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1. 10:03ㆍ만화 애니

제17장: 균열의 잔상과 잉크의 역습
평범함은 생각보다 무거운 옷이었다. 도진과 서윤이 원룸의 낡은 벽지에 익숙해질 무렵, 현실이라는 대지는 그들에게 부드러운 안식만을 허락하지 않았다. 2026년의 첫 달이 지나가고 있을 때, 서윤은 자신의 오른손 검지에 이상한 징후를 발견했다. 펜을 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손끝이 잉크에 젖은 듯 검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그 얼룩은 피부 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서서히 손목을 향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은 소설의 중력이었다. 이야기 밖으로 도주한 주인공들에게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인과율의 사슬이 현실의 차원까지 뻗어 나온 것이었다.
"서윤아, 손이 왜 이래?"
퇴근하고 돌아온 도진이 서윤의 손을 잡으며 경악했다. 도진의 손 역시 온전치 않았다. 그의 가슴팍에는 신문의 활자들이 문신처럼 새겨지고 있었다. [그는 결코 현실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모든 것은 환상에 불과했다] 같은 잔인한 문장들이 그의 피부를 뚫고 솟아오르고 있었다.
"도진아, 우리가 도망쳐 온 곳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어.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침표가 블랙홀이 되어 우리를 다시 빨아들이려나 봐."
그날 밤, 두 사람이 잠든 원룸의 천장이 갑자기 종이처럼 찢어졌다. 그 틈새로 쏟아진 것은 어둠이 아니라, 지독하게 익숙한 카페 에테르네의 냄새였다. 갓 볶은 커피 향과 오래된 책의 먼지 냄새. 그리고 그 틈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가는 펜을 놓을 수 있어도, 인물은 서사 밖에서 숨 쉴 수 없다. 너희가 밟고 있는 그 흙은 가짜고, 너희가 마시는 그 공기는 허구다."
편집자였다. 아니, 그것은 서윤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창작의 공포 그 자체였다. 찢어진 천장 너머로 거대한 타자기의 활자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활자들은 방바닥을 치며 불꽃을 튀겼고, 서윤이 공들여 마련한 중고 가구들을 하나씩 텍스트로 분해해 버렸다. 침대는 '휴식을 위한 도구'라는 글자로 변해 흩어졌고, 식탁 위의 사과는 '붉은 과실'이라는 묘사로 환원되어 사라졌다.
도진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그의 육체가 점점 2차원의 평면으로 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윤은 필사적으로 도진을 붙잡았다.
"안 돼! 여긴 진짜야! 우리가 땀 흘려 번 돈으로 산 물건들이고, 우리가 직접 고른 방이란 말이야!"
서윤은 검게 물든 자신의 오른손을 허공에 휘둘렀다. 그 순간,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잉크가 채찍처럼 뻗어 나가 타자기의 활자들을 쳐냈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 현상을 멈추기 위해서는 단순히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조차 자신이 써 내려가는 '강력한 서사'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평범한 볼펜을 집어 들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저렴한 플라스틱 펜이었지만, 서윤은 그것을 자신의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댔다.
"나는 묘사하는 작가가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는 증인이다. 이 방의 곰팡이 냄새는 설정이 아니라 세월의 흔적이고, 도진의 굳은살은 활자가 아니라 노동의 결실이다!"
서윤이 볼펜으로 자신의 팔뚝에 문장을 새길 때마다, 방 안을 뒤덮던 잉크의 소용돌이가 멈칫했다. 그녀는 관념적인 미사여구를 쓰지 않았다. 대신 오늘 저녁에 먹은 된장찌개의 짠맛, 도진이 마트에서 나르던 상자의 무게, 주인 아주머니의 거친 목소리 같은 지독하게 구체적인 현실의 파편들을 적어 내려갔다.
추상적인 소설의 힘은 구체적인 현실의 무게 앞에 무력해지기 시작했다. 찢어졌던 천장이 다시 콘크리트의 질감을 회복했고, 글자로 변해가던 도진의 신체도 다시 입체적인 부피를 되찾았다.
"그만둬! 서사를 망치지 마라! 너희는 비극으로 끝나야만 완벽해진단 말이다!"
편집자의 목소리가 단말마처럼 울려 퍼졌다. 서윤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손바닥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잉크 얼룩 위에 펜촉을 박아 넣었다.
"완벽한 비극보다, 구질구질한 평생을 택하겠어."
그 문장이 완성되는 순간, 방 안을 가득 메웠던 잉크들이 한 방울의 눈물이 되어 서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천장의 균열은 메워졌고, 가로등 불빛이 다시 창가를 비췄다. 고요함이 찾아왔다.
도진은 거친 숨을 내쉬며 서윤의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가슴에 새겨졌던 문장들은 흉터가 되어 남았지만, 더 이상 그를 갉아먹지는 않았다. 서윤 역시 검게 물들었던 손가락이 원래의 피부색을 되찾은 것을 확인했다. 다만, 손톱 끝에 아주 작은 점 하나가 지워지지 않고 남았다. 그것은 그들이 영원히 소설의 자식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주는 낙인이었다.
"서윤아... 이제 끝난 거야?"
도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윤은 그를 일으켜 세워 꽉 껴안았다.
"아니, 도진아. 소설의 습격은 앞으로도 계속될 거야. 우리가 행복해지려 할 때마다, 세상은 우리를 다시 '이야기' 속으로 가두려 하겠지. 하지만 괜찮아. 우리에겐 이제 이 구질구질한 현실의 문법이 있잖아."
두 사람은 엉망이 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글자로 분해되었던 가구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비록 조금 삐걱거리고 낡았지만, 그것이 현실의 물건이라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안심이 되었다.
서윤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 4시. 누군가는 벌써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볼펜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아름다운 소설을 쓰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를 지키기 위해 현실이라는 거친 종이 위에 투박한 생존기를 기록하는 투사였다.
"도진아,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집 앞 공원에 가보자. 거기 심어진 나무들이 진짜인지 설정인지, 우리가 직접 만져보며 확인하자."
도진은 서윤의 손을 잡고 미소 지었다. 그의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서윤의 피부를 자극했다. 그 까칠한 촉감이 그 무엇보다 달콤했다.
이야기 밖으로 나온 주인공들에게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 순간 소설의 유혹과 싸워 이겨내야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그 투쟁을 받아들였다. 6시의 반복보다, 12시의 소멸보다, 서로의 곁에서 함께 늙어가는 이 치열한 현실이 훨씬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하늘에 걸린 달은 인쇄된 것처럼 선명했지만, 그 아래를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는 불규칙하게 흔들리며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의 운명을 움켜쥔 한 쌍의 연인으로서 진짜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제18장: 지워지지 않는 낙인
서윤은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손톱 끝의 검은 점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작은 점이었으나, 때때로 맥박에 맞춰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도진이 잠결에 뒤척이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을 때면 서윤은 서둘러 손을 감추었다. 현실로 넘어온 지 석 달째, 두 사람의 생활은 제법 궤도에 올랐지만 서윤의 내면에는 여전히 잉크의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날 오후, 서윤은 평소보다 일찍 일을 마치고 동네 시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생선 비린내와 왁자지껄한 흥정 소리가 가득한 그곳에서, 그녀는 낯선 이질감을 느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찰나의 순간, 프레임이 끊기는 필름처럼 부자연스럽게 툭툭 끊겼다.
서윤은 걸음을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서윤의 눈에는 보였다. 생선 가게 주인의 앞치마에 묻은 핏자국이 선명한 붉은색이 아니라, 짙은 검은색 잉크로 번지고 있었다.
"서윤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서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섰다. 도진이었다. 그는 마트 유니폼을 입은 채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제법 건강해 보였지만, 서윤은 그의 목덜미에 돋아난 솜털 하나하나가 잉크 입자로 변해가는 것을 포착했다.
"왜 그래?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도진아, 방금... 저 사람들 못 봤어?"
서윤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평범한 행인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도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바닥은 여전히 거칠고 따뜻했지만, 서윤은 그 접촉면을 타고 차가운 서사의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길의 전신주에 붙은 전단지들이 일제히 펄럭이며 소리를 냈다. 그것은 종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수천 개의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었다. 서윤은 귀를 막고 뛰기 시작했다. 도진이 그녀의 뒤를 쫓으며 이름을 불렀지만, 서윤의 귓가에는 도진의 목소리가 아닌 활자로 인쇄된 대사만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도망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이야기는 이미 그녀의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원룸 문을 잠그고 나서야 서윤은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뱉었다. 도진이 황급히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서윤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도진아, 네 몸에... 문장들이 돋아나고 있어."
도진은 자신의 팔과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서윤의 눈에 비친 도진은 이미 반쯤 잉크에 젖은 상태였다. 그의 심장 위치에는 [그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소멸을 택할 것이다]라는 잔인한 복선이 뚜렷하게 박혀 있었다.
서윤은 책상 위로 달려가 펜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떤 필기구도 보이지 않았다. 필기구통은 텅 비어 있었고, 서윤의 손바닥에서는 검은 잉크가 샘물처럼 솟아나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잉크는 스스로 글자가 되어 방 안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이건 내 글이 아니야. 내가 쓰는 게 아니라고!"
서윤이 절규했다. 그때 창밖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늘을 올려다본 서윤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2026년의 태양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거대한 잉크병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그 주둥이에서 검은 액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현실의 하늘이 검게 물들며 별 대신 수만 개의 마침표들이 박히기 시작했다.
편집자가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서윤 자신이 버렸던, 미처 끝내지 못한 수많은 원고 파편들의 반란이었다. 그녀가 외면했던 조연들, 삭제했던 문장들, 무책임하게 마침표를 찍어버린 감정들이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방 안의 벽지가 종이처럼 말려 올라가며 그 뒤에 숨겨져 있던 설정값들이 드러났다. [벽: 시멘트 질감, 30%의 습도], [침대: 낡은 스프링, 가난의 상징].
도진의 목소리가 점점 변해갔다. 사람의 성대가 내는 울림이 아니라, 누군가 책을 낭독하는 듯한 건조한 톤이었다.
"서윤아, 괜찮아. 내가 있잖아. 이건 그냥 꿈일 뿐이야."
하지만 그의 말 뒤에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안심시키려 애썼다)라는 지문이 허공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서윤은 자신의 손톱 끝에 남은 검은 점을 쥐어뜯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과 함께 붉은 피가 솟구쳤지만, 그 피조차 바닥에 닿기도 전에 검은 활자로 응고되었다.
"우리가 산 쌀, 우리가 마신 물, 우리가 나눈 대화... 이 모든 게 다 잉크였다는 거야?"
서윤은 절망하며 벽을 쳤다. 벽이 찢어지며 그 너머로 무한한 백지의 공간이 보였다. 그곳에는 카페 에테르네의 잔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현실이라고 믿었던 이 빌라촌 역시, 사실은 소설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한 거대한 세트장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때, 도진이 서윤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잉크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윤아, 네가 쓰지 않는다면 내가 쓸게.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게 해줘."
도진은 바닥에 고인 잉크를 손가락에 묻혀 벽면에 커다랗게 휘갈겼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것은 아픔이다.]
그가 쓴 문장은 잉크 폭포의 압력을 견디며 금방이라도 지워질 듯 파들거렸다. 서윤은 도진의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깨달았다. 소설의 습격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의 힘을 빌려 허구를 파괴하는 것임을. 독을 독으로 다스리듯, 그녀는 자신의 잉크로 이 세계의 작가에게 반격을 가해야 했다.
서윤은 자신의 손바닥에서 솟아나는 잉크를 움켜쥐어 허공에 뿌렸다. 잉크 방울들은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하늘을 뒤덮은 잉크병을 향해 날아갔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인형이 아니야. 내가 마침표를 찍는 순간, 이 지옥 같은 연재도 끝이야!"
서윤의 외침과 함께 잉크병이 박살 났다. 하지만 그 파편들은 다시 수만 권의 책이 되어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한 권 한 권의 책이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지진이 일어났고, 서윤의 원룸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도진의 하반신이 이미 글자들 속에 파묻혀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서윤을 창밖으로 밀어냈다.
"도망쳐, 서윤아! 네가 살아야 이 이야기가 현실로 남을 수 있어!"
"싫어! 같이 가야 해!"
서윤이 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도진의 손은 이미 종이처럼 얇아져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추락하는 서윤의 눈앞으로 2026년 1월의 마지막 풍경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자신의 손등에 마지막 문장을 새겼다.
[내일 아침,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어둠이 그녀를 삼켰다.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지독하게 고요했다. 서윤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창밖으로는 새벽 해가 뜨고 있었다. 식은땀에 젖은 몸을 일으키려던 서윤은 문득 이질감을 느끼고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등에는 아무런 흉터도, 문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확인했을 때, 그곳에는 도진이 없었다. 베개 위에는 오직 한 장의 낡은 원고지만이 놓여 있었다.
[제19장: 홀로 남겨진 자의 아침]
서윤은 비명을 지르며 원고지를 찢어버렸다. 하지만 찢겨나간 종이 조각들은 공중에서 다시 합쳐지며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냈다.
[그녀의 절규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으니까.]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방문을 열었다. 거실은 비어 있었고, 도진이 마트에서 사 왔던 사과 봉지나 그의 옷가지들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있었다.
현실이라고 믿었던 3개월의 시간이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삭제되어 버린 것이다. 서윤은 미친 듯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골목길, 마트, 광장... 그 어디에도 도진의 흔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여자 보듯 쳐다봤고, 누구도 도진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서윤은 광장 중앙의 시계탑 아래 멈춰 섰다. 시계는 5시 5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초침이 6시를 향해 한 칸씩 움직일 때마다, 서윤의 주변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빌라촌은 우아한 대리석 건물로, 시장의 소음은 감미로운 클래식 음악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앞에는 낯익은 카페의 문이 나타났다. CAFE ETERNE.
서윤은 눈물을 흘리며 문고리를 잡았다. 이것은 리셋이 아니었다. 이것은 더 정교해진 감옥이었다.
"어서 오세요, 서윤 작가님.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카페 안에서 들려온 것은 도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전의 다정함이 거세된, 서늘한 편집자의 말투였다.
서윤이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는 도진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마트 유니폼을 입은 노동자가 아니었다. 그는 완벽하게 재단된 수트를 입고, 차가운 눈빛으로 원고 교정지를 넘기고 있었다.
"현실 체험은 즐거우셨나요? 이제 다음 장을 시작할 시간입니다."
서윤은 뒷걸음질 쳤지만, 카페 문은 이미 벽으로 변해 사라진 뒤였다.
서윤은 카페 에테르네의 대리석 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깼다.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분명 도진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내뿜는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가 넘기고 있는 원고지 서걱거리는 소리가 서윤의 고막을 칼날처럼 긁었다.
현실이라고 믿었던 3개월의 시간이, 빌라촌의 곰팡이 냄새가, 도진이 깎아주던 사과의 단맛이 모두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서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도진아... 아니지?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우리 같이 도망쳤잖아. 네가 내 손을 잡고 그 바다를 건넜잖아."
수트를 입은 도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만년필로 원고지에 교정 부호를 그려 넣었다. 붉은색 잉크가 마치 선혈처럼 종이 위로 번졌다.
"서윤 작가님, 착각하지 마세요. 그 '도주' 역시 제가 설계한 플롯의 일부였습니다. 독자들은 주인공들이 고난을 겪고 현실로 탈출했다고 믿을 때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든요.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그 탈출구가 사실은 더 큰 감옥의 입구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 완성됩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윤을 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서윤이 사랑했던 다정함이나 생존의 열망 따위는 없었다. 오직 완벽한 서사를 완성하려는 창조자의 서늘한 집착만이 서려 있었다.
"당신은 좋은 작가지만, 너무 감상적이에요. 인물이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다고 믿는 것만큼 위험한 오만은 없죠. 도진이라는 캐릭터는 당신의 외로움을 투영한 도구였고, 나는 그 도구를 이용해 당신을 다시 이 자리로 불러들인 것뿐입니다."
서윤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눈물 섞인 웃음소리가 카페의 높은 천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도구? 아니, 그 사람은 진짜였어. 마트에서 상자를 나르며 흘리던 땀 냄새가, 나를 안아주던 그 투박한 손마디가 어떻게 가짜일 수 있어! 당신이 뭔데 우리 삶을 서사라고 불러!"
서윤은 바닥을 짚고 일어나 도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돌진했다. 그녀는 그가 보고 있던 원고지를 낚아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종이 조각들이 나비처럼 흩날렸다. 하지만 도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찢긴 종이 조각들은 공중에서 다시 자석처럼 달라붙더니, 이전보다 더 견고한 문장이 되어 서윤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녀는 발악했지만, 이미 잉크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작가님,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이곳에서 물리적인 파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이 부정할수록 서사는 더 단단해집니다. 당신의 절망이 바로 이 소설의 가장 훌륭한 연료니까요."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윤에게 다가왔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카페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우아했던 벽면은 거대한 책장으로 변했고, 그 책장에는 서윤이 지금까지 썼던, 그리고 쓰지 않았던 수만 권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모든 책의 제목은 하나였다. '서윤의 죽음'.
서윤은 뒷걸음질 치다 거대한 책장에 등을 부딪혔다. 책장에서 쏟아져 나온 문장들이 그녀의 어깨와 팔을 휘감았다. 문장들은 밧줄처럼 그녀를 구속했고, 살점을 파고들며 차가운 잉크를 주입했다.
"자, 이제 19장을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제목은 아까 보신 대로 '홀로 남겨진 자의 아침'입니다. 도진은 이제 작가님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환영이 될 것이고, 당신은 영원히 이 카페에 갇혀 그 환영을 그리워하며 글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영원한 형벌입니다."
서윤은 호흡이 가빠졌다. 가슴 속에 주입된 잉크가 심장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의식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도진의 얼굴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아니야, 이건 진짜가 아니야. 저 남자는 도진이가 아니야.'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잉크병이 깨지며 추락하던 순간, 마지막으로 새겼던 그 문장. [내일 아침,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 문장이 서윤의 살갗 밑에서 희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편집자의 수트 입은 도진은 그 문장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오직 자신이 장악한 서사의 논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서윤은 깨달았다. 편집자가 간과한 것은, 작가가 주인공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서사 외적인 변수'였다.
서윤은 밧줄처럼 감긴 문장들을 견디며 손톱으로 자신의 손등을 파헤쳤다. 피와 잉크가 섞여 흘러나왔다. 그녀는 그 혼탁한 액체로 바닥에 새로운 마침표를 찍었다.
"편집자님, 당신이 틀렸어. 소설의 결말을 정하는 건 창조자가 아니야. 그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의 '기억'이지."
서윤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낡은 영수증 조각을 꺼냈다. 빌라촌 시장에서 붕어빵을 사고 받았던, 잉크가 번진 보잘것없는 종이였다. 편집자가 현실을 지울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지극히 사소하고 구질구질한 현실의 파편.
서윤이 그 영수증 조각을 입에 물고 씹어 삼키자, 그녀의 전신에서 황금빛 불꽃이 일어났다. 그것은 완벽한 서사가 거부하는 '불순물'의 힘이었다.
"이건... 이건 플롯에 없는 일이야! 어디서 이런 조잡한 걸 가져온 거지?"
편집자의 안색이 처음으로 변했다. 카페의 대리석 바닥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썩은 물 냄새와 흙냄새가 올라왔다. 서윤은 자신을 묶고 있던 문장들을 손으로 찢어발겼다.
"당신은 도진이를 연기하고 있을 뿐이야. 진짜 도진이는 지금도 마트 창고 어딘가에서 나를 찾고 있어. 이 세계가 가짜라면, 나는 이 가짜를 부수고 진짜로 돌아갈 거야. 비록 그곳이 지옥이라 해도!"
서윤은 자신의 심장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심장 속에 박힌 잉크 덩어리를 움켜쥐었다. 그녀는 그것을 힘껏 뽑아내어 편집자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검은 잉크가 편집자의 수트를 적시자, 그의 완벽했던 도진의 얼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피부가 종이처럼 구겨지고, 눈동자가 활자로 흩어졌다.
"너... 너도 결국 사라지게 될 거다! 인물이 작가를 배반하면 이야기는 붕괴된다고!"
"붕괴해도 좋아. 이야기가 없어도 우리는 존재하니까!"
서윤은 무너져 내리는 카페의 잔해 속에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멀리서 아주 작고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탑의 종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낡은 트럭이 지나가며 내는 경적 소리였고, 시장 상인들의 투박한 욕설이었으며, 무엇보다 서윤의 이름을 부르는 도진의 갈라진 목소리였다.
서윤은 그 소리를 향해 자신의 존재 전체를 던졌다. 카페 에테르네의 대리석 기둥들이 무너지고, 수만 권의 책들이 불타오르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서윤은 그 소용돌이의 중심부로 빨려 들어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서윤은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6시 15분.
주변에는 사고라도 난 듯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서윤은 온몸이 쑤시는 통증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빌라촌 골목길이었다.
저 멀리서 누군가 빗속을 뚫고 달려오고 있었다. 젖은 마트 유니폼을 입은 채, 한쪽 신발이 벗겨진 것도 모른 채 필사적으로 달려오는 남자.
"서윤아! 서윤아!"
도진이었다. 그의 얼굴은 편집자의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눈물과 빗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었고, 넘어졌는지 무릎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서윤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종이처럼 얇아지지도, 잉크로 흩어지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빗속에서 서로를 껴안았을 때, 서윤은 깨달았다. 19장의 제목은 '홀로 남겨진 자의 아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이 서사를 이기는 순간'이었다.
편집자의 저주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언제든 다시 잉크의 파도가 그들을 덮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윤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녀의 손목에는 도진의 따뜻한 맥박이 느껴졌고, 그녀의 주머니 속에는 여전히 젖은 영수증 조각이 남아 있었다.
"도진아, 나 왔어. 진짜 집으로 왔어."
"응, 알아. 네가 올 줄 알았어. 우리 저녁 먹으러 가자. 내가 찌개 끓여놓고 기다렸단 말이야."
두 사람은 빗속을 걸어 낡은 원룸으로 향했다. 그들의 발소리는 더 이상 문장이 되지 않았다. 그저 젖은 땅을 밟는 투박하고 정직한 소음으로 남을 뿐이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가득했지만, 구름 너머에는 내일의 태양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록되지 않아도 좋은, 오직 두 사람만의 진짜 아침이 멀지 않은 곳에서 밝아오고 있었다.
제20장: 서사의 종언과 인간의 문법
빗줄기가 가늘어지며 빌라촌의 옥상 위로 희뿌연 새벽빛이 내려앉았다. 19장의 처절한 사투를 끝내고 돌아온 원룸 안에는 여전히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와 눅눅한 공기가 섞여 있었다. 도진은 서윤의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은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은 서사적인 장치가 아니라 방금 사랑하는 이를 잃을 뻔한 인간의 본능적인 공포였다.
서윤은 도진의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찢어졌던 천장의 균열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평범한 얼룩만이 남았다. 하지만 서윤은 알고 있었다. 편집자가 남긴 마지막 말처럼, 이야기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도진아, 내가 카페에서 그 남자를 봤을 때, 정말로 네가 나를 배신한 줄 알았어. 그 얼굴, 그 목소리... 모든 게 완벽했거든."
도진은 닦아주던 손을 멈추고 서윤의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에는 카페에서의 서늘함 대신, 빗물에 씻겨 내려가지 않은 깊은 애정이 서려 있었다.
"그는 내 껍데기를 빌려 쓴 유령일 뿐이야, 서윤아. 나는 마트 창고에서 상자를 나르다가 갑자기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어. 주변 사람들이 활자로 변해 흩어지는데,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만 떠오르더라. 6시가 되면 네가 기다리는 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도진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구겨진 마트 영수증 뒷면을 꺼냈다. 거기에는 연필로 거칠게 그린 서윤의 얼굴이 있었다.
"이게 내 이정표였어. 누군가 내 기억을 지우려고 문장들을 쏟아부을 때마다, 나는 이 조잡한 그림을 보며 버텼어. 작가가 쓴 설정보다, 내가 직접 보고 느낀 네 미소가 더 강했으니까."
서윤은 그 그림을 받아 들었다. 선은 엉망이었고 비율도 맞지 않았지만, 그 어떤 세밀한 묘사보다도 서윤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것은 편집자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 즉 '데이터'가 아닌 '기억'의 영역이었다.
그때, 방 안의 전등이 깜빡거리며 기분 나쁜 기계음을 냈다. 서윤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또다시 잉크의 습격이 시작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벽면에서 글자가 돋아나는 대신, 방 한가운데에 서늘한 그림자 하나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편집자도, 도진의 환영도 아닌, 서윤 자신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존재였다.
그림자는 서윤의 책상 앞에 앉아 보이지 않는 펜으로 허공에 글을 쓰는 시늉을 했다.
"너는 평생 불안할 거야, 서윤. 네가 행복해지는 순간마다 의심하겠지. 이것 또한 누군가 설계한 반전이 아닐까? 지금 네가 잡고 있는 저 남자의 손이 사실은 종이 조각이 아닐까?"
그림자의 목목소리는 서윤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자조적인 독백과 같았다. 작가로서의 자아가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보라고, 너는 지금도 이 상황을 머릿속으로 문장화하고 있잖아. [그녀는 그림자의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라고. 너는 영원히 서사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어. 너 자체가 문장으로 이루어진 존재니까."
도진은 그림자를 볼 수 없는 듯했지만, 서윤이 허공을 응시하며 사르르 떨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를 꽉 껴안았다.
"서윤아, 아무것도 듣지 마. 내 심장 소리만 들어. 이건 텍스트가 아니야. 이건 박동이야."
서윤은 도진의 품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림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묘사하지 않고는 인지할 수 없는 작가의 병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 병을 치유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문법을 이용해 자신만의 세계를 재정의하기로 했다.
서윤은 눈을 뜨고 허공의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투명한 잉크가 흘러나와 그림자의 형상을 휘감았다.
"그래, 나는 작가야.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권한을 너나 편집자에게 넘겨주지 않을 거야. 네가 내 불안을 쓰려 한다면, 나는 내 확신을 적겠어. 네가 비극적인 결말을 설계한다면, 나는 그 결말을 찢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파괴적인 주인공이 될 거야."
서윤의 의지가 강해질수록 그림자는 흐릿해졌다. 서윤은 이제 도진의 손등 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새겼다. [사랑해]. 그것은 잉크로 쓰인 것이 아니라, 체온으로 새겨진 문장이었다.
그 순간, 방 안을 감돌던 기이한 압박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전등은 다시 밝게 빛났고, 빗소리는 평범한 자연의 소리로 돌아왔다. 창밖을 보니 어느덧 새벽 시장의 상인들이 트럭을 몰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윤은 책상 위에 놓인 낡은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었다. 편집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무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과 도진을 위한, 이 세계의 마지막 마침표였다.
[그들은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은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이며, 퇴근길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평범한 이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만, 그들의 호흡은 마침표 너머로 이어진다. 누구도 읽지 않는 페이지들 속에서 그들은 비로소 자유롭다.]
서윤은 엔터 키를 눌렀다. 그리고 노트북의 전원을 완전히 껐다. 화면이 검게 변하며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이제 그녀의 눈동자에는 잉크의 독기가 사라지고, 대신 아침 햇살이 조금씩 맺히고 있었다.
"도진아, 나 이제 글 안 써도 될 것 같아. 아니, 당분간은 쉬고 싶어. 문장 대신 너랑 대화하고, 묘사 대신 너를 만지는 일에 집중하고 싶어."
도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잘 생각했어. 마침 오늘 마트 쉬는 날인데, 우리 같이 늦잠 잘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아주 지루하고 긴 잠 말이야."
두 사람은 좁은 침대에 누워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두 사람의 발치에 머물렀다. 소설 속의 빛은 늘 의도가 있었지만, 지금의 햇살은 그저 시간이 흘러 도달한 물리적인 에너지일 뿐이었다. 그 무심함이 서윤을 평온하게 했다.
잠결에 서윤은 문득 생각했다. 편집자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 혹은 이 세계 전체가 더 거대한 소설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만약 이것이 소설이라 해도, 그녀는 가장 고집스럽고 다루기 힘든 인물이 되어 작가를 괴롭힐 것이다.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정해진 대사를 내뱉지 않으며, 오로지 옆에 있는 사람과 행복해지는 데만 몰두하는 그런 돌발적인 인물.
그것이 인간이 서사(Narration)에 저항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문법이었다.
오전 10시. 시계바늘은 무심하게 6시를 지나 훨씬 멀리 나아가 있었다. 리셋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창밖에서는 이웃집 아이가 뛰어가는 소리와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화음처럼 들려왔다.
서윤은 도진의 품속에서 깊고 안락한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더 이상 펜을 쥐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도진과 함께 끝없이 펼쳐진 갈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길에는 마침표도, 지문도 없었다. 오로지 걷는 자의 발자국 소리만이 실재하는, 기록되지 않는 축복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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