스널은 아스널 스타디움에서 남동쪽으로 약 500m 떨어진 6만 명 수용규모의 '애슈버턴 그로브(Ashburton Grove)'라는 이름의 새 홈 구장으로의 이전 계획을 약속하였다.[37] 나중에 홈 구장 이름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새 구장 프로젝트는 처음에 영국식 관료주의와 비용 상승 등으로 완공 시기가 늦춰져 2006년 7월달에 겨우 완공을 할 수 있었고,[38] 때맞춰 2006 - 07 시즌부터 아스널이 새 홈 구장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39] 경기장 이름은 UAE의 국제 항공사인 에미레이트 항공사가 스폰서십을 따내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명명되었다. 아스널은 당시 에미레이트 항공사와 잉글랜드 축구 역사에서 가장 거액인 약 1억 유로의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40] 몇몇 팬들은 경기장 이름의 법인 스폰서십에 동의하지 않고, 원래의 애슈버턴 그로브로 부르거나 아니면 그냥 그로브(The Grove)라 부르기도 한다.[41] 아스널이 챔피언스리그 홈 경기를 치르는 날이면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이 아닌 애슈버턴 그로브로 불러야 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원래 에미레이트 항공사는 챔피언스리그의 공식 스폰서십 계약을 맺은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미레이트 항공사와의 경기장 스폰서십 계약은 최소 2012년까지로 알려져 있고 유니폼 스폰서 계약은 2014년까지로 되어 있다.[40]


데니스 베르흐캄프의 은퇴식이 있던 날 관중들이 들어찬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아스널의 훈련장은 런던 바로 위에 있는 주인 허트포트셔 주에 있는 셴리(Shenley)라는 곳으로서 2000년에 개장된 곳이다. 1961년까지 아스널은 아스널 스타디움 홈 구장에서 직접 훈련했었고, 셴리로 옮겨오기 전에는 런던 대학 학생 회관 근처의 훈련 시설을 쓰기도 했었다.[42] 현재 아스널의 유스 팀이 셴리를 홈 구장으로 쓰고 있으며 아스널의 2군 팀은 현재 풋볼 리그 2(Football League Two, 4부리그)에 속해 있는 바넷 FC의 홈 구장인 언더힐을 홈 구장으로 쓰고 있다.[43]

서포터
아스널의 팬들은 종종 그들 스스로를 가리켜 아스널의 애칭인 '거너스'에서 유래한 '구너스(Gooners)'라고 부르고 있다. 아스널은 광대하고 충성스런 팬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홈 경기들은 매진이 되기도 한다. 2007 - 08 시즌, 아스널은 평균 홈 관중수 60,070명과 99.5%의 점유율로 리그에서 2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며,[44] 평균 홈 관중수에 있어서는 통산 4번째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었다.[45] 아스널이 가지고 있는 팬 지역 범위는 부유층이 많이 살고 또한 인접해 있는 캐논버리와 반스버리, 여러 계층이 뒤섞인 아일링턴과 홀로웨이, 하이버리, 그리고 캠든 자치구 지역이 있다. 그리고 노동자 계층이 많은 핀스버리 공원쪽이나 스토크 뉴잉튼에도 아스널의 서포터들이 많다. 이러한 얘기는 아스널의 팬 계층이 다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002년 보고서에 따르면 잉글랜드 축구 클럽중 가장 높은 7.7%의 영국 내 유색 인종들이 아스널의 서포터인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46]

모든 잉글랜드 내 주요 클럽들처럼 아스널도 아스널 풋볼 서포터스 클럽(Arsenal Football Supporters Club)이나 아스널 독립 서포터스 협회등 많은 자국내 서포터스 클럽을 보유하고 있다. 아스널 풋볼 서포터스 클럽은 아스널과 밀접한 업무를 하고 있으며, 아스널 독립 서포터스 협회는 그보다 더 독자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다. 아스널 서포터스 트러스트란 서포터스 클럽도 있는데 아스널의 소유권을 팬들이 차지할 수 있도록 보다 많은 참여를 독려하고 있는 클럽이다. 또한 아스널의 서포터들은 The Gooner(더 구너), Highbury High(하이버리 하이), Gunflash(건플래시) 등과 그것들보다 덜 지적인 Up The Arse!(업 더 아스!)라는 팬 잡지(fanzine)를 발행하고 있다. 아스널 역시 다른 잉글랜드 축구 클럽과 마찬가지로 응원가가 있는데, 아스널은 1970년대 디스코 그룹인 빌리지 피플의 노래인 고 웨스트를 번안한 'One-Nil to the Arsenal(아스널 1 대 0)'과 'Boring, Boring Arsenal(지루한 아스널)' 등의 응원가가 있다. 원래 'Boring, Boring Arsenal'이란 응원가는 상대팀 서포터들이 아스널을 조롱하기 위해 부르는 노래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아스널 서포터들이 아스널이 경기에서 잘하고 있을 때 부르기도 한다.[47]

런던 밖에서 살고 있는 아스널 서포터들은 현 시대의 위성 텔레비전의 발달에 따라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아스널에 대한 애정을 나태내고 있다. 따라서 아스널은 현재 런던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많은 수의 팬들을 보유하고 있다. 2007년, 영국내에 24개, 아일랜드에 37개, 전 세계적으로 49개의 서포터스 클럽이 아스널과 제휴를 맺고 있다.[48] 2005년, 아스널의 9.9%의 배당 소유를 하고 있는 그라나다 벤쳐스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아스널 팬들은 약 2천 7백만 명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세 번째로 높다고 한다.[49]

아스널의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두드러진 라이벌은 가장 가까운 토트넘 홋스퍼이며 이들 팀들의 경기는 북런던 더비라고 불린다.[50] 런던 지역내에 있는 다른 라이벌 팀은 첼시와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가 있다. 거기에 아스널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80년대 후반부터 강해지면서 라이벌이 되었고, 또한 양 팀은 오늘날 프리미어리그 우승 경쟁을 함으로써 라이벌 관계가 강화되었다.[51] 2003년, 풋볼 팬스 센서스(Football Fans Census)의 온라인 투표에 따르면 아스널의 가장 큰 라이벌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며, 토트넘과 첼시가 그 뒤를 잇는 것으로 조사가 되었다.[52] 하지만 2008년 조사에서는 토트넘이 더 중요한 라이벌 관계라고 나와있다.[53]

소유권과 재정
아스널의 모기업은 '아스널 홀딩스(Arsenal Holdings plc)'이며 비상장 유한회사이다. 이러한 소유권은 여타 다른 축구 클럽에 비해 상당히 다른 소유권이라 볼 수 있다. 단 62,217 규모의 지분만 발행되었으며,[54]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와 런던 증권 거래소가 공동으로 설립한 FTSE나 런던 증권 거래소의 하위시장인 AIM과 같은 곳과는 거래하지 않고 있다. 대신, 플러스 증권 거래소와는 가끔 거래하고 있다. 2009년 3월 30일, 아스널의 주식이 중간 가격대인 7,550유로가 되었다. 이것은 아스널의 시장 자본가치가 대략 46,980만 유로가 된다는 의미이다.[55] 아스널은 2008 시즌이 끝난 5월 31일, 총 수입 223백만 유로 중에 선수 이적과 세금을 포함한 것만 3,670만 유로의 수입을 내었다.[56]

2008년 4월, 미국의 경제 미디어 포브스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레알 마드리드에 이어 아스널의 가치를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축구 클럽으로 평가 했으며, 채무를 포함해 12천만 달러(605백만 유로)의 가치를 평가받았다.[57] 미국의 회계 법인 회사인 델로이트는 전 세계 축구 클럽들의 수입을 순위로 매기는 2009 델로이트 풋볼 머니 리그에서 아스널을 6위로 평가했으며, 2007 - 08 시즌, 2093십만 유로의 수입을 냈다고 되어있다.(세금 제외)[58]

아스널의 경영진들과 주주들
아스널의 경영진들은 현재 통틀어서 41.8%의 팀 지분을 갖고 있으며, 2009년 3월 기준으로 그 중에 가장 큰 경영진 주주는 미국의 스포츠계의 거물인 스탠 크롱키이다. 이 사람은 2007년부터 아스널에 관한 입찰에 진출하였으며,[59] 현재 12,756의 지분 소유로써 20.5%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60]

다른 경영진들 로는 남아공 출신의 다이아몬드 딜러 이기도 한 대니 피즈먼이 10,025 지분으로 16.1%를 차지하고 있고, 아스널의 전 회장인 브레이스웰스미스 경의 손자인 리차드 카가 2,722의 지분으로 4.4%, 그리고 현재 아스널의 회장인 피터 힐-우드가 500의 지분으로 0.8%의 점유율을 각각 갖고 있다. 나머지 경영진들은 아주 근소한 양의 지분을 갖고 있다.[56] 전 경영진 이기도 했던 니나 브레이스웰스미스(브레이스웰 스미스 경의 손녀) 역시 9,893 지분으로 15.9%의 점유율을 갖고 있다.[56]

크롱키의 입찰 경쟁자는 레드 앤 화이트 시큐리티(Red & White Securities)의 공동 대표인 러시아의 억만장자 알리셰르 우스마노프와 이란 출신의 런던 재무가인 파하드 모시리이다.[61]

레드 앤 화이트는 2007년 8월에 입찰 진출을 하였는데, 전 아스널의 부회장이었던 데이빗 다인으로부터 배당 소유권을 샀고, 2009년 2월, 15,555의 지분으로 25%의 점유율을 지니게 되었다.[62] 이것으로 크롱키와 우스마노프 사이에 입찰 경쟁이 불거진 것이 아니냐 하는 기자 추측도 나왔었다.[61]

그러나 크롱키는 최소한 2009년 9월까지는 29.9% 이상의 팀 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데에 찬성하였고,[63] 나머지 경영진 및 주주들도 2009년 4월까지는 허가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지분을 팔지 않는 것에 대해 합의하였다. 그리고 2012년 10월까지 각각의 다른 지분들에 대해서 첫 번째 선택 사항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합의하였다.[64]

2013년 6월 14일자로 아스널은 피터 힐우드 회장의 심장병 등의 건강 문제로 인하여 새로운 회장으로 그의 43년 지기인 칩스 케스윅 경(Sir Chippendale (Chips) Keswick)을 고용한다고 밝혔다. 칩스 케스윅 경은 2005년부터 아스널의 보드진에서 일하였으며 햄브로스 은행(Hambros Bank)와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의 디렉터를 역임하였다.[65]

대중문화 속의 아스널
잉글랜드에서 가장 성공한 축구 클럽 중 하나인 아스널은 영국 문화에서 종종 묘사되었고, 미디어 매체에도 몇 번 처음으로 나왔던 적이 있었다. 1927년 1월 22일, 아스널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셰필드 유나이티드와의 경기가 잉글랜드 리그 최초로 라디오로 생중계가 되었다.[66] 10년뒤인 1937년 9월 16일에는 아스널의 1군과 2군팀과의 시범경기가 TV로 생중계 되는 첫 축구 경기가 되기도 했다.[67] 또한 아스널은 1964년 8월 22일, BBC의 스포츠 프로그램인 매치 오브 더 데이의 첫 방송에서 앤필드에서 벌어진 리버풀과의 경기가 하일라이트로 방송이 되었다.[68]

아스널은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의 초기에 배경이 되기도 했었는데 1939년작, 영화 아스널 스타디움의 미스터리(The Arsenal Stadium Mystery)가 그러했다.[69] 이 영화는 아스널과 아마추어 팀의 친선 경기에 중점을 두는데 선수들중 한명이 경기 도중 독살을 당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당시 아스널에서 뛰고 있는 많은 선수들이 직접 출연하였으며, 당시 아스널의 감독이었던 조지 앨리슨에게는 대사가 주어지기도 했었다.[70] 좀 더 최근에는 축구와 관련, 특히 아스널에 관련된 자신의 인생을 다룬 닉 혼비의 자서전인 피버 피치(Fever Pitch)란 책에도 나온다. 이 책은 1992년 출판 되었으며, 1990년대 영국 사회에서의 축구에 대한 부흥과 재건에 대한 내용이 다뤄졌다.[71] 또한 이 책은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한번씩 두번의 영화로 각색이 되기도 했었는데 영국 영화는 콜린 퍼스가 주연을 맡아 1988 - 89 시즌 아스널이 리그 우승을 할 때를 중점으로 다뤘고,[72] 미국 영화(한국명:날 미치게 하는 남자)는 드류 배리모어 주연으로써 메이저 리그의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들에 대해서 다루었다.[73]

아스널은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 동안 다소 좀 고리타분한 수비와 지루한 경기를 펼쳤는데,[47][74] 영국의 코미디언인 에릭 모어캄브와 같은 많은 코미디언들이 이런날들에 대해 조롱거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제는 1997년작, 영화 풀 몬티에도 거듭 되었는데 남자 주연 배우들이 그들의 스트립 쇼에 맞춰서 열을 맞추며 양손을 들어 올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아스널 수비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고의적으로 흉내내어 조롱하기도 했었다.[70] 게리 올드만이 제작한 1999년작의 플렁켓 & 매클린이란 영화에서도 아스널의 수비가 언급이 되었는데 당시 아스널에서 오랜 기간 동안 수비수로 뛰었었던 왼쪽 수비수 리 딕슨과 오른쪽 수비수 나이젤 윈터번의 이름을 따온 딕슨과 윈터번이란 이름을 가진 두 캐릭터가 나온다.[70] 참고로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로버트 칼라일이란 스코틀랜드 출신의 배우가 두 영화에 주연배우로 나왔다는 점이다. 로버트 칼라일은 새뮤얼 L. 잭슨 주연의 영화 51번째 주에 리버풀 팬으로 나온 적도 있었다.(자세한 것은 리버풀 FC를 참조) 하지만 그는 레인저스 FC의 팬이라고 한다.

아스널 여자축구단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아스널 WFC입니다.
아스널 WFC는 아스널과 제휴하고 있는 여자 축구 클럽이다. 1987년 창단되었고, 2002년에 프로로 전향해 현재 아스널의 유니폼 관리 담당을 맡고 있는 빅 에이커스가 창단부터 지금까지 아스널 WFC의 감독을 맡고 있다.[75] 아스널 WFC는 잉글랜드 여자축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이며, 현재 여자 프리미어리그에서 무려 5연패를 기록중이며, FA 여자컵에서도 3연패를 기록중이다.[76] 또한 그녀들은 2006 - 07 시즌, UEFA 여자 챔피언스리그(남자의 챔피언스리그와 동급이다)에서 우승해 잉글랜드 여자축구 클럽 중에서는 유일한 우승이고, 쿼드러플까지 기록하였다.[77] 이 쿼드러플 기록은 전 세계 여자축구 클럽을 통틀어 아스널 WFC가 유일하다. 아스널과 아스널 WFC는 형식적으로는 독립된 존재들이지만 꽤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아스널 WFC는 시즌당 한번 정도는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평상시의 아스널 WFC의 홈 구장은 메도우 파크라는 곳으로써 7부리그의 보어럼 우드 FC와 왓포드의 2군 팀과 같이 사용하고 있다.[78]

사회에서의 아스널
아스널은 1985년, 스포츠와 사회적 포용, 교육, 자선 사업을 제공하는 일반 사회 조직인 'Arsenal in the Community'(사회에서의 아스널)을 창설 시켰다. 아스널은 몇몇의 자선 사업을 직접 지원하기도 했었고, 1992년에는 아스널 자선 신용 위원회(The Arsenal Charitable Trust)라는 단체가 지역적 대의를 위해 2백만 유로가 넘는 금액을 확보하였다.[79] 거기에는 전 프로 선수들과 명사들로 만들어진 팀도 합세하기도 하였다.[80]

우승 기록
아스널은 통산 13번의 리그 우승을 거두었다. 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리버풀 FC 다음으로 최다 우승 기록이다.[81] 또한 아스널은 지금까지 14번의 FA컵 우승을 거두어,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아스널은 1971년, 1998년, 2002년에 리그 및 FA컵에서 모두 우승하여 더블을 기록하였고, 최다 더블 달성으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동률을 이루고 있다.[82] 한편 1993년에는 FA컵 및 리그컵에서 모두 우승하여 이른바 '컵 더블'을 잉글랜드 프로축구에서 처음으로 달성하였다.[83] 더불어 아스널은 2006년,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구단으로는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하였다.[84] 아스널은 잉글랜드 프로축구리그 역사상 가장 우수한 기록을 거둔 구단 중 하나로, 시즌 최종순위가 14위 아래로 떨어진 적은 단 7번밖에 없다. 또한 20세기 아스널의 평균 리그 순위는 경쟁 구단들보다도 높은 8.5위였다.[85] 여기에 아스널은 2001-02 및 2002-03 시즌, 2013-14 및 2014-15 시즌 동안 FA컵을 2번이나 연이어 우승하였다. FA컵 역사상 연속 우승을 달성한 구단은 아스널을 포함하여 토트넘 홋스퍼 FC,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블랙번 로버스 FC, 원더러스 FC까지 단 5개 팀밖에 없다.[86]

국내 대회
리그
풋볼 리그 1부/프리미어리그[87]
● 우승 (13): 1930-31, 1932-33, 1933-34, 1934-35, 1937-38, 1947-48, 1952-53, 1970-71, 1988-89, 1990-91, 1997-98, 2001-02, 2003-04
● 준우승 (10): 1925-26, 1931-32, 1972-73, 1998-99, 1999-2000, 2000-01, 2002-03, 2004-05, 2015-16, 2022-23
풋볼 리그 2부/EFL 챔피언십[87]
● 준우승 (1): 1903-04

FA컵
● 우승 (14, 최다 기록): 1929-30, 1935-36, 1949-50, 1970-71, 1978-79, 1992-93, 1997-98, 2001-02, 2002-03, 2004-05, 2013-14, 2014-15, 2016-17, 2019-20
,● 준우승 (7): 1926-27, 1931-32, 1951-52, 1971-72, 1977-78, 1979-80, 2000-01
EFL컵
● 우승 (2): 1986-87, 1992-93
● 준우승 (6): 1967-68, 1968-69, 1987-88, 2006-07, 2010-11, 2017-18
FA 커뮤니티 실드
● 우승 (17): 1930, 1931, 1933, 1934, 1938, 1948, 1953, 1991*, 1998, 1999, 2002, 2004, 2014, 2015, 2017, 2020, 2023
● 준우승 (7): 1935, 1936, 1979, 1989, 1993, 2003, 2005
국제 대회
유럽 대회
UEFA 챔피언스리그
● 준우승 (1): 2005-06
UEFA 유로파리그
● 준우승 (2): 1999-2000, 2018-2019
UEFA 컵위너스컵
● 우승 (1): 1993-94
● 준우승 (2): 1979-80, 1994-95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 우승 (1): 1969-70
통계와 기록
출전 기록
아스널의 유명한 중앙 수비수였던 데이비드 오리어리는 1975년부터 1993년까지 1군에서만 무려 722경기를 출장해 아스널의 최다 출장 기록을 갖고 있다. 그와 한때 중앙 수비수 파트너이자 전 주장인 토니 애덤스는 669경기 출장으로서 2위의 기록을 갖고 있다. 골키퍼 로서는 데이비드 시먼이 563경기로 최고 기록을 갖고 있다.[88]

(2010년 7월 24일 기준)[89]
순위 이름 기간 선발 교체 총 출장 횟수
1 아일랜드데이비드 오리어리 1973 - 1993 681 41 722
2 잉글랜드토니 애덤스 1983 - 2002 663 6 669
3 잉글랜드조지 암스트롱 1961 - 1977 607 14 621
4 잉글랜드리 딕슨 1988 - 2002 598 21 619
5 잉글랜드나이젤 윈터번 1987 - 2000 572 12 584
6 잉글랜드데이비드 시먼 1990 - 2003 564 0 564
7 잉글랜드팻 라이스 1964 - 1980 521 7 528
8 잉글랜드피터 스토레이 1961 - 1977 494 7 501
9 잉글랜드존 레드포드 1962 - 1976 475 6 481
10 잉글랜드피터 심슨 1960 - 1978 458 19 477
최다 골 기록

최다 골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아스널의 레전드 티에리 앙리
티에리 앙리는 아스널의 통산 최다 골 득점자로서 2005년 8월에 185골을 기록했던 이언 라이트를 넘어섰으며[90], 1999년부터 2007년까지 그리고 2012년에 단기 임대로 복귀하여 총 228골을 기록, 아스널 통산 최다 리그 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91] 이언 라이트는 1939년, 클리프 바스틴이 178골을 기록한 이래 오랫동안 이어져 오고 있던 골 기록을 1997년 9월에 갈아 치웠다.[92]

(2012년 8월 8일 기준)[91]
순위 이름 기간 출장 횟수 득점
1 프랑스 티에리 앙리 1999 - 2007, 2012 374 228
2 잉글랜드 이언 라이트 1991 - 1998 288 185
3 잉글랜드 클리프 바스틴 1929 - 1946 396 178
4 잉글랜드 존 레드포드 1962 - 1976 481 149
5 잉글랜드 테드 드래이크 1934 - 1945 184 139
6 잉글랜드 지미 브래인 1923 - 1931 232 139
7 잉글랜드 덕 리쉬먼 1948 - 1956 244 137
8 네덜란드 로빈 판 페르시 2004 - 2012 278 132
9 잉글랜드 조 흄 1926 - 1938 374 125
10 잉글랜드 데이비드 잭 1928 - 1934 208 124
최다 관중 기록
아스널의 한 경기 최다 홈 관중수는 73,707명으로 1998년 11월 25일, 구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RC 랑스와의 챔피언스리그에서 세운 기록이다. 아스널은 1998-99, 1999-2000 두 시즌 동안 챔피언스리그 홈 경기를 구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치르게 된 바 있는데 이는 아스널 스타디움의 관중 수용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스널 스타디움에서의 한 경기 최다 홈 관중수는 73,295명으로 1935년 3월 9일, 선덜랜드와의 경기였고,[88]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는 60,161명으로 2007년 11월 3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였다.[93]

기타 기록
아스널은 잉글랜드 축구에서 몇몇 기록을 세운 바 있는데, 1부리그에서 가장 오랫동안 강등되지 않고 있는 기록(2014 - 15 시즌 현재 88 시즌 연속)을 갖고 있고, 2003년 5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무려 49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세운 바 있고. 창단후 지금까지 무려 "131년간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없는 기록도 있다[94] 이 기간중에는 2003-04 시즌, 총 38경기의 무패 우승을 거두기도 했었다. 이 무패 우승 기록은 1888-89 시즌,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가 세운 이후 1부리그에서 115년 만에 나온 대기록 이었다.[16] 하지만 프레스턴 노스 엔드가 처음 기록을 세웠을 때에는 고작 22경기밖에 치르지 않았으므로 아스널이 세운 무패 우승이 더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아스널은 2005-06 시즌 동안 챔피언스리그에서 10경기 무실점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종전 기록은 AC 밀란이 세운 7경기였다. 당시 아스널은 총 995분 동안 상대 팀에게 골을 내주지 않았으나, 마지막 결승에서 76분경, 형님구단 바르셀로나에서 뛰고 있던 사뮈엘 에토에게 동점골을 내줘 무실점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95]

선수
1군 선수 명단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 GK 잉글랜드 에런 램스데일
2 DF 윌리암 살리바
4 DF 잉글랜드 벤 화이트
5 MF 가나 토마스 파티
6 DF 브라질 가브리엘 마갈량이스
7 FW 잉글랜드 부카요 사카
8 MF 마르틴 외데고르 (주장)
9 FW 브라질 가브리엘 제주스
10 MF 잉글랜드 에밀 스미스 로우
11 FW 브라질 가브리엘 마르티넬리
12 DF 유리엔 팀버르
14 FW 잉글랜드 에디 은케티아
15 DF 야쿠프 키비오르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7 DF 포르투갈 세드리크 소아르스
18 DF 도미야스 다케히로
19 FW 레안드로 트로사르
20 MF 조르지뉴
21 MF 포르투갈 파비우 비에이라
22 GK 스페인 다비드 라야 (브렌트퍼드에서 임대)
24 FW 잉글랜드 리스 넬슨
25 MF 이집트 모하메드 엘네니
29 MF 카이 하베르츠
31 GK 카를 헤인
35 MF 우크라이나 올렉산드르 진첸코
41 MF 잉글랜드 데클런 라이스
— FW 코트디부아르 니콜라 페페
 
임대 선수 명단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3 DF 스코틀랜드 키어런 티어니 (레알 소시에다드로 임대)
13 GK 아이슬란드 루나르 알렉스 루나르손 (카디프 시티로 임대)
23 MF 알베르 삼비 로콩가 (루턴 타운으로 임대)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27 FW 브라질 마르키뉴스 (낭트로 임대)
33 GK 잉글랜드 아서 오콘코 (렉섬으로 임대)
— DF 포르투갈 누노 타바레스 (노팅엄 포레스트로 임대)
 
올해의 선수
연도 이름 국적 포지션
2006 옌스 레만 독일 GK
2007 세스크 파브레가스 스페인 MF
2008 마티외 플라미니 프랑스 MF
2009 로빈 판 페르시 네덜란드 FW
2010 세스크 파브레가스 스페인 MF
2011 잭 윌셔 잉글랜드 MF
2012 로빈 판 페르시 네덜란드 FW
2013 산티 카소를라 스페인 MF
2014 에런 램지 웨일스 MF
2015 알렉시스 산체스 칠레 FW
2016 메수트 외질 독일 MF
2017 알렉시스 산체스 칠레 FW
2018 에런 램지 웨일스 MF
2019 알렉상드르 라카제트 프랑스 FW
2020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 가봉 FW
2021 부카요 사카 잉글랜드 FW
2022 부카요 사카 잉글랜드 FW
2023 마르틴 외데고르 노르웨이 MF
과거 소속 선수
<nowiki /> 역대 아스널 FC 소속이었던 선수들에 대해서는 분류:아스널의 축구 선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아스널 출신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진한 글씨는 현재 아스널 FC에서 뛰는 선수들이다.
메이저 대회에 (FIFA 월드컵,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출전했던 선수들로만 작성하였다.
앨런 볼 (1971-1976)
토니 애덤스 (1983-2002)
데이비드 시먼 (1990-2003)
데이비드 플랫 (1995-1998)
매슈 업슨 (1997-2003)
애슐리 콜 (1998-2006)
솔 캠벨 (2001-2006, 2010)
리처드 라이트 (2001-2002)
시오 월컷 (2006-2018)
잭 윌셔 (2008-2018)
앨릭스 옥슬레이드체임벌린 (2011-2017)
대니 웰벡 (2014-2019)
부카요 사카 (2018-)
벤 화이트 (2021-)
에런 램스데일 (2021-)
데클런 라이스 (2023-)
코칭스태프
2020년 1월 22일 기준

위치 이름 국적 비고
감독 미켈 아르테타 스페인 스페인
수석 코치 스티브 라운드 잉글랜드 잉글랜드
수석 코치 알베르트 스투이벤버그 네덜란드 네덜란드
골키퍼 코치 살 비보 잉글랜드 잉글랜드
골키퍼 코치 이냐키 카나 파본 스페인 스페인
유소년 아카데미 감독 페어 메르테자커 독일 독일
U-23 감독 스티브 볼드 잉글랜드 잉글랜드
Head of performance 쉐드 포사이스 미국 미국
클럽 주치의 게리 오드리스콜 잉글랜드 잉글랜드
감독

22년 동안 아스널의 감독을 맡은 아르센 벵거.
1897년, 토마스 미첼 감독이 아스널의 첫 프로 감독이 된 이후 현재까지 총 20명의 정규 감독과 6명의 감독 대행이 아스널을 이끌어 왔다.[96] 가장 오랫동안 아스널의 감독을 맡은 사람은 아르센 벵거(1996 - 2018)이다.[97] 벵거 감독은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을 제외한 첫 아스널 감독이고 2018년까지 무려 57.25%라는 승률을 거둔 아스널의 가장 성공적인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레슬리 나이트 전 감독이 34.46%로 승률이 제일 낮다.[97] 두 명의 아스널 감독이 시즌 도중에 사망하였고 그 두명은 바로 허버트 채프먼과 탐 휘태커이다.[98]

네임드 팬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웨일스 공자 해리 (영국 왕자, 웨일스 공 찰스의 차남)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제45대 대통령)
제러미 코빈 (영국 노동당 전 대표)
데이지 리들리 (배우)
엠마왓슨 (배우)
케빈 코스트너 (배우)
제이미 벨 (배우)
피델 카스트로 (정치가)
해리 스타일스 (가수)
저스틴 비버 (가수)
베네딕트 컴버배치 (배우)
로저 돌트리 (더 후의 보컬)
다이도 (가수)
잭 에프론 (배우)
이드리스 엘바 (배우)
모 패러 (육상선수)
콜린 퍼스 (배우)
매튜 폭스 (배우)
앤드류 가필드 (배우)
제이지 (가수)
이언 매켈런 (배우)
피어스 모건 (언론인, TV진행자)
닉 혼비 (소설가)
폴 카가메 (정치가)
오사마 빈 라덴 (국제 테러리스트)
존 라이든 (섹스 피스톨즈의 보컬)
로버트 패틴슨 (배우)
해리 레드냅 (축구감독)
카야 스코델라리오 (배우)
마크 스트롱 (배우)
로저 워터스 (핑크 플로이드의 베이시스트)
조슈아 캐럿 (엔터테이너, 모델)
김상혁 (클릭비의 멤버)
목진석 (바둑기사)
민호 (샤이니의 멤버)
수빈 (우주소녀의 멤버)
박종윤 (캐스터)
이상윤 (축구 해설위원)
그리 (래퍼)
임시완 (ZE:A의 멤버)
한준희(축구 해설위원)
한현민 (모델)
이제동 (프로게이머)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A%A4%EB%84%90_FC 위키백과

맨체스터 시티 FC(영어: Manchester City Football Club)는 잉글랜드 그레이터 맨체스터 주 맨체스터를 연고로 하는 1894년에 창단한 잉글랜드의 축구 클럽이다. 1960년대에는 첫번째 전성기로, 조 머서의 지휘 아래 콜린 벨, 마이크 서머비, 프랜시스 리 등의 선수들을 주축으로 풋볼 리그 1부(현재 프리미어리그), FA컵, 리그컵, 슈퍼컵과 UEFA 컵 위너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맨체스터 시티는 프리미어리그 9회, FA컵 7회, 리그컵 8회, FA 커뮤니티 실드 6회, UEFA 챔피언스리그과 UEFA 컵위너스컵에서 각 1회씩 우승을 기록하였다.

맨체스터 시티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두 팀뿐인 트레블과 프리미어 리그 단일 시즌 역대 최다 승점 우승 및 유일한 도메스틱 쿼드러플 등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는 '세인트 마크스 웨스트 고튼(St. Mark's West Gorton)'으로 창단되었고, 창단 첫 경기는 1880년 11월에 치러졌다. 1887년, '아드윅 어소시에이션 풋볼 클럽(Ardwick Association Football Club)'으로 구단명을 개칭한 이후, 현재의 구단 명칭으로 바뀐 시점은 1894년이다.

맨체스터 시티는 EPL 출범 전, 20세기에도 잉글랜드 1부리그 역대 통산 승점 6위에 위치하던 우승을 밥 먹듯 하던 전 세계구 명문은 아니었으나 리그에서 가장 입지가 탄탄한 터줏대감 클럽 중 하나로 중상위권을 유지하던 전통적인 클럽이었다. 그러나 방만한 운영으로 1990년대 잉글랜드 프로축구 리그가 프리미어 리그로 개편되는 시기에 강등을 당하는 구단 최악의 암흑기를 보내기도 하였다.

2007년 태국의 총리였던 탁신 친나왓이 구단을 인수하며 부활의 날갯짓을 시작하였고, 2008년 9월 만수르 빈 자이드 알나하얀 소유의 아부다비 유나이티드 그룹이 구단을 매입하였으며,[2] 술라이만 알 파힘이 구단주가 되었다.[3]이후 프리미어 리그에서 2011-12 시즌, 2013-14 시즌, 2017-18 시즌, 2018-19 시즌, 2020-21 시즌, 2021-22, 2022-23까지 7차례, 잉글랜드 1부 리그 우승 포함 총 9번의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다. 현재 감독은 펩 과르디올라이다.

역사
창단부터 1930년까지

1884년 맨체스터 시티
1880년, 맨체스터 서부의 고튼이란 동네에 있는 세인트 마크스 교회에서 인도주의적인 목적으로 축구 클럽이 탄생하였는데 이것이 맨체스터 시티 축구 클럽의 기원이다. 두명의 교구 위원들과 목사의 딸 안나 코넬은 지역 조직 폭력배들과 알콜 중독자들에게 종교에 개의치 않으면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안나는 개인적으로 모든 교구 주민들의 집을 방문해 (개신교 신자들의 집까 포함해) 관련 사항을 모색해 보았다. 교회의 크리켓 클럽은 이미 1875년에 창단 되었지만 겨울철엔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바로 잡고 또한 이러한 사회 악들에 개입해 전폭적인 격려로 교구 위원인 윌리엄 비스토우와 토마스 굿비히어와 함께 축구 클럽을 창단하였는데 그것이 세인트 마크스(웨스트 고튼)이란 클럽이다. 안나 코넬은 메이저 축구 클럽 창단을 촉진시킨 유일한 여성이다.[출처 필요]

클럽의 첫 경기는 1880년 11월 13일로 기록되었는데 상대 팀은 매클스필드에서 온 교회 팀이었다. 1884년, 클럽은 고튼의 또다른 축구 클럽인 고튼 애슬레틱과 합병되지만 불과 몇 개월도 안되어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 AFC로, 고튼 애슬레틱은 웨스트 고튼 애슬레틱으로 분리 된다. 1887년, 고튼 AFC는 프로로 전향되었고, 연고지를 맨체스터시 동부에 위치한 아드윅이란 동네로 옮겨 클럽 이름을 아드윅 AFC로 바꾸고, 홈 구장도 하이드 로드로 옮기게 된다.


1904년 FA 컵 우승
1891년, 아드윅은 뉴턴 히스를 1-0으로 꺾고 맨체스터 컵 우승을 차지한다. 이 결과는 아드윅이 1891-92 시즌부터 풋볼 얼라이언스의 멤버가 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풋볼 얼라이언스는 1892년, 풋볼 리그와 통합되었고, 아드윅은 풋볼 리그 2부리그의 창단 멤버가 되었다. 1893-94 시즌에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지게 되어 클럽의 전체적인 개편이 필요하게 되어 아드윅은 맨체스터 시티 FC로 클럽 이름을 바꾸고 1894년 4월 16일, 공식적으로 등록이 되었다. 1899년, 맨체스터 시티는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처음으로 1부리그 승격을 하게 된다.

1904년, 맨체스터 시티는 크리스털 팰리스에 있는 작은 구장에서 볼턴 원더러스를 1-0으로 꺾고 처음으로 FA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에는 리그에서 2위를 차지해 아깝게 더블을 놓치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시즌에는 불법 재정자금 혐의를 받게 되었고 절정에 다다랐을땐 1906년도에 주장 빌리 메레디스를 포함한 무려 16명의 선수가 퇴출 당하기도 하였다. 당시 맨체스터 시티 팬들이 화가났던 것은 이 퇴출 당한 선수들 대부분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옮겨가 유나이티드의 첫 번째 성공기를 가져다 주게 된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 하이드 로드에 화재가 벌어져 메인 스탠드가 파괴가 되었고 1923년, 맨체스터 시티는 메인 로드 (Maine Road) 로 홈 구장을 옮기게 된다.

1926년, 맨체스터 시티는 FA컵 결승에서 다시 볼턴 원더러스와 재회하지만 이번엔 0-1로 패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부턴 기복이 심한 플레이로 리그에서 부진이 잇따르게 되는데 시즌 마지막 날, 강등이 되고 만다. 1926-27 시즌에는 1부리그 승격을 목전에 두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었다. 승격 경쟁은 시즌 마지막 날까지 이어졌는데 맨체스터 시티와 포츠머스가 2위를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마지막 날 브래드퍼드 시티를 무려 8-0으로 꺾었고 맨체스터 시티 팬들은 승격이 확정된걸로 믿고 있었지만 같은 시각, 포츠머스는 15분이나 경기가 지연되어 아직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경기 막판에 터진 골로 5-1 승리를 거둔 포츠머스는 골 평균차 (총 실점 수와 득점 수를 나누는 방법으로써 당시에는 이 룰이 적용되었으며, 골 득실차가 적용이 된 것은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잉글랜드에는 1976-77 시즌부터였다.)로 인해 2위를 차지하여 포츠머스가 승격하게 되었다.

아깝게 승격을 놓치게 된 맨체스터 시티는 다음시즌, 우승으로 1부리그에 승격하게 된다. 1927-28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줄곧 상위권을 유지하며 8위로 마치게 되는데 이 시즌에는 토미 존슨이 38골로 클럽 기록을 세우게 된다.

연속된 결승 진출과 논란 (1930년대~1950년대)
1930년대에 맨체스터 시티는 트로피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1930년에는 리그에서 3위를 기록한뒤, 1932년 FA컵 준결승에서 허버트 채프먼이 이끄는 아스널에게 막판 골로 탈락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결승에 진출하지만 에버턴에게 패하게 되며, 1934년, 3년 연속 FA컵 결승에 진출해 삼수만에 포츠머스를 꺾고 두 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클럽은 1937년,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만 곧바로 다음시즌에 제일 많은 득점에도 불구하고 강등 당하게 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로 맨체스터 시티의 도전도 잠시 멈추게 된다. 1946년에 다시 리그가 재개되자마자, 前 주장이었던 샘 코완의 관리 아래 2부리그 우승으로 다시 승격을 하게 된다.

그러나 클럽은 1949년, 은퇴한 프랭크 스위프트를 대신할 독일 골키퍼 버트 트라우트만을 영입하면서 논란을 일으키게 된다. 트라우트만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중 하나인 독일군 낙하산 부대원 출신이었고 전쟁 포로에서 석방돼 랭커셔주에 정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영입은 많은 항의를 유발시키게 되었고 약 2만명의 인원들이 시위에 참가 하기도 하였다.

1950년대에는 센터 포워드인 돈 레비를 주축으로 하는 포메이션인 이른바 레비 플랜 (Revie Plan)을 가지고 1955년과 1956년, FA컵 결승에 진출한다. 1955년에는 패했고 1956년에는 우승을 하였는데, 56년에 우승할 당시 버밍엄 시티를 3-1로 꺾었었는데 이 경기는 가장 유명한 역대 FA컵 결승전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특히 맨체스터 시티 구단이나 팬들에겐 논란 속에 영입한 버트 트라우트만이 목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도 경기를 계속 뛴 투혼을 발휘한 경기로 기억되고 있다.

영광의 시대
1963년 강등당한 뒤 조지 포이저가 감독에 오르지만 클럽의 하락세를 막지는 못했다. 최악의 순간은 1965년, 스윈든 타운과의 1-2 홈 패배를 당할때였으며 관중 동원은 고작 8,015명 이었다. 이 경기는 메인 로드에서의 최저 관중 기록이 되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그 해 2부리그에서 11위를 기록하였는데 당시 맨체스터 시티 역사상 가장 최악의 기록이었다. 포이저는 시즌이 끝나기 전에 사임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즌이 끝날무렵 조 머서가 새로이 감독직에 오른다. 머서는 애스턴 빌라에 감독직에 있으면서 클럽을 1부리그로 승격시키고 1961년, 리그 컵 우승을 하여 조그만 성공을 거뒀지만 1964년, 뇌졸중으로 애스턴 빌라를 떠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보다 젊고, 기술적이고, 훈련시간을 잘 운용할 수 있는 그런 어시스턴트 코치가 필요했는데 그는 당시 플리머스 아가일 감독이었던 말콤 앨리슨을 선택하였다.

머서의 지휘 첫시즌인 1965-66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콜린 벨과 마이크 서머비 영입에 성공하게 된다. 다음시즌은 1부리그에서 15위를 기록하게 되는데 시즌 막판 17경기에서 단 4패에 그치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게 된다. 1967-68 시즌, 클럽은 시즌 마지막 날,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4-3으로 꺾고 우승을 확정해 역사상 두 번째 1부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시즌의 다른 하일라이트는 TV로 중계된 토트넘 핫스퍼와의 4-1 승리였는데 경기 당일날 경기장이 눈으로 뒤덮여져 발레 온 아이스 (The Ballet on Ice) 라고 불렸었다. 그리고 올드 트래퍼드에서 벌어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맨체스터 더비에서 거둔 3-1 승리도 있었다.

이후 맨체스터 시티는 더 많은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게 되는데 1969년엔 세 번째 FA컵 우승을 달성하였고, 1970년에는 비엔나에서 폴란드의 구르닉 자브제를 2-1로 꺾고 유로피언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 대회 우승은 맨체스터 시티의 처음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유럽대회 우승이기도 하다. 또한 그 해 첫 리그 컵 우승을 차지하였는데 맨체스터 시티는 한 시즌 유럽 대회와 유명 컵대회를 동시에 우승한 첫 잉글랜드 축구 클럽이 되기도 하였다.

1971년, 클럽은 경영에 변화를 주게 되는데 조 머서가 단장직에 오르게 되고 미디어와 친화적인 말콤 앨리슨이 감독에 오르게 된다. 1971-72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다시 한번 리그 우승에 도전하게 되는데 3월 중순까지 4점차로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즌 막판에 실망스런 성적을 이어가면서 4위로 시즌을 마쳐 흐지부지 되고 만다. 많은 팬들이 시즌 도중에 스트라이커 로드니 마쉬를 영입한 건에 대해 책임전가를 하였다. 그는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팀 밸런스에 지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마쉬 자신 스스로도 훗날 인정을 하게 되었다 ""저는 1972년 맨체스터 시티의 리그 우승을 잃게 만들어 손을 들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뜻)"". 시즌이 끝나고 머서가 앨리슨과의 불화로 코벤트리 시티로 떠남으로써 머서-앨리슨 체제가 깨지게 된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맨체스터 시티는 경기장 안팎으로 여러 가지 변화를 겪게 된다. 비즈니스맨인 피터 스웨일스가 회장이 되며, 말콤 앨리슨은 강등권으로 치닫던 1972-73 시즌 도중, 감독직을 사임하게 된다. 오랜기간 코치로 역임해 있던 조니 하트가 감독대행을 맡아 팀을 강등권에서 구해내고 괜찮은 성적을 거두게 되어 결국 시즌이 끝나고 정식감독직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가 그를 압박했고 그의 감독 기간은 수 개월밖에 가지 못했다. 노리치 시티의 감독을 맡고 있었던 론 손더스가 하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데 그의 지휘 아래 맨체스터 시티는 1974년, 리그 컵 결승에 진출하지만 아깝게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리그에선 부진하게 되었고 손더스는 1973-74 시즌 한달을 남겨놓고 해고 당하게 되었고 맨체스터 시티도 강등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前 주장이었던 토니 북이 선수 겸 감독으로 팀을 이끌어 안정을 되찾게 된다. 시즌 마지막날의 상대는 연고지 라이벌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로써 강등을 면하기 위해서 양팀 모두 승리가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前 유나이티드 선수였던 데니스 로가 힐킥으로 득점을 성공시켜 1-0 승리를 거두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강등을 확정짓게 만들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토니 북의 재임기간 동안 작은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1976년,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2-1로 꺾고 두 번째 리그 컵 우승을 거머쥐었고 1977년에는 리그에서 2위를 기록하였다.

추락과 반격
1960년대와 70년대의 성공 이후 오랜 기간 하락세가 이어진다. 1979년, 말콤 앨리슨이 다시 감독이 되지만 아사 하트포드, 게리 오웬, 피터 반스등 팀의 스타 선수들을 파는 동안 여러 실패한 영입들로 인해 막대한 자금을 낭비하게 된다. 그중 하나는 울버햄튼에서 영입한 미드필더 스티브 데일리로써 당시 영국내 이적 기록을 갱신하였지만 맨체스터 시티에선 부진하였다. 앨리슨은 한 시즌만에 물러났고 존 본드가 팀을 맡아 1981년, FA컵 결승에 진출해 토트넘과 맞붙게 되지만 재경기 접전끝에 패하고 만다.

2년뒤, 맨체스터 시티는 중위권을 달리고 있었고 감독자리가 안전할것 같아 보였지만 (당시 강등의 위험조차 보이지 않았다.) 뜻밖에도 운영진들과 논란을 일으켜 시즌도중에 해고 당하게 되며 코치직에 있었던 존 벤슨이 후임에 오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벤슨이 지휘한 19경기에서 11점 밖에 올리지 못했고 시즌 마지막 날 루턴 타운에게 패하게 되어 2부리그로 강등되는 재앙을 겪게 된다. 빌리 맥닐이 다음 감독이 되었고 위기의 한 시즌을 보낸뒤, 1985년, 1부리그로 다시 승격이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1986년, 간신히 잔류 한 뒤 빌리 맥닐은 다음 시즌 시작후 얼마 못가 애스턴 빌라로 떠나게 된다. 남은 시즌동안은 지미 프리젤이 꾸려나가지만 강등을 막지 못하고 애스턴 빌라와 레스터 시티와 함께 강등 당하게 된다. 프리젤은 사임을 하였고 멜 마친이 후임에 오른다.

1989년, 멜 마친의 맨체스터 시티는 2부리그에서 2위를 기록하며 1부리그에 다시 승격하게 된다. 1989-90 시즌은 어려운 시즌이 되었고 89년 11월, 또다시 강등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마친은 해고 당하게 된다. 前 에버턴 감독이었던 하워드 켄달이 팀을 맡아 결국 강등에 구해내었고 다음시즌인 1990-91 시즌에는 좋은 출발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1990년 11월, 켄달은 에버턴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34살의 미드필더인 피터 리드가 선수 겸 감독이 된다. 리드의 첫 두 시즌은 5위를 기록했지만 UEFA 컵에는 진출하지 못했던게 이 당시에는 2, 3위 팀만 진출할 수 았었기 때문이었다. 1992-93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9위를 기록했지만 1993-94 시즌, 단 두 경기만을 치르고 리드는 해임 당하게 된다.

또 다른 추락
1993-94 시즌, 맨체스터 시티에 슬럼프가 다시 찾아오게 되는데 새 감독 브라이언 호튼의 지휘 아래 16위의 성적을 거두게 된다. 회장인 피터 스웨일스는 팬들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었고 결국 회장직을 맨체스터 시티의 레전드인 프랜시스 리에게 넘겨주게 된다. 1994-95 시즌은 뭐 하나 나은게 없었고 암울한 후반기를 보내 강등권에서 두 계단위인 17위를 기록하게 된다. 호튼은 시즌이 끝나기 직전에 해임 당하고 사우스햄튼 감독이었던 앨런 볼을 데려오게 된다. 앨런 볼은 맨체스터 시티를 재건하는데 초점을 맞췄고 비효율적인 노장 선수들을 대거 정리하였다. 그는 여러 가능성 있는 어린 선수들을 선발하였고 특히 가장 주목받았던 선수는 22세의 조지아 미드필더 기오르기 킨클라제였다. 하지만 1995-96 시즌, 끔찍한 출발을 보였고 마지막날 강등권 싸움에서 패하며 또다시 2부리그로 강등 당하게 된다. 앨런 볼은 1996-97 시즌 도중에 해임 당했고 후임자인 스티브 코펠은 자신에게 너무 심한 압박을 가한다는 이유로 몇 주만에 사임을 하게 된다. 크리스마스 무렵, 맨체스터 시티는 하위권을 기록하고 있었고 前 노팅엄 포레스트 감독이었던 프랭크 클락이 후임 감독이 된다. 결국 그 시즌엔 14위로 마치게 되었지만 다음 시즌인 1998년 2월에 밑에서 5번째를 맴돌고 있었고 클락은 또 해고 당하게 된다. 남은 시즌은 前 올덤 애슬레틱과 에버턴 감독이었던 조 로일이 대신하였다. 하지만 시즌 마지막날 스토크 시티 원정에서 5-2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같이 강등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포츠머스, 퀸스 파크 레인저스, 포트 베일이 모두 승리를 거두는 바람에 강등이 되고 말았다. 그 의미는 결국 맨체스터 시티가 3부리그 (당시엔 Division Two) 로 강등 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클럽 창단 후 최초였다. 그리고 이 치욕은 당시 유럽대회 우승을 기록했었던 클럽들중 최초였다.

회복기

2003년 5월 11일 맨체스터 시티
3부리그로 강등된 뒤, 맨체스터 시티는 경기 외적에서 지각변동을 일으키는데 잉글랜드의 사업가인 데이빗 번스타인이 새 회장이 된다. 맨체스터 시티는 3부리그로 강등되자 마자 첫시즌만에 2부리그로 승격이 되는데 질링엄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폴 디코프의 막판 동점골로 인해 승부차기까지 끌고가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하지만 팬들은 크게 기뻐할 수 없었던 게 이웃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당시 잉글랜드 축구클럽 사상 최초와 전 세계 축구클럽들 중에서도 몇 안되는 트레블의 위업을 달성하였기 때문이었다.

2부리그로 돌아온 1999-00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강등권 싸움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예상외로 시즌내내 자동 승격을 위해 도전하게 되었다. 그들은 시즌 마지막날 2위로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확정지었다.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했지만 또 부진이 뒤따르게 되는데 2000-01 시즌, 또 다시 2부리그로 강등이 되고 만다. 이 시즌은 프리미어리그 출범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강등팀이 리그 마지막 날 전에 확정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로일은 시즌이 끝나고 해임 당하게 되었고 후임자리에는 前 잉글랜드 국가대표 감독 출신인 케빈 키건이 오르게 된다. 키건은 여러 영향력있는 선수들을 데려오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선수가 에얄 베르코비치, 알리 베나르비아, 그리고 스튜어트 피어스였다. 2001-02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클럽의 승점 신기록을 세우며 승격을 하게 된다. 당시 션 고터가 30골을 기록하고 대런 허커비가 26골을 기록하였다. 2002-03 시즌, 프리미어리그로 복귀해서 맨체스터 시티는 좋은시즌을 보냈는데 9위를 차지하긴 했지만 페어 플레이상을 수상해 25년 만에 UEFA 컵에 진출하게 되었다. 또한 그 시즌에는 80년간 홈 경기장 이었던 메인 로드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리고 본래 2002년 코먼웰스 게임 (Commonwealth Games) 개최를 위해 지어진 4만 8천석 규모의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으로 홈 구장을 옮긴다. 그러나 2003-04 시즌은 어려운 시즌이었으며, 시즌내내 강등권에서 머물다 결국 16위로 끝마치게 되었다.


에티하드 스타디움.
키건은 2005년 3월경 사임하였으며, 후임에는 스튜어트 피어스가 오르게 된다. 시즌 8위를 기록해 아깝게 UEFA 컵 진출을 놓치게 된다. 2005-06 시즌에는 매우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시즌 막판 10경기에서 9패를 당하는 하락세로 15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다음시즌엔 14위를 기록하게 되어 피어스는 해임 당하게 되며, 태국의 군사정변으로 망명한 탁신 친나왓이 IT기업으로 벌어들인 재산을 가지고 맨체스터 시티를 인수했다.

후임에는 사상 첫 잉글랜드 국가대표 외국인 감독이었던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이 오르게 된다. 그 후 맨체스터 시티는 2007-08 시즌 내내 유럽대항전 진출을 놓고 겨루게 된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약화되었고 결국 9위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UEFA 컵 진출에 성공했지만 그의 시대도 1년으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마크 휴스가 3년 계약으로 새 맨체스터 시티 감독이 된다. 휴스는 前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스트라이커였으며, 5년간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었으며, 그리고 4년을 블랙번 로버스의 감독에 있으면서 두 번의 UEFA 컵 진출을 따내기도 하였다.

변혁의 시대 (2008년~2020년)
본국 태국에서의 문제로 구단주 탁신 친나왓의 계좌가 동결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맨체스터 시티가 다시 매각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결국 2008년 9월 1일 만수르 빈 자이드 알나하얀 소유의 아부다비 유나이티드 그룹의 구단 인수가 보도되었고,[4] 술라이만 알 파힘이 구단주가 되면서 유럽 제패를 목표로 천명하였다.[5] 그 후 이적시장 마감일인 2008년 9월 1일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호비뉴를 이적료 3250만 파운드에 영입하면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외에도 첼시의 숀 라이트필립스,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셰이 기븐,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크레이그 벨라미 등의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선수진의 수준이 한층 높아졌다. 숀 라이트필립스는 유스 시절까지 포함해 7년간 맨체스터 시티에서 뛰었던 선수였다. 휴스의 첫 시즌은 모순의 본보기였다.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선덜랜드, 포츠머스, 스토크 시티, 아스널같은 팀들에겐 홈에선 승리했지만 원정가면 늘 패했다. 시즌 막판엔 성적이 괜찮아 7위를 목표로 했지만 토트넘에게 패하며 물거품이 된다. 컵대회에서도 모순이 이어졌는데 리그 컵 2라운드에서 3부리그 팀인 브라이턴 & 호브 앨비언에게 패했으며, FA컵 3라운드 에선 2부리그 팀인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홈에서 0-3 패배를 당하게 된다. 반면에 UEFA 컵에서는 잘했는데, 8강까지 진출해 함부르크 SV에게 최종 스코어 3-4로 패하게 된다.

맨체스터 시티는 그 시즌 결국 리그 10위로 마감하였고 휴스는 팀을 더욱더 강화시키고자 여름 이적시장에서 많은 선수들을 영입하게 된다. 아스널에서 에마뉘엘 아데바요르와 콜로 투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카를로스 테베즈, 블랙번 로버스에서 로케 산타 크루스, 애스턴 빌라에서 개러스 배리, 에버턴에서 졸리온 레스콧을 영입하여 막강한 스쿼드를 갖추었다. 2009-10 시즌 개막전에서 블랙번 로버스를 2-0으로 꺾었고 캄프 누에서 바르셀로나를 꺾고 바르셀로나가 주최하는 조안 감퍼 트로피 대회 (1회성 대회)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다음 상대인 울버햄프턴 원더러스를 홈에서 꺾으며 상승세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초반의 상승세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이후 11경기에서 단 3승에 그치는 등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휴스에게 상당한 부담감이 짊어지게 되었다. 결국 마크 휴스는 2009년 12월 19일 해임 당했으며, 후임으로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감독이었던 로베르토 만치니가 감독직에 오른다. 휴스의 마지막 경기는 4-3 승리를 거둔 선덜랜드와의 경기였다.

2011년 10월 23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린 맨체스터 더비 경기에서 맨유를 6-1로 대승을 하였다.

특히 2012년 5월 14일, 2011-12 시즌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최종전 38라운드를 앞두고, 맨체스터 시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승점이 동률이지만 골 득실에서 크게 앞서 1위에 올라 있었고, 자력 우승을 위해선 반드시 승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종전 상대는 강등을 피하기 위해서 역시 승리가 필요한 퀸즈 파크 레인저스였기 때문에 어려운 승부가 예상되었다. 이 경기에서 맨체스터 시티는 전반 38분 파블로 사발레타가 선제골을 넣었으나, 수비수인 레스콧의 어처구니없는 백패스를 QPR의 공격수인 지브릴 시세에게 패스하며 후반 3분 동점골을 허용하였다. 후반 9분 QPR의 주장 조이 바튼이 테베즈에게 팔꿈치로 얼굴을 가격하는 반칙을 하며 퇴장을 당했다. 이때 조이바튼은 퇴장판정을 받은 직후 가만히 서있던 맨체스터시티의 스타 공격수 세르히오 아구에로의 허벅지를 니킥으로 가격하며 또 한번 논란을 일으켰고 퇴장당하면서 발로텔리와 언쟁을 벌이는듯 그의 별명인 악동의 면모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리고 퇴장이후 맨체스터 시티는 다시 기회를 잡았지만, 오히려 후반 21분 제이미 마키에게 역습에 의한 역전골을 허용했고, 수 차례 잡은 득점 기회는 QPR의 골키퍼 패디 케니의 선방 속에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1-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90분이 지났고 44년에 찾아온 우승의 기회를 또 이웃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넘겨주는 상황을 맞이했다.

프리미어리그의 마지막 38라운드는 20개의 팀이 동시에 경기가 진행되는데 약간의 차이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VS 선덜랜드의 경기가 조금 일찍 끝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가 끝난직후에 맨체스터 시티의 스코어는 1-2로 뒤지고있었기 때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서포터들은 당연히 올해 우승은 유나이티드의 차지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내 곧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는데 정규 90분의 플레이타임이 끝나고 추가시간에 접어든 직후 맨체스터시티의 공격수 에딘 제코의 헤딩 동점골이 터지면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94분 마리오 발로텔리의 어시스트를 받은 세르히오 아구에로가 침착하게 수비수를 제치고 환희의 역전골을 뽑아냈다. 이 극적인 순간은 44년만에 맨체스터 시티에게 리그 우승컵을 안겨다 준 것이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극적인 우승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2013-14 시즌을 앞두고 맨시티는 만치니의 후임으로 말라가 CF의 마누엘 페예그리니 감독을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하였으며, 페르난지뉴, 요베티치, 네그레도, 헤수스 나바스 등을 영입하면서 전력을 강화하였다. 2014년 5월 12일 새벽(한국시간) 맨체스터의 에티하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웨스트 햄과의 홈 경기에서 무승부만 기록하더라도 자력 우승이 가능했지만, 결국 2-0으로 승리하며 2시즌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2014-15 시즌에는 첼시 FC에 이어 리그 2위를 기록하여 준우승을 차지했고, 2015-16 시즌에는 리그에서 4위를 기록하였지만 구단 역사상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였다. 그 이후, 맨시티는 페예그리니 감독과 계약 기간을 연장하지 않으면서 페예그리니 감독은 2015-16 시즌을 끝으로 맨시티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페예그리니의 뒤를 이어 FC 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직을 맡았던 호셉 과르디올라가 2016-17 시즌을 앞두고 맨시티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과르디올라의 맨시티 감독 부임 이후, 지난 시즌까지 수비를 책임진 마르틴 데미첼리스를 에스파뇰로 이적시킨 후, 사미르 나스리, 윌프레드 보니, 조 하트 등의 기존 선수들을 임대 이적시켰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활약한 미드필더 일카이 귄도간의 영입을 시작으로 에버튼에서 활약한 수비수 존 스톤스, FC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한 칠레 국가대표 골키퍼 클라우디오 브라보, FC 샬케 04의 떠오르는 유망주 르로이 사네를 영입하며 새 시즌을 위한 전력보강을 마쳤다. 그러나 전 경기에서 10연승을 달리며 무적의 모습을 보여주던 시즌 초반을 지나 양쪽 풀백들의 노쇠화로 인한 부진과 새로이 영입한 존 스톤스와 클라우디오 브라보의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리그에서는 3위를, 챔피언스리그는 16강에서 AS 모나코 FC에게 탈락하는 등 무관으로 시즌을 마무리 하였으며, 과르디올라 감독 커리어에 첫 무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게 된다.

2017-18 시즌을 앞두고 맨시티는 지난 시즌의 실패를 교훈 삼아 대대적인 스쿼드 보강 및 리빌딩 작업에 들어갔다. 지난 시즌 30대가 되면서 노쇠화를 보였던 파블로 사발레타, 바카리 사냐, 알렉산다르 콜라로프, 가엘 클리쉬 등 4명의 풀백 모두 계약 연장없이 자유계약으로 방출하였다. 방출된 4명의 빈자리를 토트넘의 카일 워커, 레알 마드리드의 다닐루, AS 모나코의 뱅자맹 망디 등 20대의 젊은 수비수들의 영입으로 보강하였다. 또한 벤피카의 젊은 골키퍼 이데르송을 영입하며 지난 시즌 부진한 클라우디오 브라보를 대체할 골키퍼 보강에도 성공한다. 이외에도 사미르 나스리, 헤수스 나바스, 놀리토, 조 하트 등 지난 시즌 펩 체제에서 중용받지 못하던 선수들을 정리하였고 AS 모나코의 베르나르두 실바를 영입하면서 2선 자리의 전력을 강화하였다. 대대적인 스쿼드 보강과 리빌딩 이후 시즌에 들어선 맨체스터 시티는 새 얼굴들의 활약과 더불어 과르디올라 감독의 전술에 시행착오를 겪던 선수들이 점점 적응해 나가면서 압도적인 페이스를 보여주었고, 리그에서 18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면서 4년만의 EPL 우승을 달성한다. 더불어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초로 승점 100점을 기록함과 동시에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 득점, 최다 승리, 2위와의 최다 승점차, 최다 골득실 기록 등을 달성하면서 성공을 넘은 역대급의 시즌을 보냈다. 리그 우승과 더불어 2년만의 EFL컵 우승도 함께 달성한다.

2018-19 시즌에는 FA 커뮤니티 실드를 우승하며 순조롭게 시작하였고, 이후 리그컵, FA컵을 우승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리그에서는 리버풀 FC를 우승 경쟁에서 단 승점 1점 차이로 따돌리며 창단 첫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2019-20 시즌에서는 리버풀 FC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인해 리그 준우승을 차지하였지만, 리그컵 3연패와 FA 커뮤니티 실드 2연패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가 그토록 바라던 UEFA 챔피언스리그 빅이어는 언더독 올랭피크 리옹에게 패해서 좌절되게 된다.

역대 우승 기록
국내
리그

2011-12 시즌 우승 후 프리미어리그 트로피를 든 주장 뱅상 콩파니.
1부/프리미어리그[6]
우승 (9): 1936-37, 1967-68, 2011-12, 2013-14, 2017-18, 2018-19, 2020-21, 2021-22, 2022-23
2부/1부[6]
우승 (7) (최다): 1898-99, 1902-03, 1909-10, 1927-28, 1946-47, 1965-66, 2001-02

FA컵
우승 (7): 1904, 1934, 1956, 1969, 2011, 2019, 2023
EFL컵
우승 (8): 1970, 1976, 2014, 2016, 2018, 2019, 2020, 2021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6): 1937, 1968, 1972, 2012, 2018, 2019
더블
프리미어리그, FA컵
우승: 2018-19
도메스틱 트레블
프리미어리그, FA컵, 리그컵
우승: 2018-19
트레블
프리미어리그, FA컵,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2022-23
유럽
UEFA 컵위너스컵
우승 (1): 1970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1): 2023
UEFA 슈퍼컵
우승 (1): 2023
엠블럼과 유니폼
맨체스터 시티의 홈 유니폼 색은 하늘색 상의와 흰색 하의이다. 예전의 원정 하의는 상하의 모두 적갈색 이거나 빨간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 이기도 하였다. 클럽의 오리지널 홈 유니폼은 불명확하긴 하지만 1892년을 전후로 파란색을 입었었다는 증거가 있다. '유명한 축구 클럽들 - 맨체스터 시티'라 지어진 1940년대에 펴낸 이 소책자에서는 과거 웨스트 고튼 (세인트 마크스) 이 본래 암적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를 입었다고 명시되어 있으며, 1884년에는 클럽 창단이 교회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백십자 (white cross) 가 새겨진 검은색 유니폼을 입었었다고 전해져 있다. 빨간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 원정 유니폼은 前 어시스턴트 코치이자 감독이었던 말콤 앨리슨 시절부터 나왔으며, 그는 이탈리아의 명문클럽인 AC 밀란의 유니폼을 채택하여 그런 색깔의 유니폼이 맨체스터 시티의 성공을 불어넣어줄 걸로 믿고 있었다.

현재의 클럽 엠블럼은 1997년 채택이 되었으며, 이전 엠블럼이 상표 등록으로 부적합해지자 바꾸게 되었다. 맨체스터 시를 상징하는 문장(紋章)을 기초로 하여 그 위에 검독수리를 표현해 내었다. 방패의 상단부에는 맨체스터 운하를 상징하는 배를 삽입했으며, 가운데에 M.C.F.C., 그리고 하단부에 맨체스터 시를 흐르는 3개의 강을 대각선으로 표현 하였다. 엠블럼의 맨 밑에는 'Superbia in Proelia (전장의 자부심, Pride in Battle)' 이란 라틴어 표어를 새겨 넣었다. 독수리와 방패위에는 3개의 별이 있으며, 이것은 오로지 장식하기 위함이었다.

이전에는 유니폼에 때에 따라 두개의 각기 다른 엠블럼을 사용하였는데, 첫 번째는 1970년에 소개된 것으로써, 1960년대 중반이후 클럽의 서류에 공식적으로 사용된 문양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현재와 똑같은 방패 문양을 사용하였고 안쪽에 클럽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둥근 엠블럼을 표현해 내었다. 1972년에는 방패의 하단부에 랭커셔주의 빨간 장미를 새겨넣은 수정된 엠블럼이 발표가 되었다. 두 번째는 맨체스터 시티가 메이저 컵 대회 결승을 뛸때 엠블럼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맨체스터 시에서 그들의 자존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맨체스터 시의 '휘장'을 맨체스터 시티에 수여함로써 그들의 유니폼에 새겨넣도록 하였다. 이런 관례는 선수들의 유니폼에 어떤 종류의 엠블럼도 새겨 넣을 수 없었던 때부터 유래되었고 지금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선수 명단
2023년 9월 1일[7]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2 DF 잉글랜드 카일 워커 (부주장)
3 DF 포르투갈 후벵 디아스 (3주장)
4 MF 잉글랜드 캘빈 필립스
5 DF 잉글랜드 존 스톤스
6 DF 나단 아케
8 MF 크로아티아 마테오 코바치치
9 FW 엘링 홀란드
10 MF 잉글랜드 잭 그릴리시
11 FW 제레미 도쿠
13 GK 잭 스테판
16 MF 스페인 로드리 (4주장)
17 MF 케빈 더 브라위너 (주장)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18 GK 슈테판 오르테가
19 FW 훌리안 알바레스
20 MF 포르투갈 베르나르두 실바
21 DF 스페인 세르히오 고메스
24 DF 크로아티아 요슈코 그바르디올
25 DF 마누엘 아칸지
27 MF 포르투갈 마테우스 누네스
31 GK 브라질 에데르송
33 GK 잉글랜드 스콧 카슨
47 MF 잉글랜드 필 포든
82 DF 잉글랜드 리코 루이스
 
임대 선수 명단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7 DF 포르투갈 주앙 칸셀루 (바르셀로나로 임대)
32 MF 막시모 페론 (라스팔마스로 임대)
97 DF 잉글랜드 조시 윌슨에스브랜드 (랭스로 임대)
 
전 맨시티 선수
마리오 발로텔리
세르히오 아궤로
다비드 실바
조 하트
야야 투레
프랭크 램퍼드
가레스 베리
사미르 나스리
빈센트 콤파니
가엘 클리쉬
파블로 자발레타
마티야 나스타시치
마르크비비앙 푀
리처드 던
나이얼 퀸
마이클 브라운 (축구 선수)
믹 매카시
실뱅 디스탱
숀 라이트필립스
피터 비어슬리
제임스 밀너
파비안 델프
피터 비어슬리
스튜어트 피어스
데이비드 시먼
스티브 맥매너먼
데이비드 제임스 (축구 선수)
대니 밀스
대니얼 스터리지
웨인 브리지
개러스 배리
졸리언 레스콧
오언 하그리브스
헤로니모 룰리
리야드 마레즈
일카이 귄도안
조지 웨아
영구 결번
참고: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합니다. 선수는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번호 포지션 국적 이름
23 MF 카메룬 마르크비비앵 푀 (사후 명예, 2002~2003)
 
올랭피크 리옹에서 임대된 마르크비비앵 푀는 2003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에서 카메룬을 대표하여 콜롬비아와의 경기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맨체스터 시티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23번을 영구 결번하였다.

역대 올해의 선수
연도 수상자
1967 잉글랜드 토니 북
1968 잉글랜드 콜린 벨
1969 잉글랜드 글린 파도
1970 잉글랜드 프랜시스 리
1971 잉글랜드 마이크 도일
1972 잉글랜드 마이크 서머비
1973 잉글랜드 마이크 서머비
1974 잉글랜드 마이크 도일
1975 잉글랜드 앨런 오크스
1976 잉글랜드 조 코리건
 
연도 수상자
1977 잉글랜드 데이비드 왓슨
1978 잉글랜드 조 코리건
1979 스코틀랜드 에이사 하트퍼드
1980 잉글랜드 조 코리건
1981 잉글랜드 폴 파워
1982 잉글랜드 토미 카튼
1983 잉글랜드 케빈 본드
1984 아일랜드 믹 매카시
1985 잉글랜드 폴 파워
1986 잉글랜드 케니 클레먼츠
 
연도 수상자
1987 스코틀랜드 닐 맥냅
1988 잉글랜드 스티브 레드먼드
1989 스코틀랜드 닐 맥냅
1990 스코틀랜드 콜린 헨드리
1991 아일랜드 나이얼 퀸
1992 잉글랜드 토니 코튼
1993 잉글랜드 게리 플릿크로프트
1994 잉글랜드 토니 코튼
1995 독일 우베 뢰슬러
1996 조지아 기오르기 킨클라제
 
연도 수상자
1997 조지아 기오르기 킨클라제
1998 잉글랜드 마이클 브라운
1999 네덜란드 헤라르트 비컨스
2000 버뮤다 숀 코터
2001 오스트레일리아 대니 티아토
2002 알제리 알리 베나르비아
2003 프랑스 실뱅 디스탱
2004 잉글랜드 숀 라이트필립스
2005 아일랜드 리처드 던
2006 아일랜드 리처드 던
 
연도 수상자
2007 아일랜드 리처드 던
2008 아일랜드 리처드 던
2009 아일랜드 스티븐 아일랜드
2010 아르헨티나 카를로스 테베스
2011 벨기에 뱅상 콩파니
2012 아르헨티나 세르히오 아구에로
2013 아르헨티나 파블로 사발레타
2014 코트디부아르 야야 투레
2015 아르헨티나 세르히오 아구에로
2016 벨기에 케빈 더 브라위너
 
연도 수상자
2017 스페인 다비드 실바
2018 벨기에 케빈 더 브라위너
2019 포르투갈 베르나르두 실바
2020 벨기에 케빈 더 브라위너
2021 포르투갈 후벵 디아스
2022 벨기에 케빈 더 브라위너
2023 노르웨이 엘링 홀란
과거 선수
<nowiki /> 역대 맨체스터 시티 FC 소속이었던 선수들에 대해서는 분류:맨체스터 시티 FC의 축구 선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맨체스터 시티 출신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진한 글씨는 현재 맨체스터 시티 FC에서 뛰는 선수들이다.
메이저 대회에 (FIFA 월드컵,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출전했던 선수들로만 작성하였다.
피터 비어슬리 (1998)
숀 라이트필립스 (1999-2005, 2008-2011)
스튜어트 피어스 (2001-2002)
데이비드 시먼 (2003-2004)
스티브 맥매너먼 (2003-2005)
데이비드 제임스 (2004-2006)
대니 밀스 (2004-2009)
대니얼 스터리지 (2006-2009)
조 하트 (2006-2018)
웨인 브리지 (2009-2013)
개러스 배리 (2009-2014)
졸리언 레스콧 (2009-2014)
제임스 밀너 (2010-2015)
오언 하그리브스 (2011-2012)
프랭크 램파드 (2014-2015)
라힘 스털링 (2015-2022)
파비안 델프 (2015-2019)
존 스톤스 (2016- )
카일 워커 (2017- )
필 포든 (2017- )
스콧 카슨 (2019- )
잭 그릴리시 (2021- )
캘빈 필립스 (2022- )
스태프
보드진
직위 이름
구단주 아랍에미리트 만수르
회장 아랍에미리트 칼둔 알 무바라크
최고 경영 책임자 스페인 페란 소리아노
최고 운영 책임자 미국 톰 글릭
디렉터 미국 마티 에델만
디렉터 잉글랜드 사이먼 피어스
디렉터 아랍에미리트 모하메드 알 마주로우이
디렉터 이탈리아 알베르토 갈라시
풋볼 디렉터 스페인 치키 베히리스타인
풋볼 행정관 잉글랜드 존 윌리엄스
시티 풋볼 아카데미 상무이사 잉글랜드 브라이언 말우드
코치진
직위 이름
감독 스페인 펩 과르디올라
수석코치 스페인 후안 마누엘 리요
수석코치 아르헨티나 루벤 코우시야스
골키퍼 코치 스페인 사비 만시도르
체력 코치 이탈리아 조제 카벨로
플랫 레인 아카데미 사장 잉글랜드 마크 앨런
아카데미 감독 잉글랜드 제이슨 윌콕스
미켈 아르테타

주요 감독
<nowiki /> 이 부분의 본문은 맨체스터 시티 FC 감독 목록입니다.
이름 시작 종료 경기 수 승리 무승부 패배 승률 % 우승 대회
이탈리아 로베르토 만치니 2009 2013 191 113 38 40 59.16 2011-12 FA컵
2011-12 프리미어리그
2012-13 커뮤니티실드
로베르토 만치니 감독은 이탈리아에 손꼽히는 뛰어난 명장이자, 맨체스터 시티에서 가장 오래 부임한 감독 중 한명이다. 특히, 2011-12시즌에서 퀸스 파크 레인저스 FC와의 경기에서 놀라운 역전승으로 승리하여 약 반세기만에 팀에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선물하였다.

만치니는 축구선수 시절, 이탈리아의 1부 리그인 세리에 A의 UC 삼프도리아의 주장이자, 레전드 선수이다. 특히, 약 15년간 UC 삼프도리아에서 뛰었고, 팀의 첫 1부 리그 우승을 안겼다. 그외에도 악동으로 유명한 발로텔리와 테베스를 이끌어 2011-2012 시즌 프리미어 리그 우승 컵을 들어올렸다.

이후 만치니는 결국 2013년 5월 13일 결국 경질되었다. 사유는 대륙대회에서 가장 큰 명성을 가진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의 부진과 보드진과의 마찰때문인것으로 알려졌다. 만치니는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시절부터 리그 경기에서는 강한 모습을 보이는데에 반면 대륙대회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였고, 결국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보드진에 의하여 2007-2008시즌 경질되었다. 이후 2009년 12월에 맨체스터 시티 감독에 부임하여 프리미어 리그 우승 1회 이후 12-13 시즌에 무관에 그치자. 2013년 5월 13일 만치니 감독이 공식적으로 경질되었다고 맨체스터 시티 보드진은 전했다.

이름 시작 종료 경기 수 승리 무승부 패배 승률 % 우승 대회
스페인 펩 과르디올라 2016 109 73 19 17 66.97 프리미어리그 2017-18
풋볼 리그컵 2017-18
펩 과르디올라 감독은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명장이자 전술가이다. 2016년 맨체스터 시티에 부임하였으며, 2017-18시즌 리그에서만 단일 시즌 최다 승점, 최다 승리, 최다 연승, 최다 득실차 등 다양한 신기록들을 달성하면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1990년 요한 크루이프의 FC 바르셀로나에서 데뷔한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 드림팀의 일원으로 맹활약하였고, 97년부터는 팀의 주장이 되어 선수단을 이끌었다. 바르셀로나에서 11시즌 동안 6번의 리그 트로피와 2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컵을 들어올렸으며 92년도에는 팀에서 염원하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이후 2008년 바르셀로나 1군 감독으로 부임한 과르디올라는 스페인 최초의 트레블(리그, 컵대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포함해 단일 시즌 6관왕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였으며, 2009년과 2011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알렉스 퍼거슨 경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두 번 모두 승리하면서 두 번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바르셀로나의 점유율 축구는 스페인을 넘어 유럽을 호령하는 등 극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과르디올라는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으로 부임해 분데스리가 3연패를 달성하였고, 2016년,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부임 첫 시즌에는 선수들의 부상과 부진, 리그 적응 문제로 인해 과르디올라 커리어 사상 첫 무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겼지만 이후 대대적인 스쿼드 보강 및 리빌딩 작업을 거치고 선수들이 감독의 전술에 점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부임 두 번째 시즌인 17-18시즌, 수많은 대기록들을 달성하면서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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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터들과 유나이티드와의 관계
맨체스터 시티는 광대한 범위의 팬계층을 보유하고 있다. 에티하드 스타디움으로 옮긴 이후, 맨체스터 시티의 평균 홈 관중수는 잉글랜드내에서 6위권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상적으로 4만명을 넘는다. 심지어 1990년대 후반에 세 시즌에서 두 번이나 강등을 당했고 특히 3부리그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도 홈 관중은 3만명을 넘었고 같은 리그 전체 평균 관중수에서 8천명이나 더 많았다. 2005년, 맨체스터 시티가 자체 조사한바에 따르면 맨체스터 시티는 영국내에서 886,000여명, 전 세계적으로는 2백만명의 팬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맨체스터 시티는 몇몇 서포터스 단체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세개의 단체로써 공식 서포터즈 클럽, 센테너리 서포터즈 연합, 그리고 국제 서포터즈 연합등이 있다. 맨체스터 시티는 서포터들이 발간한 팬 잡지가 몇몇 있었는데, 이중 가장 오래된것은 '키팩스의 제왕' (King of the Kippax)이며 현재까지 발간되고 있는 유일한 맨체스터 시티의 팬 잡지이다.

맨체스터 시티 팬들의 주된 응원가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곡 블루 문이며 원곡은 우울한 분위기의 곡이지만 마치 대단한 응원가인 것처럼 굉장히 열정적으로 소리높여 부르기도 한다. 맨체스터 시티 서포터스들은 팀에 내재된 주특성인 예측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경향이 있으며 그 결과는 뜻밖에도 '맨체스터 시티 답다' (typical city) 라는 꼬리표가 달려졌다. 팬들이 '맨체스터 시티 답다'라고 평가하는 예에 따르면, 1부리그 우승을 차지했다가 다음 시즌 강등된 유일한 팀이며 (1938년), 한 시즌 100득점, 100실점 이상을 기록한 시즌도 있었으며 (1957 - 58시즌), 2004 - 05시즌에는 우승 팀 첼시를 꺾는 유일한 팀이었으며, 반면에 그 시즌에는 FA컵에서 3부리그 팀인 올덤 애슬레틱에 패해 탈락한적도 있었으며 최근에도 그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맨체스터 시티의 가장 중요한 라이벌은 이웃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며 그들의 시합을 맨체스터 더비라 부른다. 제2차 세계 대전 전에는 원정 응원도 다소 드물었고, 많은 맨체스터 축구 팬들은 그들 스스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은 단 하나라고 생각하긴 했어도 각각의 양팀 경기를 자주 관전하곤 했었다. 1960년대 초까지는 이런 관행이 계속되다가 원정 응원 길이 다소 쉬워지면서 양팀의 홈 구장인 올드 트래포드와 메인 로드에 유나이티드와 시티 원정 팬들이 입장하기 시작해 각각의 양팀 경기를 지켜보는 일이 점점 드물게 되었고 라이벌 관계가 격해지게 되었다.

일반적인 고정관념은 맨체스터 시티 팬들은 고유 맨체스터 시에 많고 유나이티드 팬들은 타지에서 오는 팬들이 많다는 점이다. 2002년, 맨체스터 광역 대학이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맨체스터 구역 우편번호를 이용해 시즌 티켓을 구매한 맨체스터 시민들중에 시티 팬들이 더 많다고 되어있다. (시티 40%, 유나이티드 29%) 하지만 유나이티드의 시즌 티켓 구매자들이 더 많은데 전체적으로 합해보자면 유나이티드의 시즌 티켓 구매자 수는 시티보다 더 많다고 되어있다. (유나이티드 27, 667 시티 16, 481) 하지만 유의해야 할것은 이 자료는 2001년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엮은 자료이며, 이후 시티는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으로 옮겼으며 유나이티드는 올드 트래포드 증축 공사로 인해 시즌 티켓 판매수가 증가해 현재 양팀의 시즌 티켓 구매자 수는 점점 늘게 되었다. 다만 성적이 향상된 지금도 맨체스터 시티 경기장에는 빈 자리가 보이는 걸로 봐서 팬들이 막연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맨체스터 시티 팬수가 유나이티드 팬수보다 많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보여진다. 팬수가 많이 증가했다고 하나 기본적으로 영국의 팬층은 가족단위로 구성 되는 경우가 많으며 대도시등의 유동 인구층의 유입등이 팬수가 늘어나는 주요 원인이나 사실상 팬수에 영향을 많이 끼치지 못한다. 영국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맨체스터 시티 팬수는 여전히 유나이티드 팬수에 비교하기 어렵다.

1980년대 후반에 맨체스터 시티들 사이에 공기나 가스 주입식 특대 고무 풍선이 대유행 했었는데 특히 특대 바나나 풍선이 유행 했었다. 한번은 논란을 일으킨적이 있었는데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과의 경기 때 당시 맨체스터 시티 선수였던 임레 바라디를 부를때 팬들이 '임레 바나나'라고 연호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1988 - 89시즌에는 입석에 서서 특대 바나나 풍선을 흔드는 서포터들의 풍경을 흔히 볼 수 있었으며 이는 다른 클럽들에도 확산되었으며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에서는 특대 해머 망치 풍선, 올덤 애슬레틱은 큰 개 모양 풍선, 그림스비 타운 같은 팀에서는 특대 생선 모양의 풍선이 유행 했었다.) 절정에 다다랐을땐 1988년 12월 26일, 스토크 시티와의 원정 경기 때 특대 바나나 풍선을 이용해 가장 무도회를 한다고 팬 잡지에서 공표하기도 하였다.

2006년 8월, 맨체스터 시티는 영국의 동성애자 및 양성애자 인권 재단인 스톤월에 의해 구단 직원으로 게이를 고용해 게이를 고용한 첫 축구 클럽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공식 스폰서
에티하드 항공(Etihad Airways, 아랍 에미리트) - 주 스폰서, 2003년 11월 ~ 현재
나이키(Nike, 미국) - 공식 스포츠웨어 파트너, 2013년 5월 ~ 2019년 7월
Key 103(잉글랜드) - 공식 라디오 중계 파트너, 2010년 1월 ~ 현재
페로스탈(Ferrostaal, 독일) - 홈 경기 & 국내 컵 대회 광고권, 2009년 11월 ~ 현재
에미리트통신(Etisalat, 아랍 에미리트) - 홈 경기 & 국내 컵 대회 광고권, 2010년 7월 ~ 현재
아부다비 관광청(ADTA, 아랍 에미리트) - 홈 경기 & 국내 컵 대회 광고권, 2010년 7월 ~ 현재
싱하맥주(Singha Beer, 태국) - 공식 맥주, 2007년 9월 ~ 현재
푸마(Puma, 독일) - 공식 스포츠웨어 파트너, 2019년 7월 ~ 현재
닛산(일본)
넥센타이어(대한민국)
SAP(독일)
EA SPORTS(미국)
aabar
etisalat
HAYS
Wix
betsafe
QNET
wega
DSQUARED2
구단 기록
리그 승리 기록 - 11-3. 링컨 시티전 (1895년 3월 23일, 최다 득점) 10-0, 다웬전 (1899년 2월 18일, 최다 점수차 승리)[8]
프리미어리그 승리 기록 - 8-0. 왓포드전 (2019년 9월 21일)
FA컵 승리 기록 - 12-0. 리버풀 스탠리전 (1890년 10월 4일)[9]
리그 패배 기록 - 0-8. 버턴 원더러스전 (1894년 12월 26일), 0-8. 울버햄튼 원더러스전 (1933년 12월 23일),
1-9. 에버턴전 (1906년 9월 3일), 2-10. 스몰 히스전 (1893년 3월 17일)[8]

프리미어리그 패배 기록 - 1-8. 미들즈브러전 (2008년 5월 11일)
FA컵 패배 기록 - 0-6. 프레스턴 노스 엔드전 (1897년 1월 30일), 2-8. 브래드퍼드 파크 애비뉴전 (1946년 1월 30일)[9]
홈 최다 관중 - 84,569 스토크 시티전 (1934년 3월 3일) (잉글랜드 역대 최다 홈 관중수)
리그 최다 출장 - 561 + 3 교체, 알란 오크스 1958-76
통산 최다 출장 - 676 + 4 교체, 알란 오크스 1958-76
통산 최다 골 - 256, 세르히오 아구에로 2011-2021
한 시즌 최다 골 - 38, 토미 존슨 1928-29
한 시즌 팀 최다 승리 및 승점 - 32승, 100점 (2017-18 시즌, 32승 4무 2패)
한 시즌 팀 최다연승 - 18연승 (2017-18 시즌, 3R ~ 20R)
최고 이적료 지출 - 6,000만 파운드, 2018년 7월 레스터 시티에서 이적한 리야드 마레즈
최고 이적료 수입 - 2,100만 파운드, 2005년 7월 첼시로 이적한 숀 라이트필립스
계열 구단
<nowiki /> 자세한 정보는 시티 풋볼 그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미국 뉴욕 시티 FC (2013년 - 현재)[10]
맨체스터 시티 FC는 2013년 5월 21일 미국 야구 프랜차이즈인 뉴욕 양키스와 함께 메이저 리그 사커 20번째 구단인 뉴욕 시티 FC를 창단한다고 발표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시티 FC
맨체스터 시티 FC는 2014년 1월 13일 멜버른 시티 FC를 인수했다.[11]
일본 요코하마 F. 마리노스
2014년 5월 20일 지분 투자가 발표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B%A7%A8%EC%B2%B4%EC%8A%A4%ED%84%B0_%EC%8B%9C%ED%8B%B0_FC 위키백과

홀란드가 골을 잘넣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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