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9. 22:02ㆍ만화 애니

[제1화: 마른 하늘에 내린 핏물]
하늘은 푸르다 못해 시렸다. 산서성 태원 외곽의 작은 객잔, 삼거리 객잔의 뒷마당에서 한운은 자기 몸집보다 두 배는 큰 쌀가마니를 옮기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낡은 마포 옷은 이미 땀에 절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어이, 운이! 그것만 옮기고 점심이나 먹게."
객잔 주인인 왕 노인이 소리쳤다. 한운은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가마니를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평화롭던 정오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정적. 한운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서 붉은 점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가 아니었다. 진득하고 비릿한 냄새가 진동하는, 갓 도축한 짐승에서나 나올 법한 선혈이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엇이냐!"
왕 노인이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한운은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붉은 핏방울이 그의 눈동자에 닿는 순간, 십수 년간 봉인되어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뇌리를 난도질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불타는 저택,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 위로 유유히 걸어오던 검은 복면의 사내들. 그들의 가슴팍에 새겨진 기괴한 문양, '혈해종(血海宗)'의 낙인이 한운의 눈앞에서 환영처럼 되살아났다.
[제2화: 각성(覺醒), 뒤틀린 운명의 서막]
하늘에서 쏟아지는 핏물은 삼거리 객잔의 평상을 붉게 물들였다.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찔렀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태원의 한적한 공기를 찢어발겼다. 그러나 한운에게는 그 모든 소음이 마치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멀고 먹먹하게 느껴졌다. 그의 의식은 현재가 아닌, 십여 년 전 그 참혹했던 밤의 잔상 속으로 함몰되어 있었다.
머릿속을 헤집는 통증은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녹슨 칼날로 뇌수를 긁어내는 듯한 예리하고도 집요한 고통이었다. 한운은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윽, 아아아악!"
그의 입에서 짐승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평소 감정의 기복 없이 묵묵히 쌀가마니만 옮기던 청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좌우로 거칠게 흔들렸고, 혈관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1. 되살아난 악몽과 혈해(血海)의 그림자
기억 속에서 그는 화려한 전각의 회랑을 달리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 붉은 불길이 집어삼킨 가문의 상징, '청운검문(靑雲劍門)'의 깃발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 운아, 돌아보지 마라! 살아서, 반드시 살아서 검의 끝을 보거라!
그 마지막 외침과 함께 아버지를 꿰뚫었던 것은 검은 안개와도 같은 기운이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현실에서도 그 검은 안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핏물이 잦아든 객잔의 입구, 안개처럼 흐릿한 형체 셋이 허공을 밟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땅에 발을 붙이지 않은 채, 마치 유령처럼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흔적이 느껴지는군. 십 년 전 놓쳤던 그 미미한 씨앗의 냄새가."
가운데 서 있는 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쇠 긁는 듯한 불쾌한 음색이었으며, 가슴팍에는 기억 속의 그것과 일치하는 '혈해종'의 붉은 눈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왕 노인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 "당신들... 당신들 정체가 뭐요? 왜 이런 짓을..."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가운데 선 사내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보이지 않는 기운이 왕 노인의 목을 쳐올렸다. 왕 노인은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한 채 바닥을 굴렀다. 한운의 눈앞에서, 그를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던 노인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2. 만맥불통(萬脈不通)의 폭주
그 순간, 한운의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분노였고, 슬픔이었으며, 동시에 수천 년간 잠들어 있던 고대의 의지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혈이 뒤틀린 만맥불통의 몸으로는 진기를 운용할 수 없다. 기운이 흐를 통로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통로가 없기에 기운은 몸 전체의 세포 하나하나에 직접 스며들기 시작했다. 한운의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어라? 저 놈 봐라?"
혈해종의 무사들이 흥미롭다는 듯 멈춰 섰다. 그들 중 한 명이 비웃으며 다가왔다. "죽어가는 똥개인 줄 알았더니, 발악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절맥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사내의 손바닥에 검은 독기가 어렸다. [혈인장(血印掌)]. 맞으면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잔혹한 무공이었다. 사내의 손바닥이 한운의 가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앙!
굉음과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혈해종 무사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먼지 속에서 드러난 광경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한운은 피를 토하면서도 부러지지 않은 자세로 서 있었다. 아니, 오히려 사내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내... 내가 누군지... 이제야 알 것 같다."
한운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실리자,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마교 무사의 뼈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3. 무명검전(無名劍典)의 첫 번째 초식: [공(空)]
한운의 머릿속에 투명한 검 한 자루가 형상화되었다. 그것은 실재하는 검이 아니었다. 마음속에서 피어난 의념의 검이었다. 만맥불통의 신체는 거대한 그릇이 되었고, 주변에 흩뿌려진 핏물과 대기의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옆에 놓여 있던 낡은 빗자루 자루를 집어 들었다. 평범한 나무막대기에 불과했지만, 한운의 손에 잡히는 순간 그것은 세상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신검(神劍)의 기세를 뿜어냈다.
- 무명검전 제1장. 세상은 비어 있으나,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한운이 나무막대기를 수평으로 가볍게 그었다. 화려한 검초도, 눈부신 검기도 없었다. 그저 공기를 가르는 미세한 파동만이 일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파동이 닿는 곳마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크악!"
다가오던 사내의 상체가 비스듬히 미끄러졌다. 혈사(血絲)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절단면이었다.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무사 역시 경악하며 신법을 펼쳐 뒤로 물러났으나, 이미 그들의 가슴팍에는 깊은 검흔이 새겨져 있었다.
(확실하지 않음: 이 현상이 한운의 내공에 의한 것인지, 혹은 고대의 검의지가 발현된 것인지는 추후 수련 과정을 통해 밝혀질 것입니다.)
4. 고독한 길의 시작
혈해종의 무사들은 동료의 시신조차 챙기지 못한 채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남긴 것은 "반드시... 다시 오마..."라는 서늘한 경고뿐이었다.
정적이 찾아온 삼거리 객잔. 한운은 손에 든 나무막대기가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번의 휘두름에 나무는 버티지 못하고 바스러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투박하고 거친, 짐꾼의 손. 하지만 이제 이 손은 쌀가마니가 아닌 검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왕 노인의 시신 앞에서 한운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그는 노인을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비석도 없는 무덤이었지만, 한운은 그 앞에서 맹세했다. 자신의 가문을 멸망시키고 평범한 이들의 삶을 짓밟는 저 혈해종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노라고.
이제 태원에는 더 이상 짐꾼 한운은 없었다. 오직 부모의 원수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강호라는 거대한 바다에 몸을 던진 한 명의 검객만이 남았을 뿐이다.
한운은 객잔 구석방 깊숙이 숨겨져 있던, 아버지가 죽어가며 건네주었던 낡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녹슨 단검 한 자루와 해독할 수 없는 글귀가 적힌 비단 보자기, [무명검전]의 서문이 들어 있었다.
그는 태원의 성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지는 석양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제3화: 녹슨 단검의 진명(眞名)]
태원을 벗어나는 길목은 유난히 황량했다. 한운의 품속에는 아버지가 남긴 낡은 가죽 주머니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산길 초입에 있는 작은 정자에 멈춰 서서 주머니 속의 물건들을 꺼냈다.
녹슨 단검. 날이 무뎌질 대로 무뎌져 칼이라기보다는 뾰족한 쇳덩이에 가까웠다. 그러나 한운이 단검의 자루를 쥐는 순간, 손바닥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짐꾼으로 일하며 거칠어진 그의 손마디가 미세하게 떨렸다.
1. 봉인된 기운
그는 단검의 검신에 낀 녹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분명 겉보기에는 평범한 쇠붙이인데,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검은 녹이 허물처럼 벗겨지며 은은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 청강(靑剛).
단검의 코등이 근처에 새겨진 두 글자가 보였다. 과거 청운검문의 가주들만이 대대로 물려받았다는 보검, 청강검의 파편으로 만든 단검이었다. 한운은 아버지가 왜 이 보물을 직접 쓰지 않고 자신에게 맡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검은 사용자의 내력이 아닌, 사용자의 의지와 공명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무명검전]의 비단 보자기를 펼쳤다. 글자는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글자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먹선들이 살아서 꿈틀대며 형태를 바꿨고, 한운의 눈이 그 궤적을 쫓을 때마다 막혔던 기혈이 요동쳤다.
2. 숲속의 매복
"거기, 넙죽 엎드려 있는 놈. 가진 것 다 내놓고 목숨만은 구걸해 보겠나?"
정적을 깨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숲의 어둠 속에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혈해종의 무사들과는 격이 다른, 이 근방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산적 무리였다. 그들의 손에는 조잡한 도(刀)와 도끼가 들려 있었다.
한운은 비단을 조심스럽게 접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눈은 여전히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방금 전 비단의 글귀를 억지로 읽으려다 기혈이 뒤틀린 탓이었다.
"꺼져라."
한운의 짧은 대답에 산적 두목인 털보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이놈 보게? 보아하니 객잔 짐꾼 놈 같은데, 어디서 기어오르는 거냐? 얘들아, 저놈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라!"
산적 둘이 좌우에서 동시에 달려들었다. 한 명은 어깨를 노리고 도끼를 휘둘렀고, 다른 한 명은 하체를 겨냥해 발길질을 해왔다.
3. 무명(無名)의 궤적
한운의 눈에 그들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비쳤다. 아니, 느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도'가 선으로 보였다. 도끼가 그려낼 궤적과 발길질이 닿을 지점이 허공에 붉은 선으로 미리 그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는 단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한 걸음 옆으로 비켰을 뿐이다.
슈우욱!
도끼는 한운의 옷깃만을 스치며 허공을 가르고 땅에 박혔다. 중심을 잃은 산적의 목덜미를 한운이 단검의 자루로 가볍게 쳤다.
"커억!"
단순한 타격이었으나, 단검을 통해 전달된 만맥불통의 거친 진기가 산적의 몸속을 헤집었다. 산적은 온몸의 관절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남은 하나가 당황하여 칼을 휘둘렀지만, 한운의 손은 이미 그의 손목을 낚아채고 있었다.
우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운은 단검의 날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이미 산적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내 말을 듣지 않는군."
한운의 목소리가 정자에 낮게 깔렸다. 그는 쓰러진 산적의 가슴에 단검 끝을 가져다 댔다. 죽이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단검을 통해 자신의 몸속에서 날뛰는 제어되지 않는 기운을 배출하려는 본능적인 시도였다.
4. 뒤틀린 진기의 배출
단검의 푸른 빛이 강해졌다. 한운의 몸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열기가 단검을 타고 산적의 혈맥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아아악! 뜨거워! 제발 살려줘!"
산적은 마치 불덩이를 삼킨 듯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한운은 당혹감을 느꼈다. 자신이 의도한 것보다 훨씬 파괴적인 힘이었다. 만맥불통의 신체는 기운을 저장할 수는 없지만, 외부의 기운을 받아들여 순식간에 증폭시켜 내뱉는 '폭발적인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주변의 산적들이 겁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운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바닥을 펴 보았다. 검은 연기가 손등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5. 길을 묻는 자
산적들이 떠난 자리에 정적이 찾아왔다. 한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자 기둥에 기대앉았다. 단 한 번의 짧은 교전이었음에도 온몸의 진액이 다 빠져나간 듯한 탈력감이 몰려왔다.
"기이하군. 절맥의 몸으로 그런 기운을 내뿜다니."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운은 반사적으로 단검을 치켜들며 위를 보았다. 정자의 지붕 위, 삿갓을 깊게 눌러쓴 노인이 술병을 손에 든 채 다리를 까닥이고 있었다.
노인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한운의 경계 어린 눈빛에도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애송아, 그 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 검에 깃든 원한이 네 뒤틀린 혈맥을 먼저 태워버릴 게야."
노인이 지붕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낙엽 한 장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완벽한 신법이었다. 한운은 직감했다. 이 노인은 방금 전의 산적들이나 혈해종의 조무래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괴물이라는 것을.
"당신은 누구지?"
한운의 물음에 노인이 삿갓을 슬쩍 들어 올렸다. 외눈박이 노인의 눈동자에는 만년 한설보다 차가운 안광이 서려 있었다.
"죽어가는 놈의 이름을 알아서 뭐 하겠느냐. 그저 길 잃은 개새끼 한 마리가 제 꼬리를 물어뜯으려 하기에 참견 좀 해본 것이지."
노인은 한운에게 다가와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한운이 반항할 틈도 없었다. 노인의 손가락이 한운의 맥문을 짚는 순간, 얼음물 같은 기운이 한운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허어, 이놈 봐라. 만맥불통이 아니라... 이건 '천막불통(天幕不通)'이 아닌가?"
노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스쳤다.
[제4화: 하늘을 가린 그릇]
노인의 손가락을 통해 들어온 냉기는 한운의 뒤틀린 기혈을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마치 수천 개의 얼음 송곳이 혈관을 타고 뇌를 찌르는 듯한 고통에 한운의 전신이 떨렸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고통 끝에는 기분 좋은 청량감이 뒤따랐다. 들끓던 열기가 가라앉고, 시야가 맑아졌다.
"천막불통이라니,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한운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노인은 삿갓을 고쳐 쓰며 껄껄 웃었다.
"하늘이 너를 버린 줄 알았더냐? 아니, 하늘이 너라는 그릇을 감당하지 못해 뚜껑을 덮어버린 것이다. 네 놈의 몸 안에는 거대한 바다가 들어있는데, 물길이 죄다 막혀 있으니 그 물이 썩어 문드러지거나 제 살을 깎아 먹고 있었던 게지."
노인은 술병을 내밀었다. 한운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독주가 노인의 냉기와 충돌하며 몸 안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그럼 저는 평생 무공을 익힐 수 없는 겁니까?"
"무공? 남들이 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안 되지. 남들이 시냇물을 끌어다 농사를 지을 때, 너는 제방을 무너뜨려 홍수를 일으켜야 한다. 제 몸이 부서질 각오로 그 뚜껑을 조금씩 열어야 한다는 소리다."
노인은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기괴한 선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까 한운이 보았던 [무명검전]의 비단 보자기 속 문양들과 닮아 있었다.
"내가 지금부터 보여주는 동작을 잘 봐라. 이건 무공이 아니다. 네 몸 안에 갇힌 홍수를 길들이는 법이다."
노인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화려한 신법도, 강맹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기괴한 춤사위 같았다. 팔을 비틀고 다리를 꼬며, 때로는 짐승처럼 바닥을 기는 동작들. 하지만 한운의 눈에는 보였다. 노인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굴절되고, 대지의 기운이 노인의 발끝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한운은 홀린 듯 노인의 동작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팔 하나 올리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뒤틀린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가 정자에 울려 퍼졌다.
"멈추지 마라! 네 몸속의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노인의 갈성(喝聲)이 한운의 귓가를 때렸다. 한운은 입술을 깨물며 동작을 이어갔다. 한 번, 두 번... 반복될수록 고통은 무뎌졌고, 대신 손끝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찌릿한 감각이 살아났다.
그때였다. 숲의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안광이 번뜩였다.
산적들을 쫓아내고 평화가 찾아온 줄 알았던 정자 주변으로, 이번에는 늑대 무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평범한 늑대가 아니었다. 놈들의 눈은 핏빛으로 충전되어 있었고, 입에서는 검은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흥, 혈해종의 똥개들이 벌써 추격귀(追擊鬼)들을 풀었구나."
노인이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꼈다.
"애송아, 배운 걸 바로 써먹을 기회다. 네 놈의 그 녹슨 칼을 뽑아라. 그리고 네 몸속에 가득 찬 그 썩은 물을 저 짐승들에게 쏟아부어."
한운은 청강단검을 고쳐 잡았다. 노인이 가르쳐준 기괴한 호흡법을 펼치자, 막혀 있던 맥륜이 진동하며 단검의 푸른 날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굶주린 늑대 한 마리가 허공을 갈라 한운의 목덜미를 노리고 도약했다. 한운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노인의 춤사위 중 하나였던, 상체를 뒤트는 동작과 함께 단검을 수직으로 치켜올렸다.
파앗!
단검의 끝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검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늑대를 짓눌러버리는 듯한 압도적인 중압감이었다.
"끼잉!"
단검에 닿기도 전, 늑대의 몸은 허공에서 으깨져 바닥으로 처박혔다. 한운 자신도 놀란 표정이었다. 살상(殺傷)을 목적으로 한 휘두름이 아니었음에도, 단검을 통해 배출된 기운은 주변의 공간 자체를 뒤틀어버린 것이다.
"좋다! 그게 바로 천막을 찢는 첫 번째 구멍이다!"
노인이 파안대소하며 술병을 허공으로 던졌다.
한운은 몰려드는 늑대 무리를 향해 단검을 겨누었다. 이제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다. 십 년 넘게 자신을 짓눌러왔던 절맥이라는 저주가, 이제는 세상을 베어 넘길 가장 날카로운 칼날로 변하고 있었다.
어두운 산길, 청강단검의 푸른 빛이 늑대들의 붉은 안광을 하나둘씩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강호라는 거대한 전장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르고 있었다.
[제5화: 만각(萬覺)의 눈, 핏빛 숲의 혈투]
청강단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이 정자의 지붕까지 닿을 듯이 치솟았다. 늑대들의 사체가 바닥에 뒹굴었지만, 숲의 어둠은 오히려 더 짙어졌다. 수십 마리의 늑대 무리 뒤편에서, 기괴한 피리 소리가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 띠리리, 띠리릭.
소름 끼치는 곡조가 들릴 때마다 죽었던 늑대들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놈들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오직 살육만을 위해 박제된 기운이 그들의 근육을 강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시해(屍骸)들이군. 혈해종 놈들이 조무래기 무사 대신 귀도(鬼道)를 익힌 술사를 보낸 모양이다."
노인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직접 나설 기색이 없었다. 한운은 단검을 꽉 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진동이 아까보다 훨씬 거칠어졌다. 노인이 가르쳐준 호흡을 반복할수록,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용암이 역류하는 것 같았다.
1. 흐름을 읽는 감각
한운은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감았음에도 세상이 보였다. 그것은 시각이 아닌, 피부로 느껴지는 '진동의 지도'였다.
피리 소리가 공기를 흔드는 파형, 늑대들이 바닥을 긁는 미세한 마찰음, 그리고 숲속 깊은 곳에서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술사의 심장 박동까지. 만맥불통의 그릇이 외부의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빨아들이며 생겨난 기현상이었다.
"온다."
한운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늑대 네 마리가 동서남북에서 동시에 달려들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검을 휘둘러 쳐내겠지만, 한운은 기괴한 보법을 밟았다. 노인에게 배운 춤사위였다. 그의 몸이 채찍처럼 유연하게 휘어지며 늑대들의 사이를 물 흐르듯 빠져나갔다.
스각!
스치는 찰나, 청강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날이 늑대의 목을 벤 것이 아니었다. 단검에서 뿜어진 예리한 기운의 파동이 늑대의 몸속에 흐르는 피리의 마력을 끊어버렸다. 기운이 차단된 늑대들은 공중에서 힘없이 고꾸라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2. 그림자 속의 술사
"이... 이럴 수가! 일개 짐꾼 놈이 어떻게 나의 '혈랑진(血狼陣)'을 파훼한단 말이냐!"
숲속에서 경악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피리 소리가 급박해지더니, 나무들 사이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튀어나왔다. 그의 손에는 뼈로 만든 기괴한 피리가 들려 있었고, 얼굴 절반은 흉측한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혈해종의 하급 술사, 모용휘였다. 그는 자신의 비기가 무력화되자 당황하여 소매 안에서 수십 개의 독침을 비산시켰다.
"죽어라, 이 벌레 같은 놈!"
검은 독침들이 한운의 전신을 노리고 쏘아져 왔다. 한운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단검을 거꾸로 쥐고 바닥을 강하게 찍었다.
콰콰쾅!
한운의 발밑에서부터 대지가 융기하며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만맥불통의 신체에 갇혀 있던 폭발적인 기운이 단검이라는 도구를 통해 땅으로 배출된 것이다. 날아오던 독침들은 그 충격파에 휘말려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모용휘 역시 그 여파에 밀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3. 단검의 진가
한운은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그의 움직임은 이제 짐꾼의 것이 아니었다. 사냥감을 쫓는 매처럼 신속하고 정확했다.
모용휘는 공포에 질려 품속에서 단환을 꺼내 터뜨리려 했다. 연막을 피워 도망치려는 속셈이었으나, 한운의 단검이 더 빨랐다.
서걱.
청강단검의 푸른 날이 모용휘의 어깨를 뀄다. 날카로운 비명이 숲을 울렸다. 한운은 단검을 비틀며 차갑게 물었다.
"십 년 전, 청운검문을 멸문시킨 자가 누구냐. 혈해종의 종주는 지금 어디에 있지?"
모용휘는 피를 토하며 히죽거렸다. "크크... 이제 와서 그것을 알아서 무엇 하느냐. 너는 이미 사냥개들의 표적이 되었다. 종주님께서는... 너의 그 뒤틀린 육신을 가장 탐내고 계시지. 너는 인간이 아니라, 그분을 위한 가장 완벽한 '제물'이다!"
말을 마친 모용휘의 몸이 급격히 부풀어 올랐다. 자폭하려는 의도였다.
"치잇!"
한운이 급히 발로 그를 차 멀리 보냈으나, 노인이 더 빨랐다. 노인은 어느새 한운의 곁으로 다가와 모용휘의 정수리를 가볍게 눌렀다.
푸쉬쉭.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팽창하던 모용휘의 몸이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노인의 손끝에서 시작된 빙한의 기운이 모용휘의 전신을 얼려버린 것이다.
"정보를 얻으려면 곱게 죽여야지, 이렇게 터뜨리게 놔두면 되느냐."
노인이 무심하게 말했다. 얼어붙은 모용휘는 그대로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4. 새로운 동행
전투가 끝난 숲에는 다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운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검을 쥔 손은 피로 범벅되어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가슴 속은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처럼 맑았다.
"노인장, 아까 저를 제물이라 부르던 자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한운의 물음에 노인은 삿갓 아래로 날카로운 안광을 번뜩였다.
"말 그대로다. 천막불통의 육신은 만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물(奇物)이지. 그 안에는 무한한 기운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만약 누군가 네 영혼을 뽑아내고 그 빈 껍데기를 차지한다면, 그는 신선도, 악마도 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겠지."
한운의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살아온 고통스러운 세월이 누군가에게는 탐스러운 먹잇감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들이 나를 노린다면, 저 역시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씌운 천막을 찢고, 그들의 목을 멜 것입니다."
"허허, 배포 하나는 마음에 드는구나. 하지만 지금의 네 실력으로는 혈해종의 문턱도 넘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할 게다."
노인은 술병을 허리춤에 차고는 숲의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내 술이 떨어졌으니 술을 채우러 가야지. 그리고 네 놈의 그 엉성한 춤사위를 제대로 된 무공으로 다듬어줄 곳이 그쪽에 있기도 하고."
한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노인의 뒤를 따랐다.
"이름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노인은 대답 대신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허공에 휘둘렀다. 숲의 거대한 고목들이 노인의 휘두름 한 번에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이 만들어졌다.
"빙천무황(氷天武皇). 강호에서는 그렇게 부르더군. 하지만 지금은 그저 술 좋아하는 늙은이일 뿐이다."
무황.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대자의 이름이었다. 한운은 아버지가 유품과 함께 자신을 이 산길로 보낸 이유를 깨달았다. 우연처럼 만난 이 노인은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믿었던 유일한 구원이었다.
새벽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숲길을 따라,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한운의 품속에 있는 [무명검전]의 비단 보자기에서 미세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주인의 성장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검전의 글귀들이 푸른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제6화: 빙해(氷海)의 수련, 한계를 부수다]
빙천무황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험준한 산맥을 평지처럼 걸어갔고, 한운은 그 뒤를 쫓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만맥불통의 몸이 주는 무게감은 여전했지만, 노인이 가르쳐준 기괴한 호흡법을 반복할수록 다리에 실리는 힘이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태원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이름 없는 설산의 동굴이었다. 동굴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살을 에이는 듯한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진기로 몸을 보호해야 할 수준의 냉기였다.
"여기서 멈춰라."
노인이 동굴 중앙의 거대한 빙판 위를 가리켰다. 빙판 아래로는 시퍼런 강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1. 차가운 지옥에서의 정좌
"옷을 벗고 저 빙판 위에 앉아라. 그리고 내가 가르쳐준 춤사위의 호흡을 유지해."
한운은 망설임 없이 상의를 벗어 던지고 얼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엉덩이가 닿는 순간, 전신이 마비될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만년 한설의 기운이 모공을 타고 들어와 뼛속까지 얼려버릴 기세였다.
"네 몸속의 바다는 너무 뜨겁고 거칠다. 외부의 극심한 한기로 그 바다를 억눌러라. 밖에서 누르고 안에서 팽창할 때, 비로소 네 혈맥을 덮고 있는 그 지독한 천막에 균열이 갈 것이다."
노인은 동굴 구석에 앉아 술을 들이키며 무심하게 말했다.
한운은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이가 덜덜 떨리고 의식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가 밀려오는 순간, 그는 필사적으로 [무명검전]의 첫 구절을 떠올렸다.
- 세상은 비어 있으나,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비우려 노력했다. 추위를 밀어내려 하지 않고, 오히려 한기를 몸 안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들이마신 차가운 공기가 폐를 얼리고, 뒤틀린 혈맥을 타고 내려가 단전 부근에 웅크리고 있던 뜨거운 기운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르르!
한운의 몸 내부에서 보이지 않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뜨거운 양기와 차가운 음기가 충돌하며 발생하는 거대한 에너지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막힌 기혈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커헉!"
한운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그 피는 빙판에 닿자마자 얼어붙어 보석처럼 빛났다.
2. 균열과 각성
고통의 극점(極點)에 도달했을 때, 한운은 기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평생 자신을 옥죄고 있던 거대한 사슬 하나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의 등 뒤로 은은한 청백색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노인이 가르쳐준 보법과 수신(手身)의 동작들이 머릿속에서 수천 번, 수만 번 반복해서 돌아갔다. 어느 순간, 한운은 자신이 앉아 있는 빙판과 흐르는 지하수, 그리고 동굴을 채운 공기와 하나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이것이... 길인가."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푸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청강단검을 잡았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무겁게만 느껴졌던 단검이 마치 자신의 손가락 연장선인 것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그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손목을 살짝 비틀었을 뿐이다.
치리릭!
한운의 주변 3장(丈) 내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수천 개의 얼음 파편으로 화했다. 검기가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 배출된 뒤틀린 기운이 주변의 수분을 응결시켜 무기로 바꾼 것이었다.
"이제야 사람 꼴을 갖췄구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에는 흐뭇함과 동시에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3. 찾아온 불청객
그때, 동굴 밖에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진동이 전해졌다.
"무황 선배님! 후학들이 인사를 올리러 왔습니다! 숨어 계시지 말고 나오시지요!"
당당하면서도 오만한 목소리가 동굴 내부를 울렸다. 빙천무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쯧, 정파 놈들의 콧대 높은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는군. 무림맹의 사냥개들이 벌써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한운은 단검을 집어넣고 옷을 챙겨 입었다.
"정파라면... 저희의 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흥, 강호에 완전한 아군이 어디 있더냐. 특히 네 놈 같은 천막불통을 발견한다면, 저들은 너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평생 지하 감옥에 가두고 연구하려 들 게다. 혈해종이 너를 제물로 삼으려 한다면, 저들은 너를 병기로 삼으려 하지."
노인은 한운의 어깨를 툭 쳤다.
"나가자. 네 놈의 그 억울한 팔자가 얼마나 잘 닦였는지 확인할 좋은 기회다."
동굴 밖으로 나가자, 설원의 하얀 배경 위로 푸른 도포를 입은 무인 수십 명이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화려한 장식이 달린 검을 든 미청년 한 명이 오만한 자세로 서 있었다.
"청운검문의 유산과 무황의 신물을 내놓으시지. 그럼 목숨만은 보존해 주겠소."
청년의 가슴에는 무림맹 산하 '청룡당'의 문양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한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십 년 전 가문이 멸망하던 날, 무림맹은 도움을 청하는 아버지의 서신을 묵살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유산을 내놓으라며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한운은 천천히 청강단검을 뽑아 들었다. 설산의 찬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휘날렸다.
"가문의 유산은 줄 수 없다. 목숨이 아깝다면 물러가라."
한운의 목소리에는 예전의 떨림이 없었다. 빙해의 수련을 거친 그의 목소리는 대지를 얼릴 듯 차갑고 견고했다.
4. 청룡의 발톱 vs 무명의 검
"방자하구나! 일개 평민 놈이 감히 무림맹의 명을 거역해?"
청룡당의 소당주, 진백천이 격노하며 검을 뽑았다. 그의 검 끝에서 푸른 검강(劍剛)이 솟구쳤다. 명문의 정종 무공다운 깨끗하고 강렬한 기운이었다.
"청룡출해(靑龍出海)!"
진백천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순식간에 한운의 심장을 노리고 쇄도했다. 수십 갈래의 검 그림자가 한운을 덮쳤다. 주변의 무인들은 한운의 죽음을 예견한 듯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한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검 그림자 속에서 오직 하나의 '진실된 선'을 보았다. 노인과 수련하며 익힌, 기운의 흐름을 읽는 감각이었다.
깡!
맑은 쇳소리가 설원에 울려 퍼졌다.
한운의 단검이 진백천의 보검 측면을 정확히 때렸다.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단검을 통해 전달된 극저온의 진기가 진백천의 검에 맺힌 검강을 그 자리에서 얼려버렸다.
"뭐... 뭐라고?!"
진백천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자랑이던 검강이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한운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한 걸음 내디디며 단검의 자루로 진백천의 복부를 가격했다.
퍽!
진백천의 몸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뒤로 수십 장을 날아갔다. 설산의 눈더미에 처박힌 그는 신음조차 내뱉지 못하고 기절했다.
주변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무림맹의 정예 무사들이 단 한 수 만에 패배했다는 사실을 누구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말했을 텐데. 물러가라고."
한운이 단검을 털어내자, 검날에 묻어 있던 서리가 흩날렸다. 그의 등 뒤로 빙천무황이 껄껄 웃으며 걸어 나왔다.
"자, 이제 시작이다. 정파와 사파, 그리고 혈해종까지. 이제 온 무림이 너를 탐내게 될 게야. 준비됐느냐, 애송아?"
한운은 대답 대신 먼 산 너머, 자신의 가문이 있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제 복수는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그의 손안에서 차갑게 박동하는 청강단검이 그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제7화: 암운(暗雲)의 무시장, 보이지 않는 칼날]
설산에서의 교전은 강호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무림맹 청룡당의 소당주가 이름 없는 신예에게 단 한 수에 패했다는 소식은 정보 단체들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빙천무황은 한운을 데리고 설산을 내려와 중원의 심장부와 가까운 대도시, 낙양(洛陽) 인근의 무시장으로 향했다.
무시장은 정파의 법도도, 사파의 잔혹함도 통하지 않는 무법지대이자 거대한 암시장이다. 그곳은 오직 힘과 금전만이 진리인 곳이었고, 빙천무황은 한운에게 실전의 비정함을 가르치기에 그곳보다 적합한 장소는 없다고 판단했다.
1. 그림자의 도시
낙양 외곽, 폐허가 된 사찰의 지하로 연결된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지하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에는 수만 개의 야광주가 박혀 있어 낮처럼 환했지만, 그 빛은 어딘지 모르게 음습하고 창백했다.
"여기서부터는 네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한다. 나는 술이나 좀 구하러 가마."
노인은 한운에게 낡은 철패(鐵牌) 하나를 던져주고는 군중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한운은 홀로 남겨졌다. 그의 등 뒤에는 천으로 감싼 청강단검이 묵직하게 매여 있었다.
무시장의 거리는 기괴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전설적인 영물의 내단이라고 주장하는 상인들부터, 사람의 목숨을 사고파는 암살 의뢰소까지. 한운은 노인이 준 철패를 만지작거리며 걷다가, 유독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 앞에 멈춰 섰다.
2. 혈투의 무대, 투귀장(鬪鬼場)
그곳은 '투귀장'이라 불리는 지하 결투장이었다. 돈을 걸고 무인들이 생사를 겨루는 곳. 한운이 그곳에 시선을 멈춘 이유는 경기장 안에서 풍겨오는 익숙한 기운 때문이었다.
"혈해종의 기운이다."
한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경기장 중앙, 온몸에 쇠사슬을 감은 거구의 사내가 상대방의 목을 무자비하게 비틀어 죽이고 있었다. 사내의 가슴에는 혈해종의 말단 무사들이 새기는 핏빛 눈 문양이 선명했다.
"자! 오늘의 승자, '혈괴'에게 도전할 자가 더 없는가! 승리한다면 판돈의 열 배와 함께 희귀한 무공 비급을 얻을 수 있다!"
사회자의 외침에도 사람들은 선뜻 나서지 못했다. 혈괴의 잔혹한 살수(殺手)에 이미 세 명의 무인이 시체가 되어 끌려 나갔기 때문이었다.
한운은 군중을 헤치고 나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신중했으나 망설임은 없었다.
"내가 나가겠다."
좌중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짐꾼처럼 보이는 투박한 차림의 청년이 나서자, 사람들은 비웃음을 터뜨렸다.
"어이, 애송아!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 저놈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다!"
한운은 사람들의 야유를 뒤로하고 경기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혈괴라고 불리는 사내는 피비린내 나는 숨을 몰아쉬며 한운을 노려보았다.
3. 폭주하는 본능
"또 한 놈의 먹잇감이 왔군. 네 뼈마디를 하나하나 분질러주마."
혈괴가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의 공격은 정교하지 않았으나, 혈해종 특유의 탁한 마기가 실려 있어 스치는 것만으로도 장기를 부식시킬 만큼 위협적이었다.
한운은 청강단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빈손으로 혈괴의 공격 궤적을 파고들었다. 설산의 빙해 수련을 통해 익힌 '흐름의 감각'이 극대화되어 있었다.
슈우욱!
거대한 도끼날이 한운의 뺨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갔다. 한운은 상체를 낮추며 혈괴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그의 명치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 무명검전 제2장. 흐르지 않는 것은 썩으나, 갇힌 것은 폭발한다.
한운의 몸속에 갇혀 있던 천막불통의 기운이 손바닥을 통해 배출되었다. 내공의 형태가 아닌, 순수한 압력의 파동이었다.
콰아앙!
강철 같은 혈괴의 가슴팍이 움푹 패이며 뒤로 튕겨 나갔다. 사슬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혈괴는 경기장 벽면에 처박혔다. 관중석에서는 경악 섞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4. 드러나는 배후
하지만 혈괴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붉은 알약을 꺼내 삼켰다. [혈신단(血神丹)]. 잠시 동안 고통을 잊고 공력을 세 배 이상 폭증시키는 혈해종의 금기된 약물이었다.
"크아아악!"
혈괴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르며 피부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검게 변했고, 전신에서는 검붉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이제 그는 이성을 잃은 괴수나 다름없었다.
"이것 봐라, 저놈 약까지 먹었어! 무시장이 발칵 뒤집히겠군!"
사람들이 동요하며 뒤로 물러났으나, 한운은 오히려 단검의 자루를 고쳐 쥐었다.
"제대로 된 괴물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군."
한운의 전신에서 서늘한 냉기가 피어올랐다. 빙천무황에게 배운 빙령보(氷靈步)가 펼쳐졌다. 그의 신형이 수십 개로 나뉘는 듯하더니, 혈괴의 사방에서 푸른 잔상이 일었다.
폭주한 혈괴가 허공에 대고 도끼를 난사했으나, 한운의 본신은 이미 그의 등 뒤에 있었다.
"끝이다."
청강단검의 푸른 날이 혈괴의 목 뒷덜미를 가볍게 스쳤다. 화려한 초식은 없었다. 단지 가장 효율적이고 치명적인 궤적을 따라 검 끝이 지나갔을 뿐이다.
순간, 혈괴의 전신이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단검을 통해 주입된 극저온의 진기가 혈신단으로 달아오른 혈괴의 혈맥을 순식간에 동결시켜 버린 것이다.
쩌적, 쩌적.
거구의 혈괴는 얼음 조각상이 되어 우뚝 멈춰 섰다. 한운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자, 얼어붙은 괴물은 수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바닥에 흩어졌다.
5. 보이지 않는 감시자
승리의 정적이 찾아온 투귀장 상층부, 화려한 발(簾)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한 여인이 부채를 접었다.
"흥미롭군. 빙천무황의 제자인가, 아니면 청운검문의 망령인가."
여인의 옆에는 무림맹의 복장을 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당주님, 저 소년이 들고 있는 단검... 분명 청강검의 조각입니다. 지금 당장 포획할까요?"
"아니, 아직은 때가 아니다. 혈해종 놈들도 저 아이를 노리고 있으니, 우리는 그들이 서로 물고 뜯게 놔둔 뒤에 과실만 챙기면 된다. 무시장의 정보꾼들에게 전해라. 저 소년의 머리에 현상금을 걸되, 죽이지는 말라고."
여인의 서늘한 명령과 함께 무시장의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한운을 향해 고정되었다.
한운은 경기장을 내려오며 느꼈다. 자신을 향한 시선들이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이제 그는 숨어 지낼 수 있는 짐꾼이 아니었다. 강호라는 거대한 판 위에 던져진 가장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말이 된 것이다.
멀리서 노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놈, 판돈을 꽤 벌었겠구나! 오늘 술값은 네가 내라!"
한운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가 보여주려 했던 강호의 진정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핏빛으로 물든 잔혹한 전장이었으나,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제8화: 낙양의 밤, 붉은 유혹과 검은 그림자]
투귀장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독이 든 성배와 같았다. 한운이 결투장을 빠져나올 때, 수만 개의 시선이 그의 등 뒤를 찔렀다. 탐욕, 경외, 그리고 살의가 뒤섞인 무시장의 공기는 방금 전보다 훨씬 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빙천무황은 어느새 나타나 한운의 옆에서 건들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품 안에서 육포 한 점을 꺼내 씹으며 낮게 읊조렸다.
"애송아, 뒤는 돌아보지 마라. 지금 네 뒤를 밟는 놈들이 서른 명은 넘는다. 그중 셋은 숨소리조차 지운 일류 살수들이야."
한운은 청강단검을 감싼 천 위로 손을 올렸다. 단검의 서늘한 기운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며 폭주하려던 심장 박동을 차갑게 가라앉혀 주었다.
1. 매향루(梅香樓)의 초대
무시장의 깊숙한 골목, 화려한 홍등이 밝혀진 거대한 누각 하나가 앞을 가로막았다. 낙양 최대의 기루이자 정보의 집결지인 매향루였다. 입구에는 붉은 비단 옷을 입은 여인들이 서 있었고, 그들 사이로 은은한 향사(香蛇) 냄새가 흘러나왔다.
"어머, 오늘 투귀장을 뒤흔든 영웅께서 오셨네요."
한 여인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다가왔다. 그녀의 눈매는 여우처럼 가늘었고, 몸짓 하나하나에는 고도로 훈련된 유혹의 기술이 배어 있었다.
"우리 주인님께서 귀한 손님을 모셔오라고 명하셨습니다. 빙천무황 어르신도 함께하시지요."
노인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실쭉 웃었다. "매향루의 죽엽청이 일품이지. 마침 목이 칼칼하던 참인데 잘됐구나."
한운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으나, 노인의 태평한 모습에 일단 걸음을 옮겼다. 누각 3층, 가장 깊숙한 방에 들어서자 은은한 가야금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에는 아까 발 뒤에서 결투를 지켜보던 그 여인이 앉아 있었다.
2. 무림맹의 여우, 남궁설
"청운검문의 후예를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무림맹 소속, 남궁가의 남궁설이라고 합니다."
여인은 우아하게 차를 따르며 자신을 소개했다. 남궁가. 오대세가 중에서도 검법으로 으뜸이라는 명문가였다. 한운은 그녀가 내미는 찻잔을 받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무림맹이 청운검문의 유산에 관심이 많다는 건 설산에서 이미 확인했습니다. 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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