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그림자를 삼킨 재상: 피로 쓴 복수의 서막

2025. 12. 7. 22:03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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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달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 궁궐의 후원에서 사내의 숨결이 조용히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토해낸 피는 흙바닥에 스며들어 형체를 지웠고, 그 위에 떨어진 한 송이 백목련 꽃잎만이 시신의 참혹함을 알고 있는 듯했다.

조선의 세 번째 왕자, 혜명대군 이선은 그 백목련을 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서찰은 방금 전 숨을 거둔 환관이 목숨을 걸고 전하려 했던 내용이었다. 서찰의 내용은 간결했으나, 그 무게는 왕조 전체를 짓누를 듯했다.

‘영의정 최현. 그 권세의 근원은 왕실의 재원이 아닌, 은밀히 축적된 사금(私金)에 있으며, 그 자금의 운용은 국경 밖 ‘천일회’와 닿아있습니다. 전하의 명이 닿지 않는 곳에 그의 군대가 있습니다.’

영의정 최현. 그는 왕의 총애를 넘어, 왕을 움직이는 그림자 권력자였다. 그의 말 한마디는 조정의 법보다 무거웠고, 그의 미소는 사대부들의 목숨을 좌우했다. 이선은 최현의 권세가 왕권의 허점을 파고든 단순한 간신배의 전횡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것은 시스템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된 왕조 전복의 청사진이었다.

이선은 서찰을 태워버리고 조용히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차분했지만, 눈 속에는 이미 거대한 폭풍이 일고 있었다. 최현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은 단순한 충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한 숙명이었다.


한편, 한양 저잣거리의 뒷골목, 버려진 폐가에서 숯검댕이 묻은 얼굴의 소녀가 독기를 품은 눈빛으로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소아.

불과 세 달 전, 소아는 부유한 역관 가문의 외동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청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그 부의 일부가 최현의 은밀한 자금줄, 즉 '천일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이 왕조를 뒤흔들 역모의 자금이라는 것을 직시했다.

진실을 알게 된 소아의 아버지는 왕실에 이 사실을 고하려 했으나, 최현이 한발 빨랐다. 최현은 자신의 계획이 왕조를 뒤집으려는 역모임을 숨기기 위해, 오히려 소아의 아버지를 '천일회'와 내통하여 역모를 꾸몄다는 무서운 누명을 씌웠다. 역모라는 끔찍한 죄명 아래, 소아의 아버지는 국문을 당한 뒤 참형당했고, 가문은 멸족의 위기에 처했다.

소아의 어머니와 오라비는 간신히 도망쳤으나, 최현의 사병 조직 '칠성패'의 추격을 받아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역모자의 가족에게는 자비란 없었다. 소아는 오라비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숨겨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나, 그녀의 삶은 이미 불타버린 폐허였다. 그녀의 가슴에는 가족의 피로 새겨진 증오와 복수심만이 남았다.

그날 이후, 소아에게 남은 것은 오직 복수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온몸을 불태울 정도로 뜨거운 증오를 품고 최현을 향한 칼날을 갈았다. 그는 단순한 간신배가 아니었다. 그는 왕을 기만하고 역모의 자금을 축적했으며, 죄 없는 가족을 가장 추악한 죄명으로 몰아 죽인 악마였다.

소아는 최현의 저택 주변을 맴돌며 정보를 모았다. 그녀는 복수를 위해 기녀가 되기도, 짐꾼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최현의 비밀 자금 운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 그의 서고지기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 서고지기는 한 달에 한 번, 영의정 저택의 비밀 통로를 통해 국경 밖으로 나섰다.


이선은 최현의 권력 구조를 쫓다가 우연히 한양의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는 수상한 세력, '칠성패'의 존재를 감지했다. 그들은 최현의 명을 받아 암살과 은밀한 감시를 일삼는 사병 조직이었다.

이선은 칠성패가 한 역관의 가족을 역모죄로 몰아 몰살하고 그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몰수했다는 소문을 접하고, 단순한 숙청이 아닌 최현의 비밀과 관련된 핵심 증거 인멸임을 직감했다. 그 희생된 역관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이선은, 그녀를 찾아 나섰다. 어쩌면 그녀가 최현의 가장 깊은 어둠을 파헤칠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몰랐기에.

그녀를 찾는 과정은 험난했다. 하지만 혜명대군은 신분을 숨기고 직접 시장의 바닥을 기어 다니며 소문을 쫓았다. 그리고 어느 비 오는 밤, 이선은 칠성패의 그림자 속에서 민첩하게 움직이며 정보를 빼내는 한 소녀를 발견했다.

검은 옷을 입고 비단 보자기에 무언가를 싼 채 도망치는 소녀. 그 뒤를 쫓는 칠성패의 살기 어린 추격.

"멈춰라! 그 물건을 당장 내려놓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이다!" 칠성패의 우두머리, 강인한 체구의 사내가 소리쳤다.

소아는 젖은 흙바닥 위를 전력으로 달렸다. 그녀의 손에 든 보자기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최현의 비밀 서고에서 빼낸, 그의 자금줄에 대한 은밀한 장부였다.

길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소아는 누군가에게 강하게 부딪혔다. 몸의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는 찰나, 강인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숨 막힐 듯 가까운 거리에서, 소아는 자신을 구해준 사내의 깊고 단단한 눈빛과 마주했다. 그는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침착함을 지니고 있었다.

"괜찮소? 그들이 당신을 쫓는 이유가 무엇이오?" 혜명대군 이선이 나직이 속삭였다.

소아는 그의 눈빛에서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그 눈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같은 어둠 속을 걷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경계와 분노를 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들을 막을 수 있습니까?" 소아는 장부를 품에 숨긴 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물었다.

이선은 쫓아오는 칠성패 무리를 흘끗 보더니, 소아의 손목을 잡고 빠르게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나는 그대와 같은 목적을 가진 자요."

그의 한 마디는, 왕의 권세를 능가하는 재상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왕자와, 가족의 복수를 위해 모든 것을 건 소녀의 숙명적인 만남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두 개의 칼날은 이제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겨눠지기 시작했다. 피의 복수를 계획하는 소녀, 그리고 왕조의 명운을 건 왕자의 동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의 앞에는 최현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굳건히 서 있었다.

빗속의 동맹: 장부와 왕자의 서책

혜명대군 이선은 소아의 손목을 잡은 채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이끈 곳은 평범한 골목이 아니었다. 축축한 돌벽에 숨겨진 좁고 낮은 입구. 칠성패가 도착하기 직전, 이선은 그녀를 그 틈으로 밀어 넣었다.

"숨이 막혀도 참고, 소리 내지 마시오. 이곳은 오래된 배수로요." 이선은 속삭이며 재빨리 흙과 돌로 위장된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밖에서는 칠성패의 거친 발소리와 욕설이 들렸다.

"놓쳤다! 이 근처에 숨어있을 것이다! 샅샅이 뒤져라!"

소아는 좁고 축축한 배수로에 웅크려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곰팡이 냄새와 흙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녀는 장부를 품에 안은 채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이 사내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평범한 왈패나 도망자가 아니었다. 그의 몸가짐과, 이 비밀 통로를 알고 있는 침착함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선은 배수로 안에서 잠자코 칠성패의 발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는 소아의 굳게 다문 입술과 불타는 눈빛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복수 외의 다른 감정은 없어 보였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이선은 배수로의 끝을 열고 소아를 이끌었다. 그들이 나온 곳은 도성 밖 야트막한 언덕, 버려진 듯한 작은 정자였다. 이곳은 이선이 궁궐의 답답함을 피해 가끔 나와 사색하던 은밀한 장소였다.

정자 안에 들어서자 이선은 자신의 옷소매를 찢어 소아의 얼굴에 묻은 숯과 흙을 닦아주려 했다.

"몸이 젖었으니 우선 불부터 피웁시다. 추위를 피해야 하오."

소아는 그의 친절에 오히려 더욱 경계심을 드러내며 뒤로 물러섰다.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저 같은 목적을 가진 자라는 말로는 믿을 수 없습니다. 영의정 최현을 쫓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입니다. 당신의 정체를 밝히십시오."

이선은 그녀의 완강한 태도에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에서 그는 꺾이지 않는 강한 의지를 읽었다.

"나의 신분을 섣불리 밝히는 것은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소. 다만, 내가 이 나라의 가장 높은 곳에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만 알아두시오."

소아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장 높은 곳에 닿을 수 있는 위치라니, 혹시 왕실 사람인가. 그러나 왕실 사람이 이처럼 위험한 음모를 파헤치려 뒷골목을 헤매고 다닐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아는 품속에서 비단 보자기를 꺼내 해진 장부를 꺼냈다. 빗물에 약간 젖었으나, 글자는 선명했다.

"이것은 영의정 최현이 '천일회'라는 역모 조직을 통해 축적한 은밀한 자금의 흐름을 기록한 장부입니다. 내 아버지는 이것을 알았다는 이유로 역모자로 몰려 참형당했습니다. 그리고 내 가족은 모두 칠성패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분노로 인해 힘이 있었다. 소아는 장부를 이선에게 건넸다. 이선은 촛불을 켜서 조심스럽게 장부를 펼쳤다.

장부에는 최현의 개인 사금과 외국과의 비밀 무역 내역, 그리고 그 자금이 국경 인근의 특정 무관들에게 흘러들어 간 기록이 치밀하게 적혀 있었다. '천일회'라는 이름은 자주 언급되었고, 매번 막대한 자금이 오갔다.

이선은 장부를 읽어 내려가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최현이 왕권을 위협하는 거물 간신이라고 짐작했지만, 그 실체가 이렇게 명확한 '역모'일 줄은 몰랐다. 이것은 단순한 횡령이 아니라, 왕조를 전복시키기 위한 사병 조직과 자금줄을 완벽하게 갖춘 반역의 증거였다.

"이것이… 최현의 힘의 근원이오. 왕의 명령도 따르지 않는 그의 사병들은 이 자금으로 움직이고 있었군. 장부를 보니, 이 자금은 단순히 개인의 부를 넘어, 청나라와의 경계 부근에서 무기 거래에까지 사용되고 있소." 이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아는 이선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무기 거래라니요? 단순히 사금을 축적한 것이 아니라… 군사를 모으고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역관이었던 그대의 아버지는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이 돈의 흐름을 포착했고, 그것이 단순히 부정한 재산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최현에게 숙청당한 것이오. 최현은 역모를 숨기기 위해 오히려 그대 아버지를 역모자로 둔갑시킨 것이고."

이선의 단호한 설명은 소아의 복수심에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그녀의 복수는 이제 개인적인 원한을 넘어, 나라를 뒤흔들려는 거대한 악에 맞서는 싸움이 되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장부를 통해 최현의 역모를 밝혀내고, 그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군요." 소아는 확신을 담아 물었다.

이선은 장부를 덮고 고개를 들었다. 정자의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나는 이 나라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는 자요. 영의정 최현의 역모를 밝히는 것은 단순히 그를 벌하는 것을 넘어, 무너져가는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더 이상의 희생을 막는 길이라오."

이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대가 이 장부를 목숨 걸고 지킨 이유는, 가족의 원한을 갚기 위함일 것이오. 나는 그대의 원한이 헛되지 않도록, 이 역모를 왕 앞에서 증명해 보이겠소. 내가 바로 혜명대군 이선이오."

그의 입에서 '혜명대군'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소아는 놀라 굳어버렸다. 왕자라니. 그녀의 복수의 칼날이, 왕실과 연결된 가장 위험하고도 유일한 조력자를 만난 것이다.

북으로 가는 그림자: 상인과 복수의 소녀

다음 날 새벽, 정자에는 밤새도록 논의한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혜명대군 이선과 소아는 최현의 비밀 장부를 증거로 삼아, 역모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북방 국경 지대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장부에 기록된 비밀 창고는 압록강 부근의 만상(滿商) 거점에 위장되어 있었다.

이선은 자신이 왕자임을 밝힌 후에도 소아의 눈빛에 복수심 외의 다른 감정, 즉 연모나 굴종의 기색이 없음을 확인하고 더욱 확신했다. 그녀는 오직 최현을 무너뜨리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만 자신을 대하고 있었다. 이선 역시 그녀의 복수심이 최현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찌를 수 있는 날카로운 칼날임을 인정했다.

"북방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영의정의 세력이 관료와 군부 곳곳에 뿌리내려 있소. 관청의 통행증은 쓸모가 없을 것이오." 이선이 말했다.

소아가 나섰다. "제 아버지는 역관이셨습니다. 저는 북방 상인들의 은밀한 길과 그들의 언어를 압니다. 우리가 상인으로 위장한다면, 일반적인 관문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선은 곧바로 대책을 세웠다. 그는 은밀히 자신을 따르는 내시에게 연락하여 신분이 노출되지 않을 최소한의 자금과 낡은 상인 복장, 그리고 청나라에서 들여온 듯한 골동품 몇 점을 준비시켰다.

며칠 후, 이선과 소아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한양을 벗어났다. 이선은 투박한 옷차림에 텁수룩한 수염을 붙인 중년 상인 '김 서방'으로, 소아는 그의 짐을 들고 다니는 영리한 하녀 '아영'으로 위장했다.

길을 나서는 동안, 이선은 끊임없이 주변을 경계했다. 북쪽으로 향하는 역로(驛路)는 생각보다 최현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다. 주요 관문에 배치된 군사들은 왕명이 아닌, 최현의 은밀한 지시를 따르는 듯한 강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어느 날 저녁, 인적이 드문 산길을 걷던 중, 그들은 맞은편에서 말을 탄 일행과 마주쳤다. 그들은 사복 차림이었으나, 허리에 찬 패도와 눈빛은 영락없는 무사들이었다. 이들은 최현의 직속 사병인 '칠성패'의 다른 분파임이 분명했다.

그 무사들은 낡은 상인 차림의 이선과 소아를 지나쳐 갔지만, 그 중 한 명이 갑자기 고삐를 당겨 멈춰 섰다.

"이봐, 상인. 근처에서 수상한 자를 보지 못했느냐?" 무사가 거칠게 물었다.

이선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수상한 자라니요. 저희는 그저 국경 쪽으로 물건을 대러 가는 불쌍한 상인 나부랭이들입니다. 산길에서 호랑이나 마적 떼가 더 수상할 뿐입니다."

무사는 이선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소아는 순간 몸이 굳었지만, 그녀는 과거 역관의 딸로서 수많은 낯선 이들을 상대했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녀는 재빨리 이선에게 다가가 짐을 건네는 척하며 무사에게 말을 걸었다.

"나리들께서 찾으시는 수상한 자가 도망치는 몸인가 봅니다. 저희는 아침부터 이 길을 걸었지만, 그저 짐승 소리만 들었을 뿐입니다. 목이 마르시다면, 저희가 가진 물통을 나눠드리겠습니다." 소아는 순박한 하녀처럼 행동하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

무사는 소아의 맑고 겁먹은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경계를 풀었다. 그가 찾는 자는 역모의 증거를 들고 도망친 위험하고 영리한 자들이었지, 이런 하녀와 늙은 상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흥. 됐으니 빨리 길이나 비켜라." 무사는 짐짓 위협적으로 말하며 다시 말을 몰았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이선과 소아는 나무 뒤에 숨어 한참을 기다렸다. 소아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들은... 아까 그 칠성패였습니다. 제가 장부를 훔쳤을 때 저들과 비슷한 눈을 가진 자들에게 쫓겼습니다." 소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선은 소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잘했소, 아영. 침착하게 대처했으니 그들이 눈치채지 못했소. 그들의 목적은 그대가 훔친 장부를 회수하고, 증거를 아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이니, 경계를 늦춰선 안 되오."

그 순간, 소아는 그가 자신을 '아영'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위험 속에서도, 왕자의 지위를 잊고 자신을 한 명의 조력자로 대우하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웠던 마음 한구석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군마마... 정말 위험한 길입니다. 만약 저들에게 잡힌다면, 역모의 증거를 훔친 저뿐만 아니라, 마마께서도 영의정의 사병들에게..." 소아는 말끝을 흐렸다. 왕자가 최현의 사병들에게 잡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치욕과 위험이었다.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이 길에 들어섰소. 궁궐에서 안전하게 앉아 왕의 눈과 귀를 가리는 역모를 묵과하는 것보다, 이 길을 가는 것이 더 나에게 맞는 일이오. 그리고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오. 그대의 눈과 지식, 그리고 이 장부를 통해 내가 보지 못했던 진실을 보았소."

그의 말은 왕자로서의 오만함이 아니라, 진정한 책임감과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소아는 자신의 복수심이 드디어 나라를 구할지도 모르는 거대한 물결에 합류했음을 깨달았다.

며칠을 더 걸어, 그들은 마침내 국경에 가까운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다. 이 마을은 만상들의 왕래가 잦아 외부인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장부에 기록된 비밀 창고는 이 마을의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버려진 듯한 방앗간이었다.

이선은 방앗간을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건물이었으나, 밤하늘 아래 드리워진 그 그림자는 왠지 모를 깊은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최현의 역모 자금이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오늘 밤, 이곳을 확인해야 하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회일 수 있소." 이선이 소아에게 말했다.

소아는 품속의 장부를 꽉 쥐었다. "제 가족의 원한이 시작된 곳입니다. 반드시 그 실체를 밝혀내겠습니다."

반역의 방앗간: 화약과 강철의 섬뜩한 진실

자정 무렵, 달이 구름 뒤에 숨어 온 세상이 먹물을 들이부은 듯한 짙은 어둠에 잠겼다. 혜명대군 이선과 소아는 영의정 최현의 비밀 창고로 지목된 낡은 방앗간 앞에 섰다. 퀴퀴한 곡식 냄새와 묵은 흙먼지 외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경계가 너무 허술합니다. 밖에서 보초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소아가 속삭였다.

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역모의 자금 창고일수록 겉으로는 더욱 평범해야 하는 법이오. 어쩌면 경비들은 방앗간 내부에 숨어있을 수도 있소. 잠금쇠가 특이하군."

이선은 품속에서 작은 쇠꼬챙이 꾸러미를 꺼냈다. 왕실 호위무사들에게서 배운 비술이었다. 손끝의 감각만으로 낡은 자물쇠를 만지던 이선이 미세한 소리를 내며 잠금쇠를 열어젖혔다.

삐걱이는 소리를 최소화하며 문을 열자,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가 그들을 맞았다. 방앗간 내부는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거대한 맷돌과 낡은 기구들이 먼지 속에 잠겨 있었고, 달빛이 깨진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와 춤을 추었다.

이선은 장부에 기록된 내용을 떠올리며 방앗간 내부의 구조를 살폈다. 그의 시선은 바닥 한쪽에 쌓인 땔감 더미에 닿았다. 땔감은 너무 깔끔하게 쌓여 있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소아가 먼저 땔감 쪽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그녀는 바닥의 흙을 유심히 살피더니, 손가락으로 미세한 선을 짚었다.

"이곳은… 땔감을 치우면 바닥이 열리는 구조입니다. 흙먼지가 쌓여 있지만, 최근에 움직인 흔적이 있습니다."

이선과 소아는 힘을 합쳐 땔감을 치웠다. 과연, 땔감 뒤에는 얇은 널빤지가 깔린 작은 문이 드러났다. 이선이 문고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지하에서 차가운 기운이 훅 끼쳐 올라왔다.

지하 창고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선은 촛불 대신 미리 준비한 휴대용 석등에 불을 붙였다. 희미한 불빛이 지하 창고의 내부를 비추자, 두 사람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멈추었다.

그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금괴나 은덩이로 가득 찬 광경은 아니었다. 대신, 방앗간 지하 창고는 하나의 거대한 군수 창고였다.

벽을 따라 나 있는 나무 선반 위에는 촘촘하게 청나라에서 밀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조총(鳥銃) 수십 정이 정렬되어 있었다. 창고 중앙에는 큼직한 나무 통들이 쌓여 있었는데, 냄새를 맡아보니 축축한 화약이었다. 그리고 가장 구석진 곳에는 두루마리 형태의 종이 뭉치와 함께 지도들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이선은 무기들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모의 자금이 맞소. 단순히 재산을 불린 것이 아니라, 왕조를 무너뜨릴 군대를 위한 무기였소."

소아는 무기 대신 구석의 지도 뭉치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펼친 지도는 한양 도성 전체를 상세히 그린 것이었고, 왕궁의 후미진 곳과 주요 방어선에 붉은 먹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선 마마... 이들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된 궁궐 침투입니다. 이 붉은 표시는... 왕궁의 수비가 가장 허술한 곳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소아의 목소리가 전율했다. 그녀의 복수심이 현실의 끔찍한 위협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선은 즉시 지도 뭉치 옆에 놓인 작은 서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최현의 친필로 보이는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진 첩보 목록이었다. 단순한 자금 장부가 아닌, 역모 실행일과 핵심 가담자 명단이었다.

책의 첫 장에는 선명하게 날짜가 적혀 있었다. '다음 보름달이 뜨는 밤, 거사 개시.'

"시간이 없소. 보름달은... 사흘 뒤요!" 이선은 충격에 휩싸여 말했다. 최현의 역모는 이미 코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그때였다. 지하 창고 입구 쪽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방앗간의 맷돌이 있는 윗층이었다. 두 사람의 심장이 동시에 내려앉았다.

"누구냐!" 윗층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칠성패의 순찰대임이 분명했다.

이선은 급히 첩보 목록 서책과 소아가 가져온 자금 장부를 품에 챙겨 넣었다.

"들켰소! 이 문을 닫고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하오!" 이선이 속삭였다.

소아는 무기들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쪽 구석에 흙이 쌓여 있습니다! 아마도 옛날에 사용하던 작은 환기 구멍일 겁니다!"

윗층에서는 널빤지 뚜껑을 열고 지하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석등의 불빛이 그들의 위치를 고스란히 노출시키고 있었다.

"움직여! 내가 시선을 끌겠소!" 이선은 결심한 듯, 들고 있던 석등을 창고 구석으로 힘껏 던졌다.

석등은 '쨍' 소리를 내며 깨졌고, 기름과 불꽃이 화약 통 근처에 떨어졌다. 불꽃을 보자마자 칠성패 무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멈칫했다. 화약에 불이 붙으면 모두 죽을 수 있었다.

그 혼란을 틈타, 이선은 소아를 작은 환기 구멍 쪽으로 밀어 넣었다. 구멍은 너무 좁았지만, 소아는 필사적으로 몸을 쑤셔 넣었다.

"먼저 나가시오! 뒤따라가겠소!" 이선이 소리쳤다.

소아가 흙구멍을 통해 간신히 몸을 빼내자, 이선은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구멍을 빠져나와 숲속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지하 창고에서 칠성패 무사들의 분노에 찬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찾아라! 방앗간을 불태우고서라도 그들을 잡아라! 서책을 빼앗겼다!"

이선과 소아는 사력을 다해 어둠 속을 달렸다. 그들의 손에는 최현 역모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두 권의 서책이 쥐어져 있었다. 사흘 뒤, 조선의 운명이 걸린 거사가 시작된다는 끔찍한 진실과 함께.

사흘간의 도주: 왕자를 시험하는 강물

숲속을 가로지르는 두 그림자의 발걸음은 절박했다. 뒤에서는 칠성패 무리들이 횃불을 들고 맹렬히 추격해오고 있었고, 짖어대는 사냥개들의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혜명대군 이선은 험한 숲길에도 불구하고 지친 기색 없이 소아를 이끌었다. 그러나 소아는 며칠 밤낮을 제대로 쉬지 못했고, 방앗간에서의 긴장과 도주로 인해 체력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소아! 조금만 더 버티시오. 이 숲을 벗어나면 지름길이 있소!" 이선이 거친 숨을 내쉬며 외쳤다.

소아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찰나, 이선이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두 사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마침내 그들은 숲을 벗어나 깊은 계곡과 맞닿은 급류 앞에 섰다. 강물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세게 포효하며 흘러가고 있었다. 추격자들을 따돌리기에는 완벽한 장소였지만, 건너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강 건너에 우리가 묵을 만한 폐사(廢寺)가 있소. 칠성패는 쉽게 이 강을 건너려 하지 않을 것이오." 이선이 말했다.

"하지만... 강물이 너무 거셉니다." 소아가 걱정스럽게 강물을 바라보았다.

이선은 잠시 고민하더니,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는 강가에 쓰러져 있는 커다란 통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이것으로 건너야 하오."

이선은 망설이지 않고 통나무를 강물로 밀어 넣었다. 그는 통나무 위에 올라서서 소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말을 믿고, 나에게 의지하시오. 서책을 잃어서는 안 되오."

소아는 망설일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뒤에서는 이미 횃불의 불빛이 숲속을 뚫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결심하고 이선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통나무 위에 몸을 싣고 거친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강물은 통나무를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그들의 얼굴을 강타했고, 통나무가 뒤집힐 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이선은 통나무의 균형을 잡는 동시에, 소아가 강물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그녀를 자신의 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소아는 문득 눈을 감았다. 그녀는 복수심 외에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깨달았다. 그의 강인한 팔과, 결코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는 단단한 의지가 느껴졌다.

강을 건너는 동안, 강 건너편에서 칠성패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그들은 감히 급류를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하고 강변에서 활을 쏘기 시작했다.

쉬익! 화살 몇 발이 통나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선은 소아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숙였고, 그의 왼쪽 팔에 화살 한 발이 깊숙이 박혔다.

"크윽!" 이선은 짧은 신음소리를 내었지만, 통나무를 놓치지 않았다.

"마마!" 소아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재빨리 입을 막았다.

마침내 통나무는 간신히 건너편 강변의 잔가지 사이에 걸렸다. 이선은 피 흘리는 팔을 붙잡고 소아와 함께 재빨리 강변을 벗어나 폐사 쪽으로 향했다.

폐사에 도착하자마자 이선은 쓰러지듯 돌바닥에 주저앉았다. 소아는 급히 촛불을 켜고 이선의 상처를 살폈다.

"화살촉이 깊이 박혔습니다. 당장 빼내야 합니다." 소아는 떨리는 손으로 이선의 팔을 지혈했다.

이선은 핏기 없는 얼굴로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역모의 증거를 지켜야 하오. 빨리... 빼내주시오."

소아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옷자락을 찢어 이선의 상처 위를 묶어 지혈한 뒤, 자신이 항상 가지고 다니던 날카로운 단도를 꺼냈다. 그녀는 통증을 줄여주기 위해 이선에게 깨끗한 나무 조각을 물리고, 단숨에 화살촉을 빼냈다. 이선은 고통을 참아내며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처치를 마친 후, 소아는 이선의 곁에 앉아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왜… 저 같은 천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마마께서 이렇게 다치셔야 합니까?"

이선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왕자 이전에 이 나라의 백성을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오. 그리고 그대가 지닌 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칼날이오. 우리는 동지이오. 서로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의 말은 소아의 굳게 닫혔던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허물어뜨렸다. 그녀는 복수심 때문에 잊고 있었던 인간적인 유대를, 이선의 희생을 통해 다시 느꼈다.

그들은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녘에 다시 길을 떠났다. 이선은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사흘. 이선과 소아에게 남은 시간이었다.

그들은 이제 일반적인 역로가 아닌, 이선이 왕자 신분으로 궁궐을 나설 때 사용하던 은밀한 연락망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선은 폐사 근처의 오래된 소나무 아래에 숨겨둔 연락용 서찰을 통해, 한때 자신을 가르쳤던 노신하의 집으로 향하는 긴급 전갈을 보냈다. 그 노신하는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지방에서 근신하고 있었으나, 왕실에 대한 충성심만은 변치 않은 인물이었다.

그들이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최현의 움직임은 빨라졌다. 방앗간에서 증거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최현은 분노에 치를 떨었고, 전국에 비상을 걸어 이선과 소아의 초상화를 뿌렸다. 죄명은 당연히 '역모 가담 및 국가 기밀 절취'였다.

조력자의 희생: 사흘째, 한양의 그림자 속으로

혜명대군 이선과 소아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노신하 송선규(宋善圭)가 은거하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어 있었고,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채 이틀도 되지 않았다.

송선규는 평생 왕실을 지켜온 충신이었으나, 최현의 모함으로 십 년 전 조정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초야에 묻혀 지내고 있었다. 이선이 소나무 아래에 숨겨둔 비단 서찰을 통해 그들의 방문을 미리 알린 상태였다.

소복한 한복을 입은 송선규는 마당에서 두 사람을 맞았다. 상처투성이의 이선을 보자 그의 눈빛은 흔들렸으나, 곧 평정을 되찾고 그들을 조용히 집 안으로 안내했다.

"대군 마마... 이 꼴이 되시기까지, 얼마나 모진 고초를 겪으셨습니까." 송선규는 떨리는 목소리로 예를 갖추려 했으나, 이선이 그의 손을 잡아 막았다.

"예는 나중에 갖추십시오. 지금은 나라의 명운이 걸려 있습니다. 저 소녀가 목숨을 걸고 가져온 증거를 살펴봐 주십시오."

이선은 곧바로 부상당한 팔을 치료받는 동안, 소아는 송선규에게 최현의 역모 장부와 실행일이 적힌 첩보 서책을 내보였다.

송선규는 서책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화약과 조총... 그리고 보름달이 뜨는 밤이라니! 최현, 그자가 감히 하늘을 거스르려 하다니! 조정에서는 이미 최현이 뿌린 독에 모두 중독되었습니다. 전하께 올리는 보고서, 심지어 내명부의 움직임까지도 최현의 사람들을 거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송선규는 이선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치료해주고, 약재와 함께 며칠을 버틸 수 있는 간단한 식량을 챙겨주었다. 그리고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마마, 한양으로 통하는 모든 길목에 최현이 파견한 비공식 감시병들이 배치되었습니다. 특히, 궁궐의 경비를 맡은 무관 중 상당수가 최현에게 매수되었습니다. 정문으로 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들어갈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 소아가 불안하게 물었다.

송선규는 잠시 생각하더니, 낡은 지도를 꺼내 벽에 걸었다. "하나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제가 숙직을 설 때 발견한 비밀 통로입니다. 궁궐의 후미진 담장 아래에 버려진 옛 수로(水路)가 있는데, 그 끝은 왕궁의 내의원 약재 창고와 연결됩니다.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을 아는 자는 저와... 그리고 궁궐 건축을 담당했던 노장 뿐이었으니, 최현의 눈도 그곳까진 닿지 않을 겁니다."

희망의 불씨가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송선규의 지도를 바탕으로 남은 하루 동안의 침투 계획을 짰다.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시각은 이미 깊은 밤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흙먼지 날리는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그림자가 송선규의 집을 포위했다.

"송선규! 역모자와 간악한 여인을 숨긴 죄를 물으러 왔다! 당장 혜명대군을 내놓으라!" 칠성패의 우두머리, 방앗간에서 이들을 놓쳤던 무사가 외쳤다.

최현은 이선이 궁을 떠난 지 오래된 충신을 찾으리라 예측했던 것이다. 송선규의 집은 이미 최현의 감시망에 걸려 있었다.

"마마,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이들을 막아설 동안, 그 길로 달아나십시오!" 송선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미리 준비한 낡은 갑옷을 걸치고 창을 들었다.

"안 됩니다, 영감! 혼자서는 저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선이 만류했다.

"마마의 목숨과 이 나라의 운명이 제 목숨보다 천만 배 중요합니다! 저는 왕을 섬기는 신하지, 최현의 노비가 아닙니다! 전하께 증거를 전하십시오!"

송선규는 문을 박차고 나가 칠성패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칠성패의 무사들이 그를 에워싸자, 송선규는 노구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창술로 그들을 잠시나마 막아섰다.

"빨리!" 소아는 이선의 손을 잡아끌고 뒷문으로 달아났다. 이선은 뒤돌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송선규의 맹렬한 외침과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박혔다. 충신의 희생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두 사람은 밤의 어둠 속을 미친 듯이 달렸다. 이선은 부상을 입은 팔을 붙잡았고, 소아는 그의 짐을 나누어 들고 송선규가 건네준 한양의 비밀 수로 지도를 꽉 쥐었다.

새벽녘, 그들은 마침내 한양 도성 바깥의 후미진 곳에 도착했다. 수많은 군사와 포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최현의 역모 거사일이 하루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온 도시의 긴장감으로 느껴졌다.

"이제부터는 지도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 지도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소아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성벽 밑, 잡초가 무성한 곳이었다. 그곳에 송선규가 표시해준 낡은 수로 입구가 돌무더기 아래에 숨겨져 있었다.

성벽의 그림자 아래에서, 이선과 소아는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수로의 돌뚜껑을 들어 올렸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차가운 지하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들이 이제 들어서야 할 곳은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지하 미로였다.

역모 거사일 전날, 왕자와 복수심에 불타는 소녀는 왕좌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도박을 위해 한양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들의 손에 쥐어진 두 권의 서책만이 희망의 전부였다.

지하의 미로: 왕궁 깊은 곳으로 향하는 마지막 숨통

찬 새벽 공기를 마시며, 이선과 소아는 흙과 돌로 덮인 낡은 수로 입구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둠 속으로 들어서자, 곰팡이와 썩은 냄새, 그리고 차가운 지하수가 그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수로는 좁고 낮았다. 몸을 완전히 펴지 못하고 허리를 숙인 채, 이선은 부상당한 팔을 꽉 잡고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소아는 횃불을 켤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송선규가 준 지도를 손에 쥐고 기억에 의존해 길을 안내했다.

"마마, 물이 깊어지는 곳이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소아의 목소리는 지하의 축축한 공기 속에서 낮게 울렸다.

수로는 살아있는 미로와 같았다. 수십 년 동안 버려졌던 탓에 벽돌이 무너져 내린 곳도 있었고, 독성을 지닌 쥐 떼가 사납게 그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선의 부상당한 팔은 강물에 젖은 후 다시금 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이선은 소아를 바라보았다. 숯검댕이가 묻은 얼굴, 낡은 옷차림, 지칠 대로 지쳤음에도 흔들림 없는 그녀의 눈빛은 그에게 계속 전진할 힘을 주었다. 그녀는 이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목표를 잃지 않는 단단한 존재였다.

한참을 기어가던 중, 소아는 갑자기 몸을 멈췄다.

"마마, 이곳입니다. 지도에 표시된 세 번째 갈림길. 하지만… 길이 막혀 있습니다."

그들 앞에는 최근에 무너져 내린 듯한 거대한 돌무더기가 수로 전체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선은 절망했다. 이 돌을 치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돌아갈 시간은 없소. 최현의 거사가 곧 시작될 것이오." 이선은 돌벽을 주먹으로 쳤다.

소아는 침착하게 돌무더기 사이의 틈을 살폈다. "아닙니다.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닙니다. 가장 아래쪽 돌 세 개가 비교적 느슨하게 끼워져 있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배운 상술(商術)로,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소아는 몸을 최대한 웅크려 틈새로 먼저 기어 들어갔다. 돌덩이에 옷이 걸리고 피부가 긁혔지만, 그녀는 장부를 보호하듯 몸을 구부렸다. 이선은 그녀를 따라가기 위해 부상당한 팔의 통증을 무시하고 힘겹게 몸을 통과시켰다.

마침내 막힌 수로를 지나자, 수로의 폭은 갑자기 넓어졌고, 그 위로 희미한 빛줄기가 스며들었다. 송선규의 말대로, 이곳은 궁궐의 내의원 약재 창고 밑을 흐르는 수로의 종착점이었다.

이선은 창고 바닥으로 연결된 낡은 배수구를 발견했다. 그는 소아에게 신호를 보내고, 힘겹게 몸을 끌어올려 배수구의 쇠창살을 붙잡았다. 쇠창살이 삐걱이는 소리를 낼까 두려웠지만, 다행히 오랜 세월 속에 녹슬어 소리는 크지 않았다.

이윽고 이선은 창살을 열고 내의원 약재 창고 바닥으로 기어 올라섰다. 창고 안은 짙은 약초 냄새로 가득했고, 수많은 약재함들이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소아도 재빨리 올라왔다. 두 사람은 축축한 옷을 약재함 뒤에 숨긴 채, 궁궐 내부의 상황을 살폈다.

창고 밖 복도에서는 이미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평소 궁궐의 야간 순찰과는 달리, 복도에는 철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이들은 분명 최현의 사병인 칠성패가 공식 무관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창고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한 명의 궁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약재함을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이선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궁녀를 제압하고 궁궐의 상황을 파악해야 했다.

이선이 궁녀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소아가 이선의 팔을 붙잡고 약재함 뒤로 숨겼다. 그리고는 대신 몸을 일으켜 궁녀의 뒤를 덮쳤다.

소아는 재빠르게 궁녀의 입을 틀어막고, 그녀의 뒤로 몸을 감추었다. "소리 내지 마시오. 우리는 역모를 막으러 온 왕실 사람입니다. 전하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

궁녀는 공포에 질려 눈을 크게 떴으나, 소아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필사적인 절박함에 경계를 풀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아가 그녀의 입을 놓아주자, 궁녀는 덜덜 떨며 속삭였다.

"최현 대감이… 오늘 밤을 기해 궁궐 경비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제부터 몸이 편찮으시다며 침전에서 나오지 않고 계십니다. 지금 최 대감이 침전 앞에서 주요 신하들을 모아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비상 상황을 선포하려는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편찮으신 것이 아니라, 최현의 수하들이 감시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선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름달이 떴소. 시간이 없소."

창고 밖 복도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이 전하께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침전으로 향하는 복도를 뚫고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이선과 소아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침전 앞의 격돌: 역모의 칼날을 꺾다

내의원 약재 창고를 빠져나온 혜명대군 이선과 소아는 곧바로 침전(寢殿)으로 향하는 복도로 몸을 숨겼다. 궁녀에게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최현은 침전 앞에서 왕을 감금한 채 마지막 회의를 열고 있었다. 보름달이 궁궐 지붕 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복도에는 오직 최현의 충복들만이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차갑고 잔혹했으며, 왕의 명령보다 최현의 한마디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들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들은 마마의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소아가 속삭였다.

이선은 잠시 생각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숨겨진 수로 지식과, 궁궐 내부 구조를 대강 아는 소아의 기지뿐이었다.

소아는 갑자기 방금 전 제압했던 궁녀의 옷 중 소매가 넓은 겉옷을 벗겨내 몸에 둘렀다. "궁녀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후미진 통로가 있습니다. 제가 선두에 서서 시선을 끌겠습니다. 마마께서는 제 뒤를 따라와 주십시오."

이선은 반대했지만, 소아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에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소아는 궁녀처럼 머리를 숙인 채, 한 손에 약재가 담긴 작은 그릇을 들고 침전으로 향하는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녀의 몸놀림은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러웠고, 궁녀들 특유의 느린 걸음걸이를 흉내 냈다.

복도 중앙에 서 있던 칠성패 출신의 경비 무사들이 소아를 발견하고 창을 비껴 들었다.

"멈춰라! 누구냐! 지금은 내명부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무사가 굵은 목소리로 외쳤다.

소아는 고개를 더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드실 약재를 가져왔습니다. 주상 전하의 명입니다."

이때, 소아의 등 뒤 그림자 속에 완전히 몸을 감춘 이선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무사가 소아에게 시선을 빼앗긴 틈을 타, 이선은 부상당하지 않은 오른팔을 뻗어 무사의 목을 날카롭게 베었다. 소리 없는 암살이었다. 이선은 재빨리 쓰러지는 무사의 몸을 받아내 소리를 죽이고는, 소아와 함께 그의 갑옷 뒤에 몸을 숨겼다.

나머지 무사들은 동료의 움직임이 멈춘 것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침전 앞에서 들리는 최현의 높은 목소리 때문에 쉽사리 자리를 비우지 못했다.

이선과 소아는 죽은 무사의 갑옷을 방패 삼아 마지막 코너를 돌아 마침내 침전 앞 넓은 뜰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영의정 최현이 대여섯 명의 주요 신하들을 병풍처럼 두른 채, 침전 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최현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전하의 병세가 심하여, 국사를 더 이상 돌보시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소. 주상의 뜻을 받들어, 노신 최현이 잠시 국정을 대리하고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할 것이오!" 최현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이선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숨어있던 곳에서 튀어나오며 고함쳤다.

"영의정 최현! 감히 전하를 기만하고 역모를 꾸미는가!"

이선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침전 앞의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최현을 포함한 대신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고, 칠성패 무사들은 당황하여 창을 겨누었다.

"혜명대군 마마! 어찌 이곳에!" 대신 중 한 명이 외쳤다.

최현은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선 대군! 송선규와 결탁하여 역모를 꾸미고, 궁궐에 무단 침입한 죄를 묻겠다! 저자를 당장 잡아들이라!"

최현은 이선이 역모의 증거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숨긴 채, 오히려 이선을 역모자로 몰아세웠다. 칠성패 무사들이 이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선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검을 뽑았지만, 숫적으로 압도적이었다. 바로 그때, 소아가 앞으로 나섰다.

"잠깐!" 소아는 외치며 품속의 서책 두 권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이곳에 영의정 최현이 왕을 폐하고 조선을 전복시키려 한 모든 죄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현의 안색이 완전히 변했다. "저 간악한 계집의 말을 믿지 마라! 저것은 날조된 것이다! 당장 베어라!"

칠성패 무사들이 소아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대신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최현의 힘을 믿었지만, 왕자가 목숨을 걸고 '역모의 증거'를 외치는 상황은 그들의 충성심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왕실 자금 외에 '천일회'를 통한 사금 축적! 북방 무기 밀매 내역! 그리고 이 서책에는 오늘 밤, 보름달이 뜨는 시각, 궁궐 친위대를 가장한 칠성패를 동원하여 전하를 시해하려 한 계획이 적혀 있습니다!" 소아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이선의 등 뒤에서 궁녀를 제압했던 그 궁녀가 침전 문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갔다. "대군 마마! 전하께서 위험하십니다!"

그 궁녀의 외침은 결정적이었다. 이선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칼을 내던지고, 자신의 모든 힘을 담아 몸을 날려 침전 문을 가로막고 있는 칠성패 무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왕의 침전이었다.

최현은 다급히 소리쳤다. "막아라! 그를 막아!"

이선이 무사들의 틈을 뚫고 침전 문을 열어젖혔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병색이 완연한 왕의 모습이 아니었다. 왕은 평상에 기대어 축 늘어져 있었고, 그의 곁에는 낯선 약재 통이 놓여 있었다.

이선이 왕에게 다가서는 순간, 최현도 침전 안으로 뛰어들었다.

"증거를 들이대기 전에, 네놈의 목숨부터 거두겠다!" 최현은 품속에서 은장도를 꺼내 이선을 향해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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