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31. 22:20ㆍ만화 애니

남궁설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그녀는 거절당한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긋 웃었지만, 눈동자에는 서늘한 이채가 서렸다.
"직설적이시군요. 좋습니다. 무림맹이 청운검문의 비보를 찾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혈해종처럼 무식하게 힘으로 빼앗으려 하지 않아요. 우리는 정당한 대가를 제안하러 온 것입니다."
그녀는 품 안에서 작은 옥함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뚜껑이 열리자 방 안 가득 청량한 약향이 퍼져 나갔다.
"이것은 소환단(小還丹) 세 알입니다. 그리고 낙양 내에 마련된 안전한 거처와, 당신의 정체를 가려줄 새로운 신분도 준비되어 있죠. 조건은 간단합니다. 그 단검의 원래 주인이 남긴 비급의 위치, 혹은 그 열쇠가 되는 단서 하나만 넘겨주시면 됩니다."
한운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죽엽청을 병째로 들이키던 빙천무황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게, 남궁 낭자. 우리 애송이가 들고 있는 게 고작 약덩어리 몇 개에 팔릴 물건처럼 보이나? 무림맹의 인심이 예전만 못하구먼."
남궁설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가 입을 열려는 찰나, 갑자기 방 안의 촛불들이 일제히 일렁이며 검은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3. 어둠 속의 침입자, 흑영살(黑影殺)
"향사(香蛇)에 독이 섞였군."
한운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는 숨을 멈추고 내력을 운기해 혈맥을 봉쇄했다. 동시에 매향루의 창문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며 대여섯 명의 흑의인들이 난입했다. 그들은 무림맹의 무사도, 평범한 자객도 아니었다.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오직 살기만을 뿜어내는 혈해종의 정예 암살대, 흑영살이었다.
"남궁설, 무림맹의 여우년이 선수를 치려 했나 보군. 하지만 이 아이는 종주님께서 직접 지목하신 제물이다!"
선두에 선 흑의인이 기괴한 모양의 곡도를 휘두르며 한운의 목을 겨냥했다. 좁은 방 안에서 펼쳐지는 급작스러운 난전. 남궁설 또한 소매 속에서 유연한 연검(軟劍)을 뽑아내며 응전했다.
챙! 채쟁!
금속음이 고막을 찔렀다. 한운은 청강단검을 뽑는 대신,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파공음을 내며 날아간 찻잔이 자객의 미간을 정확히 타격했다.
"빙령보(氷靈步)!"
한운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자객들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투귀장에서의 전투가 힘의 폭발이었다면, 지금은 좁은 공간을 활용한 극강의 효율이었다. 그의 손끝이 자객들의 혈도를 스칠 때마다, 차가운 냉기가 그들의 신체를 마비시켰다.
4. 무시장의 밤은 끝나지 않는다
단 몇 번의 호흡 만에 세 명의 자객이 바닥에 쓰러졌다. 남은 자객들은 한운의 기이한 무공에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괴물 같은 놈... 이 정도 공력을 가졌을 줄이야!"
그들이 연막탄을 터뜨리며 후퇴하려 하자, 한운은 창틀을 밟고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 순간, 빙천무황이 한운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쫓지 마라. 미끼다."
노인의 말대로, 매향루 밖 무시장의 거리는 이미 수백 명의 무인들로 포위되어 있었다. 남궁설이 현상금을 걸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인지, 아니면 혈해종이 무시장의 모든 세력을 움직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남궁설은 흐트러진 옷가지를 정리하며 냉소 섞인 미소를 지었다.
"한운 공자, 이제 선택하셔야 할 겁니다. 이 무시장의 모든 인간이 당신을 노리는 사냥개가 되었습니다. 내 손을 잡고 이곳을 빠져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지옥도 속에서 홀로 뼈를 묻으시겠습니까?"
한운은 피 묻은 단검 자루를 꽉 쥐었다. 자신의 앞에는 비릿한 욕망을 드러내는 무림맹의 여인이, 창밖에는 자신을 찢어 죽이려는 수많은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달빛이 보이지 않는 지하 도시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가 말했던 강호의 비정함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누구의 손도 잡지 않는다."
한운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 나갈 뿐이다."
그의 전신에서 투귀장에서보다 훨씬 더 짙은 푸른 진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명검전 제3장, 파로(破路). 막힌 길을 뚫어내는 파괴의 검기가 매향루 전체를 진동시키기 시작했다.
5. 보이지 않는 칼날의 정체
매향루 3층에서 뿜어져 나온 한운의 기세는 거리를 메운 무인들을 주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무시장의 인간들은 공포보다 탐욕에 더 익숙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한운의 기세에 압도당하면서도, 동시에 그가 가진 무공의 가치가 상상 이상임을 직감하고 침을 삼켰다.
"저놈의 다리 하나만 가져가도 평생 먹고살 금자가 떨어진다!" "무림맹이 뒤를 봐주기 전에 끝내야 해!"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암기가 쏟아졌다. 독침, 비수, 그리고 쇠사슬에 매달린 철퇴까지. 한운은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허공에서 그의 신형이 기묘하게 꺾였다. 빙천무황에게 전수받은 신법은 중력마저 무시하는 듯했다.
청강단검의 포장을 뜯어내자, 푸른 안개가 밤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한운은 공중에서 단검을 크게 휘둘렀다.
"무명검전, 단천(斷天)!"
푸른 검기가 반월형을 그리며 쏟아지는 암기들을 한꺼번에 쳐냈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낙양의 밤하늘을 갈랐다. 바닥에 착지한 한운의 주변으로 무시장의 무인들이 겹겹이 에워쌌다.
그때였다. 인파 사이를 뚫고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리를 헤치고 나타난 자는 키가 팔 척에 달하는 거한이었다. 그는 등에 거대한 파산추(破山鎚)를 매고 있었고,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지하 도시의 바닥이 미세하게 떨렸다.
"비켜라. 현상금 사냥꾼 따위가 건드릴 상대가 아니다."
거한의 등장은 공기를 순식간에 냉각시켰다. 그는 무시장의 사법 집행자이자, 비밀리에 혈해종의 자금을 받는 '철귀(鐵鬼)'였다.
6. 진정한 위기
철귀는 아무런 예고 없이 거대한 추를 휘둘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아니라, 공간 자체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한운은 본능적으로 단검을 세워 방어했다.
콰앙!
단검과 파산추가 충돌하자 한운의 신형이 뒤로 수 장이나 밀려났다. 발바닥이 지면을 긁으며 불꽃을 일으켰다. 한운은 손목이 저릿해오는 것을 느꼈다. 단순히 힘이 센 것이 아니었다. 철귀의 공격에는 상대의 내력을 흩뜨리는 특이한 진각(震脚)의 힘이 실려 있었다.
"호오, 이걸 버티나? 하지만 다음은 쉽지 않을 거다."
철귀가 다시 추를 들어 올렸다. 한운은 숨을 몰아쉬며 빙천무황을 찾았다. 그러나 노인은 매향루 3층 난간에 걸터앉아 여유롭게 술병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스승님!" "내가 뭐라더냐. 실전의 비정함을 배우라고 하지 않았느냐. 죽을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네 검은 영원히 짐꾼의 칼일 뿐이다."
노인의 비정한 목소리에 한운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더 이상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내부에 잠든, 아버지가 남겨준 그 뜨겁고도 차가운 기운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7. 각성하는 청운의 검
철귀의 파산추가 다시 한번 한운의 머리 위로 낙하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한운은 단검을 역수로 쥐고, 오히려 철귀의 정면으로 박차고 나갔다.
"어리석군!"
철귀가 비웃으며 추의 무게를 실었다. 하지만 한운의 신형은 추의 그림자 속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빙령보의 극의인 환영(幻影)이었다.
철귀의 추는 허공을 때렸고, 그 반동으로 지면이 폭발하듯 내려앉았다. 그 연기 속에서 한운이 나타났다. 그의 단검 끝에는 푸른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흐르지 않는 것은 썩으나, 갇힌 것은 폭발한다."
한운은 무명검전의 구결을 읊조리며 철귀의 가슴팍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철귀의 두꺼운 갑주도, 그가 자랑하던 강기(剛氣)도 청강단검의 예기 앞에서는 종잇장에 불과했다.
푸슉!
단검이 심장을 관통함과 동시에, 한운의 내력이 폭발했다. 철귀의 거구 안에서 냉기가 팽창하며 그의 혈관과 뼈를 순식간에 으스러뜨렸다. 철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주변을 에워쌌던 무인들은 그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시장의 강자 중 하나인 철귀가 단 한 수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8. 낙양을 뒤덮는 암운
한운이 단검을 거두자, 철귀의 시신은 얼음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거리는 정적에 휩싸였다. 한운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수많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낙양성 방향에서 수십 개의 신호탄이 하늘로 쏘아 올려졌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불꽃. 그것은 혈해종의 총동원령이었다.
남궁설은 매향루 위에서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혈해종의 본대가 움직이는군요. 이제 무시장은 전장이 될 겁니다."
빙천무황은 술병을 던져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날카롭게 빛났다. "이놈 한운아, 이제 진짜 사냥이 시작된다. 낙양성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그곳에 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 있을 게야."
한운은 피 묻은 손을 옷에 닦아내며 단검을 다시 천으로 감쌌다. 그의 눈은 이미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풍랑 앞에 선 무사의 눈이었다.
"가겠습니다. 어디든."
한운과 빙천무황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무시장은 비로소 폭발적인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들은 이제 수면 위로 드러나 낙양의 밤을 붉게 물들일 준비를 마쳤다.
제9화: 혈해의 파도, 낙양 공성전
무시장의 지하 통로를 빠져나온 한운과 빙천무황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평온한 낙양의 야경이 아니었다. 성벽 너머로 치솟는 검붉은 연기와 비명, 그리고 공기를 가르는 화전(火箭)의 궤적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무시장에서 쏘아 올려진 신호탄은 단순한 경고가 아닌, 거대한 학살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1. 불타는 낙양의 관문
낙양의 북문인 안희문(安喜門)은 이미 시체들로 가득했다. 성문을 지키던 관군들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짓겨져 있었고, 그 위를 혈해종의 무인들이 핏빛 깃발을 휘날리며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성을 함락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한운이라는 제물을 가두기 위해 성 전체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한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호의 싸움이 민초들의 삶까지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는 광경을 그는 처음 보았다. 빙천무황은 담담하게, 그러나 서늘한 안광을 띤 채 성벽을 바라보았다.
"이게 강호다, 애송아. 권력을 쥐려는 자들이 명분을 잃으면 귀신보다 더한 짓을 저지르지. 혈해종 놈들은 지금 너 하나를 잡겠다고 낙양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게야."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벽 위에서 수십 명의 궁수가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다. 화살촉마다 혈해종 특유의 부식성 마기가 서린 혈살시(血殺矢)였다.
슈슉! 슈슈슉!
"빙령장(氷靈掌)!"
한운이 허공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설산에서 익힌 차가운 진기가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와 거대한 얼음 장막을 형성했다. 빗물처럼 쏟아지던 화살들이 얼음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2. 혈해종의 사자, 혈영대(血影隊)
성벽 위에서 검은 망토를 두른 다섯 명의 무인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혈해종 내에서도 오직 종주 직속의 암살 임무만을 수행한다는 혈영대였다. 그들이 발산하는 살기는 아까 투귀장에서 만난 혈괴나 철귀와는 격이 달랐다.
"빙천무황,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우리 종주님께서는 당신과의 해묵은 원한을 들추길 원치 않으신다. 오직 그 아이와 단검만 넘겨준다면, 당신의 술값 정도는 넉넉히 쳐드리지."
혈영대의 대장인 귀검(鬼劍)이 기괴하게 굽은 검을 뽑으며 말했다. 빙천무황은 코방귀를 뀌며 술병을 허리춤에 찼다.
"늙은이 자존심 긁는 소리 하고 있네. 이놈아, 내 제자가 술값보다 못하다는 말이냐? 한운, 저놈들은 네가 상대해라. 나는 성벽 위에 숨어서 화살이나 쏘아대는 쥐새끼들을 좀 잡아야겠다."
말을 마친 노인은 신형을 날려 순식간에 성벽 위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한운과 다섯 명의 혈영대원뿐이었다.
3. 무명검전 제4장, 수(水)의 흐름
"죽여라. 단검은 손상되지 않게 조심하고."
귀검의 명령에 네 명의 대원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동시에 쇄도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유기적이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한운은 청강단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광채가 밤공기를 가르며 파동쳤다.
챙! 채쟁!
한운의 단검이 네 자루의 검과 연달아 맞부딪혔다. 좁은 공간에서의 연환 공격이었으나, 한운의 발놀림은 물 흐르듯 유연했다.
'적의 힘을 거스르지 마라. 물은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고, 구덩이를 만나면 채운다.'
무명검전의 요결이 한운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상대의 검기를 자신의 진기로 맞받아치는 대신, 살짝 비틀어 옆 사람의 공격 궤적과 부딪히게 만들었다. 자객들의 호흡이 엉키는 찰나, 한운의 단검이 번개처럼 내뻗어졌다.
"빙화(氷花)!"
단검 끝에서 푸른 얼음 꽃이 피어나는 듯하더니, 자객들의 가슴팍에 치명적인 검기를 심었다. 콰드득, 소리와 함께 두 명의 자객이 얼어붙은 채 뒤로 나자빠졌다.
"이놈이...!"
귀검이 직접 나섰다. 그의 굽은 검이 기괴한 궤적을 그리며 한운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검기에 섞인 혈향이 코를 찔렀다. 한운은 뒤로 물러나며 단검을 가로로 그었다.
4. 청운검의 진동
귀검의 검과 한운의 단검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 순간, 한운의 품속에 있던 청강단검이 공명하듯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사용하던 시절의 기억이 단검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운아, 검은 베는 도구가 아니다. 너의 의지를 투영하는 거울이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한운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투명한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그의 내공이 급격히 안정되면서도 밀도는 수 배로 높아졌다.
"무명검전 제4장, 청운파천(靑雲破天)!"
단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가 거대한 기둥이 되어 귀검을 덮쳤다.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청운의 기세가 실린 일격이었다.
"크아아악!"
귀검은 자신의 검이 종잇장처럼 부러지는 것을 목격하며 뒤로 날아갔다. 성문의 거대한 석재 벽에 처박힌 그는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 정신을 잃었다.
5. 낙양 성내의 비극
성문을 돌파한 한운의 눈앞에 펼쳐진 성내의 모습은 더욱 비참했다. 민가에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고, 혈해종의 잔당들이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무림맹의 무사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오직 겁에 질린 백성들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도와주세요! 제발...!"
어느 골목 입구에서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이 혈해종 무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무사 중 하나가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도를 들어 올렸다.
"걱정 마라. 아프지 않게 보내줄 테니."
슈욱!
검은 선이 허공을 갈랐다. 도를 치켜들었던 무사의 목이 그대로 분리되어 바닥을 굴렀다. 한운이 어느새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단검에서는 여전히 푸른 냉기가 서려 있었다.
"강호의 일을 민간인에게 전가하는 자들은 무인이라 부를 가치가 없다."
한운의 목소리는 낮고 위압적이었다. 남은 세 명의 무사는 한운의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다 그대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한운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손가락을 튕기자 지면에서 솟아오른 고드름들이 그들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6. 남궁설의 등장과 뜻밖의 정보
여인과 아이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한운의 뒤로,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매향루에서 보았던 남궁설이었다. 그녀는 혈흔이 묻은 연검을 갈무리하며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혈영대의 귀검을 쓰러뜨리고 여기까지 오시다니."
"무림맹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낙양이 이 꼴이 되도록 방치하는 게 당신들이 말하는 정의입니까?"
한운의 일침에 남궁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부의 배신자가 있었습니다. 무림맹 낙양 지부의 수뇌부 중 일부가 혈해종과 손을 잡고 성문을 열어준 거예요. 저는 지금 그들을 처단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리고... 한운 공자, 당신이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녀는 품 안에서 낡은 서신 한 장을 꺼냈다.
"당신의 아버지, 한청운 대협이 돌아가시기 직전 낙양의 '백운표국(白雲鏢局)'에 무언가를 맡겼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혈해종이 낙양을 이토록 이 잡듯 뒤지는 진짜 이유도 그곳에 있을 겁니다."
7. 백운표국으로의 진격
백운표국. 한때 낙양에서 가장 번성했던 표국이었으나, 청운검문이 멸문당하던 시기에 함께 몰락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한운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유산, 그리고 자신이 왜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이 그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스승님은요?"
"빙천무황 어르신은 성벽 위의 복병들을 정리하고 계십니다. 아마 곧 합류하시겠죠. 하지만 백운표국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을 겁니다. 혈해종의 부종주, '혈염라(血閻羅)'가 이미 그곳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있거든요."
혈염라. 혈해종의 이인자이자, 잔혹하기로 소문난 고수였다. 한운은 단검의 자루를 고쳐 쥐었다.
"가겠습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든,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합니다."
한운은 남궁설과 함께 불타는 낙양의 거리를 가로질러 백운표국으로 향했다. 발밑에는 적들의 피가 흥건했고, 머리 위로는 여전히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8. 드러나는 거대한 그림자
백운표국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이미 폐허나 다름없었다. 무너진 담장 사이로 붉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고, 중앙 연무장에는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뒷모습을 보인 채 서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수많은 시신이 쌓여 산을 이루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청운의 씨앗."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은 핏빛으로 충혈되어 있었고, 전신에서는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극독의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바로 혈염라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상자 하나를 한운에게 보여주며 기괴하게 웃었다.
"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게 고작 이런 것이었다니. 하지만 우리 종주님께는 이것이 천하를 얻을 열쇠가 되겠지."
상자 안에서 희미한 청백색 빛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한운의 단검과 공명하며 강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한운은 직감했다. 저 상자 안에 든 것이 자신의 과거이자, 미래를 결정지을 핵심임을.
낙양의 밤은 아직 깊지 않았다. 이제 진정한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제10화: 백운의 유산, 깨어나는 진실
백운표국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사이로 붉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고, 그 중심에 혈해종의 부종주 혈염라가 낡은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백운표국의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표사들의 시신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청강단검을 든 한운이 서 있었다. 등 뒤에는 남궁설이 긴장한 표정으로 연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1. 혈염라의 시험
"네 아비, 한청운이 숨겨둔 것이 이것이었다. 무림의 패권을 뒤흔들 수 있는 위대한 힘. 하지만 네놈은 어리석게도 그 가치를 모르는군."
혈염라는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빛을 욕심스럽게 바라보며 기괴한 미소를 지었다. 한운의 청강단검은 상자의 빛과 공명하며 더욱 강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 상자 안에 무엇이 있든, 그것은 내 아버지의 것이다. 돌려줘라."
한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면에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혈염라는 코웃음을 쳤다.
"돌려달라? 하하하! 힘없는 자에게 소유권이란 없다. 빼앗을 수 있다면 가지는 것이 강호의 이치! 네놈의 아비도 그 이치를 몰라 비참하게 죽은 것이지."
혈염라의 조롱에 한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주위의 붉은 안개마저 얼어붙게 만들었다.
"네 아비는 무력했지만, 나약하진 않았다. 그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을 뿐. 자, 그럼 네놈은 어떠한가? 아비와 같은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이 혈염라의 힘 앞에 무릎 꿇을 것인가!"
혈염라가 상자를 품에 넣고 성큼 한운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주변의 열기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지면이 움푹 패이며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력이 한운을 덮쳤다.
2. 빙천지류(氷天之流), 격류(激流)
"무명검전 제5장, 빙천지류(氷天之流)!"
한운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 더 내딛으며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진기가 거대한 물결처럼 혈염라를 향해 쇄도했다. 단순한 검기가 아니었다. 설산의 빙하수가 끓어오르며 격류를 이루는 듯한 기세였다.
콰아앙!
혈염라의 거대한 체구가 순간 뒤로 밀려났다. 그의 붉은 마기와 한운의 푸른 진기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혈염라는 비틀거렸지만 곧 중심을 잡았다. 그의 팔뚝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흥, 제법이군.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는 내 갑주조차 뚫을 수 없다!"
혈염라가 거대한 손을 휘둘렀다. 주변의 불길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한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혈해종의 무공인 '혈염화(血炎火)'였다.
한운은 물러서지 않고 단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그의 발밑에서부터 거대한 얼음 결정이 솟아올라 화염을 막아냈다. 빙천무황에게서 배운 지형 활용법이었다.
3. 노인의 등장과 혈염라의 분노
그 순간, 폐허가 된 담장 너머에서 술병을 흔드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혈염라! 젊은 놈 하나 상대한다고 그 고생을 하는 모양이군! 네놈 실력은 여전하구나!"
빙천무황이었다. 그는 혈해종의 잔당들을 모조리 정리하고 백운표국으로 합류한 것이었다. 노인의 등장에 혈염라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빙천무황! 네놈이 아직도 살아있었나! 감히 이 혈염라의 앞길을 막으려는 것이냐!"
"내가 네놈 앞길을 막은 게 어제오늘 일이더냐? 그나저나 이놈 한운이 제법이로구나. 철귀와 귀검을 상대하고도 혈염라와 대등하게 싸우다니."
빙천무황의 여유로운 모습에 혈염라는 더욱 분노했다.
"빙천무황, 네놈은 우리 종주님과 원한이 깊은 자. 감히 주제를 모르고 날뛰다간 이 자리에서 너의 목을 베어 종주님께 바치겠다!"
"늙은이 목 잘라봐야 술 한 잔 값도 안 나온다, 이놈아! 차라리 저 애송이를 잡아서 종주님께 바치는 게 낫지 않겠느냐?"
빙천무황은 한운을 도발하는 듯한 말을 던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4. 사파의 이인자, 혈염라의 진면목
"좋다! 빙천무황, 네놈과 애송이를 한 번에 갈아버리겠다!"
혈염라의 전신에서 검붉은 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의 피부는 굳건한 갑옷처럼 변했고, 근육은 불뚝불뚝 솟아올라 거대한 괴수처럼 보였다. 사파의 이인자인 혈염라가 자신의 진정한 힘을 드러낸 것이었다.
"혈해만사(血海萬邪)!"
혈염라가 손을 휘두르자, 땅에 널려 있던 표사들의 시신에서 핏빛 안개가 솟아올라 그의 주변을 감쌌다. 핏빛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움직이며 한운과 빙천무황을 향해 달려들었다. 독기가 가득한 마기는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살을 꿰뚫을 듯했다.
"흡! 늙은이 혼자서는 버겁겠구나. 한운, 저놈의 약점은 심장에 있다. 혈해만사의 진수를 쓸 때는 늘 심장을 비우는 버릇이 있지!"
빙천무황은 지팡이를 휘둘러 핏빛 안개를 쳐내며 한운에게 소리쳤다. 노인은 재빠르게 움직여 혈염라의 뒤를 노렸다. 남궁설 또한 연검을 휘둘러 핏빛 촉수들을 베어냈다.
한운은 스승의 조언을 듣자마자 단검을 고쳐 쥐었다. 혈염라의 공격은 강력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약점이 존재했다.
5. 한운의 폭주, 파로(破路)의 완성
"무명검전 제3장, 파로(破路)!"
한운의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냉기가 더욱 짙어졌다. 이번에는 주변의 냉기를 끌어모아 단검 전체를 거대한 얼음 칼날로 만들었다. 그의 눈은 투귀장에서 혈괴를 상대할 때보다 훨씬 더 차갑게 빛났다.
한운은 혈염라의 마기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돌진했다. 핏빛 촉수들이 그의 몸을 휘감으려 했지만, 한운의 단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촉수들은 얼어붙어 부서졌다.
"건방진 애송이! 감히 내 혈해만사를 뚫으려 하느냐!"
혈염라는 한운의 돌진에 당황했다. 그는 온몸의 마기를 집중하여 거대한 방어막을 형성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푸른 섬광이 밤하늘을 갈랐다. 한운의 단검이 혈염라의 방어막을 종잇장처럼 뚫고 지나갔다. 정확히 그의 심장을 겨냥한 일격이었다.
콰직!
단검이 혈염라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 얼음 칼날에서 폭발적인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혈염라의 전신이 순식간에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의 핏빛 마기가 점차 푸른 얼음으로 변해갔다.
"크으으윽... 이럴... 수가... 청운의... 힘... 이..."
혈염라는 마지막 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거대한 체구는 그대로 얼음 조각상이 되어 버렸다. 한운이 단검을 거두자, 얼음 조각상은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6. 상자 속의 진실
혈염라가 쓰러지자, 그가 품에 지니고 있던 낡은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상자는 뚜껑이 열리면서 내부의 내용물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고요?"
남궁설이 경악했다. 한운 역시 눈을 비볐다. 그토록 혈해종이 필사적으로 찾던 것이, 백운표국이 멸문한 이유가 고작 텅 빈 상자란 말인가?
"아니, 이 상자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빙천무황이 상자 앞으로 다가왔다. 노인은 상자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그러자 상자 바닥에 새겨져 있던 미세한 문양이 드러났다. 그것은 검에 대한 그림이자, 복잡한 기호들이었다.
"이것은... 청운검문의 진법이다. 그리고 이곳이 바로 그 문양의 중심."
노인의 손가락이 상자 바닥의 한 지점을 짚었다. 그러자 백운표국 연무장의 바닥이 서서히 흔들리더니, 거대한 석판이 움직이며 지하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네 아비는 여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숨겨두었다. 그리고 이 텅 빈 상자는 그 봉인을 여는 열쇠였던 게야."
7. 지하의 유산, 청운검보(靑雲劍譜)
한운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비밀 통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서늘하면서도 맑은 기운이 느껴졌다. 통로 끝에는 거대한 석실이 나타났다.
석실 중앙에는 낡은 검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한 자루의 검이 놓여 있었다. 검은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으나, 청강단검과는 다른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검대 옆에는 낡은 비단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두루마리의 표면에는 '청운검보(靑雲劍譜)'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저것이... 아버지의 검과 비급입니까?"
한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빙천무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아비의 혼이 깃든 검, 그리고 그가 평생을 바쳐 이룬 무공의 정수. 이제 네가 그것을 이을 차례다, 한운."
한운은 천천히 검대 앞으로 다가갔다. 검을 잡으려는 순간, 청강단검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러더니 검대 위의 검과 마치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8. 청운검의 부활과 혈해종의 붕괴
두 자루의 검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석실 전체가 푸른 빛으로 뒤덮였다. 청강단검은 본래 청운검의 부러진 조각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완전한 형태로 돌아온 청운검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을 내뿜었다. 검의 울림은 백운표국 전체를 넘어 낙양성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낙양성 곳곳에서 혈해종 무사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청운검의 기운은 혈해종의 마기를 억누르는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낙양의 밤을 뒤덮었던 붉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검은 그림자들이 혼란에 빠졌다.
"이것이... 청운검의 힘이군요."
남궁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무림맹이 찾던 비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한운은 합쳐진 청운검을 손에 쥐었다. 검은 그의 손에 들리자마자 마치 살아있는 듯한 따뜻한 기운을 전해왔다. 아버지의 유산이, 그의 손에서 부활한 것이었다.
"아버지... 이제 제가 아버지의 뜻을 잇겠습니다."
한운의 눈빛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소년의 불안함은 사라지고, 강한 무인의 결의가 그 자리를 채웠다. 청운검을 든 한운은 이제 강호의 새로운 전설을 쓸 준비를 마쳤다. 낙양의 새벽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제11화: 강호의 격변, 청운의 새로운 주인
낙양의 새벽은 선혈보다 붉게 타오르며 밝아왔다. 불길이 잦아든 백운표국의 지하 석실, 한운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청운검(靑雲劍)을 내려다보았다. 부러진 파편이었던 청강단검이 본체와 결합하자, 검신은 은은한 청백색 광채를 내뿜으며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검에서 전해지는 맑고 강인한 기운은 한운의 단전에 머물던 냉기와 뒤섞여 새로운 차원의 내공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1. 비급의 첫 장을 넘기다
한운은 떨리는 손으로 검대 옆에 놓인 청운검보(靑雲劍譜)를 집어 들었다. 오래된 비단지의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첫 장을 넘기자, 정갈하면서도 힘 있는 필체로 적힌 문구가 한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검은 구름을 가르고 푸른 하늘을 드러내는 도구이나, 진정한 검은 마음속의 먹구름을 먼저 걷어내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 청운의 뜻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맑은 곳에 머무는 것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무공의 구결이 아니었다. 평생을 협(俠)과 의(義)를 위해 살았던 아버지 한청운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유언이었다. 한운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자신이 이 무거운 짐을 짊어질 것을 미리 알고, 기술보다 마음을 먼저 가르치려 했던 것이다.
빙천무황은 뒤에서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애송아,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다. 그 검이 깨어났다는 건, 강호의 모든 늑대놈들이 네 위치를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특히 무림맹의 영감탱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야."
노인의 경고는 현실이었다. 석실 밖, 낙양성의 공기는 이미 무림맹과 잔존하는 사파 세력들의 기세로 뒤덮여 있었다.
2. 남궁설의 경고와 무림맹의 압박
석실 입구에서 상황을 살피던 남궁설이 다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더 어둡고 복잡해 보였다.
"한운 공자, 지금 즉시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무림맹 집행단의 본대가 낙양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혈해종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진짜 목적은 공자가 들고 있는 그 검과 비급입니다."
한운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남궁 낭자도 무림맹 소속이 아닙니까? 왜 저를 도와주는 거죠?"
남궁설은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답했다. "제 가문인 남궁가는 무림맹의 주축이지만, 이번 결정은 맹주와 몇몇 원로들의 독단입니다. 그들은 청운검문의 부활을 원치 않아요. 그저 그 힘을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쓰려 할 뿐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존경했던 한청운 대협의 유산이 그렇게 더럽혀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한운은 이미 무림의 생리를 뼈저리게 느낀 뒤였다. 정의라는 이름 뒤에 숨은 탐욕은 사파의 잔혹함보다 더 음습하고 치명적이었다.
3. 청운검보 제1초식, 운해개벽(雲海開闢)
지하 석실의 입구가 거센 진동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먼지 구름 속에서 은색 갑주를 입은 무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무림맹 최정예 집행부대인 은랑대(銀狼隊)였다. 그들의 선두에는 긴 창을 든 중년 무인, 청룡당의 장로 '철기창' 조승이 서 있었다.
"청운검문의 잔당 한운은 들어라! 맹주님의 명에 따라 너를 포박하고 문중의 비보를 회수하러 왔다. 순순히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부지해 주겠다."
조승의 목소리는 위압적이었다. 한운은 천천히 청운검의 자루를 쥐었다. 이전의 단검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감이 느껴졌지만, 기이하게도 그것은 전혀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검과 자신의 팔이 하나로 이어진 듯한 일체감이 들었다.
"이 검은 제 아버지의 목숨입니다. 그리고 이 비급은 제 가문의 역사입니다. 당신들이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구나! 그렇다면 무력으로 취할 수밖에!"
조승의 창이 번개처럼 쇄도했다. 창끝에서 뿜어져 나온 강기가 석실의 벽을 긁으며 거대한 파공음을 냈다. 한운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비급의 첫 장에 그려진 초식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
[운해개벽: 구름의 바다를 가르고 새벽을 연다.]
한운의 신형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청운검의 검신이 아름다운 원을 그리며 조승의 창기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냉기와 맑은 진기가 섞여들며 조승의 거친 창기를 순식간에 정화하고 흩어버렸다.
챙!
청운검의 끝이 조승의 창대를 가볍게 쳤다. 하지만 그 가벼운 타격에는 한운의 모든 내공이 응축된 '빙청진기(氷淸眞氣)'가 실려 있었다. 조승의 창대는 순식간에 하얗게 얼어붙으며 수천 조각으로 비산했다.
4. 고립된 영웅, 그리고 선택
조승은 경악하며 뒤로 물러났다. 은랑대원들 또한 한운의 압도적인 무위에 주춤했다. 한운은 검을 거두며 냉정하게 말했다.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길을 비키십시오."
하지만 무림맹의 집행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석실 밖에서는 더 많은 무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낙양성 전체가 한운 한 명을 가두기 위한 거대한 덫이 된 형국이었다.
빙천무황이 껄껄 웃으며 지팡이를 바닥에 쾅 찍었다. "이놈들아! 내 제자가 좀 바쁘다는데 웬 참견들이냐! 자, 애송아. 여기는 내가 좀 놀아줄 테니 너는 남궁 낭자를 데리고 서쪽 성벽을 뚫어라. 그곳에 내 친구놈이 배 한 척을 준비해뒀을 게야."
"스승님!"
"잔말 말고 가라! 이 늙은이 무공이 녹슬었는지 시험해 볼 좋은 기회 아니냐. 그리고 잊지 마라. 네 검은 이제 더 이상 숨어 지내는 짐꾼의 것이 아니다. 당당히 청운의 이름을 걸고 세상으로 나아가거라!"
한운은 스승의 결연한 뒷모습을 보며 짧게 목례를 했다. 그는 남궁설의 손을 잡고 무너진 벽 너머로 몸을 날렸다.
5. 낙양 탈출, 그리고 새로운 여정
성밖으로 나가는 길은 험난했다. 혈해종의 잔당들과 무림맹의 추격대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낙양의 거리. 한운은 청운검을 휘두르며 길을 열었다. 그의 검법은 시간이 갈수록 비급의 초식과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으나 군더더기가 없고, 부드러운 듯하나 강철도 단숨에 베어 넘기는 위력.
서쪽 낙하(洛河) 강변에 다다랐을 때, 남궁설이 멈춰 섰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한운 공자. 제가 함께 가면 무림맹은 끝까지 당신을 쫓을 핑계를 찾을 거예요. 저는 성내로 돌아가 남궁가의 이름으로 시간을 벌겠습니다."
한운은 그녀의 눈을 보았다. 거기에는 복잡한 우정과 미안함, 그리고 일말의 기대가 섞여 있었다. "고맙습니다, 남궁 낭자.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살아남으세요. 그래서 아버님이 이루지 못한 그 푸른 꿈을 꼭 보여주세요."
한운은 작은 목선에 몸을 실었다. 강물은 낙양의 비극을 뒤로한 채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멀리서 빙천무황의 기합 소리와 함께 낙양성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운은 청운검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6. 청운의 뜻, 천하를 향하다
배가 강 중심부로 접어들 무렵, 한운은 비급의 다음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직접 쓴 듯한 작은 글귀가 덧붙여져 있었다.
[운아, 강호는 넓고 너를 삼키려는 어둠은 깊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라. 가장 짙은 어둠 속에서도 검을 놓지 않는 자만이 진정한 새벽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너의 검이 향하는 곳이 곧 너의 길이 될 것이다.]
한운은 검 자루를 꽉 쥐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인 복수귀가 아니었다. 멸문당한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도 아니었다. 그는 청운검문의 주인이자, 썩어버린 강호의 질서를 다시 세울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강 저편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낙양의 불길은 이제 보이지 않았지만, 한운의 가슴속에는 그보다 더 뜨겁고 맑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이다."
한운의 선언과 함께, 청운검이 공명하듯 맑은 소리를 냈다. 그의 눈앞에는 끝없이 넓은 중원 대륙이 펼쳐져 있었다. 정파와 사파, 그리고 그 너머의 진실을 향한 한운의 대장정은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막을 올린 것이다.
제12화: 소림의 종소리, 감춰진 흑막의 그림자
낙하(洛河)의 물줄기를 따라 흘러온 목선은 며칠 후 숭산(嵩山)의 자락에 닿았다. 낙양에서의 소란은 이미 강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청운검문의 후예가 빙천무황의 제자가 되어 부활했으며, 그가 완전한 청운검과 비급을 손에 넣었다는 소문은 각 문파의 정보망을 타고 들불처럼 번졌다. 이제 한운의 일거수일투족은 천하 무림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1. 숭산의 정적과 천년의 위엄
한운은 숭산의 가파른 계단을 밟으며 올라갔다. 청운검은 이제 천에 감싸여 있었지만,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검에서 흘러나오는 맑은 기운이 주변의 산기와 어우러졌다. 그가 숭산을 찾은 이유는 명확했다. 아버지 한청운의 서신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조력자로 지목된 인물이 바로 소림사의 방장인 공공 대선사였기 때문이다.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이라면,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계실지도 몰라."
산바람이 한운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길을 오르는 동안 한운은 비급의 제2초식인 '운중산보(雲中山步)'를 끊임없이 되새겼다. 구름 속을 걷듯 가볍고 변화무쌍한 신법. 낙양성에서의 혈투를 거치며 그의 내공은 더욱 정제되어, 이제는 의념만으로도 기혈이 폭포처럼 요동쳤다.
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 웅장한 종소리가 숭산 전체를 울렸다. 뎅― 뎅―. 천년을 이어온 고찰의 종소리는 한운의 어지러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종소리 이면에는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2. 불청객, 무림맹의 그림자
소림사의 정문인 일주문 앞에는 이미 일단의 무인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은랑대보다 훨씬 더 고위직인 무림맹의 상단 집행관들이었다. 그 중심에는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 무림맹의 섭정관 중 한 명인 '천무검' 육진강이 있었다.
"청운검문의 어린 공자가 예의도 없이 사찰을 방문하다니, 참으로 대담하구나."
육진강의 목소리에는 내공이 실려 있어 주변의 나무들이 파르르 떨렸다. 한운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직시했다.
"무림맹이 이제는 소림사의 앞마당까지 점거하고 있군요. 맹주님의 욕심이 참으로 끝이 없습니다."
"말조심해라, 애송아. 우리는 네놈이 가진 그 위험한 물건이 강호의 화근이 될 것을 우려해 직접 회수하러 온 것이다. 소림의 자비로운 대사들께서도 우리의 뜻에 동의하셨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림사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황색 가사를 입은 승려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선두에 선 계율원주 원각 대사가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운 시주, 안타깝게도 지금 소림은 시주를 환영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방장 스님께서는 현재 폐관 수련 중이시며, 외부인의 출입을 일절 금하고 계십니다."
3. 소림의 변고, 뒤바뀐 진실
한운은 직감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공공 대선사가 한운을 거부할 리 없었다. 아버지가 보낸 마지막 서신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공공을 찾아가라'고 적혀 있었다.
"원각 대사님, 방장 스님께서 정말로 저를 거부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으신 것입니까?"
한운의 날카로운 질문에 육진강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어린놈이 의심만 많구나. 소림은 정파의 수장이다. 그런 곳이 무림맹과 뜻을 같이하는 것이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냐? 더 이상의 설전은 무의미하다. 아이야, 순순히 검을 내놓고 죄를 빌어라."
육진강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신에서는 금색 기운이 일렁였다. 무림맹의 최고 비기 중 하나인 '천무강기'였다. 한운은 천천히 등에 매고 있던 청운검의 자루를 잡았다. 천이 스르르 풀리며 청백색의 고결한 빛이 소림사의 일주문을 환하게 밝혔다.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진실을 가리는 안개는 베어버려야 한다고."
4. 청운검보 제2초식, 운중뇌정(雲中雷霆)
육진강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금색 강기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한운을 덮쳐왔다. 육진강은 일류 고수 중에서도 정점에 서 있는 인물. 그의 일격은 산을 쪼개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한운은 눈을 감았다. 청운검을 통해 전해지는 대지의 진동과 상대의 기 흐름을 읽었다.
'구름 속에 감춰진 벼락은 소리 없이 다가와 일순간에 만물을 정화한다.'
청운검보 제2초식, 운중뇌정(雲중雷霆).
한운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속도로 파고든 그는 육진강의 금색 강기 틈새로 검을 찔러 넣었다. 검 끝에서 푸른 전각(電角)이 일며 육진강의 강기를 분쇄했다.
콰르릉!
마치 실제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소림사를 진동시켰다. 육진강은 자신의 검기가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한운의 검은 이제 단순한 냉기가 아닌, 자연의 섭리를 담은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청운검문의 무공이 이토록 강했단 말이냐!"
5. 가짜 방장의 정체
난전 중에 소림사 안쪽에서 기괴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자비로운 불가의 기운이 아닌, 피 냄새와 마기가 섞인 탁한 기운이었다. 한운은 전투를 멈추고 소림사 내부를 바라보았다.
"방장 스님의 수련처에서 이런 마기가 느껴지다니... 무림맹, 당신들이 소림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한운의 일갈에 육진강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무언가 숨기려는 듯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소림의 승려들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 소림사 대웅전 방향에서 붉은 옷을 입은 승려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공공 대선사의 가사를 입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크크크... 청운의 씨앗이 제 발로 무덤에 들어왔구나."
원각 대사가 비명을 질렀다. "방장 스님! 어찌 그런 기운을...!"
"이자는 공공 대선사가 아닙니다!" 한운이 소리쳤다. "혈해종의 변장술, 혹은 마음을 조종하는 '혈혼술(血魂術)'에 당한 가짜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짜 방장의 신형이 팽창하더니, 거대한 혈영(血影)으로 변해 한운을 습격했다. 혈해종의 마수가 무림의 성지 소림사 깊숙한 곳까지 뻗어 있었던 것이다.
6. 무림의 어둠, 연합의 실체
육진강은 가짜 방장의 공격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운의 등 뒤를 노리며 검을 찔렀다.
"이놈, 진실을 알았으니 살려둘 수 없겠군!"
정파의 대들보라는 무림맹과 사파의 극단인 혈해종이 손을 잡고 소림을 장악하려 했던 것이다. 한운은 사방이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믿었던 정의도, 자비로운 불교의 성지도 이미 권력과 힘의 논리에 잠식되어 있었다.
"스승님 말씀이 맞았어... 강호에는 믿을 놈 하나 없구나."
한운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청운검을 거꾸로 쥐고 바닥을 강하게 찍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극저온의 진기가 반경 십 장 이내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기 시작했다.
7. 각성하는 의지, 파천(破天)의 일격
"무명검전과 청운검보의 합일, 빙천청운(氷天靑雲)!"
한운은 두 무공의 정수를 하나로 융합했다. 빙천무황에게 배운 파괴적인 냉기와 아버지의 맑은 검기가 조화를 이루며 그의 전신에서 푸른 화염이 타올랐다.
그는 먼저 가짜 방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청운검이 허공에 십자를 그었다. 핏빛 마기는 푸른 검기에 닿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정화되었다. 단 한 수. 가짜 방장의 가슴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렸고, 그 안에서 혈해종의 비기인 '혈령구(血靈珠)'가 깨져 나갔다.
뒤이어 육진강의 공격이 쏟아졌지만, 한운은 보지도 않고 검을 뒤로 휘둘렀다.
"당신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청운검의 검기가 육진강의 어깨를 관통했다. 금색 강기는 얼음처럼 부서졌고, 무림맹의 실력자 육진강은 피를 토하며 바닥에 굴렀다.
8. 드러나는 거대한 음모의 끝
가짜 방장이 사라진 자리에서 진짜 공공 대선사가 쇠사슬에 묶인 채 발견되었다. 그는 깊은 내상을 입었지만, 한운을 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한청운의 아들이구나... 네 아버지가 옳았다. 강호의 어둠은 맹주 한 명의 욕심이 아니라, 정(正)과 사(邪)가 뒤섞인 거대한 뿌리에 있었다."
공공 대선사는 품 안에서 낡은 지도 한 장을 꺼내 한운에게 건넸다.
"이것이... 네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숨기려 했던 '천하무림지도'다. 거기에는 무림맹과 혈해종이 수십 년간 결탁해온 모든 증거와, 그들이 노리는 궁극의 힘이 있는 곳이 적혀 있다. 이제 네가 이 추악한 연극을 끝내야 한다."
한운은 지도를 받아 들었다. 소림사의 종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번 종소리는 평화가 아닌, 전 무림을 향한 선전포고와 같았다.
한운은 소림사의 계단을 내려오며 숭산의 정상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그는 홀로 강호를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청운검이 있었고, 그의 곁에는 정의를 갈망하는 아버지의 의지가 함께하고 있었다.
"가겠습니다. 이 썩은 뿌리를 도려내기 위해."
한운의 발걸음은 이제 망설임이 없었다. 중원의 북쪽, 무림맹의 본산인 황궁으로 향하는 그의 등 뒤로 청운의 기세가 거대한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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