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개 사건 동물학대 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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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갈색 개 사건 동물학대 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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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개 사건은 생체 실험 찬반을 놓고 1903년에서 1910년 사이 영국에서 벌어진 정치적 논란이다. 1903년 스웨덴 여성주의 활동가들이 런던 대학교 의학대학 생체 실험 강의실에 난입한 사건으로 촉발되었고, 이후 1906년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이 동상을 건립하자 의대생들은 동상 파괴를 위해 경찰과 충돌하였다. 논쟁은 명예훼손 소송으로 번졌고, 영국 정부가 동물 생체 실험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심의회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영국 전역을 찬반으로 갈라놓는 “코즈 샐레브르”(프랑스어: cause célèbre, 유명한 쟁점)이었다.[1]

1903년 2월 런던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윌리엄 베일리스는 60명의 학생들 앞에서 갈색 테리어에 대한 생체 실험을 하고 있었다. 스웨덴 출신 여성주의 활동가들은 이 생체 실험이 불법이라고 여겨 강의실에 난입하였다. 베일리스와 조수들은 개가 충분히 마취되어 있었다고 했지만, 활동가들은 개가 분명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저항하였다고 말했다. 전국반생체실험협회는 이 생체 실험이 잔혹하고 적법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개를 이용한 생체 실험으로 세크레틴을 발견한 저명한 생리학자이었던 베일리스는 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다.[2]

1906년 반생체실험협회는 배터시에 갈색 개를 추모하는 동상을 세웠지만, 의대생들은 그 동상에 표시된 선동적 문구에 격분하였다. 동상에는 "영국의 남녀들이여, 얼마나 이런 일을 계속하게 두려는가?"라는 문구가 달려 있었다. 의대생들은 계속하여 동상을 파괴하고자 하였고, 결국엔 경찰이 "반견주의자"로 불린 이들의 습격에 대비해 24 시간 내내 동상을 경호해야 하였다.[3] 1907년 12월 10일 1천여명의 의대생들이 지팡이마다 갈색 개 모형을 매달고 런던 한 가운데를 지나 4백명의 경찰과 여성참정권론자,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지키고 있는 동상 앞에서 충돌하였다. 이 일은 "갈색 개 폭동"이라 불린 여러 충돌 가운데 하나였다.[4]

1910년 3월 배터시 의회는 동상을 철거하기로 의결하였다. 4 명의 노동자가 경찰 120 명의 호위를 받으며 동상을 철거하였고, 2만 건이 넘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의회는 동상을 대장간에 보내어 녹였다.[5] 70년이 지난 1985년 생체 실험 반대론자들은 새 동상을 배터시 공원에 설립하였다.[6] 1997년 피터 메이슨은 옛 동상에서 녹인 청동이 보행자 안전 펜스로 쓰였는데 펜스 위에는 "개 금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썼다.[7]

1837년에서 1901년 사이인 빅토리아 여왕 재임기의 영국 의회는 상하 양원 모두 생체 실험에 대한 반대 입장이 분명했다.[9] 여왕부터 생체 실험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생체 실험은 의대생으로 하여금 살아있는 동물을 해부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때로 동물에 대한 마취 없이 이루어지기도 했다.[10][11] 1875년 당시 영국의 동물을 이용한 실험은 연간 약 300회 정도였으며, 횟수는 해가 갈수록 늘어 갈색 개 사건이 있던 1903년에는 연간 19,084회에 달했다. 2012년 현재의 영국 내 동물 실험 횟수는 411만 건으로 이 가운데 개를 이용한 것은 4,643회이다.[12]

19세기 당시 생리학자들의 연구는 종종 비난을 받았는데, 널리 알려진 클로드 베르나르 역시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13] 베르나르는 아내에게 "생명 과학이라는 가장 반짝이는 방에 들어서려면 길고 섬뜩한 부엌을 지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등, 이러한 비난에 불쾌감을 드러내곤 하였다.[14] 아일랜드 페미니스트 프랜시스 파워 코브는 1875년 런던에서 전국반생체실험협회를 창립하였고, 1898년에는 영국 생체 실험 퇴출 조합을 설립하였다. 전자는 생체 실험에 대한 규제를 목적으로, 후자는 퇴출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15]

1875년 7월 영국 정부는 반대 여론에 이끌려 “과학적 검증을 위해 살아있는 동물을 객체로 하는 실험의 시행”에 대한 왕립 심의회를 개설하였다.[16] 청문 결과 연구자들이 마취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심의회는 개·고양이·말·당나귀·노새 등을 포함하는 동물의 생체 실험을 금지하는 규제안을, 종합의료협의회와 《영국 의학회지》는 금지 대신 보호 조치의 강화를 제시하였으며,[10] 그 결과 1876년 동물학대방지법이 제정되었다. 전국반생체실험협회는 이 법이 실효성은 없이 이름만 그럴싸하다고 비판하였다.[17]

법의 핵심은 마취 없이 생체 실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물 한 마리에 대해서 단 한 차례의 실험만이 허용되었으나, 동일한 실험의 일부로 인정될 때에는 몇 차례까지도 연장하여 실험할 수 있었다. 실험이 끝난 뒤엔 실험이 실패하였다 할지라도 사용된 동물을 죽이도록 하였다.[18] 법률 위반에 대한 고발은 오직 내무성 장관에게 할 수 있었으나, 갈색 개 사건 당시 내무성 장관인 애러터스 애이커스-더글라스는 생체 실험 반대론자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19]


20세기 초 런던 대학교 생리학 교수 어니스트 스털링과 그의 매형이기도 하였던 윌리엄 베일리스는 개를 이용한 생체 실험을 통하여 신경계가 이자의 분비물을 조절한다는 이반 파블로프의 가설을 검증하였다.[20] 스털링의 전기를 쓴 존 헨더슨은 스털링과 베일리스가 매우 자주 실험을 하였으며 스털링의 연구소는 런던에서 가장 바삐 돌아가는 곳이었다고 썼다.[8] 베일리스는 1890년 생체실험 자격을 획득했고 1900년부터 생리학 강의를 했다.[21]

둘은 췌장에서 만들어지는 소화액이 미즙(糜汁, Chyme)형태로 십이지장과 공장으로 들어가 산성도를 높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마취된 개의 십이지장과 공장 신경을 절단하고 혈관은 그대로 두어 산성도의 증가가 신경의 조절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으며 매개체가 혈관을 통해 이동함으로써 진행됨을 확인하였다. 새롭게 발견된 매개체는 순환계에서 소화기관으로 배출되는 물질이란 의미에서 세크레틴(secretin)이라고 명명되었다.[20]

1905년 스털링은 그리스어 호르모(고대 그리스어: ὁρµάω, 촉진(또는 흥분)시키다)를 어근으로 삼아 호르몬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호르몬은 세크레틴과 같이 아주 작은 양으로도 생체 기관의 작용을 촉진시키는 물질을 말한다. 스털링과 베일리스는 1899년에 마취된 개를 이용한 실험으로 창자의 연동 운동을 발견하기도 하는 등 생체 실험을 통해 많은 생리학 가설을 검증하였다.[22][23]


1903년 4월 여성주의 활동가이자 생체실험 반대론자였던 리찌 린드 아프 하게비(Lizzy Lind af Hageby)와 라이자 카터리네 샤르타우(Leisa Katherine Schartau)는 스털링과 베일리스의 강의실로 뛰쳐 들어갔다. 두 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 린드 아프 하게비의 아버지는 스웨덴 대법원장을 역임하였고, 할아버지는 스웨덴 국왕의 시종이면서 영국 첼튼햄 여자대학의 교직원이기도 하였다. 샤르타우의 아버지는 스웨덴군의 대위였다.[24]

1900년 두 여성은 당시 동물실험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를 방문하였다. 둘은 방 하나를 가득 매운 우리마다 상처받고 병든 동물이 놓여 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었고, 스웨덴으로 돌아간 뒤 스웨덴 반생체실험협회를 창립하였다. 1902년 둘은 런던 여자 의예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당시의 다른 대학과 달리 생체실험을 하지 않았다. 린드 아프 하게비와 샤르타우는 생체실험 반대를 위해 자신들이 의사가 되고자 하였다.[24]

사건 당시 킹스 칼리지와 유니버시티 칼리지에는 100개의 강의가 개설되어 있었는데, 50 회의 생체 실험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20 회는 "전체적 생체실험"이었다.[24] 이들은 당시의 일을 담은 《목격담》을 일기로 기록하였고, 훗날 《과학의 도살장: 두 생리학도의 일기에서 발췌》로 출간하였다.[25] 두 여성은 갈색 개의 생체 실험 동안 강의실에서는 웃음 소리가 났다고 기록하면서 해당 장의 제목을 〈재미〉라고 지었다. 이 제목은 명예훼손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하였다.[26]


생체실험에 대한 2차 왕립 심의회편집

1906년 9월 정부는 생체 실험에 대한 2차 심의회를 개최하였다.[49] 심의회는 청문을 통해 과학자들과 생체실험 반대론자의 의견을 들었고, 1906년 12월에는 사흘 동안 어니스트 스털링을 불러 청문하였다.[50]

심의 보고서의 공표는 매우 늦게 이루어져 1912년 3월에야 이루어졌는데 그 사이 심의 위원 열 명 가운데 둘은 몇 차례의 병환 끝에 사망한 뒤였다. 애초 두 명이었던 상임 조사관은 네 명으로 늘어났고 보고서의 분량은 139쪽이었다. 보고서는 생체 실험 동안 동물을 마비시키기 위해 쓰이는 독성 물질인 쿠라레의 사용 규제, 실험 실패를 의미한다고 할 지라도 고통 받은 동물에 대한 안락사 의무화, 그리고 척수 절개술에 대한 확고한 정의 등을 규정하였다. 보고서는 또한 동물학대방지법의 개선을 위한 세부 사항들을 장관에게 조언하였는데, 이는 1986년 동물에 대한 과학적 실험에 관한 법률에 의한 동물과학실험위원회 설치의 근간이 되었다.[51]

https://ko.m.wikipedia.org/wiki/%EA%B0%88%EC%83%89_%EA%B0%9C_%EC%82%AC%EA%B1%B4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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