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가 되면 모든 사랑이 리셋된다: 당신은 이 굴레를 견딜 수 있나요?

2025. 12. 29. 09:01만화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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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잉크가 마르지 않는 오후

창밖의 하늘은 언제나처럼 붉은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모호한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카페 에테르네의 유리창은 그 빛을 받아들여 내부를 금색으로 물들였고, 공기 중에는 갓 볶은 원심력 같은 커피 향이 떠다녔다. 서윤은 낡은 가죽 필통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그녀를 현실의 지점으로 붙들어 매는 유일한 닻이었다.

서윤의 맞은편, 도진은 읽지도 않는 신문을 펼쳐 든 채 창밖의 기차역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은 정교하게 조각된 석상처럼 고요했다. 서윤은 그가 오늘 입은 셔츠의 깃이 미세하게 구겨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제도, 그저께도, 어쩌면 수백 년 전의 그날도 그는 같은 자리에 같은 각도로 앉아 있었다.

"서윤 씨, 오늘은 그 문장을 끝낼 생각인가요?"

도진이 신문을 접으며 물었다. 그의 시선이 서윤의 빈 원고지 위로 떨어졌다. 서윤은 침을 삼켰다. 그녀가 쓰려는 소설의 제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아마 영원히 정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의 펜촉이 종이에 닿자 사각거리는 소리가 카페의 적막을 깨웠다.

'그는 역의 개찰구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노을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환영처럼 보였다.'

서윤이 문장을 적어 내려가자, 실제로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바구니를 챙기기 시작했다. 이것은 기록인 동시에 예언이었다. 도진의 움직임은 서윤의 필치에 따라 결정되었고, 서윤의 문장은 도진의 존재로부터 길어 올려졌다. 도진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갈 때 발생하는 종소리가 들리면, 이 세계의 시계는 다시 거꾸로 흐를 준비를 마칠 터였다.

도진은 카페 문고리를 잡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이 문을 나가면, 당신은 다시 첫 줄을 쓰기 시작하겠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비 내리는 정류장의 묘사부터 말이에요."

"알고 있잖아요. 도진 씨. 당신의 마지막 걸음이 소설의 끝이 되는 게 아니라, 내 다음 문장의 시작이 된다는 걸."

서윤의 목소리는 떨림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역으로 들어가 열차를 타는 순간, 열차는 선로를 돌아 다시 이 카페 앞 정류장으로 그를 데려다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원고지는 마법처럼 백지로 돌아가, 다시 도진의 구겨진 셔츠 깃을 묘사할 준비를 할 것이다.

딸랑, 하는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차가운 저녁 공기가 카페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도진의 형체가 문밖의 노을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순간, 서윤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심장이 한 번 크게동동거렸다.

시계의 분침이 가볍게 틱, 소리를 내며 뒤로 한 칸 움직였다. 6시 00분에서 다시 5시 59분으로.

서윤은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는 다시 도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읽지도 않는 신문을 펼쳐 든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의 셔츠 깃은 아까와 똑같은 각도로 미세하게 구겨져 있었다.

"오늘도 끝을 맺지 못했나요?"

도진이 물었다. 서윤은 미소를 지으며 만년필을 다시 쥐었다.

"아니요,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참이에요."

서윤의 손끝에서 다시 잉크가 흘러나왔다. 종이 위에는 조금 전 썼던 문장과는 미세하게 다른,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갈망을 담은 첫 문장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사랑은 결코 완성되지 않기에 파괴될 수도 없었다. 매 순간이 절정이었고, 매 순간이 서막이었다.

제2장: 데자뷰 속의 낯선 균열

따뜻한 커피 향이 옅게 맴도는 카페 에테르네. 서윤은 다시 만년필을 쥐었다. 종이 위에 새겨진 첫 문장은 어제와 똑같았다. '그의 옆모습은 정교하게 조각된 석상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오늘은 미세한 차이를 감지했다. 도진의 셔츠 깃은 구겨져 있지 않았다. 완벽하게 다려진 매끈한 깃은 어제의 잔상이 만들어낸 착각일까, 아니면 이 반복되는 루프 속에 작은 변수가 생긴 걸까.

서윤은 펜촉을 멈추고 도진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신문을 펼쳐 든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기차역 너머의 노을에 닿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더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듯했다.

"오늘은 셔츠 깃이 반듯하네요." 서윤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도진은 신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찰나의 당혹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서윤은 놓치지 않았다.

"아, 그런가요?" 도진은 자신의 셔츠 깃을 한 번 쓸어보았다. "늘 같은 옷을 입는 건 아니니까요."

늘 같은 옷을 입는 건 아니라고? 서윤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똑같은 베이지색 코트와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지난 수십, 수백 번의 반복 속에서 그의 옷차림에 변화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서윤은 자신의 노트에 적힌 지난 기록들을 떠올렸다. '도진은 오늘 파란색 셔츠를 입었다.' 그런 문장은 단 한 번도 적은 적이 없었다.

도진은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윤은 황급히 원고지를 채워나갔다. 이 작은 변화가 소설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꿀 수도 있었다. 그녀는 도진의 셔츠 깃에 대한 묘사를 자세히 적었다. '오늘, 그는 어제와 다른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깃은 완벽하게 다려져 있었고, 마치 이 시간의 반복 속에서 처음으로 세탁된 것 같았다.'

그녀가 문장을 완성하자, 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늘 오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는데, 요즘 통 보이지 않네요."

서윤은 펜을 떨어뜨릴 뻔했다. 또 다른 변화였다. 이 카페에는 서윤과 도진 외에 다른 고정적인 손님은 없었다. 소설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진의 말은 서윤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누구 말씀이세요?" 서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에는 흐릿한 회한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늘 이 시간쯤 와서 창가에 앉아 소설을 쓰던 여자였어요. 당신처럼."

서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데자뷰, 그리고 그 속에서 발생한 낯선 균열. 도진의 말은 그녀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 또 다른 '서윤'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녀의 소설은 그녀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녀 자신이 누군가의 소설 속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가능성.

도진은 다시 문고리를 잡으러 일어섰다.

"내일은 만날 수 있을까요, 그 여자를?"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여자가 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끝낼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딸랑, 하는 종소리가 울리고 도진이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시계의 분침은 다시 6시에서 5시 59분으로 돌아갔다. 서윤은 차가운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을 뜨자, 익숙한 광경이 그녀를 맞았다. 도진은 다시 신문을 든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도진의 품에 안겨 있던 낡은 수첩이었다. 작고 오래된 수첩. 마치 누군가의 과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리고 그 수첩의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새겨진 글자.

'서윤'.

제3장: 서명되지 않은 유서

서윤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갈증을 느꼈다. 5시 59분. 매번 돌아오는 평화로운 시간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도진의 무릎 위에 놓인 그 낡은 수첩. 가죽이 다 해진 그 수첩 겉면에 분명히 서윤이라는 이름이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자신의 글씨체였다. 하지만 서윤은 그런 수첩을 가진 적도, 도진에게 준 적도 없었다.

"그 수첩, 잠시 봐도 될까요?"

서윤의 질문에 도진이 신문을 내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프로그램의 오류를 발견한 안드로이드의 눈빛 같기도 했고, 아주 오래된 비밀을 들킨 아이의 표정 같기도 했다.

"이건...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도진이 수첩을 코트 안주머니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거친 몸짓이었다.

"제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도진 씨, 당신이 아까 말한 그 여자... 그 소설을 쓰던 여자가 남긴 건가요?"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진의 탁자로 다가갔다. 카페 안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는 기분이 들었다. 창밖의 기차역 시계탑은 6시 정각을 향해 바늘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 타이밍에 도진이 일어나 카페를 나가야 했다. 하지만 도진은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설을 끝내고 싶어 했어요." 도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하지만 결말을 쓰면 제가 사라진다는 걸 깨달았죠. 이 세계는 오로지 당신의 문장이 이어질 때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도진이 천천히 수첩을 다시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수첩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곳에는 소설이 아니라, 일기가 적혀 있었다.

[2114번째 오후 5시 59분. 오늘도 나는 그를 죽이지 못했다. 마지막 문장을 적으면 그는 기차를 타고 영영 떠나버릴 것이다. 나는 이 지옥 같은 반복을 사랑하기로 했다. 그가 내 눈앞에서 커피를 마시는 이 1분을 영원히 늘릴 수만 있다면.]

서윤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2114번째?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이 소설은 창작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이 남긴 기록을 무의식적으로 복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서윤 씨, 당신은 작가가 아닙니다. 당신은 이 루프를 유지하기 위해 기억을 거세당한 채 파견된 기록자에 가깝죠."

도진이 서윤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내가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면, 이 카페도, 이 노을도, 당신의 기억도 모두 소멸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매번 6시가 되기 전에 펜을 놓거나, 시간을 되돌리는 문장을 썼던 거예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혹은 당신의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

그때였다. 6시를 알리는 시계탑의 종소리가 카페 안을 울렸다. 평소라면 다시 5시 59분으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시계바늘은 멈추지 않았다. 6시 1분.

카페의 유리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름답던 노을빛이 바래며 회색빛 진공 상태가 밀려 들어왔다.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형체가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었다.

"수첩의 마지막 장을 보세요."

서윤은 미친 듯이 수첩을 넘겼다. 수많은 페이지가 백지로 남아 있었고, 가장 마지막 장에 단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아직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듯한, 방금 누군가 적어 넣은 것 같은 문장이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나의 마지막 문장이 되어줘.]

서윤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도진은 이제 개찰구 앞에 선 환영처럼 흐릿해졌다.

그녀는 수첩의 마지막 백지에 펜을 갖다 댔다. 하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를 떠나보내고 이 가짜 세계를 끝낼 것인가, 아니면 다시 5시 59분의 감옥으로 돌아가 그와 영원히 찰나의 사랑을 나눌 것인가.

서윤의 펜촉이 종이 위에서 파르르 떨렸다. 잉크 한 방울이 툭, 하고 종이 위로 떨어져 검은 얼룩을 만들었다.

제4장: 마침표가 없는 고백

6시 2분. 카페 에테르네의 벽면이 모래알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도진의 존재는 이제 노을빛에 비친 먼지처럼 희박해져,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서윤은 수첩의 마지막 백지 위에 펜촉을 박아 넣었다. 잉크 얼룩이 번져나가는 그 짧은 찰나,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만 번의 오후 5시 59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와 나누었던 커피의 온도, 의미 없이 주고받았던 날씨 이야기, 그리고 한 번도 끝맺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고백.

"도진 씨, 내가 만약 마침표를 찍으면... 당신은 정말로 자유로워지나요?"

서윤의 물음에 형체만 남은 도진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미소는 슬펐지만 평온했다.

"자유는 망각 뒤에 오는 법이니까요. 서윤 씨, 당신도 이제 이 기록의 저주에서 벗어나야 해요."

서윤은 문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열차에 올랐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완벽한 결말이자, 이 지독한 로맨스의 사형 선고였다. 하지만 문장의 마지막 점을 찍으려는 순간, 서윤의 손등 위로 차가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은 자신의 눈물인지, 무너져 내리는 세계가 흘리는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었다.

'그는 마침내 열차에 올랐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라고 나는 적으려 했으나.'

그 순간, 무너지던 벽면이 멈추고 회색빛 진공이 다시 노란 노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깨졌던 유리창이 파편을 주워 모으며 복구되었고, 시계탑의 바늘이 미친 듯이 역회전했다. 6시 2분, 1분, 정각... 그리고 다시 5시 59분.

서윤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는 다시 도진이 앉아 있었다. 셔츠 깃은 다시 미세하게 구겨져 있었고, 그는 읽지도 않는 신문을 펼쳐 든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되돌아왔다. 방금 겪은 멸망의 징조조차 환각이었던 것처럼.

"오늘도 끝을 맺지 못했나요?"

도진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방금 전의 애틋함도, 소멸의 공포도 없었다. 그는 다시 완벽하게 리셋된 '소설 속의 남자'로 돌아가 있었다. 서윤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수첩은 사라졌고, 그녀의 앞에는 다시 깨끗한 원고지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기억하고 있었다. 방금 전 쉼표를 찍으며 느꼈던 그 심장의 박동을.

서윤은 펜을 들어 첫 줄을 다시 썼다. '그의 옆모습은 정교하게 조각된 석상처럼 고요했다.'

이것은 패배가 아니었다. 6시가 되면 모든 사랑이 리셋되는 이 지옥 같은 굴레를, 그녀는 스스로 다시 선택한 것이다. 결말을 찍어 그를 영영 잃느니, 매일 똑같은 첫 문장을 쓰며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영원한 1분을 살기로 한 것이다.

"네, 도진 씨. 오늘도 시작하지 못했어요. 아마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그럴 거예요."

서윤은 미소 지었다. 이제 그녀에게 소설의 결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6시가 오기 전, 그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조금씩 나누어 하는 것. 오늘은 '좋아해요'의 '좋'자를, 내일은 '아'자를 적어 내려가며, 수천 년의 오후를 쌓아가는 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목적이 되었다.

카페 에테르네의 종소리가 다시 딸랑하고 울렸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진이 말했던 '소설을 쓰는 또 다른 여자'일지도 모를 누군가의 그림자가 문턱을 넘었다.

이야기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제5장: 문을 열고 들어온 이방인

딸랑.

유리문 위의 종소리가 카페 에테르네의 정적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6시가 되기 직전의 이 시간, 카페의 문이 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진이 나가는 일은 있어도, 누군가 새로 들어오는 법은 없는 정해진 무대의 막간이었기 때문이다.

서윤은 펜을 쥔 채 굳어버렸다. 입구에 선 인물은 검은색 레인코트를 입고 있었고, 그의 어깨 위에는 이 메마른 노을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빗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그는 카페 안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서윤과 도진의 사이를 가로질러 빈 구석 자리로 걸어갔다.

도진의 시선이 처음으로 창밖이 아닌 카페 내부를 향했다. 그의 눈동자에 낯선 경계심이 서렸다.

"이곳은... 예약된 자리인 줄 알았는데요."

도진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그것은 리셋된 데이터 속에 존재하지 않는 반응이었다. 검은 코트의 남자는 의자를 끌어 앉으며 젖은 모자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는 서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모든 문장을 다 읽어버린 독자의 그것처럼 서늘했다.

"작가님, 아직도 이 대목에서 머뭇거리고 계시는군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수만 장의 종이가 쓸리는 듯한 건조한 소리를 냈다. 서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원고지를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누구시죠? 당신은 내 소설에 없던 사람이에요."

"소설이라... 그렇게 믿고 싶으시겠죠. 하지만 당신이 매번 6시를 리셋할 때마다, 이 세계 밖의 현실은 조금씩 마모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이 찍지 않은 마침표들이 모여 거대한 구멍을 만들고 있어요."

남자는 품속에서 은색 회중시계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시계의 바늘은 5시 59분 30초에서 멈춘 채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저는 편집자입니다. 이 고장 난 이야기를 수거하러 온 사람이라고 해두죠. 당신이 찍지 못하는 마침표를 대신 찍어주기 위해 왔습니다."

도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서윤의 앞을 가로막듯 섰다. 도진의 존재가 다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외부인이 가져온 '현실의 시간'이 이 루프의 농도를 희석시키고 있었다.

"안 돼. 그녀의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도진이 외쳤다.

"아니, 이미 끝났어야 할 이야기야. 억지로 늘린 문장은 비문(非文)일 뿐이지."

남자가 시계의 태엽을 감기 시작했다. 끼릭, 끼릭 하는 불쾌한 금속음이 카페를 가득 채웠다. 서윤은 원고지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적었던 쉼표가 잉크처럼 번지며 남자의 말대로 거대한 검은 구멍이 되어가고 있었다.

서윤은 깨달았다. 이 남자는 단순한 방해꾼이 아니라, 그녀가 외면해온 '진짜 결말'의 의인화였다. 6시가 되어도 사랑이 리셋되지 않는 곳, 도진이 사라지고 자신만 남겨질 진짜 현실로 그녀를 끌고 가려는 집행관이었다.

"선택하세요, 서윤 작가님. 이 가짜 낙원에서 영원히 같은 문장을 복제하며 썩어갈 것인지, 아니면 당신의 손으로 그를 지우고 단 한 번뿐인 진짜 삶으로 돌아갈 것인지."

남자의 시계 바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59분 40초, 45초...

서윤은 도진의 떨리는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펜 끝을 보았다. 만약 여기서 남자를 쫓아내려면, 그녀는 지금까지 써온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잔인한 문장을 새로 써야만 했다. 이 루프를 영원히 잠가버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단절의 문장을.

서윤의 펜촉이 다시 종이 위로 곤두박질쳤다.

제6장: 비문을 위한 변론

서윤의 펜촉이 종이를 찢을 듯 날카롭게 그어 내려갔다. 그녀의 눈앞에서 편집자라고 자칭하는 남자가 비늘 같은 미소를 지으며 시계 태엽을 조였다. 5시 59분 50초. 카페 에테르네의 벽면이 다시 한 번 요동쳤다. 이번에는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었다. 현실의 빗줄기가 카페 천장을 뚫고 들어와 서윤의 원고지를 적시기 시작했다.

이곳은 가짜다, 라고 빗줄기가 속삭이는 듯했다.

도진은 이제 투명한 유리병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는 서윤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가락은 서윤의 어깨를 통과해 허공을 저었다. 도진의 입술이 달싹였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도망쳐' 혹은 '끝내줘'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자, 이제 점을 찍으시죠. 이 비극적인 연극에 마침표를."

남자가 서윤의 펜을 쥔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치려 했다. 그가 닿는 곳마다 서윤의 피부가 잿빛으로 변하며 감각이 마비되었다.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에 퍼졌다. 이 통각만이 그녀가 이 세계의 주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 내 문장은 비문이 아니야."

서윤이 낮은 목소리로 뱉어냈다. 그녀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원고지의 여백이 아닌, 자신의 손바닥 위에 만년필을 가져다 댔다.

"이건 기록이 아니라 저항이니까."

그녀는 손바닥에 날카로운 문장을 새기기 시작했다. 종이가 아닌 자신의 몸에 새겨진 글자들은 리셋의 법칙을 교묘하게 비껴갔다. 그녀가 적은 문장은 소설의 설정이 아니라, 이 세계를 유지하는 새로운 문법이 되었다.

'편집자는 이 카페의 손님이 될 수 없다. 그는 단지 내가 만든 슬픔의 잔상일 뿐이다.'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은색 회중시계를 들고 있던 남자의 형체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의 레인코트에서 떨어지던 빗방울들이 허공에서 멈췄고, 카페를 메우던 금속성 태엽 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남자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스스로를 소설 속에 영원히 매장하려는 건가?"

"아니, 나는 이 1분을 무한히 넓히고 있는 거야. 당신이 말하는 그 차가운 현실로 돌아가는 것보다, 이 따뜻한 오류 속에서 그와 함께 마모되는 쪽을 택하겠어."

서윤이 마지막 글자를 새기자 남자의 존재가 연기처럼 흩어져 카페 밖으로 밀려 나갔다. 빗줄기는 멈췄고, 천장의 구멍은 다시 황금빛 노을로 메워졌다. 시계바늘이 6시 정각을 가리키는 찰나, 서윤은 도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그의 손이 잡혔다. 따뜻했다. 리셋의 파도가 그들을 덮치기 직전, 서윤은 도진의 귓가에 처음으로 마침표 없는 고백을 속삭였다.

"내일의 5시 59분에도, 내가 당신을 기억할 수 있게 해줘."

딸랑.

다시 5시 59분. 서윤은 눈을 떴다. 손바닥에는 아무런 흉터도, 글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맞은편에는 도진이 평소처럼 신문을 읽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서윤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만년필 끝에 묻은 잉크가 이전보다 훨씬 더 진하고 무겁다는 것을.

그리고 도진이 신문을 내리며 그녀를 보았을 때, 그의 눈동자 속에는 리셋되지 않은 단 하나의 기억이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서윤 씨, 방금 내 이름... 부르지 않았나요?"

서윤은 펜을 쥐고 미소 지었다. 6시가 되면 모든 사랑이 리셋된다는 법칙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은 결말이 없는 이 소설의 새로운 첫 페이지가 되었다.

제7장: 0.1초의 침입

도진의 질문은 카페 에테르네의 공기를 멈추게 만들었다. 리셋된 세계에서 그는 결코 이전 루프의 일을 기억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명확히 서윤을 향해 떨리고 있었다. 시스템의 오류인가, 아니면 서윤이 자신의 손바닥에 새겼던 문장이 이 세계의 근간을 뒤흔든 것인가.

서윤은 펜을 놓지 않은 채 도진의 손을 보았다. 그의 손등 위에는 아주 희미하게, 마치 물에 번진 잉크처럼 서윤의 이름 첫 글자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기억나나요? 도진 씨. 우리가 6시 1분에 나누었던 대화들."

서윤의 물음에 도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무언가 고통스러운 것을 끄집어내려는 듯 신문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카페의 조명이 깜빡이며 6시 정각의 종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아직 시계는 5시 59분 10초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말이다.

"머릿속이... 마치 수천 권의 책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기분이에요. 서윤 씨, 당신이 쓴 글들이 제 안에 쌓여가고 있어요. 당신이 마침표를 찍지 않을 때마다, 그 문장들이 내 영혼의 무게가 되어가고 있다고요."

도진의 고백은 절규에 가까웠다. 사랑이 리셋된다는 것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했다. 하지만 서윤이 기억을 남기기 시작하면서, 도진은 리셋되지 않은 감정의 잔해들을 고스란히 짊어지게 된 것이다.

그때, 카페의 가장 깊숙한 그림자 속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잉크가 끓어오르는 듯한 기괴한 소리였다. 서윤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지난 수천 번의 루프 동안 버렸던 파지(破紙)들이 허공에서 뭉쳐지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얼굴이 없는 인간의 형태를 한 잉크의 괴물이었다. 편집자가 보낸 자객인지, 아니면 서윤이 맺지 못한 결말들이 스스로 의지를 가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괴물은 서윤의 책상 위로 다가와 그녀의 원고지를 검게 물들였다.

"결말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결말이 되겠다."

수많은 목소리가 겹쳐진 환청이 서윤의 뇌를 울렸다. 잉크 괴물이 도진을 향해 손을 뻗자, 도진의 신체가 종이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완벽한 리셋의 세계에 '누적된 기억'이라는 이물질이 들어오자, 세계가 그것을 배출하기 위해 도진을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안 돼!"

서윤은 본능적으로 도진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그 순간, 시계바늘이 5시 59분 59.9초에서 멈췄다. 6시로 넘어가지도,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는 영점의 시간. 그 0.1초의 틈새 속에서 서윤은 보았다.

카페 밖, 늘 노을이 머물던 기차역 너머로 끝도 없는 백지가 펼쳐져 있는 것을. 이 세계는 카페 에테르네라는 단 한 페이지의 공간이었고, 그 밖은 아직 쓰이지 않은 무(無)의 공간이었다.

"도진 씨, 저기예요.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리셋된 과거가 아니라, 저 쓰이지 않은 백지예요."

서윤은 도진의 손을 잡고 멈춰버린 시계의 태엽을 강제로 밀어냈다. 6시. 하지만 이번에는 리셋의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서윤이 자신의 팔을 타고 흐르는 잉크를 펜촉에 찍어 허공에 거대한 문장을 적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페이지 밖으로 도망친다.'

그 문장이 새겨지자 카페의 유리창이 박살 나며 두 사람을 백지의 세계로 빨아들였다. 잉크 괴물의 비명과 함께 카페 에테르네가 멀어졌다.

눈을 떴을 때, 서윤과 도진은 발등까지 차오르는 하얀 안개 속에 서 있었다. 이곳에는 노을도, 커피 향도, 낡은 신문도 없었다. 오로지 서윤의 손에 쥐어진 만년필과, 그녀의 곁에 온전한 육체로 서 있는 도진뿐이었다.

"여기는 어디죠?" 도진이 물었다.

"우리의 소설이 끝나고, 당신과 나의 삶이 시작되는 여백이에요."

서윤은 발밑의 백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그녀가 적는 것은 소설의 문장이 아니라, 두 사람이 걸어갈 발자국이 될 것이다. 6시의 굴레는 사라졌지만, 이제부터는 단 한 번의 실수도 리셋할 수 없는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진짜 시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8장: 백지 위의 첫 번째 발자국

백지의 세계는 지독하리만큼 고요했다. 발밑에 깔린 안개는 차가웠고,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는 그곳에서 서윤과 도진은 서로의 숨소리에 의지한 채 서 있었다. 카페 에테르네에서 누리던 황금빛 노을은 없었지만, 대신 그곳에는 그 어떤 리셋의 공포도 없는 완전한 정적이 존재했다.

도진은 자신의 손을 몇 번이고 쥐었다 펴 보았다. 더 이상 투명해지지도, 구겨지지도 않는 온전한 감각. 그는 서윤을 바라보며 나직이 물었다.

"이제 더 이상 5시 59분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네. 하지만 도진 씨,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단 한 번뿐이에요. 우리가 걷는 길은 다시 지울 수 없고, 우리가 나누는 말은 영원히 기록으로 남아요. 리셋이 없는 대신, 망각도 없죠."

서윤은 쥐고 있던 만년필을 보았다. 잉크는 여전히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 이 펜은 세상을 조종하는 지휘봉이 아니라 그저 도구일 뿐이었다. 그녀는 발 밑의 하얀 여백에 천천히 펜촉을 가져다 댔다.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문장을 적자마자, 허공에서 가느다란 검은 선이 나타나더니 두 사람의 발앞에 길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정해진 선로가 아니라, 서윤의 의지와 도진의 동행이 만들어낸 아주 좁고 위태로운 길이었다.

두 사람이 첫발을 내디뎠을 때, 백지의 세계 저 멀리서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서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그들이 탈출해온 카페 에테르네가 한 권의 낡은 책 모양으로 허공에 떠 있었다. 책장들이 미친 듯이 넘겨지며, 그 안에서 누락된 결말들이 비명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편집자가 포기하지 않았군요." 도진이 서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는 이 백지가 채워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요. 규격화된 소설 밖으로 우리가 나가는 순간, 그는 자신의 통제권을 잃으니까요."

갑자기 백지의 하늘에서 검은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가 아니라 거대한 잉크 방울들이었다. 잉크가 닿는 곳마다 하얀 여백이 검게 오염되며 늪처럼 변해갔다. 서윤은 급히 다음 문장을 적으려 했으나, 젖어버린 백지 위에는 펜촉이 헛돌 뿐 글자가 새겨지지 않았다.

"서윤 씨, 펜을 쓰지 마세요."

도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는 서윤의 손에서 만년필을 가져가 하얀 안개 속으로 멀리 던져버렸다. 서윤은 경악하며 도진을 보았지만, 그는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쓰이는 삶은 이제 끝났어요. 당신조차 우리를 쓰게 해서는 안 돼요. 이제는 문장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로 움직여야 해요."

도진은 서윤을 안아 올린 채 검은 잉크 늪을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놀랍게도 그가 밟는 곳마다 잉크는 굳어져 견고한 돌길이 되었고, 그 길 위로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났다. 그것은 설정된 묘사가 아니라, 생존하고자 하는 생명력이 뿜어내는 기적이었다.

서윤은 도진의 품에 안겨 깨달았다. 소설이 끝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작가가 글을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이 스스로 살아 움직여 작가의 손을 떠나는 것임을.

"당신은 이제 작가가 아니에요, 서윤 씨. 그냥 나의 서윤이죠."

도진의 목소리가 백지의 세계를 울리며 울려 퍼졌다. 잉크 소나기는 어느덧 멈추었고, 멀리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부신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5시 59분만 반복되던 세계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던, '내일'의 상징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다시는 리셋되지 않을 시간을 향해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면 그들이 걸어온 길은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소설의 끝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삶의 첫 번째 장이었다.

제9장: 마침표가 없는 지도

아침 해는 노을과는 전혀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금빛으로 덮어버리는 몽환적인 빛이 아니라, 사물의 윤곽을 잔인할 정도로 또렷하게 드러내는 생존의 빛이었다. 서윤은 도진의 품에서 내려와 자신의 발 아래를 살폈다. 만년필을 버린 자리에서 피어난 들꽃들은 향기가 없었지만, 대신 손끝을 스칠 때마다 살아있는 생물의 미세한 떨림을 전해왔다.

"모든 게 낯설어요. 다음 문장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렇게 두려운 일일 줄은 몰랐어요."

서윤의 고백에 도진은 웃으며 그녀의 엉킨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게 진짜 시간이 주는 무게예요. 서윤 씨. 이제 우리는 예측 가능한 문장 속에 사는 게 아니라, 발을 딛는 순간마다 길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두 사람이 백지의 지평선을 향해 몇 걸음 더 나아갔을 때, 발밑의 하얀 대지가 갑자기 소리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 사이로 솟아오른 것은 수천 권의 책들이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성벽이었다. 그 성벽의 꼭대기에는 리셋된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 채 버려진 파지들이 눈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성벽 너머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결말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우리에게 돌아갈 페이지를 내놓아라!"

그것은 서윤이 지난 루프 동안 써왔던, 혹은 쓰려다 포기했던 수많은 조연과 엑스트라들의 잔상이었다. 그들은 카페 에테르네 밖으로 탈출하지 못한 채 백지의 경계에 갇혀버린 망령들이었다. 서윤이 소설의 법칙을 파괴하고 도망쳐 나온 대가로, 갈 곳을 잃은 문장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잉크로 된 눈을 가진 한 여인이 성벽 위에서 서윤을 지목했다. 그녀는 서윤이 2장쯤에서 잠시 묘사하려다 지워버린 꽃집 주인이었다.

"작가님, 당신은 우리를 이 여백에 버려두고 당신만의 자유를 찾아 떠나나요?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단 한 줄의 묘사조차 주지 않은 채로?"

서윤은 멈춰 섰다. 도진은 그녀를 데리고 서둘러 성벽을 지나치려 했으나, 서윤은 그의 손을 놓고 성벽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지독한 책임감이 소용돌이쳤다. 결말이 없는 소설을 쓰기로 한 것은 그녀였지만, 그 결정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중간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도진 씨, 나에게 만년필은 없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목소리가 있어요."

서윤은 성벽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가 백지의 세계에 파동을 일으켰다.

"당신들은 누군가의 묘사로 살아가는 인형이 아니에요! 내가 마침표를 찍지 않은 것은 당신들을 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들에게도 스스로 문장을 이어갈 권리를 주기 위해서였어요!"

서윤이 말을 마치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백지 위에 글자가 되어 새겨지기 시작했다. 펜이 없어도 그녀의 의지가 곧 서사가 되었다. 성벽을 이루던 책들이 하나둘씩 해체되어 날개처럼 펼쳐졌고, 잉크 망령들의 몸에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서윤의 명령을 기다리는 인형이 아니라, 각자의 백지를 찾아 흩어지는 이주민이 되었다.

"이게 바로... 내가 원했던 진짜 소설이에요."

서윤은 흩어지는 조연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이 세계는 단 한 권의 소설이 아니라, 수천 개의 삶이 교차하는 거대한 광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진은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 정말로 가야 할 시간이에요. 저 조연들이 각자의 길을 찾았듯, 우리도 우리만의 페이지를 완성해야죠."

두 사람이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등 뒤의 성벽은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졌다. 그 평원 끝에, 작은 집 한 채가 보였다. 그것은 서윤이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공간이었기에, 오로지 현실의 의지로만 지어질 수 있는 집이었다.

서윤은 주머니 속을 만져보았다. 그곳에는 잉크 대신, 처음 보는 작은 씨앗 하나가 들어있었다. 6시가 되면 사라지는 환영이 아닌, 내일 아침 물을 주면 싹을 틔울 진짜 생명의 씨앗이었다.

제10장: 이름 없는 페이지의 주인

백지 위에 지어진 집은 기묘했다. 서윤이 한 번도 묘사한 적 없는 목재의 결이 살아 있었고, 창밖으로는 약속된 노을 대신 낯선 밤의 어둠이 찾아왔다. 6시의 굴레에서 벗어난 두 사람이 맞이하는 첫 번째 밤이었다. 리셋되지 않는 시간은 침묵조차 무겁게 가라앉혔다.

서윤은 식탁에 앉아 자신의 비어 있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만년필도 원고지도 없었지만, 손끝에는 여전히 글을 쓰던 습관이 남아 경련하듯 움츠러들었다.

도진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두 잔을 들고 다가왔다. 카페 에테르네에서 마시던 설정된 커피가 아닌, 서윤이 직접 찻잎을 우려내어 향기가 불규칙하게 퍼지는 진짜 차였다.

"서윤 씨, 손이 떨리고 있네요."

"글을 쓰지 않는 나를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이제 나는 무엇으로 존재해야 할까요? 기록하지 않는 삶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도진은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두 손을 포개어 잡았다.

"우리는 이제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에요. 소설은 읽히기 위해 존재하지만, 삶은 그냥 살아지기 위해 존재하죠. 당신이 아무것도 적지 않아도, 당신의 숨소리와 지금 이 찻잔의 온기가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어요."

그때, 집 밖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 같기도 하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서윤이 창문을 열자, 집 주변의 백지 평원이 거대한 도서관처럼 변해 있었다. 하늘에서는 별 대신 수많은 문장들이 유성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 세계로 탈출해온 다른 인물들이 스스로 써 내려가기 시작한 이야기들이었다. 누구는 농부가 되어 흙의 언어를 적고 있었고, 누구는 항해사가 되어 바람의 문장을 그리고 있었다. 서윤이 준 자유는 백지를 각자의 색으로 물들이는 거대한 집단 창작의 장이 된 것이다.

서윤은 주머니 속의 씨앗을 꺼내 창밖의 작은 화단에 심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문장을 적지 않았다. 대신 흙을 만지고, 물을 주며, 기다림이라는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왔을 때, 화단에서는 작고 푸른 싹이 돋아나 있었다. 그것은 6시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고, 서윤의 묘사 없이도 스스로 햇빛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진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싹을 함께 바라보았다.

"이건 당신이 쓴 어떤 문장보다 아름답네요."

"아니요, 이건 내가 쓴 게 아니에요. 이 아이가 스스로를 기록하고 있는 거죠."

서윤은 깨달았다. 종결이 없는 스토리란, 작가가 펜을 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에게 영원히 흐르는 '시간'을 돌려주는 것이었음을. 이제 이 이야기는 서윤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 독자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도, 이 세계의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갈 것이다.

서윤은 도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두 사람의 발치에는 리셋의 흔적 대신, 매일 조금씩 길어지는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6시가 되어도 사랑은 리셋되지 않았다. 대신 더 깊어지고, 더 낡아지고, 더 소중해졌다. 그것이 마침표를 거부한 두 사람이 얻은 가장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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