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숨을 앗아가는 차가운 손: 심장을 꿰뚫는 메스

2025. 11. 27. 19:50나의일상

반응형

🌌 서장: 차가운 새벽을 가르는 날카로운 메스 소리

깊은 새벽, 서울 도심의 거대한 병원, 성도 대학병원의 흉부외과 수술실은 언제나처럼 차가운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희뿌연 조명 아래, 메스의 날카로운 은빛만이 번뜩이는 곳. 이곳의 제왕은 단연 이설(李雪)이었다.

스물아홉. 흉부외과 레지던트 4년 차. '눈처럼 차가운'이라는 이름의 뜻과는 달리, 그녀의 심장은 환자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완벽을 향한 고독한 집착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손은 그 누구보다 차가웠다. 마치 얼음 조각처럼, 오직 생명과 죽음의 경계만을 예리하게 가르는 차가운 기계처럼.

"헤모글로빈 수치 계속 떨어집니다! 심박수 40이하, 벤틸레이터 산소포화도 70!"

수술실은 절규와도 같은 긴급한 목소리로 아수라장이었다. 앰뷸런스에 실려 온 환자는 30대 남성. 불의의 교통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져 심장을 찌른, 최악의 경우인 심장 압전 상태였다.

"썩션! 멈추지 마! 라이트 앵글! (Right Angle, 직각 겸자) 빨리!"

이설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수술실 안의 모든 소음을 단칼에 베어낼 만큼 날카롭고 명료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앞에는 피로 흥건한 환자의 흉부가 마치 시한폭탄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지체 없이 날카로운 메스를 쥐고는, 이미 절개된 흉곽을 더욱 과감하게 열었다. 뼈를 자르는 기계음이 귀청을 때리고, 핏방울이 보호 안경에 튀었다. 시야를 가리는 피를 닦아내면서, 이설은 재빨리 심장 주변을 덮고 있는 혈종을 걷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출혈의 원인이 된 작은 파열 부위를 발견했다.

"심근 봉합 세트! 4-0 프롤린 (Prolene, 수술용 실) 준비!"

그녀의 손놀림은 신들린 듯 빨랐다. 심장 근육은 끊임없이 뛰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오차, 단 한 번의 떨림도 용납되지 않는 극한의 상황. 수술용 바늘이 춤추듯 파열된 심장 근육 사이를 오갔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땀방울이 이설의 미간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15분 후.

"출혈... 멈췄습니다! 심박수 안정화됩니다. 80! 산소포화도 95!" 마취과 의사의 안도 섞인 목소리가 수술실에 울려 퍼졌다.

이설은 메스를 내려놓았다. 승리감보다는 고독한 책임감을 내려놓은 듯한 무표정이었다.

"클로징 (봉합) 시작해. 오늘 아침 수술 스케줄 확인해."

그녀는 뒤돌아섰다. 길고 혹독했던 새벽이 지나고, 창문 밖으로 희미하게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긴 가운에는 환자의 피가 묻어 있었지만, 그녀의 내면은 여전히 차가운 얼음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이설은 알지 못했다. 오늘 그녀가 살려낸 이 환자가, 앞으로 그녀의 완벽했던 삶의 '개연성'을 송두리째 뒤흔들, 파국적인 운명의 실타래를 쥐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실타래는 병원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를 얽어매기 위해 준비되고 있었다.

 

🔪 1화: 되살아난 망자의 눈빛과 차트 속의 그림자

이설이 수술실을 나섰을 때, 이미 복도에는 그녀를 기다리는 날카로운 시선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흉부외과 과장, 강태헌이었다. 50대 중반의 그는 명예와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물로, 이설의 천재적인 실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이용하려 드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설 선생. 새벽 응급 콜에 바로 나와 완벽하게 처리했더군. 역시 자네의 집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해."

칭찬이었지만, 강 과장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설을 '자네'라고 부르며 한 수 아래로 대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실력에 대한 불안감이 엿보였다.

"과장님. 제 역할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환자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놀랍도록 안정세야. 하지만 그 환자... 백선우라고 했지? 신원 확인에 문제가 좀 있더군."

"문제요?"

이설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오직 환자의 생명만을 두고 싸웠기에, 환자의 이름이나 배경은 중요하지 않았다.

"경찰이 와서 신원을 조회했는데, 이 환자의 신분증과 지문이 5년 전 실종 처리된 인물과 일치한 모양이야.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사망 처리된 사람과."

이설의 차가운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망 처리된 인물을 그녀가 살려냈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의료 기록의 문제가 아니었다. 소설보다 더 기이한 현실이었다.

"5년 전 교통사고로 신원 미상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DNA 검사 결과 이 백선우라는 인물로 최종 확정되어 보험금까지 지급 완료되었다더군." 강 과장이 덧붙였다.

이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어딘가 불안하게 느껴졌던 백선우 환자의 상태를 떠올렸다. 응급 수술 당시, 그의 몸에는 교통사고 외에도 오래된 상처 자국들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눈빛.

수술 전, 산소마스크를 씌우기 직전, 의식이 희미하게 남아있던 환자는 이설을 향해 잠깐 눈을 떴었다.

그 눈빛은 도움을 구하는 간절함이 아니었다. 오히려 차가운 경고나, 혹은 깊은 절망을 담고 있는 듯했다. 마치 '나를 살려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는 듯한 기묘한 눈빛이었다.

"백선우 환자의 과거 진료 기록을 전부 찾아보겠습니다." 이설은 직감했다. 이 사건은 그녀의 완벽한 의사 생활에 던져진 단순한 돌멩이가 아님을.

[백선우의 과거]

이설은 레지던트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성도 대학병원의 과거 전산 기록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녀가 검색창에 '백선우' 석 자를 입력하자, 놀랍게도 5년 전의 퇴원 기록이 하나 검색되었다.

환자명: 백선우 (30세) 진단명: 급성 심근경색, 불안정 협심증 진료의: 강태헌 흉부외과 과장

그녀의 심장이 순간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5년 전, 지금의 강 과장이 이 환자를 진료했고, 그 후 이 환자는 '사망' 처리되었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강 과장이 5년 전 이 환자와 얽힌 무언가를 은폐하기 위해 그의 사망을 방조하거나, 혹은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는 걸까?

이설은 미친 듯이 차트를 스크롤했다. 백선우는 5년 전, 대기업 비자금 관련 내부 고발을 시도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입원했다는 간단한 기록 외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료 기록의 마지막 줄에서 소름 끼치는 메모를 발견했다.

"환자, 퇴원 2일 후 실종. 특이 사항: 보호자 요청에 의한 퇴원 절차 진행됨. 보호자: 김도현 (강 과장 부인)"

이설은 숨을 멈췄다. 강 과장의 부인이 왜 그의 퇴원을 도왔을까? 그리고 환자는 퇴원 후 바로 '사망' 처리되었다.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들어가는 섬뜩한 개연성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흉부외과 과장, 강태헌의 어둠의 비밀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녀의 메스가 심장 압전된 생명을 살려낸 것이 아니라, 5년 동안 잠들어 있던 병원의 거대한 부패를 깨운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이설은 강 과장을 찾아갔다. 그녀의 손에는 프린트된 백선우의 과거 진료 기록과, 차가운 결의가 담겨 있었다.

"과장님. 백선우 환자 차트에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5년 전 환자의 퇴원을 돕고 실종에 연루된 '김도현'이라는 분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강 과장의 눈빛이 찰나의 순간, 짐승처럼 섬뜩하게 번뜩였다.

 

⛓️ 2화: 덫에 걸린 천재와 과거의 흔적

이설의 질문에 강태헌 과장의 얼굴에서 모든 온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빛은 직전의 섬뜩했던 번뜩임 대신,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이설을 꿰뚫어 보았다.

"이설 선생. 자네, 지금 뭘 보고 온 건가?" 강 과장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속에는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문을 닫았다.

이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 역시 강 과장만큼이나 차분하고 확고했다.

"5년 전 백선우 환자의 퇴원 기록과 보호자 기록입니다. 보호자는 과장님의 배우자이신 '김도현' 씨로 되어 있습니다. 환자는 퇴원 후 이틀 만에 실종, 그리고 사망 처리되었죠. 사망 처리된 사람을 제가 살려냈습니다, 과장님. 이 사실은 개연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의료 기록의 오류인지, 아니면..."

이설은 말을 멈추고 강 과장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녀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가 스스로 진실의 일부를 드러내도록 유도하는 것.

강 과장은 피식, 짧은 웃음을 흘렸다.

"역시 이설답군. 늘 진실과 논리만을 추구하지." 그는 책상으로 돌아가 앉으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소리가 집무실의 긴장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김도현은... 나의 아내가 맞네. 하지만 그녀는 당시 병원의 행정 업무를 돕는 자원봉사자였어. 백선우는 대기업 비자금을 고발하려던 인물로, 퇴원 후에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네. 김도현이 그를 잠깐이나마 보호하려고 했던 것은 순수한 선의였지. 하지만 실종 이후,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네. 내 아내는 단지 선의를 베푼 것뿐이야."

강 과장의 설명은 완벽하게 합리적이었다. 이설은 머릿속으로 그의 말을 되짚었다. 선의? 하지만 왜 하필 과장 부인이 개입했고, 그 환자는 왜 강 과장이 진료를 맡았을까?

"환자가 입원했을 때, 강 과장님은 대기업의 심장 수술을 전담하시던 분이었습니다. 그 환자가 들고 있던 비자금 관련 정보가 혹시 병원이나 과장님께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이설의 직설적인 질문에 강 과장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이설! 자네 지금 선을 넘고 있어. 자네는 의사지, 경찰이 아닐세. 자네의 일은 살려낸 환자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괜히 병원의 명예와 나의 개인사에 진흙탕을 묻히지 말게."

강 과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목소리에는 위협적인 기운이 실려 있었다.

"자네가 지금처럼 완벽한 메스를 유지하는 한, 성도 대학병원의 다음 흉부외과 과장 자리는 자네 것일세. 하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이 자네의 손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심장을 다루는 의사에게 가장 치명적인 건, 메스를 잡은 손의 떨림일 테니."

그의 마지막 말은 이설의 심장을 정통으로 찔렀다. 그녀의 가장 큰 트라우마를 건드린 것이다.


[차가운 손의 숨겨진 떨림]

이설의 손이 차가운 것은 긴장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자신을 얼음처럼 동결시켜야만 했다. 그녀는 과거, 중요한 수술에서 한 번의 떨림으로 환자를 잃었던 경험이 있었다.

5년 전, 레지던트 1년 차였을 때, 그녀는 선배의 지도 아래 첫 심장 수술 보조에 나섰다. 갑작스러운 출혈 상황에서, 그녀는 패닉에 빠져 메스를 미세하게 떨었고, 그 찰나의 순간이 환자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 이후, 그녀는 자신을 감정 없는 기계로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녀의 모든 완벽함은, 그 한 번의 '떨림'을 잊기 위한 처절한 자기 통제였다.

강 과장은 정확히 그녀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설에게 권력을 미끼로 제시하는 동시에, 그녀의 트라우마를 이용해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설은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의 심장은 고요한 듯 보였으나,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백선우 환자의 중환자실로 향했다. 회복 중인 환자는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산소마스크를 통해 희미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내가 살린 이 사람이, 강 과장이 5년 전 묻으려 했던 진실의 열쇠라면, 나는 끝까지 파헤쳐야 한다.

이설은 결심했다. 그녀는 중환자실 모니터 옆에 붙어 있는 환자의 약물 투여 기록을 살펴보았다. 그때, 백선우 환자의 팔뚝에서 주사 자국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정맥 주사 자국과는 달리, 미세하지만 여러 번 찔린 듯한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의식이 없던 환자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은 새벽 수술 때처럼 차가운 경고를 담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미세하게 입을 움직였다. 이설은 그의 입술 모양을 읽으려 가까이 다가갔다.

"도... 망... 쳐..."

환자는 마치 필사적으로 경고하듯,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인 후 다시 의식을 잃었다. 도망치라고? 누구에게서? 그리고 그가 도망쳐야 할 대상이 강 과장이라면, 지금 자신은 이미 그 덫 안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었다.

이설은 자신이 강 과장의 '차기 과장'이라는 달콤한 덫과, 백선우가 쥐고 있는 '과거의 진실'이라는 날카로운 칼날 사이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는 도망치거나, 아니면 이 차가운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 3화: 도망자의 메시지와 의도된 오진

백선우 환자가 속삭인 "도망쳐"라는 메시지는 이설의 완벽한 이성을 뒤흔들었다. 의식이 희미한 환자가 발작적으로 남긴 이 경고는, 그녀가 강태헌 과장의 어둠을 파헤치기 시작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이설은 백선우의 미세한 주사 자국을 다시 살폈다. 여러 번 찔린 듯한 흔적은 마치 정맥을 찾지 못해 헤맨 흔적 같기도 했지만, 일반적인 의료 행위에서 보기는 힘든 패턴이었다. 그녀는 즉시 백선우의 혈액 샘플을 은밀하게 채취해 병원 내 연구실의 후배에게 일반적인 약물 검사 목록에 없는 성분을 포함하여 분석을 의뢰했다. 그녀는 강 과장이나 병원 시스템이 덮으려 했던 무언가가 환자의 몸에 남아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5년 전 백선우의 심장]

이설은 다시 5년 전 백선우의 진료 기록, 특히 '급성 심근경색' 진단 부분을 깊이 파고들었다.

심근경색은 심장 근육에 피를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막혀 발생하는 질환이다. 5년 전 백선우의 심전도(ECG)와 심장 효소 수치는 모두 심근경색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설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30대 초반의 환자가 급성 심근경색? 흔치 않은 일이야."

이설은 5년 전 차트와 자신이 응급 수술 시 관찰했던 환자의 심장 상태를 비교했다. 그녀가 직접 봉합했던 심근 조직은 탄력 있었고, 관상동맥에도 심각한 동맥경화나 협착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즉, 이 환자는 심근경색을 일으킬 만한 기저 질환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5년 전의 심근경색은 왜 발생했을까?

심근경색의 비전형적인 원인 중 하나는 '약물 유발 심장 독성'이다. 특정 독성 물질이나 약물은 심장 근육에 갑작스러운 경련이나 손상을 일으켜 경색을 유발할 수 있다.

이설의 차가운 눈빛이 더욱 예리해졌다. 그녀는 5년 전 백선우의 심근경색 진단이 의도된 오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누군가 백선우를 위협하기 위해 심장에 무리가 가는 약물을 투여했고, 강 과장은 그것을 자연스러운 심장병으로 위장해 사건을 덮으려 했을 것이다. 강 과장의 부인 김도현이 환자의 퇴원을 도왔다는 기록은, 어쩌면 그를 '사망'으로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을지도 모른다.

[숨겨진 진실을 쥔 인물]

이설은 백선우 환자의 진료에 5년 전 참여했던 의료진 명단을 확인했다. 강 과장 외에, 당시 레지던트 2년 차였던 염기준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지금은 지방 대학병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강 과장에게는 물을 수 없다. 이설은 염기준 교수가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을 유일한 생존 증인이라고 판단했다.

다음 날, 이설은 새벽 수술이 끝난 직후, 무단으로 연차를 내고 지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차가운 외투 아래에는 강 과장과의 정면 승부를 위한 첫 번째 증거 수집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염기준 교수는 작은 병원 회의실에서 이설을 만났다. 이설은 그의 눈빛에서 강 과장의 이름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불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성도 대학병원 흉부외과 레지던트 이설입니다. 염기준 교수님. 5년 전 백선우 환자 진료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염기준 교수는 손에 쥔 커피잔을 떨기 시작했다. "아... 백선우 환자요.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5년 전 백선우 환자의 심근경색은 약물 유발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시 환자의 독성 검사 기록을 보셨습니까? 혹은... 환자에게 투여된 약물 중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없으셨나요?" 이설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염기준 교수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설 선생. 강 과장이 자네에게 말했을 텐데. 의사는 진실을 파헤치는 사람이 아니야. 특히 성도 대학병원의 진실은."

"그 진실 때문에 한 사람이 5년 동안 '사망'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환자는 지금 저에게 '도망치라'고 경고했습니다." 이설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아닌, 진실을 향한 냉정한 집착이 담겨 있었다.

염기준 교수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당시 백선우 환자에게... 심근경색을 유발할 수 있는 특정 약물이 투여된 흔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차트에 기록하려 했지만... 강 과장님이 막으셨죠. '단순한 심근경색으로 처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의 고백은 이설의 추론이 맞았음을 확증하는 결정적인 증언이었다. 강 과장은 5년 전, 대기업 비자금을 은폐하기 위해 백선우를 처리하려 했고, 그의 죽음을 병원 차트 속에서 조작했던 것이다.

"염 교수님. 그 약물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백선우 환자의 혈액 분석 결과가 나오는 대로 확인해야 합니다."

염기준 교수는 떨리는 손으로 작은 쪽지를 이설에게 건넸다.

"이설 선생... 나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메모를 강 과장에게 들키면... 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이 메모가 자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조심하십시오. 자네는 이미 깊이 들어왔어요."

이설은 쪽지를 쥐었다. 염기준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이설은 쪽지를 조용히 접어 가운 주머니에 넣고, 미련 없이 염기준 교수를 뒤로했다.

[쪽지 속의 진실]

이설이 차 안에서 쪽지를 펼쳤다. 깔끔하지 않은 글씨체로 단 두 단어가 적혀 있었다.

'R-시퀀스', '2019-R03'

'R-시퀀스'는 제약 분야에서 실험적으로 개발되는 약물군을 칭하는 코드 같았다. 그리고 '2019-R03'은 그 약물 중 하나의 코드명일 터였다. 이설의 직감은 이것이 백선우 환자에게 투여된 '심장 독성 약물'일 것이라고 속삭였다.

염기준의 증언과 쪽지의 코드명. 이제 그녀에게는 강 과장을 향한 강력한 무기가 생겼다. 그러나 그 무기가 그녀를 보호해 줄지, 아니면 오히려 그녀의 목에 겨눠질 칼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이설은 연구실 후배에게서 급한 문자를 받았다.

[이설 선배, 환자 혈액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선배가 요청하신 비정형 성분이 검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분은 일반적인 의약품 성분이 아닙니다. 어딘가에서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이설은 가운 주머니에 든 쪽지의 'R-시퀀스'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제 이 약물의 근원을 찾아야 했다. 그 근원은 병원의 어둠과 5년 전 백선우를 죽이려 했던 배후와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 4화: R-시퀀스의 정체와 제약 비리의 늪

이설은 연구실 후배에게 'R-시퀀스'와 '2019-R03'이라는 코드를 즉시 조사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병원으로 향하지 않고, 도심 외곽에 위치한 제약회사 밀집 지역으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병원 시스템을 거치는 순간, 강 과장에게 모든 것이 노출될 것이라 확신했다.

[연구실의 증거와 제약회사]

후배는 몇 시간 만에 놀라운 정보를 찾아냈다. R-시퀀스는 현재 성도 대학병원이 임상 시험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는 거대 제약회사 '나노팜(NanoPharm)'에서 극비리에 개발 중인 신약 후보 물질군이었다.

"선배. R-시퀀스는 아직 정식 명칭도 없어요. 극소수의 연구진만 다루는 자료입니다. '2019-R03'은 그중 심혈관 질환 치료제로 개발되던 초기 버전인데, 독성 문제가 심각해서 5년 전에 개발이 잠정 중단되었던 물질이에요. 그런데 이게 왜 백선우 환자에게서 나왔죠?"

이설의 추론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5년 전, 백선우는 대기업 비자금을 고발하려 했고, 그 대기업은 아마도 나노팜의 주요 투자처나 협력사였을 것이다. 나노팜은 심각한 독성 문제가 있는 약물을 이용해 백선우를 조용히 제거하려 했고, 성도 대학병원의 흉부외과 과장 강태헌이 이 '의도된 살인'의 은폐를 맡은 것이다.

이설은 나노팜의 임상 시험 자료실을 해킹해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예전에 병원의 전산 보안 관련 업무를 돕던, 지금은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IT 전문가 천호진을 떠올렸다. 천호진은 과거 이설이 수술했던 희귀 심장병 환자의 동생이었고, 이설에게 깊은 신뢰와 은혜를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이설은 천호진을 병원 근처의 외딴 카페에서 만났다.

"호진 씨. 나노팜의 5년 전 R-시퀀스 임상 시험 자료에 접근해야 합니다. 특히 2019년에 폐기된 R03 관련 자료요. 병원의 서버가 아닌, 나노팜 서버를 뚫어야 해요."

천호진은 이설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놀랐다. "선배님. 나노팜은 국내 최고 수준의 보안을 자랑합니다. 이건 해킹이에요. 발각되면 저뿐만 아니라 선배님까지 위험해집니다."

"내 직업과 명예를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5년 전 성도 대학병원과 나노팜이 공모해 한 사람을 '죽음'으로 위장한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호진 씨가 아니면 이 일을 할 사람이 없어요." 이설의 눈빛은 강렬한 호소력과 함께 흔들림 없는 결의를 담고 있었다.

천호진은 이설의 진심을 읽었고, 그녀가 환자의 생명에 모든 것을 거는 의사임을 알았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서버 접근 권한을 획득하는 데 며칠이 걸릴 겁니다. 일단 선배님은 병원에서 강 과장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계셔야 해요."

[강 과장의 견제와 덫]

다음 날 아침, 이설은 중환자실 회진을 돌고 있었다. 백선우 환자는 여전히 의식이 명확하지 않았지만, 심장 박동은 안정적이었다.

그때, 강 과장이 중환자실에 나타났다. 그의 옆에는 성도 대학병원 법무팀장과, 나노팜 소속의 법률 대리인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이설 선생. 백선우 환자에 대한 자네의 집착이 조금 과한 것 같네. 어젯밤, 자네가 백선우 환자의 차트에서 '사망 처리'된 인물의 신원 정보를 유출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네." 강 과장의 목소리는 공개적으로 이설을 압박하고 있었다.

"과장님. 저는 환자의 진료 기록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신원 유출이라니요?" 이설은 당황한 기색 없이 맞섰다.

법무팀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백선우 씨는 현재 '신분 도용'이 의심되는 미확인 신원입니다. 이설 레지던트가 개인적인 목적을 가지고 환자의 정보를 조회하고 외부에 퍼뜨리려 했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당분간 백선우 환자의 진료에서 손을 떼십시오."

나노팜 측 대리인이 강 과장의 지시를 공고히 했다. "나노팜은 성도 대학병원과 환자의 안전을 위해 백선우 씨에게 일대일 간병인을 배치하고, 저희 측 법률팀이 환자 병실에 상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이설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하려는 강 과장의 공개적인 견제였다. 백선우 환자는 이제 강 과장의 감시 아래 들어갔고, 이설은 그를 지킬 수도, 추가적인 단서를 얻을 수도 없게 되었다.

이설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강하게 반발하면 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것임을 알았다.

"알겠습니다. 환자의 회복을 위해 병원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이설은 표정 변화 없이 중환자실을 나왔다.

[밤의 습격과 붕괴의 시작]

그날 밤. 이설은 숙직실에서 강 과장과의 싸움에서 사용할 논리와 증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연구실 후배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선배님! 큰일 났습니다! 제가 백선우 환자의 혈액 샘플을 은밀하게 분석했던 연구실이... 방금 화재가 났습니다! 단순 합선이라고 하는데... 제가 검출했던 '2019-R03' 관련 샘플과 모든 백업 자료가 전부 타버렸어요!"

이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단순한 합선 화재가 아니었다. 강 과장이 움직였다. 그녀의 뒤를 밟고 있었던 것이다. 백선우를 살린 메스를 들고 진실을 파헤치려 했던 이설은, 이제 증거가 불타버린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그 순간, 숙직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이설은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문 앞에는 흉부외과 펠로우 정민준이 서 있었다. 그는 이설과 함께 강 과장의 밑에서 일하는 의사였다.

"이설 선배. 지금 강 과장님이 선배님을 찾고 계십니다. 과장님 집무실로 바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정민준의 눈빛은 무언가 불안함과 경고를 담고 있었다.

이설은 온몸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증거는 사라졌고, 강 과장은 그녀를 자신의 영역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가장 치명적인 덫에 걸려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메스 케이스를 확인했다. 그녀의 차가운 손에는 이제 어떤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고, 오직 심장을 가를 수 있는 차가운 메스만이 남아 있었다.

💣 5화: 집무실의 심문과 폭로의 순간

이설은 정민준 펠로우를 따라 강 과장의 집무실로 향했다. 복도는 길고, 병원의 밤은 침묵했지만, 그녀의 발걸음 소리만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날카롭게 울렸다. 이설은 강 과장이 단순히 해고나 징계를 통보하려는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가 그녀의 약점인 '떨림'을 건드려 정신적으로 완전히 붕괴시키려 할 것이다.

집무실 문이 닫히자, 강 과장은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오만함으로 번득였다.

"이설 선생. 연구실 화재 사건에 대해 들었나? 자네가 은밀하게 백선우 환자의 혈액 샘플을 분석하려 했다는 사실이, 이번 화재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많네. 법무팀도 자네의 행동을 직무 유기와 병원 기물 파손 방조로 보고 있어."

강 과장은 이설의 모든 탈출 경로를 막아섰다. 혈액 샘플이 사라졌고, 염기준의 증언은 증거로 사용할 수 없는 단순한 진술일 뿐이었다.

"과장님. 저는 환자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5년 전 차트의 의아한 점을 확인하는 것이 의사의 기본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이설은 감정을 최대한 억누른 채 말했다.

"의사의 의무? 자네는 그 의무 때문에 한 번 환자를 죽이지 않았나?"

강 과장은 이설의 가장 깊은 상처를 정면으로 후벼 팠다. 이설의 안색이 미세하게 창백해졌다.

"5년 전, 자네가 보조했던 그 흉부 대동맥류 환자. 자네의 손이 1초만 덜 떨렸어도 그 환자는 살았을 걸세. 자네는 늘 완벽을 추구하지만, 그 내면에는 통제할 수 없는 '떨림'이 있지. 자네가 지금 진실을 쫓는 것은 그 죄책감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일 뿐이야."

강 과장의 말은 논리적이었지만,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이설의 손이 차가워지며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을 억눌렀다.

"저의 과거는 과장님의 비리를 덮을 수 없습니다. 백선우 환자에게는 심장 독성 약물이 투여되었고, 과장님은 그것을 심근경색으로 위장하셨습니다." 이설은 증거가 없더라도 이 사실을 관철해야 했다.

"약물? 증거 있나? 샘플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나노팜 임상 자료는 극비 보안 속에 있네. 자네가 믿는 그 증인(염기준)은 겁쟁이라 입을 열지 않을 거고. 이설 선생. 자네가 가진 것은 망상과 떨리는 손뿐이야. 5년 전처럼, 자네는 이번에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실패할 걸세."

강 과장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듯, 이설의 눈을 응시했다.

"자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깨끗이 사과하고, 모든 것을 잊고, 다시 메스를 잡을 수 있도록 나의 선처를 구하는 것뿐이야. 선택하게."


[예기치 못한 반전]

이설이 깊은 수렁에 빠지는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천호진이었다.

이설은 강 과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잠깐만 시간을 주십시오. 중요한 연락입니다."

"이설 선생! 나노팜 서버를 뚫었습니다! 5년 전 백선우의 심근경색과 관련된 모든 자료를 확보했어요.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천호진의 목소리는 흥분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설은 강 과장의 싸늘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호진이 보내준 암호화된 파일을 열었다. 파일에는 5년 전 나노팜이 '2019-R03'을 성도 대학병원에 비밀리에 제공하고, 강 과장이 이를 임상 시험 환자가 아닌 일반 환자에게 투여하도록 지시한 내부 이메일과 함께, 강 과장의 비자금 계좌로 수억 원이 입금된 거래 내역이 담겨 있었다.

이설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운 결의로 가득 찼다. 떨리던 그녀의 손은 기적처럼 다시 단단하게 굳어졌다.

"강 과장님." 이설은 전화를 끊고 말했다. "저는 더 이상 과장님의 선처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는 휴대전화 화면을 강 과장 쪽으로 돌렸다. 화면에는 강 과장의 이름과 계좌 번호, 그리고 나노팜의 비공개 메일 내용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5년 전 백선우 환자에게 '2019-R03'을 투여하도록 지시하셨고, 그 대가로 나노팜에서 거액의 비자금을 받으셨습니다. 이메일과 거래 내역은 모두 나노팜의 공식 서버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심근경색이 아닌, 독극물에 의한 의도된 심장 손상이었고, 과장님은 이를 은폐하셨습니다. 백선우 환자가 사망 처리된 이유도 이것 때문이겠죠."

강 과장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오만함은 산산조각 났고, 눈빛에는 충격과 함께 맹렬한 분노가 떠올랐다.

"이... 이설! 감히 네가... 그 파일 당장 지워! 그건 조작된 자료야!" 강 과장은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이설에게 달려들려 했다.

"늦었습니다." 이설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이 파일은 이미 외부의 안전한 서버에 복사되었으며, 병원 내부의 비리가 밝혀지도록 언론과 경찰에 모두 전달될 것입니다."

강 과장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가 수십 년간 쌓아 올린 명예와 권력이, 이설의 차가운 메스보다 더 날카로운 진실의 증거 앞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자네는... 자네는 스스로의 미래를 완전히 부숴버렸어! 이 병원은 자네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걸세!" 강 과장은 격렬하게 숨을 몰아쉬며 이를 갈았다.

이설은 미련 없이 집무실 문을 열고 나섰다. 그녀의 내면은 여전히 고독했지만, 5년 전의 죄책감으로 인한 '떨림'은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떨림 대신, 진실을 마주한 자의 차가운 평정심을 되찾았다.

병원의 새벽은 다시 밝아오고 있었다. 이설은 강 과장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녀는 이 거대한 병원 시스템의 어둠과 이제 막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원인, 백선우 환자에게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비밀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 6화: 폭풍의 성도대학병원과 위협받는 생명

이설이 강 과장의 집무실을 나선 지 30분 만에 성도 대학병원은 거대한 폭풍의 중심에 놓였다. 천호진이 보낸 파일은 예정대로 언론사와 경찰에 도달했고, 새벽부터 병원 앞에는 취재진과 경찰 차량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었다.

흉부외과 과장 강태헌은 비리 혐의와 5년 전 백선우 환자의 의도적 살인 은폐 혐의로 즉시 경찰에 연행되었다. 성도 대학병원 이사회는 긴급 회의를 소집했고, 나노팜 주가는 폭락했다. 이설은 하루아침에 병원의 거대한 비리를 폭로한 '의로운 고발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병원 내부에서는 그녀를 조직을 파괴한 '배신자'로 보는 시선도 존재했다.

[백선우의 위험]

소동 속에서도 이설의 머릿속에는 오직 백선우 환자의 안전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 과장은 끌려갔지만, 그가 몸담았던 조직—대기업과 나노팜—의 배후는 여전히 건재했다. 백선우는 살아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며,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설은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백선우의 병실 문 앞에는 사복을 입은 형사들이 이미 배치되어 있었다. 그녀는 형사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환자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

"이설 선생. 죄송하지만, 현재 백선우 씨는 중요한 증인이기 때문에 저희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모든 의료 행위는 법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되어야 합니다." 형사 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설은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환자 감시 모니터를 살폈다. 심장 박동수, 혈압, 산소포화도는 모두 안정적이었다.

"환자에게 투여되는 약물 목록을 보여주십시오." 이설이 요청했다.

형사 팀장은 난색을 표했지만, 이설이 이 사건의 핵심 인물임을 알기에 간호사에게 약물 목록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이설은 약물 목록을 훑어보았다. 항생제, 진통제, 수액 등 일반적인 중환자실 투여 약물들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이 한 줄에서 멈췄다.

'헤파린 (Heparin) 5,000 IU/hr 지속 정맥 투여'

헤파린은 혈액 응고를 막는 항응고제이다. 심장 수술 후 혈전 생성을 방지하기 위해 흔히 사용되지만, 백선우는 교통사고로 갈비뼈가 부러져 심장을 찔렀던 환자다. 심장 주변과 흉곽에 미세한 출혈 위험이 여전히 남아있을 수 있는 환자에게 높은 용량의 헤파린을 지속적으로 투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처방이었다.

"간호사님! 지금 당장 헤파린 투여를 중단하십시오! 이 환자는 심장 봉합 부위의 재출혈 위험이 높습니다. 헤파린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설이 즉시 명령했다.

간호사는 당황했다. "하지만... 어제 오후에 새로 오신 심장내과 전문의가 처방한 내용입니다. 출혈 위험보다 혈전 예방이 더 시급하다고 하셨는데요..."

"어제 새로 온 전문의요? 이름이 무엇입니까? 흉부외과와 심장내과는 이런 처방을 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이설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재구성했다. 강 과장의 구속 후, 백선우를 처리하려는 배후가 의료 시스템을 이용해 살인을 시도하고 있었다. 헤파린 과다 투여로 인한 내출혈은 자연스러운 합병증으로 위장될 수 있다.

그때,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삐-----!

백선우 환자의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고, 심박수가 치솟기 시작했다. 심장 봉합 부위가 터진 것이다.

"재출혈입니다! 심장 압전! 다시 심장이 피로 압박받고 있습니다! 응급 수술 준비! 지금 당장 수술실로 옮겨!" 이설은 형사들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침묵의 메스]

중환자실은 다시 아비규환이 되었다. 형사들은 이설을 체포하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몰입해 있었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이 환자는 5분 내로 사망합니다! 이는 의사로서의 저의 마지막 의무입니다!" 이설은 단호하게 외쳤다.

결국 형사들은 그녀의 전문성과 상황의 긴급함에 밀려 물러섰다.

이설은 백선우를 응급 수술실로 옮겼다. 5년 전처럼, 그리고 이틀 전처럼, 그녀는 다시 백선우의 심장을 열어야 했다. 그녀의 심장은 분노와 긴장으로 타올랐지만, 메스를 쥔 그녀의 손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분했다.

"심낭 절개! 혈종 제거! 썩션!"

그녀는 빠른 속도로 흉곽을 열고, 심장을 압박하는 응고된 피를 걷어냈다. 예상대로 봉합 부위 근처의 미세한 혈관에서 재출혈이 발생하고 있었다. 과도한 헤파린 투여가 원인이었다.

이설은 피가 솟구치는 환자의 심장을 마주했다. 그녀는 강 과장에게 협박당했던 '떨림'을 완전히 극복한 상태였다. 그녀의 손은 망설임 없이 바늘과 실을 조작했다. 그녀의 메스는 살인을 꾀하는 악의와, 그 악의에 희생된 생명을 구하는 정의의 도구가 되어 다시 한번 심장을 봉합했다.

30분 후, 재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돌아온 의식과 마지막 경고]

수술을 마친 이설은 지친 몸으로 백선우의 옆에 섰다. 그녀는 이번만큼은 환자를 혼자 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백선우의 손을 잡고 그의 회복을 지켜보았다.

얼마 후, 백선우가 미세하게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이번에는 경고가 아닌, 깊은 감사와 죄책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백선우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를... 살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제가 알던 진실이... 너무 거대합니다."

"괜찮습니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진실을 밝힐 유일한 증인입니다." 이설은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선생님이 폭로한 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강 과장은 그저 하수인이었어요. **'총수(總帥)'**가 있습니다. 그들이 5년 전, 제가 심근경색으로 위장되어 죽어야 했던 이유... 그것은 나노팜의 신약 부작용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통해 성도 병원의 가장 깊은 지하에 숨겨진 또 다른 비밀을 덮으려 했습니다."

백선우의 목소리는 매우 약했지만, 이설의 귀에 선명하게 박혔다. 총수? 성도 병원의 지하?

"백선우 씨. 그 비밀이 무엇입니까? 성도 병원 지하실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설은 다급하게 물었다.

백선우는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의 눈빛은 갑자기 공포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이설의 뒤편을 향하고 있었다.

"총수... 그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선생님... 제발... 병원 지하실은... 들어가지 마십시오."

백선우는 경고를 끝으로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이설은 섬뜩한 예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병실 문 앞, 그림자 속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조용히 돌아서 사라지고 있었다. 이설은 그 남자의 얼굴을 명확히 보지 못했지만, 그의 손목에 번쩍이는 최고급 시계의 은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의사나 행정직원이 찰 수 있는 시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과 자본의 정점을 상징하는 시계였다.

이설은 이제 자신의 싸움이 단순한 병원 비리가 아닌, 거대한 자본과 권력의 어둠, 그리고 성도 대학병원의 숨겨진 비밀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백선우의 경고대로, 그녀는 이제 병원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야 할 운명에 처했다.

🗝️ 7화: 지하의 낙인과 총수의 그림자

이설은 백선우의 경고("병원 지하실은 들어가지 마십시오.")와 함께, 그의 시선이 향했던 복도 끝에서 사라진 '총수'의 그림자, 그리고 그 손목에 번쩍이던 시계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 병원의 어둠이 강 과장 한 명으로 끝나지 않음을 확신했다.

[총수를 추적하다]

이설은 자신이 본 시계의 종류를 알아내기 위해, 병원의 폐쇄회로(CCTV) 기록을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중환자실 CCTV 기록에 접근하려 하자마자, 전산실에서 **'보안 긴급 점검'**을 이유로 모든 접근이 차단되었다. 이는 백선우를 감시하던 '총수'의 측근이 이미 이설의 행동을 예측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설은 직접 그 시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 그녀는 병원 내에서 권력층 인사들과 접촉이 잦은 흉부외과 수간호사 최윤경을 찾아갔다. 최 수간호사는 강 과장의 몰락에 충격을 받았지만, 평소 이설의 실력과 냉철함을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최 수간호사님. 혹시 병원에서 아주 고가의 시계를 착용하는 분을 보신 적 있습니까? 특히 예물 시계로 유명한 스위스 명품 'Patek Philippe' 같은 모델이요."

최 수간호사는 잠시 망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파텍 필립이요... 제가 딱 한 번, 병원 최고위층의 팔목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보통은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시지만,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만 착용하셨죠."

"누구입니까?" 이설의 목소리가 조용히 떨렸다.

"성도 재단의 이사장, 윤정수 박사님입니다. 병원 전체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분이죠. 윤 이사장님은 재단 설립자의 아들로, 강 과장과는 오랜 정계(政界) 인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총수'의 정체는 성도 대학병원의 최고 권력자, 윤정수 이사장이었다. 그는 단순히 병원장이 아니라, 이 병원과 나노팜을 포함한 재단 전체를 지배하는 인물이었다. 강 과장은 그의 지시를 따른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병원 지하의 입구]

이설은 백선우의 마지막 경고, '병원 지하실'에 집중했다. 그녀는 일반적인 물품 창고나 주차장 외에, 병원 설계도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숨겨진 공간이 있을 것이라 직감했다.

다음 날 새벽, 이설은 모두가 잠든 시간을 이용해 지하로 내려갔다. 그녀는 평소 물품 반입로로 쓰이는 가장 외진 구역으로 향했다. 그곳의 낡은 벽면에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고, 유난히 덧칠이 많이 된 철문 하나가 보였다.

이설은 철문 옆의 환기구 주변을 살폈다. 환기구의 나사를 풀어 내부를 들여다보니, 일반적인 지하 공간과는 다른, 낮은 기계음과 희미한 화학 약품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곳은 분명 병원 공식 시설이 아니었다.

그때,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천호진이었다.

"선배님! 나노팜 서버를 분석하다가 아주 이상한 기록을 발견했어요. '2019-R03' 독성 약물 개발과 동시에, 성도 병원 지하에 'R-시퀀스 비밀 연구소'를 설립했다는 내부 문서입니다. 윤정수 이사장이 직접 서명한 비밀 계약서도 있어요!"

이설은 숨을 멈췄다. 그녀가 서 있는 곳, 덧칠된 철문 뒤가 바로 그 'R-시퀀스 비밀 연구소'였던 것이다. 나노팜과 윤정수 이사장은 독성으로 폐기된 약물을 이용해 비윤리적인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고, 백선우는 아마도 이 연구소의 비밀을 알게 된 내부 고발자였을 것이다.

[낙인 찍힌 연구 노트]

이설은 철문에 설치된 보안 패널을 해킹하기 위해 천호진에게 원격 지원을 요청했다. 천호진의 능숙한 조작 덕분에 낡은 철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내부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강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복도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자, 여러 개의 냉동 보관실과 실험실이 나타났다. 이곳은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5년 전 비밀이 그대로 보존된 공간이었다.

이설은 한 실험실 책상 위에 놓인, 낡았지만 잘 정리된 연구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노트 제목: R-시퀀스 임상 외 평가 기록 (윤 박사 지시)

노트의 내용을 읽던 이설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뜨였다.

R-시퀀스 R03은 심장 독성이 아닌, 특정 유전자에 반응하여 발작적인 심장 정지를 유발하는 약물로 설계되었다.

그리고 노트 중간에는 충격적인 기록이 있었다.

2019년, R03 투여 후 심장 정지 유도 성공. 환자 '이' 계열 유전자 보유. 특이사항: '이' 계열 유전자는 성도 재단 설립자의 가족에게서 흔히 발견됨.

이설은 자신의 성, **이(李)**를 떠올렸다. 그녀는 소름 끼치는 진실과 마주했다.

5년 전, 백선우가 고발하려 했던 것은 나노팜의 비리가 아니라, 성도 재단 가족의 유전병을 타겟으로 한 비밀 실험과 그 은폐였던 것이다. 백선우는 이 약물이 성도 재단 내부의 권력 다툼이나 유전적 약점을 제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노트 마지막 페이지에는 충격적인 메모가 적혀 있었다.

실험 주시 대상 목록. 코드명: '이설' (흉부외과 레지던트) – '이' 계열 유전자 보유 확인됨. 윤 이사장 지시: '가장 뛰어난 메스'를 가진 그녀의 심장을 주시할 것.

이설의 이름이 그들의 비밀 실험 대상 목록에, 그것도 '가장 뛰어난 메스'라는 섬뜩한 수식어와 함께 올라 있었다. 윤정수 이사장은 그녀의 실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녀의 유전적 약점을 이용해 언제든 그녀의 심장을 멈출 수 있는 살인 면허를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설은 자신이 단순한 고발자가 아니라, 이 거대한 음모의 궁극적인 희생양으로 설계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모든 노력, 완벽한 메스, 그리고 천재성은 윤 이사장에게는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 취약한 '실험체'였던 것이다.

이설은 노트와 함께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그녀의 심장은 생사를 가르는 수술 때보다 더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윤정수 이사장의 심장을 꿰뚫는 메스를 들고, 이 전쟁을 끝내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이제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 8화: 심장을 겨눈 메스, 최후의 대결

이설은 연구 노트를 손에 쥐고 병원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윤정수 이사장이 계획한 '실험 주시 대상'이자 '유전적 약점'을 가진 희생양임을 알았다. 그녀의 뛰어난 실력은 그들의 계획을 감추는 완벽한 방패였던 셈이다. 이설은 더 이상 숨거나 도망칠 수 없었다. 그녀는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개인의 생존을 위해, 윤 이사장의 심장에 메스를 겨눠야 했다.

[최후의 계획]

이설은 병원으로 돌아오자마자 천호진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윤 이사장과 나노팜의 비리를 담은 모든 증거—강 과장의 거래 내역, R-시퀀스 연구 노트, 그리고 윤 이사장이 서명한 비밀 연구소 계약서—를 언론과 검찰에 가장 극적인 순간에 공개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요청했다.

'가장 극적인 순간'이란, 윤 이사장이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최고로 과시하는 순간이어야 했다.

이설은 수간호사 최윤경을 통해 윤 이사장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놀랍게도, 성도 대학병원은 이틀 뒤 **'혁신 심장 이식 센터 기공식'**을 대규모로 개최할 예정이었다. 이 행사는 윤 이사장이 재단 설립 이후 이룬 가장 큰 업적으로,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참석하는 그의 '권력 과시의 장'이었다.

"기공식 날, 그를 무너뜨린다." 이설은 결심했다.

하지만 이설에게는 또 하나의 급박한 문제가 있었다. 백선우였다. 백선우는 진실을 아는 유일한 생존 증인이었지만, 그의 몸에는 언제든 심장을 멈추게 할 수 있는 R-시퀀스 독성 약물의 잔재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이설은 백선우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곧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임을 알았다.

[이설의 경계와 윤 이사장의 움직임]

이설은 백선우의 병실로 돌아갔다. 그녀는 형사들에게 윤 이사장이 사건의 배후임을 알리고, 환자 보호를 더욱 강화할 것을 요청했다. 형사들은 이미 강 과장의 구속으로 인해 윤 이사장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요청을 즉각 받아들였다.

그때, 윤정수 이사장으로부터 개인적인 호출이 이설에게 내려졌다. 그의 집무실이 아닌, 병원 꼭대기 층에 위치한 그의 개인 서재였다.

이설은 그 호출이 덫임을 알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그와의 마지막 대면이자, 그녀의 마지막 도박이 될 것이었다.

밤 11시. 병원의 가장 높은 곳, 윤 이사장의 서재는 화려하지만 차가운 고급스러움으로 가득했다. 윤 이사장은 이설을 맞이하며 친절하게 웃었지만, 그의 눈빛은 뱀처럼 냉정했다.

"이설 선생. 자네가 우리 병원 최고의 인재라는 것을 알고 있네. 강태헌은 작은 실수로 물러났지만, 자네는 앞으로 성도 병원의 미래를 이끌어갈 사람이야." 윤 이사장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차 한 잔을 이설에게 권했다.

"저는 강 과장님의 실수뿐만 아니라, 이사님이 5년 전부터 저지르신 비윤리적인 실험과 은폐를 알고 있습니다." 이설은 차를 마시지 않고, 연구 노트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윤 이사장은 노트를 펼쳐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R-시퀀스라... 놀랍군. 자네는 정말 똑똑해. 이 노트는 자네의 이름이 적힌, 나의 완벽한 보험 증서이기도 하네."

"제 유전적 약점을 이용해 저를 제거할 계획이시겠죠."

"제거? 아니. 나는 자네를 살리고 싶네. 자네는 나처럼 특별한 유전자를 가졌지. 나의 연구는 바로 그 특별함을 위한 것이었어. R-시퀀스는 통제된 상황에서 놀라운 의학적 성과를 낼 수 있네. 자네가 내 말을 따른다면, 나는 이 병원에서 자네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네. 자네는 다음 병원장이 될 수도 있어."

이설은 차갑게 반박했다. "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메스를 잡았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실험을 위한 도구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윤 이사장의 미소가 사라졌다. "안타깝군. 이설. 자네는 가장 뛰어난 메스지만, 그 메스를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군. 강태헌처럼, 자네도 쓸모가 없어진다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설이 마시지 않은 차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네가 마시지 않은 이 차에는 R-시퀀스의 변형된 약물이 아주 미량 들어있었네. 아주 미세한 양이지만, 자네의 심장에는 이미 경고 신호를 보냈을 거야. 자네는 이미 내 손아귀에 있네."

이설은 자신이 이미 '약물'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주사기를 꺼내 자신의 팔에 주사했다. 그것은 독극물에 대한 응급 해독제였다.

"제가 이미 해독제를 투여했다는 사실은 예상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이설의 단호한 행동에 윤 이사장은 마침내 분노를 터뜨렸다. "이 어리석은 여자! 자네는 이 병원의 힘이 뭔지 모르는군!"

"저는 압니다. 그것이 살인과 비리로 쌓아 올린 허상이라는 것을."

[기공식 날, 심장을 꿰뚫다]

이틀 후, 혁신 심장 이식 센터 기공식. 성도 대학병원 메인 광장은 수백 명의 주요 인사와 카메라 플래시로 가득했다.

윤정수 이사장이 연단에 올라 화려하게 연설을 시작했다. 그의 연설이 절정에 달했을 때, 거대한 LED 전광판에 갑자기 영상이 떴다.

그것은 강 과장의 비리 자료, 윤 이사장의 비밀 계약서, 그리고 R-시퀀스 연구 노트의 상세 내용이었다. 천호진이 정확한 타이밍에 모든 것을 폭로한 것이다.

광장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윤 이사장은 경악하며 전광판을 쳐다보았고, 그의 얼굴은 분노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때, 윤 이사장의 옆에 서 있던 이설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에는 메스 대신, 미리 준비한 마이크가 들려 있었다.

"윤정수 이사장님은 심장을 살리는 의술 뒤에서, 수많은 환자와 의료진을 이용해 비윤리적인 약물 실험을 진행하고, 심지어 살인까지 은폐했습니다. 저는 그 증거를 모두 확보했습니다. 이 병원은 더 이상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곳이 아닙니다. 이사장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살인 연구소였습니다!"

이설의 차갑지만 명확한 목소리는 광장의 모든 소음을 잠재웠다. 기자들은 미친 듯이 셔터를 눌렀고, 경찰이 윤 이사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 이사장은 이성을 잃고 이설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네년이 감히! 네 심장부터 멈춰주지!"

그러나 그의 발길은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고, 그는 분노에 찬 비명을 지르며 연행되었다.

이설은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임무는 끝났다.

며칠 후, 백선우는 완전히 회복되어 경찰의 증인으로 나섰고, 성도 대학병원은 거대한 개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설은 흉부외과 레지던트의 자리를 내려놓고, 그 누구의 간섭도 없는 작은 지방 병원으로 떠났다. 그녀는 더 이상 '총수의 실험체'가 아닌, 오직 환자의 심장만을 바라보는 진정한 의사가 되었다.

그녀의 손은 이제 생명을 구하는 고귀한 도구로서, 더 이상 과거의 죄책감으로 떨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차가운 메스로 병원의 어둠을 가르고, 결국 자신의 심장까지 구원해낸 것이다.


[에필로그: 다시 뛰는 심장]

작은 지방 병원. 이설은 간호사와 함께 심장 수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 환자는 심장 이식을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입니다. 수술 전에 많이 긴장되시죠?" 간호사가 물었다.

이설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차가웠지만, 그 속에 따뜻한 빛이 담겨 있었다.

"긴장됩니다. 하지만 떨리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메스를 쥐었다. 메스의 은빛은 환자의 생명을 향한 그녀의 단단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그녀의 메스는 이제 진실과 정의를 지키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다. 그녀의 심장, 그리고 그녀가 살려낸 모든 심장은 멈추지 않고 계속 뛰고 있었다.

[끝]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