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8. 08:09ㆍ자동차
챕터 1. 어둠 속의 조각배, 이도현
"야, 김전민! 너 오늘 점심시간에 급식실 바닥에 흘린 거 전부 닦아라. 냄새나서 밥맛 떨어진다고."
교실 뒤편,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구석에 앉아 있던 김전민은 오늘도 박헌주의 명령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헌주는 반에서 가장 덩치가 크고, 힘으로 아이들을 지배하는 폭군의 전형이었다. 전민이 겪는 괴롭힘은 학교폭력의 전형이었다. 물리적인 폭행은 물론이고, 공개적인 모욕, 물건 파손, 지속적인 심부름 요구 등으로 전민의 영혼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전민의 얼굴에는 늘 생기가 없었고, 눈빛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흐릿했다.
나는 이도현이다. 키가 크거나 싸움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타고난 성격이 불의를 참지 못했다. 하지만 헌주의 폭력은 너무 거대해서, 나 역시도 처음에는 그저 외면하는 다수 중 한 명이었다.
전민에 대한 나의 태도가 바뀐 것은 2학년 겨울, 혹한의 어느 날이었다. 헌주가 전민의 교과서를 전부 찢어 눈이 쌓인 운동장에 뿌렸다. 전민은 아무 말 없이 운동장으로 내려가 찢어진 종잇조각들을 떨리는 손으로 하나씩 주워 모으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고, 찬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창문으로 보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전민이 웅크리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 찢어진 종이 조각들을 함께 줍기 시작했다.
"야, 이도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네가 쟤 꼬붕이라도 되냐?" 헌주가 멀리서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김전민이 네 하인 아니잖아. 네가 버린 쓰레기 네가 치워."
결국 그날, 나는 헌주 무리에게 심한 위협과 몇 대의 구타를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 후, 전민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내 옆에 꼭 붙어 다녔고, 내가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주자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았다. 나는 전민에게 무너지지 않는 법을 가르쳤고, 헌주에게 반격할 용기를 심어주었다. 우리의 우정은 학교 폭력의 그림자를 몰아냈고, 전민은 어둠에서 벗어나 빛을 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졸업 후, 우리는 같은 대학, 같은 학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서울에 있는 거대 에너지 기업, '태양 에너지 코퍼레이션'에 나란히 입사했다. 나는 기술팀 소속이었고, 전민은 경영 기획팀 소속이었다. 서로 부서는 달랐지만, 우리는 늘 서로의 성장을 응원했고, 매번 만날 때마다 과거의 지옥 같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서로의 존재에 감사했다.
"도현아, 너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아직도 구석에서 떨고 있을 거야. 네가 내 인생을 바꿨어." 전민은 언제나 진심으로 나에게 고마워했다. 나는 그런 전민의 변화를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나는 그의 구원자였고, 우리의 관계는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챕터 2. 청천벽력, 역전된 피라미드
입사한 지 4년째 되던 해, 회사에서는 대규모 조직 개편이 단행되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다. 기술팀 전체를 총괄하는 상무보로 김전민이 부임한다는 소식이었다.
전민은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명문대 MBA를 취득하고 경영 기획팀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며 초고속 승진을 이뤄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내 머리 꼭대기에 앉게 되었다.
인사 발표가 있던 날, 나는 전민을 찾아가 진심으로 축하했다. "전민아! 네가 상무보라니, 대박이다! 우리 팀 총괄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진짜 자랑스럽다, 친구야!"
전민은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도현아, 나도 아직 얼떨떨해. 네가 옆에서 늘 응원해준 덕분이지. 우리, 이제 같은 팀에서 일하게 되었네."
우리는 기쁨에 겨워 포옹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기술팀 팀장으로 부임한 김전민 상무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도현 주임."
전민은 회의실에서 나를 딱딱하고 공적인 호칭으로 불렀다. 처음에는 그의 공과 사를 구분하는 프로페셔널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발언은 단순한 냉철함을 넘어섰다.
"이도현 주임이 담당하는 핵심 기술 검토 보고서입니다. 제가 검토해 본 결과, 기초 자료 수집부터 기술 해석까지 전반적으로 수준 미달입니다. 이 보고서를 기반으로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없어요. 기술팀 4년차 경력이 맞습니까? 마치 신입 사원이 쓴 것 같습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전민은 내 보고서를 단호하게 질책했다. 나는 밤샘 작업을 하며 완벽을 기했던 보고서였기에 당황했다.
"죄송합니다, 상무님.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그 후로 전민의 날카로운 지적은 나에게만 집중되었다. 다른 팀원들에게는 상세하고 건설적인 피드백을 주면서도, 나에게는 늘 "수준 미달", "가치 없음", "경각심 부족" 같은 강한 비난을 쏟아냈다.
"이도현 주임은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 능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본인이 4년 동안 이 회사에 기여한 바가 무엇인지 스스로 되돌아보세요."
그의 말은 합리적인 비판을 가장한 공개적인 망신주기였다. 나는 이 상황이 불편하여 퇴근 후 전민에게 연락했다.
"전민아, 너 오늘 회의 때 나한테 너무 심했어. 너 상사니까 냉정한 건 알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왜 나한테만 그래?"
전민에게서 온 답장은 짧고 차가웠다.
[김전민 상무보]: 도현아, 공과 사는 구분하자. 회의 시간에 감정을 섞는 건 프로답지 못해. 상사로서 너의 기여도가 부족해서 개선을 요구했을 뿐이야.
그는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 선은 나에게만 유독 날카로웠다.
챕터 3. 왕관을 쓴 피해자
전민의 괴롭힘은 점입가경이었다. 그는 내가 담당하는 프로젝트의 핵심 자료를 회의 직전에 갑자기 변경하거나, 불가능한 시간 안에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전 팀원이 보는 앞에서 나를 질책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는 내 책상 위 보고서에 붉은 펜으로 모욕적인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나는 결국 전민의 상무보실로 찾아갔다. "김전민 상무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전민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말씀하세요. 공적인 이야기만 듣겠습니다."
"공적인 이야기입니다. 제가 상무님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향한 질책은 단순한 업무 피드백을 넘어선 인격 모독 수준입니다. 과거의 관계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제야 전민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놀랄 만큼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내가 알 수 없는 냉정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과거의 관계? 이도현 주임, 과거 이야기 하지 마세요. 과거에 저는 박헌주에게 폭력을 당하는 약자였고, 이도현 주임은 그런 저를 잠시 구원해 준 사람이었죠. 저에게는 잊고 싶은 치욕적인 기억입니다."
"치욕? 내가 너를 구해줬는데 그게 치욕이라고?" 나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전민은 싸늘하게 웃었다. "구원이라... 맞아요. 하지만 그 구원은 저에게 '나는 너 없이는 살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낙인을 찍어준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그 사실이 싫었습니다. 저는 제 힘으로 일어서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제 힘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도현 주임. 저는 더 이상 과거의 약자가 아닙니다. 제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이겨낸 방식은, 다시는 누구에게도 짓밟히지 않을 압도적인 힘과 권력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저의 지휘 아래에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힘이 있었다. "이도현 주임은 제가 가장 약했을 때의 저를 보았습니다. 제가 가장 수치스러웠던 순간의 목격자입니다. 제가 권력을 가졌다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저를 '구원'했던 이도현 주임 당신뿐입니다."
그는 과거의 피해자였지만, 권력을 쥐자 자신이 겪었던 방식 그대로 타인을 통제하고 짓밟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전민은 트라우마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 트라우마를 권력의 정당성으로 치환해버렸다. 그리고 그 권력의 첫 번째 실험 대상이 내가 된 것이다.
"당신은 제 은인이자, 가장 큰 약점이 될 수 있었던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저의 힘을 증명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제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당신은 매일매일 확인하게 될 겁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과거 내가 베풀었던 순수한 선의가, 그의 복수심을 자극하는 불쏘시개가 되어 나를 태우고 있었다. 나는 과거의 폭군(박헌주)으로부터 한 사람을 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폭군(김전민)을 내 손으로 키워낸 꼴이 되었다.
전민은 다시 자리에 앉아 서류에 집중했다. "나가보세요, 이도현 주임. 그리고 제가 지시한 기술 검토 보고서, 내일 오전까지 완벽하게 처리해 오세요. 이번에도 미흡하면, 당신의 업무 평가에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제 내가 알던 친구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냉정하고 잔인한 폭군의 가면이었다.
챕터 4. 숨 막히는 고립, 끝없는 시험
김전민 상무보의 괴롭힘은 더욱 조직적이고 교묘해졌다. 그는 나를 공개적으로 질책하는 것 외에도, 내 업무 환경 자체를 고립시키고 무력하게 만드는 데 집중했다.
- 정보 차단: 중요한 회의 자료나 고객사와의 피드백 내용을 나에게만 늦게 전달하거나, 아예 누락시켰다. 나는 늘 한 발 늦은 정보로 업무를 처리해야 했고, 이는 곧 실수의 빌미가 되었다.
- 비현실적인 기한: 다른 팀원들에게는 일주일이 주어지는 보고서를 나에게는 하루, 혹은 반나절 안에 완성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품질 저하를 유도했고, 그 결과로 다시 공개적인 질책을 받게 만들었다.
- 핵심 업무 배제: 4년차 주임으로서 맡아야 할 핵심 프로젝트와 기술 검토 업무에서 나를 제외시켰다. 대신, 신입 사원도 할 수 있는 단순 반복 업무나 잡무를 몰아주었다. 나는 기술팀 주임이 아니라 김전민 상무보의 개인 비서처럼 일하고 있었다.
팀원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상무보의 권위와 김전민의 냉정한 태도 앞에서 누구도 나를 돕겠다고 나서지 못했다. 그들은 눈치껏 나를 피하기 시작했고, 점심시간에도 나는 홀로 샌드위치를 먹거나 구내식당 구석 테이블에 앉아야 했다. 과거 박헌주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김전민처럼, 이제 내가 외톨이가 된 것이다.
어느 날, 전민은 나에게 새로 개발 중인 핵심 기술의 안전성 검토 보고서를 당일 마감으로 요구했다. 보고서는 최소 3일은 걸려야 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상무님, 이 보고서는 도저히 오늘까지 마무리할 수 없습니다. 기술 검토는 정확성이 생명인데, 이렇게 촉박하게 내면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의를 제기했다.
전민은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흥미와 잔인함이 뒤섞여 있었다. "이도현 주임. 저는 핑계를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이 정도의 업무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 회사에서 당신의 존재 가치는 없다는 뜻이겠죠. 제가 당신보다 더 잘 알 겁니다. 무능한 존재가 조직에 미치는 악영향이 얼마나 큰지."
그는 과거 자신이 겪었던 트라우마를 나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과거의 약자가 아님을 확인하려 했다.
챕터 5. 반격의 불씨, 이도현의 결심
나는 지쳐갔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내가 김전민을 구원했던 힘이 단순한 정의감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나는 밤을 새워가며 전민이 지시한 모든 비현실적인 업무를 어떻게든 완수했다.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면, 전민은 더욱 교묘하게 나를 궁지로 몰아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나는 우연히 김전민이 추진 중인 '신성장 동력 프로젝트'의 핵심 문서 초안을 보게 되었다. 그 문서는 전민이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는 프로젝트로, 그의 상무보직 승진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문서를 검토하던 나는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발견했다. 프로젝트의 핵심 기술 적용 방식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 이대로 진행된다면 기술적, 재정적으로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힐 수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하지만 이 결함은 너무나 복잡하고 전문적이라, 나처럼 깊이 있는 기술 배경을 가진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전민에게 보고해야 할지, 아니면 이 상황을 나의 반격의 기회로 삼아야 할지 고민했다. 이 실수는 김전민의 오만함과 무리한 속도전이 낳은 결과였다. 그가 나를 철저히 고립시키고 단순 잡무만 맡긴 탓에, 핵심 기술 검토를 제대로 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전민이 나에게 가한 폭력이 그의 몰락의 씨앗을 뿌린 셈이었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이 폭군에게 휘둘릴 수 없다. 나는 그가 나에게 보여줬던 냉정함과 배신감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했다.
나는 그 기술적 오류를 상세히 분석한 자료를 은밀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전민에게 직접 보고하는 대신, 회사 내 감사 부서의 고위 관계자에게 익명으로 제보할 계획을 세웠다.
챕터 6. 최후의 승부, 폭로의 순간
며칠 뒤, 전민은 나에게 또다시 무리한 지시를 내리며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었다.
"이도현 주임. 당신의 업무 태도는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4년차 경력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 팀에서 가장 오래 있었으면서도, 왜 이렇게 기여도가 낮습니까? 과거에 당신이 누군가를 구원했다는 오만함 때문에 현재의 현실을 못 보는 겁니까?"
그의 말은 선을 넘었다. 나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김전민 상무님." 내 목소리는 놀랄 만큼 차분했다. "제가 상무님께서 지시한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하나 더 했습니다. 상무님께서 추진 중인 신성장 동력 프로젝트, 기술 검토가 완료되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었습니다."
전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무슨 헛소리입니까? 이도현 주임, 당신은 그 프로젝트에 접근할 권한도 없었고, 자격도 없습니다!"
"저는 기술팀 주임으로서, 회사의 손해를 막을 의무가 있습니다. 상무님께서는 제게 단순 잡무만 주셨지만, 저는 제 능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기술적 오류는 프로젝트의 핵심 안전 기준을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진행되면 회사의 손실은 수천억 원에 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준비한 상세 자료를 인쇄하여 회의 테이블 중앙에 조용히 놓았다. 모든 팀원의 시선이 자료에 꽂혔다. 전민은 얼굴이 새하얘져서 나에게 달려들려 했다.
"이도현! 당장 그 자료 치워! 이건 기밀 유출이야!"
"이미 늦었습니다, 상무님."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과거 학교 폭력을 당하던 그 시절의 두려움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는 이미 회사 감사 부서에 이 사실을 정식으로 보고했습니다. 익명이지만, 기술적 근거가 명확하기 때문에 조사가 시작될 겁니다."
나는 그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상무님께서는 저를 짓밟고 권력을 증명하려 했지만, 진정한 힘은 타인을 짓밟는 권력이 아니라, 위기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저는 상무님께서 저에게 주신 수많은 잡무를 처리하면서도, 제 본래의 능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지금 상무님의 오만함을 무너뜨린 겁니다."
내가 회의실 문을 열고 나오자, 뒤에서는 전민의 고함 소리와 팀원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구원자가 아닌, 동등한 경쟁자로서의 마지막 승부였다. 내가 그를 구해줬을 때처럼, 이번에도 나는 그의 몰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단지 이번에는, 그 몰락의 원인이 그의 손에 쥐어진 왜곡된 권력이었다는 점만이 달랐다.
챕터 7. 감사팀의 칼날, 전민의 추락
이도현 주임의 폭로는 회사 전체를 뒤흔들었다. 신성장 동력 프로젝트는 회사 미래의 핵심이었기에, 기술적 결함에 대한 감사팀의 조사는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도현이 제출한 자료는 너무나 명확하고 기술적으로 완벽했기에, 김전민 상무보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감사팀은 김전민이 지나친 승진 욕심과 오만함으로 핵심 검토 과정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프로젝트를 추진했음을 확인했다. 특히, 기술 검토 권한이 있는 이도현 주임에게 의도적으로 단순 업무를 몰아주어 기술적 검토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정황도 함께 드러났다.
며칠 후, 김전민은 상무보 직위에서 해제되었다. 회사는 그의 무리한 업무 추진과 부하 직원에 대한 부당한 대우(직장 내 괴롭힘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정황)를 이유로 그에게 정직 처분을 내렸다. 한때 회사의 초고속 승진 신화로 불렸던 김전민은, 한순간에 권좌에서 추락했다.
나는 팀원들 앞에서 잠시나마 영웅이 되었다. 회사를 수천억 원의 손실에서 구해낸 '내부 고발자'이자 '유능한 기술자'로 인정받은 것이다. 팀원들의 시선은 경외와 미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이 나를 외면했던 과거에 대한 사과의 눈빛이었다.
챕터 8. 복도 끝, 마지막 대면
정직 처분이 내려진 다음 날 오후, 나는 인트라넷 계정이 정지되기 전에 개인 물품을 정리하러 온 김전민과 복도 끝에서 마주쳤다. 그는 과거의 번듯한 정장이 아닌, 구겨진 캐주얼 차림이었다. 어깨는 다시 학창 시절처럼 움츠러들어 있었고,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마주섰다. 침묵은 길고 무거웠다.
"이도현." 전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힘없이 갈라져 있었다.
"김전민 상무보님." 나는 공적인 호칭을 유지했다.
"나한테 왜 그랬냐? 내가 너를 괴롭힌 건 맞지만... 너 때문에 내 모든 게 무너졌어. 내가 너를 구해줬는데, 너는 결국 나를 짓밟았어." 그의 목소리에는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가 너를 짓밟은 게 아니야, 김전민. 네 스스로 무너진 거지. 네가 쥐었던 권력은 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박헌주가 되기 위한 도구였어. 너는 네 밑에 있는 사람을 약자로 만들고 통제하려 했어. 그게 너의 실수야."
나는 한 걸음 그에게 다가섰다. "네가 나를 괴롭혔던 건, 나를 구원자로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네가 나에게 졌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테고. 하지만 나는 너를 구할 때나, 지금 너의 잘못을 바로잡을 때나, 동일한 이도현이야."
전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동일한 이도현... 그래. 너는 여전히 정의로운 척하는구나. 하지만 네 덕분에 나는 다시, 가장 약한 자리로 돌아왔어."
"그게 너의 진짜 기회야."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권력 뒤에 숨는 대신, 네가 진짜 가진 능력을 보여줄 기회. 과거의 피해자로 남을지, 아니면 이 실패를 딛고 진정한 리더로 거듭날지는 이제 네 선택에 달렸어."
전민은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는 과거 박헌주에게서 보았던 오만함이 사라지고, 깊은 절망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나를 스쳐 지나쳐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이제 더 이상 폭군이 아니었다.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다시 선 자리
김전민의 징계 처분이 확정된 후, 나는 기술팀의 핵심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리더로 인정받았다. 회사는 나에게 공식적으로 감사장을 수여했고, 곧이어 팀장 대리로 승진 발령을 냈다. 나는 이제 팀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었다.
사무실 내 책상에 앉아 쌓여 있는 보고서들을 정리했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나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강해진 친구를 돕고자 했지만, 그 친구는 권력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변질되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장 잔인한 폭군이었던 그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제 누군가를 짓밟아 얻는 권력이 아닌, 능력과 신뢰로 얻는 리더의 자리에 섰다. 그날, 나는 김전민에게서 배운 쓰라린 교훈을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 권력은 언제든 사람을 변질시킬 수 있지만, 진정한 가치는 자신의 능력과 타인에 대한 존중에서 나온다는 것을.
나의 자리에는 이제 아무도 나를 괴롭히는 폭군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생각했다.
"김전민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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