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굶주린 성좌의 그림자, 영혼을 삼키는 대륙의 종말

2025. 12. 1. 08:40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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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아케디아.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왕국, 실버릿은 멸망의 그림자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황금빛 성벽은 검은 곰팡이가 슬어버린 지 오래였고, 왕궁의 화려했던 샹들리에는 한 세기 전부터 꺼진 채였다. 대륙을 휩쓰는 '공허의 역병' 때문이었다. 이 역병은 살점을 파고들기보다 영혼의 색깔을 앗아갔다. 사람들은 무표정해졌고, 꿈을 꾸지 않았으며, 단지 다음 숨을 쉬기 위해 살았다. 이는 생존이 아니라 그저 '정지된 고통'의 연장이었다.

주인공 칼릭스. 그는 실버릿의 천민 계급인 '잿빛 전사' 출신이었다. 잿빛 전사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왕궁의 가장 더러운 일만 도맡아 하는 소모품이었다. 하지만 칼릭스의 진짜 정체는 수백 년간 철저히 금지된 ‘침묵의 마도사’였다. 일반적인 마법이 자연의 원소를 빌려 쓰는 것이라면, 침묵 마법은 존재의 근원, 즉 영혼의 파동을 직접 조작하는 위험하고도 궁극적인 마법이었다. 비천한 출신 덕분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칼릭스는 이 위험한 금단의 지식을 완성했다. 그의 왼손에는 늘 차가운 금속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고, 오른팔에는 봉인을 의미하는 고대 룬 문신이 뼈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오늘 밤, 칼릭스는 실버릿 왕궁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제7 봉인실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이 곳은 역병의 근원이자, 왕국이 수백 년간 비밀리에 숭배해 온 '고대 신의 심장'이 봉인된 장소였다. 왕국의 대주교와 섭정들은 이 심장이 내뿜는 막대한 에너지를 통제하여 역병을 억누르려 했지만, 칼릭스는 알고 있었다. 심장이 뿜어내는 '공허'의 파동 자체가 역병이며, 통제가 아니라 파괴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그러나 심장이 파괴되면 대륙의 모든 마법 에너지와 함께 칼릭스 자신의 영혼까지 소멸할 터였다.

거대한 강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오직 왕실의 순수한 피를 지닌 자만이 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고대 마법이 겹겹이 얽혀 있었다. 칼릭스는 문 옆에 놓인 청동 제단으로 다가섰다. 그는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자신의 왼 손바닥을 깊이 그었다. 피가 솟구쳐 나와 검은 제단 위로 흩뿌려졌다.

하지만 칼릭스의 피는 일반적인 붉은색이 아니었다. 그의 피는 깊은 밤하늘의 색, 어둠 속에서 빛나는 짙은 남색이었다. 이는 침묵 마법을 완성한 대가로 그의 영혼에 새겨진 변이의 증거였다.

남색 피가 제단을 적시는 순간, 문에 새겨진 고대 룬 문자들에서 푸른 불꽃이 튀어 오르며 지독한 비명을 질렀다. "더러운 피! 신성 모독자! 왕의 혈통이 아닌 자는...!" 마법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칼릭스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 마법으로 자신의 피 속에 담긴 ‘존재의 파동’을 순수한 영혼 에너지로 변환시키고 있었다. 왕가의 피가 지닌 '권위' 대신, 모든 존재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본질'을 사용하여 봉인을 속이는 것이다.

파지직! 거대한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공기는 비릿하고 달콤한 피 냄새와, 수많은 영혼이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섬뜩한 소리를 함께 품고 있었다. 칼릭스는 지팡이를 고쳐 잡고, 피로 물든 손을 지팡이 끝에 가볍게 가져갔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강철 같았다.

"내가 이 길을 걷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다." 칼릭스는 숨죽여 속삭였다. "단지, 더 이상 아무도 고통받지 않는 조용한 멸망을 선사하기 위함이다."

 

칼릭스는 닫히는 강철 문을 뒤로하고 제7 봉인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뒤로 문이 닫히자, 왕궁 지하 전체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봉인실은 자연적인 동굴과 인공적인 구조물이 뒤섞인 거대한 공간이었다. 천장까지 닿는 수많은 석주에는 녹슨 쇠사슬이 감겨 있었는데, 그 쇠사슬들은 모두 중앙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중앙에는 지름 20미터에 달하는 검은 대리석 원형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 모든 압력이 집중되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박동하는 덩어리가 있었다. 그것은 고대의 심장이라고 불렸으나, 어떤 생물학적인 형태도 아니었다. 마치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찢어낸 듯한 검고 붉은 혼합물,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유동체였다. 역병의 근원인 '공허'의 파동이 바로 저 박동에서 뿜어져 나와 봉인실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주변 공기는 무게감을 지닌 듯 무거웠고, 칼릭스의 폐 깊숙한 곳까지 차가운 고통을 심었다.

"이것이... 수많은 영혼을 삼킨 심장인가." 칼릭스는 들이쉬는 숨 사이로 중얼거렸다. 그의 귀에는 수십억의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섬뜩한 환청이 들려왔다.

“자유... 고통 없는 안식...” “왜 우리를 깨우는가? 이 침묵만이 우리의 평화다.”

이것은 역병에 잠식되어 심장에 흡수된 영혼들의 잔해였다. 심장은 주변의 영혼을 빨아들여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그 대가로 '공허'를 토해냈다. 칼릭스가 제단에 가까워질수록, 오른팔에 새겨진 봉인 룬 문신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내뿜었다. 이 문신은 그의 침묵 마법을 억제하는 마지막 안전장치였으며, 지금 그 마법을 극한으로 사용하려는 시도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칼릭스는 제단 앞에서 멈춰 서서 금속 지팡이를 제단 표면에 꽂았다. 지팡이 끝에 달린 마력 증폭 수정이 심장의 검붉은 빛을 반사하며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눈을 감고 '침묵의 마법'의 근원에 접속했다. 침묵 마법은 언어나 주문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의지, 존재를 규정하는 '개념' 자체를 조작하는 행위였다.

존재비존재로. 파동정지로.

이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영혼의 소멸' 마법이었다. 자신의 영혼을 연료로 태워 심장의 개념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칼릭스의 온몸에서 짙은 남색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피부 아래의 핏줄이 남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영혼이 이미 마법의 회로로 변환되는 과정이었다.

바로 그때, 제단 뒤쪽의 거대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콰아앙!

수백 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돌 기둥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칠흑 같은 갑옷을 입은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갑옷에는 실버릿 왕가의 문장인 '날개 달린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사자의 눈은 붉은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칼릭스." 거대한 형체가 낮고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왕가의 마지막 수호 기사, 이름은 멜키오르다. 봉인실에 들어올 수 있는 비천한 영혼은 없다. 네가 누구든, 네가 무엇을 하려 하든, 여기서 끝이다."

멜키오르는 굳게 봉인된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칼이 뽑히자 봉인실 전체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을 냈고, 공허의 파동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 칼은 고대 심장의 잔류 마력을 흡수하여 만들어진, 영혼을 베는 '심연의 검'이었다. 칼릭스의 영혼 소멸 마법이 완성되기 전에, 예기치 못한 최후의 수호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는 소멸 마법을 완성하기 전, 이 방어자를 먼저 쓰러뜨려야만 했다.

 

멜키오르, 왕가의 마지막 수호 기사와의 예상치 못한 조우는 칼릭스의 계획에 치명적인 변수였다. 소멸 마법은 집중을 필요로 하는 행위였고, 그의 영혼이 불타기 시작한 지금,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멜키오르." 칼릭스는 눈을 뜨고 수호 기사를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짙은 남색으로 빛나는 핏줄은 그가 내면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증명했다. "나는 너와 싸울 시간이 없다. 네가 지키는 것은 왕국이 아니라, 왕국을 병들게 한 공허의 근원일 뿐이다."

"궤변이다!" 멜키오르의 목소리가 철갑을 통해 울려 퍼졌다. "왕가의 수호는 실버릿의 영원한 존속을 의미한다. 이 성스러운 심장은 역병을 통제하고, 왕국에 무한한 힘을 선사할 유일한 길이다. 너 같은 불경한 천민 마법사가 이를 파괴하게 두지 않는다!"

멜키오르는 거대한 몸을 이끌고 돌진했다. 그의 심연의 검은 봉인실의 어둠을 가르며 칼릭스의 머리를 향해 내려쳤다. 그 속도는 거구에서 나올 수 없는 맹렬함이었다. 심연의 검은 단순히 물질을 베는 것을 넘어, 칼릭스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영혼 파동, 즉 마법의 장벽까지 찢어발기려 했다.

콰앙! 칼릭스는 간발의 차이로 몸을 틀어 검격을 피했고, 검은 그가 서 있던 제단 바닥에 깊은 균열을 만들었다. 대리석 조각들이 파편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꽂아두었던 금속 지팡이를 재빨리 움켜잡았다.

멜키오르는 물러서지 않고 다음 공격을 이어갔다. 그는 검을 수평으로 휘둘러 칼릭스의 허리를 노렸다. 칼릭스는 피 대신 영혼을 조작하는 마법사였다. 순수한 힘과 속도로 밀어붙이는 기사에게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

"침묵의 방패."

칼릭스는 주문 대신, 자신의 남은 영혼 에너지를 재빨리 추출하여 눈앞의 공간을 '비존재'의 개념으로 채웠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검은 바로 그 '비존재의 영역'에 부딪혔다.

쩌저적! 마치 유리 조각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멜키오르의 심연의 검이 공허한 공간 속에서 멈칫했다. 검이 통과해야 할 영역이 잠시나마 이 세상의 논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 찰나의 멈춤이 칼릭스에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칼릭스는 기사의 갑옷에 난 작은 틈새, 목과 어깨가 연결되는 부분의 방어력이 가장 취약한 지점을 노려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끝의 증폭 수정에서 짙은 남색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이는 물리적인 충격이 아닌, '개념 파괴'를 위한 일격이었다.

파지직! 파동이 갑옷의 작은 틈새에 닿자, 멜키오르의 칠흑 갑옷 일부가 마치 오래된 금속이 녹아내리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갑옷이 사라진 부위 아래로 드러난 기사의 살은 이미 창백한 뼈와 다름없었고, 그 안에서는 붉은 불꽃이 더욱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 수호 기사는 이미 오래전에 육신을 잃고, 심장의 공허 에너지로 움직이는 '영혼의 껍데기'였다.

"미천한 술수!" 멜키오르는 고통 대신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한 손으로 부서진 갑옷 부위를 움켜쥐고는, 더욱 광포하게 심연의 검을 휘둘렀다. 검의 움직임이 빨라질 때마다, 봉인실의 검붉은 심장이 더욱 빠르게 박동했고, 칼릭스의 귀에 들리는 영혼들의 속삭임은 비명으로 변했다.

칼릭스는 깨달았다. 이 수호 기사는 단순한 방어자가 아니었다. 그는 심장의 공허와 연결된 일종의 '첨병'이었고, 그를 상대할수록 칼릭스의 영혼은 더 빨리 소진되어 심장에 흡수될 위기에 놓였다.

"시간이 없다." 칼릭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싸움을 끝내야 했다. 그는 오른손의 룬 문신이 불타는 고통을 무시하며, 온몸의 마나를 마지막 한 점까지 지팡이로 집중시켰다.

"영혼의 절단!"

그의 지팡이 끝에서 남색 불꽃이 폭발하듯 분출되었다. 이 마법은 멜키오르의 육체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칼릭스는 파동을 이용해 멜키오르의 영혼 껍데기를 움직이는 동력원, 즉 심장과의 연결 고리 자체를 끊어버리려 했다.

멜키오르는 광기에 찬 포효와 함께 심연의 검을 방패처럼 세웠다. 두 극한의 힘이 제7 봉인실의 중앙에서 충돌했다.

 

칼릭스는 마지막 남은 영혼 에너지를 끌어모아 지팡이 끝에 집중시켰다. "영혼의 절단!" 그의 지팡이에서 분출된 짙은 남색 불꽃은 멜키오르의 칠흑 갑옷을 꿰뚫고 심장의 '공허'와 연결된 멜키오르의 본질을 향해 쇄도했다.

멜키오르는 광기에 찬 포효와 함께 심연의 검을 방패처럼 세웠다. 두 극한의 힘이 제7 봉인실의 중앙에서 충돌했다. 쩌저저적! 금속과 개념이 충돌하는 기이한 소리가 봉인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칼릭스의 남색 파동이 심연의 검에 닿자, 검은 마치 뜨거운 철판 위의 물처럼 격렬하게 증발하려는 듯 요동쳤다.

멜키오르의 몸을 지탱하던 공허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기사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의 갑옷을 감싸던 붉은 불꽃이 순간적으로 푸른색으로 변하며 사그라들었다. 콰직! 멜키오르의 갑옷은 수백 년간 응축된 마력이 빠져나가자마자 그대로 부서지며 돌무더기가 되었다.

칼릭스는 무릎을 꿇었다. 영혼의 절단은 그에게도 치명적인 마법이었다. 오른팔의 룬 문신이 격렬하게 터지며 피부가 갈라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마법을 사용한 대가로 그의 영혼의 절반 이상이 이미 소모된 상태였다.

그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제단 중앙에 있는 검붉은 '고대 신의 심장'을 응시했다. 심장은 멜키오르의 파괴로 인해 잠시 충격을 받은 듯, 박동이 둔해져 있었다. 지금이었다. 그의 영혼에 남아있는 마지막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어 '개념 파괴'를 실행할 순간.

칼릭스는 지팡이를 버리고 맨손으로 제단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심장의 유동체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대었다. 닿는 순간, 칼릭스의 영혼과 심장에 남아있는 수십억의 잔해 영혼들이 합쳐지는 듯한 격렬한 감각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아니... 멈춰라, 네가 원하는 안식이 아니다!” “왜... 왜 우리를 다시 고통 속에 던지려 하는가?”

영혼들의 비명과 속삭임이 칼릭스의 의식을 잠식하려 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마지막 의지를 쥐어짜냈다. '비존재.' 오직 이 개념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심장의 검붉은 유동체가 칼릭스의 손을 휘감더니, 예상치 못한 하나의 선명하고 강력한 의지를 그의 영혼에 주입했다.

“흥미롭군. 소멸을 원하는 필멸자여. 너는 존재의 파동을 이해하는 자. 나를 파괴할 자격이 있다.”

그것은 심장 안에 갇혀 있던 고대 신, '코르누스'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파괴는 너무나 쉽다. 너는 이미 나의 역병을 짊어지고 있다. 나를 소멸시키는 순간, 너는 나의 모든 공허를 흡수하여 새로운... '성좌'가 될 것이다. 너는 영혼을 삼키는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가 될 것이다. 이 힘을 거부할 수 있겠느냐?”

파괴 대신 영원한 권능의 유혹이 마지막 남은 그의 영혼을 덮쳤다.


고대 신 코르누스의 유혹은 멜키오르의 검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였다. 영원한 고통을 끝내기 위해 소멸을 택했던 칼릭스에게, 모든 것을 지배하는 권능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달콤한 독이었다. 그의 영혼에 남아있던 이성적인 부분은 심장의 파괴를 외쳤지만, 이미 공허의 역병에 깊이 노출된 육체는 권능의 획득을 갈망했다.

칼릭스의 손이 심장을 파괴하기 직전 멈췄다. 그의 남색 피가 심장의 유동체와 섞이며 제단 위로 기이한 무늬를 만들어냈다.

"나는... 지배자가 될 생각이 없다." 칼릭스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의지는 이미 휘청거리고 있었다.

“지배가 아니다, 칼릭스. 균형이다. 너는 이 대륙이 겪는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는 자. 너는 이제 이 공허를 통제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있다. 왜 영원한 침묵을 택하려 하는가? 네가 구원하고자 했던 대륙이 너를 필요로 한다.” 코르누스가 속삭였다.

그 순간, 칼릭스의 의식 속에서 잿빛 전사였던 시절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굶주림, 멸시, 그리고 역병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던 고통. 그는 그 모든 고통을 끝내기 위해 이 금단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이 힘을 얻어 그 고통을 영원히 막을 수 있다면?

칼릭스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파괴 대신, 심장의 힘을 '흡수'하기로 했다. 소멸을 통한 안식이 아닌, 통제를 통한 짐을 짊어지기로 한 것이다.

그가 심장에서 손을 떼지 않고 침묵 마법의 방향을 '소멸'에서 '결합'으로 틀자, 제7 봉인실 전체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을 냈다. 검붉은 심장은 박동을 멈추고 칼릭스의 왼손으로 순식간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고대 신의 심장이 왼손에 완전히 흡수되자, 칼릭스의 육신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심장 박동은 멈췄고, 대신 왼손에서는 심장의 검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공허' 그 자체를 흡수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동시에, 대륙 아케디아 전역에 걸쳐 공허의 역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실버릿 왕궁의 검은 곰팡이가 한순간에 바싹 말라 재가 되었고, 무표정했던 사람들의 눈동자에 희미하게나마 감정의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칼릭스는 힘겹게 봉인실을 나왔다. 그의 발걸음이 왕궁의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마다, 어둠 속에서 푸른 룬 문자가 타오르며 그를 따라다녔다.

왕궁의 대신들은 공허의 역병이 사라진 것에 환호했지만, 칼릭스의 뒤틀린 형체를 보고 경악했다.

"누구냐, 네놈은! 어찌 감히 봉인실에서 나오느냐!" 왕국의 섭정, 로드 베스페르가 소리쳤다.

칼릭스는 그들을 응시했다. 수많은 영혼의 비명과 고대 신의 권능이 공존하는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칼릭스. 이제 실버릿 왕국의 새로운 왕이다. 그리고... 이 대륙의 새로운 성좌(星座)이다."


실버릿 왕국의 멸망 직전, 천민 출신 마도사 칼릭스가 고대 신의 심장을 흡수하여 새로운 권능의 존재로 거듭난 사건은 대륙 아케디아 전역을 뒤흔들었다. 왕국의 귀족들과 대신들은 칼릭스에게 반역자, 신성모독자라는 낙인을 찍었으나, 역병에서 구원받은 민중들은 그를 구원자로 숭배했다.

그러나 칼릭스의 통치는 기존의 왕권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왕좌에 앉는 대신, 제7 봉인실 위에 거대한 흑요석 첨탑을 세우고 그곳에 은둔했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의 통치는 오직 '균형'과 '질서'에 맞춰져 있었다.

새로운 통치자의 첫 번째 칙령은 잔혹했다. 역병의 시기에 권력을 남용하고 부패했던 모든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영혼의 벌'을 내렸다. 그들의 영혼 에너지는 강제로 추출되어 공허의 심장을 흡수한 칼릭스의 몸에 보충되었다.


칼릭스의 통치 아래 실버릿 왕국은 놀라운 속도로 재건되었다. 하지만 이는 잔혹한 질서 위에 세워진 평화였다. 그의 왼손에 새겨진 검붉은 심장은 끊임없이 영혼 에너지를 갈망했고, 칼릭스는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 '정의'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들었다.

3년 후, 대륙 아케디아는 칼릭스의 '흑요석 첨탑'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주변의 소왕국들은 실버릿의 막강한 힘에 굴복하거나 멸망했다. 사람들은 그를 '영혼을 삼키는 성좌'라고 불렀다.

하지만 평화는 곧 깨지려 하고 있었다. 대륙의 동쪽 끝, '황금의 제국' 레반티움에서 '태양 기사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코르누스의 심장을 흡수한 칼릭스를 악마로 규정하고, 대륙의 질서를 되찾기 위해 성전을 선포했다.


황금의 제국 레반티움의 성전은 대륙 전체에 피바람을 예고했다. 태양 기사단의 대단장, '빛의 사도' 라이오넬은 2만 명의 정예 기사와 강력한 성직자 군단을 이끌고 흑요석 첨탑을 향해 진군했다.

칼릭스는 이 움직임을 알고 있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첨탑의 가장 높은 곳, 거울처럼 매끄러운 흑요석 방에 앉아 왼손의 심장을 쓰다듬었다.

"코르누스, 네 예언대로인가. 내가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그들은 나를 악으로 규정하는군."

“인간은 너의 균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이분법 속에서만 살기를 원한다. 너는 그들의 모든 모순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이제 선택하라. 파괴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숭배를 받을 것인지.” 심장의 목소리가 칼릭스의 영혼에 울렸다.


태양 기사단은 실버릿 왕국의 국경을 넘어섰다. 라이오넬 대단장은 선봉에서 성스러운 검 '아르카디아'를 휘둘렀다. 아르카디아의 빛은 칼릭스의 공허 마법으로 오염된 지역의 어둠을 순식간에 정화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실버릿의 군대는 칼릭스의 명령 아래, 인간의 감정이 거세된 듯한 냉정한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기계처럼 움직이며 레반티움의 기사들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라이오넬의 기사단은 성스러운 신념으로 무장했다. 그들의 공격은 단순한 무력이 아닌, '빛의 축복'이 담긴 파동을 실어 날랐다. 칼릭스의 군대가 막아낼 수 없는, 영혼을 정화하는 공격이었다.

결국 실버릿의 국경 수비대는 격파되었고, 라이오넬의 군대는 흑요석 첨탑을 향한 진격을 계속했다.


라이오넬의 군대가 흑요석 첨탑 외곽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첨탑 주변에 깔린 수많은 희생자를 보았다. 칼릭스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처형했던 이들의 흔적이었다. 이 광경은 기사단의 분노와 신념을 더욱 강화했다.

멜키오르를 쓰러뜨릴 때 이미 영혼의 절반을 소모했던 칼릭스는, 이 대규모 전쟁을 직접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최후의 결전에서 자신의 힘을 아껴야 했다.

그는 첨탑 아래에 숨겨둔 마지막 비장의 무기, 고대 실버릿 왕국이 코르누스의 심장을 봉인하기 위해 만들었던 최종 방어 체계를 가동시켰다. 첨탑 주변의 대지가 갈라지더니, 거대한 크기의 흑요석 골렘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골렘들은 공허의 마력으로 움직였으며, 어떤 물리적 공격에도 흠집이 나지 않는 단단함으로 기사들을 가로막았다.


흑요석 골렘들과 태양 기사단 간의 전투는 치열했다. 기사들의 성스러운 검이 골렘의 육체를 부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빛의 결속' 마법을 사용해야 했다. 이는 성직자의 생명력을 소모하여 골렘의 공허 마력을 일시적으로 묶어두는 고난도의 마법이었다.

라이오넬 대단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빛의 결속에 묶인 골렘들의 심장부에 성스러운 검을 박아 넣어 마력의 연결을 끊었고, 골렘들은 재가 되어 쓰러졌다.

수많은 희생 끝에, 기사단은 골렘들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첨탑의 입구에 도달했다. 입구에는 이미 방어를 포기한 듯, 아무도 지키는 이가 없었다.


라이오넬과 열두 명의 정예 기사들은 흑요석 첨탑 내부로 진입했다. 첨탑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오직 정교하게 깎인 흑요석 벽과, 영혼의 파동을 흡수하는 듯한 차가운 공기만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좁고 긴 나선형 계단을 따라 첨탑의 최상층을 향해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기사들은 심한 영혼의 압박을 느꼈다. 칼릭스가 흡수한 코르누스의 심장이 뿜어내는 공허의 파동이 그들의 신념을 시험하는 듯했다. 몇몇 기사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물러서지 마라! 저곳에는 악마가 있다! 우리의 신념만이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 라이오넬은 기사들을 독려했다. 그의 아르카디아 검은 짙은 금빛으로 빛나며 기사들에게 보호막을 제공했다.

 

마침내, 라이오넬과 여섯 명의 기사들만이 첨탑의 최상층에 도착했다. 최상층은 거울처럼 매끄러운 흑요석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그 중앙에 칼릭스가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아케디아 대륙의 전경이 펼쳐졌다.

칼릭스는 잿빛 전사의 낡은 옷 대신, 흑요석과 남색 룬 문양으로 장식된 간결한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감정했으나, 왼손에서는 검붉은 심장의 박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태양 기사단, 라이오넬. 예상보다 빨랐군." 칼릭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인간의 감정 대신, 수많은 영혼의 메아리가 섞여 있었다.

"악마 칼릭스! 네가 우리의 성전을 멸시할지라도, 네 죄는 여기서 끝난다! 네가 삼킨 고대 신의 심장을 해방하고, 네 죄의 대가를 치러라!" 라이오넬이 검을 겨누었다.


칼릭스는 라이오넬의 말에 아무런 감정 없이 대답했다. "죄? 나는 이 대륙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가장 큰 짐을 짊어진 자다. 너희가 '선'이라 부르는 모든 것은 모순과 고통을 낳았을 뿐이다. 코르누스의 심장을 파괴했다면, 나는 너희와 똑같은 비참한 구원자가 되었을 것이다."

"구원이 아닌 파멸이다! 네 통치 아래 수많은 영혼이 불법적으로 희생되었다!" 라이오넬은 분노했다.

칼릭스는 왼손을 들어 심장이 박힌 부위를 보여주었다. "이 심장은 영혼을 갈망한다. 나는 그 갈망을 채우기 위해, 대륙에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부패한 영혼들을 정리했다. 이것이 '최소한의 희생'을 통한 '최대의 질서'다."


라이오넬은 더 이상 논쟁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검을 높이 들고 외쳤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악마다! 빛의 축복이 너의 어둠을 태울 것이다! 돌격!"

라이오넬과 기사들은 칼릭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칼릭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오른팔의 봉인 문신을 왼손으로 감싸며, 침묵 마법의 극한을 사용했다.

"침묵의 공간."

칼릭스를 중심으로 반경 5미터 내의 공간이 순간적으로 모든 물리 법칙과 마법의 원리에서 분리되었다. 기사들이 휘두른 검은 그의 몸에 닿기 직전, 허공 속에서 속도를 잃고 멈춰 섰다. 그들의 성스러운 보호막 역시 힘을 잃고 희미해졌다.


침묵의 공간에 갇힌 라이오넬과 기사들은 극심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들의 모든 힘, 마법, 신념은 이 영역에서 의미를 잃었다. 칼릭스는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처럼 그들을 응시했다.

"너희의 빛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존재'가 규정한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칼릭스가 말했다. "이곳은 비존재의 영역. 너희의 모든 정의와 신념은 나에게 닿지 못한다."

칼릭스는 오른손을 들어 멜키오르를 파괴했을 때 사용했던 '영혼의 절단' 마법을 다시 준비했다. 이번에는 심장에서 끌어낸 막대한 공허의 에너지를 섞어, 기사들의 영혼을 한 번에 소멸시키려 했다.


칼릭스의 영혼 절단 마법이 발동되기 직전, 라이오넬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침묵의 공간에서도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 바로 '순수한 신념'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신념은 마법도, 물리력도 아닌, 영혼 자체의 의지였다.

"칼릭스! 네가 영혼을 빼앗아 질서를 세웠다고 생각하느냐? 영혼은 빼앗길 수 없다! 단지 갇히거나 오염될 뿐이다!"

라이오넬은 검을 놓았다. 그리고 모든 힘을 오직 '기도'에 집중했다. 그의 육체는 부서지더라도, 그의 영혼은 빛을 놓지 않았다.


라이오넬의 신념이 폭발하자, 침묵의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라이오넬의 영혼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빛은 코르누스의 공허 마저 일시적으로 밀어냈다. 이는 칼릭스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그의 침묵 마법은 존재와 비존재의 논리에는 강했지만, 순수한 '믿음'이라는 비이성적인 영역에는 취약했다.

침묵의 공간이 깨지자, 기사들은 즉시 성스러운 힘을 되찾았다. 그들은 칼릭스에게 달려들지 않고, 쓰러진 라이오넬을 방어하는 대형을 만들었다.

칼릭스는 일시적인 충격에 휘청거렸다. 영혼을 흡수한 이후 처음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느꼈다. 코르누스의 심장 역시 격렬하게 박동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칼릭스는 라이오넬의 영혼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자신의 공허에 깊은 균열을 만들었음을 알았다. 이 균열은 코르누스의 심장을 봉인했던 최초의 마법적 봉인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심장이 그의 몸 안에서 통제를 벗어나려 요동쳤다.

"흥미롭군. 신념은... 개념을 파괴하지 못하지만, 개념을 무시하는가." 칼릭스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흥미였다.

라이오넬은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일어섰다. 그의 육체는 마법적 충격으로 인해 피를 토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았다.

"성좌 칼릭스! 네 공허는 우리의 빛을 완전히 삼킬 수 없다! 네가 심장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너를 지배하는 것이다!" 라이오넬이 외쳤다.


라이오넬의 말이 칼릭스의 영혼을 깊숙이 찔렀다. 사실이었다. 칼릭스가 심장을 흡수한 이후,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았다. 오직 심장의 갈망을 채우고, 대륙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존재했을 뿐이다.

칼릭스는 왼손을 높이 들었다. 심장의 검붉은 빛이 첨탑 최상층을 가득 채웠다. 그는 더 이상 침묵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침묵 마법은 영혼을 태우는 행위였고, 그의 영혼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그는 심장의 힘, 코르누스의 공허를 순수한 파괴 에너지로 변환했다. 최후의 일격이었다.

"좋다. 이 질서가 너희의 신념보다 미약하다면, 이 대륙은 다시 멸망할 자격이 있다."

첨탑의 천장이 산산조각 났고, 검붉은 공허의 빛줄기가 라이오넬과 기사단을 향해 쏟아졌다. 라이오넬은 마지막 힘을 다해 성스러운 검을 공허의 빛줄기에 맞섰다. 대륙의 운명을 건 최후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칼릭스가 발산한 공허의 빛줄기는 단순한 마력이 아닌, 수많은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 순수한 파괴 에너지였다. 빛줄기가 지나는 모든 공간은 형태를 잃고 비틀렸으며, 그 경로에 있던 흑요석 첨탑의 잔해도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라이오넬은 성스러운 검 아르카디아를 양손으로 붙잡고, 공허의 빛줄기를 향해 최후의 힘을 짜냈다. "빛의 대장벽!"

아르카디아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축복은, 칼릭스의 공허 에너지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앙! 두 극단의 힘이 부딪히자, 첨탑 최상층이 서 있는 봉인실 위에 거대한 마력의 폭풍이 생성되었다. 빛과 어둠의 파동이 뒤섞이며 아케디아 대륙 전체의 하늘을 뒤덮었다.

황금빛 대장벽은 공허의 빛줄기를 몇 초간 막아냈지만, 라이오넬의 육체는 한계에 도달했다. 그의 피부는 축복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나왔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라이오넬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그의 영혼이 불타는 듯한 고통에 눈을 감고 말았다.

빛의 대장벽이 무너지려는 찰나, 뒤에 있던 기사들이 라이오넬에게 마지막 성유(聖油)를 뿌리며 외쳤다. "대단장님! 저희의 신념을 받으십시오!" 기사들은 자신의 남은 생명력을 라이오넬에게 전송하는 금단의 마법을 사용했다.


일곱 기사의 생명력을 흡수한 라이오넬의 몸에서, 꺼져가던 아르카디아의 빛이 다시금 거세게 타올랐다. 그의 눈빛은 고통을 넘어선, 초월적인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최후의 힘을 집중하여 성스러운 검을 공허의 빛줄기를 향해 던졌다. 검은 단순한 무기를 넘어, 하나의 '개념'이 되어 칼릭스의 공허 에너지의 가장 깊숙한 핵심을 향해 날아갔다.

콰직!

아르카디아 검은 공허의 빛줄기를 꿰뚫고, 칼릭스의 왼손, 즉 코르누스의 심장이 박혀 있는 부위에 정확히 명중했다.

검붉은 심장이 날카로운 금속에 꿰뚫리자, 칼릭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격렬한 고통이 스쳤다. 그의 몸에서 공허의 에너지가 통제를 잃고 사방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검붉은 마력이 첨탑 최상층을 강타하며, 그들을 둘러싼 흑요석 구조물들이 모두 붕괴했다.

칼릭스의 몸은 공허를 흡수한 이후 처음으로 제어력을 잃고 허공에 떠올랐다. 그의 왼손에 박힌 검은, 심장이 뿜어내는 마력을 역행시켜 칼릭스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칼릭스는 고통 속에서 절규했다. 이 고통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파괴되는 영혼의 고통이었다. 심장의 파괴가 시작되자, 그가 흡수했던 수많은 영혼들의 비명과 환희가 뒤섞여 그의 의식 속에서 폭주했다.

"안 돼... 내가... 내가 통제해야..." 칼릭스는 필사적으로 심장을 붙잡으려 했지만, 아르카디아의 성스러운 힘은 공허의 모든 통제력을 무력화시켰다.

심장이 파괴되는 순간, 그 안에 갇혀 있던 고대 신 코르누스의 의지가 마지막으로 칼릭스에게 속삭였다.

“결국... 너도 실패하는군, 칼릭스. 네가 파괴를 거부했기에, 너는 파괴자에게 파괴된다. 하지만 기억하라. 이 세상의 질서는 영원히 깨졌다. 너의 소멸은... 나의 완벽한 부활의 시작이 될 것이다.”

코르누스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칼릭스의 육체는 검붉은 빛과 짙은 남색 빛을 동시에 뿜어내며 폭발 직전의 상태에 놓였다.


폭발 직전의 칼릭스를 본 라이오넬은 피를 토하며 마지막 힘을 짜냈다. 그는 검이 박힌 칼릭스에게 다가섰다.

"네가 질서를 세우려 했으나, 파괴로 끝맺는구나." 라이오넬이 말했다.

칼릭스는 간신히 눈을 뜨고 라이오넬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오랜만에 인간적인, 체념과 회한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멜키오르를... 보냈을 때... 이미 늦었음을 알았다." 칼릭스가 희미하게 말했다. "균형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라이오넬... 너의 신념이 이겼다. 하지만... 네가 얻은 것은... 새로운 짐이 될 것이다."

칼릭스는 오른팔의 봉인 룬 문신이 파괴되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침묵 마법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그는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칼릭스는 파괴 직전에 코르누스의 심장에 갇힌 자신의 모든 영혼 에너지, 그리고 흡수했던 모든 영혼의 잔해를 '하나의 공간'으로 압축했다. 이것은 침묵 마법의 가장 고차원적인 형태이자,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쉬이이익!

첨탑 최상층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는 대신, 모든 빛과 소리가 갑자기 흡수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칼릭스의 육체는 먼지처럼 소멸했고, 코르누스의 심장과 아르카디아 검, 그리고 라이오넬과 기사들까지 포함한 최상층의 모든 존재가 그 '압축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첨탑은 완전히 붕괴했고, 거대한 흑요석 잔해만 남았다. 공허의 역병은 다시 발생하지 않았으나, 칼릭스가 창조한 질서의 흔적은 대륙에서 사라졌다.


칼릭스, 라이오넬, 그리고 기사들은 모두 알 수 없는 '침묵의 공간'에 갇혔다.

이곳은 시간도, 공간도, 빛도 없는 순수한 비존재의 영역이었다. 오직 칼릭스가 자신의 소멸 직전에 만들어낸 '영혼의 감옥'이었다.

칼릭스는 영혼의 형태로 존재했다. 그는 더 이상 심장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너무나 미약해져 있었고, 자신이 만든 감옥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유폐되어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라이오넬과 기사들이 영혼의 형태로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육체가 없었기에 고통을 느끼지 못했지만, 끝없는 침묵 속에서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며칠, 혹은 몇 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침묵의 공간 속에서 흘러갔다.

라이오넬은 칼릭스의 의식에 말을 걸려고 노력했다. "칼릭스! 이 악마! 우리를 왜 이런 곳에 가두었느냐!"

칼릭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자신의 존재를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는 '침묵'을 만들었으나, 그 침묵에 자신이 갇힌 꼴이었다.

그때, 침묵의 공간의 가장자리가 희미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코르누스의 의지가 봉인된 심장의 잔해를 통해 이 공간을 부수고 침입하려 하는 움직임이었다.


코르누스의 목소리가 침묵의 공간에 울려 퍼졌다. “칼릭스! 너의 미약한 영혼으로 나를 영원히 가둘 수 없다! 네가 만든 이 감옥은 나의 새로운 무덤이 아닌, 나의 새로운 성좌가 될 것이다!”

코르누스의 의지가 침입하자, 라이오넬과 기사들의 영혼이 다시 한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침묵의 공간이 코르누스의 공허로 물들기 시작했다.

라이오넬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집중시켰다. "우리의 신은 빛이다! 네 공허는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하지만 라이오넬의 신념은 코르누스의 무한한 공허 앞에서 너무나 미약했다. 칼릭스는 이 상황을 막아야 했다. 코르누스가 이 공간을 장악하면, 대륙은 다시 역병에 휩싸일 것이 분명했다.


칼릭스는 힘겹게 자신의 영혼을 코르누스의 의지 앞에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침묵의 공간의 유일한 창조자이자 통제자였다.

"코르누스." 칼릭스의 영혼이 희미한 파동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너를 파괴하지 않았지만, 너를 '존재하지 않는 곳'에 가두었다. 이곳에서는 너의 공허도, 나의 질서도 무의미하다."

칼릭스는 자신의 마지막 영혼 조각을 이 침묵의 공간의 '벽'에 융합시켰다. 이는 스스로를 영원히 봉인하는 행위였다.


칼릭스의 영혼이 공간에 융합되자, 침묵의 공간은 다시금 견고해졌다. 코르누스의 침입은 멈췄고, 그저 갇힌 채 분노의 파동만을 일으킬 뿐이었다.

라이오넬은 이 끔찍한 진실을 깨달았다. 칼릭스는 자신이 만든 질서와 고대 신, 그리고 자신과 기사들을 포함한 모든 것을 영원히 '무(無)' 속에 봉인한 것이다.

칼릭스의 마지막 파동이 라이오넬의 영혼에 닿았다.

“라이오넬... 너는 신념을 지켰다. 나는... 침묵을 지켰다. 이 공간에서... 영원한 균형을 얻기를 바란다.”

칼릭스의 영혼은 완전히 소멸했고, 침묵의 공간은 영원히 고립되었다. 대륙 아케디아는 구원받았으나, 구원자들은 스스로를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대륙에는 칼릭스의 통치와 전쟁의 기억만이 잔혹한 전설처럼 남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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