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17. 08:05ㆍIT
강호의 덫 북천의 황량한 바람이 현욱과 설화의 뒤를 따라 불었다. 현욱은 이제 흑룡검집의 제어 아래 '흑룡파(黑龍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무림맹이 자신을 마공 계승자로 단정하고 전력을 다해 추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벽력대(霹靂隊)는 무림맹의 정예 부대 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무자비하기로 악명 높습니다. 그들은 벽력왕(霹靂王)의 직속이며, 한번 목표를 정하면 끝까지 쫓습니다." 설화는 현욱에게 경고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청룡문 멸문의 기억이 아프게 스며 있었다.
"그들의 목표가 천룡도보라면, 만청루(萬淸樓)로 가는 길은 반드시 막혀 있을 것이오. 하지만 만청루는 사도련의 거점일 가능성이 높소. 무림맹의 움직임을 피하면서, 우리는 사도련의 정보를 엿보아야 하오." 현욱은 험한 산길을 피하고,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강호의 대로를 따라 남하했다. 가장 위험한 곳에 오히려 기회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북천을 벗어나 중원으로 향하는 관문, '비룡곡(飛龍谷)'. 이곳은 험준한 산세로 인해 강호의 무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샛길이었다. 현욱과 설화가 곡을 절반쯤 지났을 때, 갑자기 사방에서 묵직한 살기(殺氣)가 쇄도했다.
콰앙! 현욱이 서 있던 앞길의 바위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섬광처럼 터져 나온 검은 바위 파편들 사이로, 푸른색 무복을 입은 수십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모두 붉은색 섬광이 감도는 장검이 들려 있었고, 그들이 내뿜는 기운은 청정하고 강렬한 정파(正派)의 내공이었다.
"벽력대다!" 설화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벽력대의 선두에는 덩치가 산만하고 얼굴에 깊은 흉터를 가진 중년 무인이 서 있었다. 그는 벽력대의 대장 '황보철(皇甫哲)'이었다. 그의 눈빛은 일말의 인정도 없이 차갑게 현욱을 겨냥했다.
"네놈이 바로 마공의 잔재를 지닌 자인가! 천검왕 대인께서 네놈의 마기(魔氣)를 확인하셨다. 무림의 안녕을 위해, 네놈은 여기서 끝장나야 한다!" 황보철이 외치자, 벽력대 무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진형(陣形)을 갖추었다. 수십 명의 무인들이 내공을 모으자, 그 기운이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압력으로 현욱을 짓눌렀다.
"낭자, 뒤로 물러서시오. 이들은 우리가 상대했던 사도련의 잡졸들과는 다르오." 현욱은 설화를 안전한 바위 뒤로 밀어 넣었다. 그는 흑룡검의 검집을 움켜쥔 채 강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 나는 흑룡검제의 계승자다! 너희들의 오해는 강호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다!" 현욱의 외침에도 황보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공을 익힌 자의 간사한 변명 따위는 듣지 않는다. 섬멸하라!"
황보철의 명령과 함께, 벽력대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휘둘렀다. 그들의 검은 푸른 내공의 빛을 뿜어냈고, 수십 개의 검기가 하나의 거대한 번개처럼 현욱을 향해 쇄도했다. 이것이 벽력대의 필살 진법, '벽력섬광진(霹靂閃光陣)'이었다.
현욱은 흑룡파를 막 개방했던 때의 천검왕과의 싸움을 떠올렸다. 단순한 힘의 충돌로는 이 조직적인 공격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는 천룡도보의 용각(龍脚)과 흑룡파를 결합해야 했다.
"용각! 흑룡파!" 현욱은 발끝에 흑룡의 기운을 모아 폭발적으로 땅을 박찼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그의 몸이 벽력섬광진의 빈틈을 향해 뚫고 들어갔다. 동시에 그의 강검에서 검집을 통해 정제된 흑룡의 검기, 흑룡파가 폭발했다.
푸슉! 현욱은 진형의 중앙으로 진입하며 세 명의 벽력대 무인을 순식간에 베어냈다. 흑룡파는 무인들의 단전(丹田)을 정확히 노렸고, 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현욱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는 칠흑 같은 검은 기운이 잠시 남았다 사라졌다.
"뭐, 뭐라고! 세 명이 동시에 당했단 말인가!" 황보철은 경악했다. 마공의 계승자가 이토록 빠르고 정확하며, 치명적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네놈! 진짜 마공이로군! 무림맹의 심법으로 단련된 정예의 단전을 한순간에 파괴하다니!" 황보철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벽력대의 방어를 벽력대원들에게 맡기고, 직접 검을 뽑아 현욱에게 달려들었다. 황보철의 검은 푸른 번개와 같은 내공을 담고 있었고, 그 기운은 현욱이 상대했던 천검왕의 힘에 버금갔다.
"벽력왕의 이름으로, 네놈을 심판하겠다!" 황보철의 검이 현욱의 강검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쨍그랑! 흑룡의 검기와 벽력의 검기가 부딪치며 거대한 굉음과 함께 비룡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현욱은 온몸의 뼈가 울리는 고통을 느꼈다. 흑룡의 힘이 강해도, 상대방의 순수한 정파 내공과 오랜 수련에서 오는 벽력대장의 노련함은 쉽게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안 돼! 이 이상 힘을 쓰면... 내 몸이 버티지 못한다!' 현욱은 직감했다. 아직 흑룡의 힘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림맹의 최정예와 장기전을 펼치는 것은 자멸을 의미했다.
현욱은 온몸의 흑룡 기운을 검집에 집중했다. 검집이 짙은 검은 빛을 발하며, 마치 현욱의 몸을 순식간에 '순간 이동'시키는 듯한 폭발적인 추진력을 만들어냈다.
"잔영각(殘影脚)!" 현욱은 스승에게 배운 경공의 극의에 흑룡의 힘을 더했다. 그의 몸은 황보철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고, 황보철은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꼴이 되었다.
"놓치지 마라! 놈은 마공을 사용해 도주한다!" 황보철은 분노하며 소리쳤다.
현욱은 설화를 안고 비룡곡의 험준한 절벽을 따라 미친 듯이 질주했다. 잔영각에 흑룡의 힘을 더하자, 현욱은 마치 허공을 날아다니는 흑룡의 그림자 같았다. 벽력대원들은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후우... 간신히 따돌렸소." 현욱은 절벽 위 깊은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그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흑룡의 기운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단전이 극심하게 요동쳤다.
설화는 현욱의 곁에 앉아 눈물을 글썽였다. "무명자님... 왜 이렇게까지 홀로 싸우려 하십니까? 무림맹은 이제 당신을 강호의 공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낭자... 이것이 나의 숙명이오. 그리고 천검왕의 주장이 맞든, 틀리든, 나는 강호가 나를 용납할 때까지 싸워야 하오." 현욱은 사도련 무인에게서 얻은 종이 조각을 꺼냈다. 그 종이 조각에는 만청루가 위치한 도시, '봉천(奉天)'의 이름이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무림맹이 나를 마공 계승자로 몰아세우는 근거, 그리고 구천마룡단의 비밀. 그 모든 열쇠가 만청루에 있을 것이오. 우리는 봉천으로 가야 하오."
현욱은 봉천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흑룡의 힘은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호의 모든 세력을 뒤흔들 '변수'였고, 그 힘을 함부로 드러내는 순간, 현욱은 평생 무림의 덫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었다.
"봉천으로 가되, 절대 흑룡의 힘을 드러내지 마시오. 우리는 봉천에서 가장 미천한 존재로 숨어들어 정보를 모아야 하오." 현욱의 눈빛은 비장했다. 이제 그는 '무명자'라는 이름을 버리고, 강호의 어둠 속을 헤매는 '그림자'가 되어야 했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봉천의 만청루였다.
속삭이는 만청루 현욱과 설화는 며칠 밤낮을 걸어 마침내 중원의 거점 도시 중 하나인 봉천(奉天)에 도착했다. 봉천은 비룡곡의 살벌한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강호의 무인과 상인, 그리고 평범한 백성들이 뒤섞여 북적이는 활기 넘치는 곳이었다. 그러나 도시를 감싸는 화려함 아래에는 피 냄새와 음모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현욱은 흑룡의 기운을 완벽하게 억눌렀다. 흑룡검의 검집을 품속 깊숙이 숨기고, 청룡문 제복 대신 낡고 헤진 평민의 옷을 걸쳤다. 설화 역시 귀족적인 기품을 감추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채 현욱의 누이인 척 행세했다. 그들의 목표는 봉천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품고 있는 객잔, 만청루(萬淸樓)였다.
"만청루는 봉천의 중심가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고급 객잔이지만, 강호의 온갖 정보와 암거래가 오가는 곳입니다. 사파 무인들이 드나드는 것은 물론, 때로는 정파의 비리 무인들도 출입하는 곳이지요." 설화는 예전 청룡문이 보유했던 강호 지도를 떠올리며 현욱에게 설명했다.
"가장 안전한 위장은 '보이지 않는 것'이오. 우리는 미천한 나그네로, 만청루에서 가장 하찮은 일을 하며 숨어들어야 하오." 현욱은 설화를 데리고 만청루 근처의 가장 허름한 여인숙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십 년간 흑곡에서 노역을 하던 경험을 살려, 짐꾼이나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으로 위장하기로 했다.
며칠 후, 현욱은 만청루의 뒷문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만청루는 겉모습만큼이나 내부도 화려했지만, 주방과 잡화 창고는 비좁고 지저분했다. 현욱은 이곳에서 나무를 나르고, 물을 긷는 잡부로 일하기 시작했다. 설화는 여인숙에 남아 주변의 소문을 모으고, 혹시 모를 무림맹의 추격을 감시했다.
만청루에서의 첫 며칠은 지루함과 고독의 연속이었다. 현욱은 일부러 눈에 띄지 않으려 했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일만 했다. 그의 눈은 늘 귀를 열어두고 있었고, 흑곡에서의 수련 덕분에 일반인들은 들을 수 없는 미세한 소리까지 포착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만청루의 주방 구석에서 솥을 닦고 있던 현욱의 귀에 미세한 목소리들이 잡혔다. 만청루의 최고급 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으나, 워낙 은밀하게 속삭이는 탓에 현욱의 이력과 청력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것이다.
"...벽력대가 마공 계승자 하나를 놓쳤다고 합니다. 황보철 대장이 직접 움직였는데도..." "쉿! 마공 계승자가 아니라, '흑룡검제'의 계승자라 부르시오. 사도련에서 그를 찾고 있는 건 단순히 도보(圖譜) 때문만은 아니오."
현욱은 솥을 닦던 손을 멈췄다. '흑룡검제'라는 이름. 그리고 '도보 때문만은 아니다'라는 말.
"총단에서는 천검왕(天劍王)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검왕이 왜 그 흑룡의 잔재를 처리하지 않고 돌아왔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천검왕이 돌아왔다고? 그는 흑룡의 계승자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을 텐데..." 현욱은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천검왕은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사도련은 그가 왜 실패했는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정보에 따르면, 천검왕은 흑룡 계승자가 '벽제단(辟邪丹)'의 재료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습니다. 그 약재가 구천마룡단의 계획을 방해할 핵심이라 보고 있지요."
벽제단! 현욱은 설화와 함께 동굴에서 벽제단의 재료를 확보했다. 설화는 그 약재가 청룡문의 비상 약재라고만 설명했지만, 그것이 구천마룡단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벽제단은 마교의 기운을 막는 해독약이나 방어약이 분명하다. 구천마룡단... 그들이 마교의 힘을 이용하려 하고 있나?' 현욱은 모든 퍼즐 조각이 사도련과 구천마룡단이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모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천검왕은 현욱을 죽이려 했지만, 그의 목표는 '흑룡의 힘'이 아닌, 흑룡의 힘과 연관된 '벽제단'의 재료였을지도 모른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 목소리는 이전의 무인들보다 훨씬 낮고 위압적이었다. "흑룡의 힘이 봉천에 도달했다는 보고가 있었소. 만청루를 중심으로 그 그림자를 쫓으시오. 마공이든 벽제단이든, 모두 우리 총단의 손에 들어와야 하오. 그리고... 조심하시오. '암영대(暗影隊)'가 이미 움직이고 있소."
암영대! 벽력대가 무림맹의 정예라면, 암영대는 사도련 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럽고 잔혹한 암살 부대였다. 이들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정보를 훔치고 목표를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현욱은 솥을 닦는 손에 힘을 주며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새겼다.
- 사도련은 구천마룡단과 연관이 있으며, 벽제단 재료를 노린다.
- 천검왕은 현욱의 정체를 알고도 죽이지 못했고, 그의 행보를 사도련이 주시한다.
- 만청루는 사도련의 핵심 거점이며, 암영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현욱은 밤이 깊어지자 몰래 주방을 빠져나왔다. 그는 여인숙으로 돌아가 설화에게 이 모든 정보를 공유해야 했다.
하지만 여인숙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소와 달랐다. 봉천의 밤거리는 고요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현저히 줄어 있었다. 현욱의 뒤를 따라 걷는 발자국 소리가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현욱은 자신을 에워싸는 차갑고 끈적끈적한 살기를 느꼈다. 벽력대의 강렬한 정파 살기와는 확연히 다른, 어둠과 독이 섞인 듯한 사파의 살기였다.
'설마, 암영대인가?' 현욱은 숨겨둔 흑룡검의 검집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흑룡의 기운을 절대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으나, 지금 이 상황은 이미 그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다.
현욱이 몸을 돌려 어둠 속의 추격자들을 마주했을 때, 그들은 이미 현욱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검은 두건과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고, 눈빛만으로도 상대의 목숨을 앗아갈 듯한 냉기를 뿜어냈다. 그들의 손에는 번쩍이는 단도(短刀)와 독침이 들려 있었다.
"흑룡의 계승자... 여기서 너의 그림자는 끝난다." 선두에 선 암영대원이 비단처럼 부드러우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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