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틈새를 흐르는 잉크

2025. 12. 30. 08:45만화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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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틈새를 흐르는 잉크

새싹이 돋아난 화단 너머로 지평선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도진과 서윤이 머무는 이 작은 집은 이제 백지 세계의 중심이 되어 있었지만,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하늘 위로 거대한 균열이 생기더니, 그 틈새로 검은 액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윤이 버렸던 만년필에서 흘러나온 잉크가 아니었다.

"서윤 씨, 저건..."

도진이 가리킨 곳을 본 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쏟아지는 액체는 글자가 되어 공중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영원한 안식', '완성된 사랑'. 그것은 소설의 결말을 강요하는 죽은 문장들의 잔해였다.

이야기를 끝맺지 않고 도망쳐 나온 서윤을 쫓아, 소설의 관성이 이 세계까지 추적해온 것이다. 결말이라는 이름의 파도는 집 주변의 평원을 삼키며 모든 것을 인쇄된 종이처럼 빳빳하게 굳히기 시작했다.

"나의 의지로 끝내지 않으면, 이 세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침표가 되어버릴 거예요."

서윤은 화단의 흙을 움켜쥐었다. 손톱 밑으로 들어오는 흙의 감촉이 점점 희미해졌다. 잉크 폭포가 닿는 곳마다 생동감 넘치던 색채는 사라지고, 무미건조한 텍스트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도진의 발치에도 이미 '그는 그녀의 곁에서 미소 지었다'라는 문장이 새겨지며 그의 움직임을 구속하고 있었다.

서윤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 주방 칼로 자신의 팔목을 살짝 그었다.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그녀는 잉크 대신 자신의 피를 손가락에 묻혀, 굳어가는 벽면에 문장을 휘갈겼다.

'우리의 삶은 읽히기 위한 것이 아니기에, 누구도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피로 쓴 문장은 잉크 파도와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소설의 법칙과 생존의 의지가 맞붙는 굉음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서윤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벽면을 가득 채우며, 자신들이 겪어온 지루한 반복과 고통, 그리고 이름 없는 조연들의 슬픔을 하나하나 기록해 나갔다.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증언하는 것이었다.

"도진 씨, 손을 잡아요! 우리가 문장 속에 갇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문장이 되어 이 파도를 타고 넘어야 해요!"

도진이 서윤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의 체온이 섞이며 붉은 피의 문장들은 황금색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잉크 파도는 그 빛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고, 결말을 강요하던 문장들은 낱글자가 되어 흩어졌다.

어느덧 소음이 잦아들었을 때, 세상은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백지도, 잉크의 늪도 아니었다. 집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의 앞에는 수천 개의 갈래 길이 나 있었다.

어떤 길은 가시밭길이었고, 어떤 길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길들은 소설처럼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왼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가다가 멈춰 서서 평생 꽃을 심을 수도 있는, 오로지 걷는 자의 마음대로 바뀌는 유동적인 길이었다.

서윤은 자신의 팔목에 남은 흉터를 어루만졌다.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리셋되지 않는 세계에서 상처는 곧 역사였고, 지워지지 않는 유일한 훈장이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도진이 물었다.

"어디든요. 우리가 멈추는 곳이 길의 시작이 될 테니까."

두 사람은 가장 어두워 보이는 길을 선택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더 이상 문장이 남지 않았다. 오로지 젖은 흙냄새와 두 사람의 나란한 발자국만이 남았을 뿐이다.

저 멀리서, 정해진 6시의 종소리가 아닌, 누군가 제멋대로 흔드는 자유로운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제12장: 소음의 바다

수천 갈래의 길 중 가장 어두운 곳을 선택해 걷던 두 사람의 귓가에 정체불명의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물의 소리가 아니었다. 수만 개의 활자가 부딪히며 내는 서늘한 마찰음이었다.

길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잉크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다였다. 수면 위에는 버려진 단어들과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이 부유물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누군가 쓰다 만 고백들이 파도에 휩쓸려 모래사장에 처박혔고, 주인을 잃은 이름들이 거품이 되어 스러졌다.

"이곳은 세상 모든 소설이 끝맺지 못한 파편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서윤은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수면 근처로 다가온 파도는 '영원히', '비극적인', '그러나' 같은 단어들을 토해내며 그녀의 발목을 적셨다. 리셋되던 세계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이야기가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낡은 종이배 한 척이 나타났다. 그 배 위에는 한 노인이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낚아 올리는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물속에서 번뜩이는 문장들이었다. 노인은 낚아 올린 문장들을 하나하나 읽어본 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시 바다로 던져 넣었다.

"누구시죠?" 도진이 외쳤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인쇄용지가 겹쳐진 것처럼 주름져 있었고, 눈동자는 잉크병처럼 깊고 검었다.

"나는 잊힌 마침표를 줍는 자다. 너희들처럼 소설 밖으로 도망친 무모한 자들이 흘리고 간 삶의 잔해들을 정리하지."

노인이 낚싯대를 크게 휘두르자 바다 밑바닥에서 거대한 문장 하나가 올라왔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으나 결국 잊기로 했다.] 노인은 그 문장을 서윤의 발 앞에 던졌다.

"이것이 너희가 카페에서 흘리고 온 결말 중 하나다. 너희가 선택하지 않은 수만 가지의 미래가 이 바다에서 썩어가고 있어. 너희가 걷는 매 걸음마다, 이런 버려진 세계들이 생겨난다는 걸 알고 있나?"

서윤은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비극적인 문장을 내려다보았다. 잉크가 묻은 발목이 무거워졌다. 리셋이 없는 삶이란,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가능성을 죽이며 나아가는 잔인한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돌아가진 않을 거예요."

서윤은 노인이 던진 문장을 짓밟았다. 밟힌 활자들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그 자리에 서윤의 체온이 닿자 이름 모를 잡초가 돋아났다.

"우리가 버린 미래들이 아프더라도,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진짜 고통을 택하겠어요. 썩어가는 문장들보다 살아있는 침묵이 더 가치 있으니까요."

노인은 껄껄 웃으며 낚싯대를 접었다. 그의 종이배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바다 전체가 거대한 소용돌이로 변했다.

"좋다. 그럼 이 소음의 바다를 건너가 봐라. 너희의 이야기가 소리가 아닌 침묵으로만 이어질 수 있다면, 저 너머의 진짜 세상이 너희를 맞이할 것이다."

소용돌이 속에서 길은 사라지고, 오직 두 사람만이 남은 채 바다는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서윤은 도진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이제 소리는 사라지고, 두 사람의 심장 박동만이 이 적막한 우주의 유일한 리듬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눈을 감고, 소리가 아닌 서로의 온기만을 이정표 삼아 바다 위를 걷기 시작했다.


제13장: 침묵의 무게와 기록되지 않는 것들

소음의 바다가 증발하고 발을 내디딘 곳은 지독할 정도로 평범한 현실이었다. 6시 15분.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서윤의 뺨 위로 스치는 바람은 카페 에테르네의 인공적인 온기보다 훨씬 서늘했고 날카로웠다. 옆에 앉은 도진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던 소설 속의 기계적인 호흡이 아니었다. 조금은 불규칙하고, 조금은 거칠며, 생존의 의지가 담긴 진짜 인간의 숨이었다.

서윤은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만년필에 눌려 굳은살이 박여 있던 중지는 매끈해져 있었다.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비워진 자리에는 낯선 공허함이 차올랐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문장으로 수식할 수 없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추우면 옷을 껴입어야 하며,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불확실한 눈빛을 주고받아야 하는, 리셋이 허용되지 않는 잔인한 현실의 시작이었다.

저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설 속의 아이들은 언제나 배경음악처럼 일정한 톤으로 웃었지만, 현실의 아이들은 제각각의 높낮이로 소리를 질러댔다. 서윤은 그 소음 속에서 묘한 현기증을 느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묘사되지 않은 사물들이 각자의 존재감을 뽐내며 그녀의 시야를 공격해 왔다. 보도블록 사이의 이끼, 쓰레기통 옆에 버려진 찌그러진 캔, 벤치 다리에 낀 녹슨 나사까지. 작가로서 그녀가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하찮은 것들이 '우리는 여기 실재한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도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5시 59분의 정체된 슬픔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서윤아, 이제 정말 시작된 거야?"

도진의 목소리는 공원의 소음 속에 섞여 작게 들렸지만, 서윤에게는 천둥소리보다 크게 울렸다. 서윤아. 소설 속에서 수천 번 불렸던 이름이었지만, 이 성조와 이 떨림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리셋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불확실성에서 기인한 진동이었다.

서윤은 대답하는 대신 도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손바닥은 땀이 배어 축축했다. 잉크가 아닌 땀. 이것이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을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응, 이제 아무도 우리를 써 내려가지 않아. 우리가 걷는 길이 그대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고,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도진아, 적어도 6시가 된다고 해서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다시 마주 앉는 일은 없을 거야."

서윤은 벤치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가에 세워진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주황색 불빛이 길게 늘어지며 보도를 비추었다. 소설 속의 빛은 언제나 주인공의 감정을 대변하며 아름답게 굴절되었지만, 현실의 가로등 불빛은 그저 어둠을 밝히는 기능적인 광원에 불과했다. 그 담백함이 오히려 서윤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두 사람은 공원을 벗어나 인파가 붐비는 거리로 향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사정을 안고 바쁘게 움직였다. 누군가는 전화를 하며 화를 내고 있었고, 누군가는 연인의 손을 잡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서윤과 도진이 누구인지, 그들이 방금 어떤 거대한 세계를 붕괴시키고 이곳으로 도망쳐 왔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관찰자이자 창조자였던 서윤이 처음으로 '배경'이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어디로 갈까? 예약된 테이블도 없고, 정해진 대사도 없는데."

도진이 묻자 서윤은 미소를 지었다.

"그냥 걷자. 발이 닿는 곳으로. 배가 고파지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고, 다리가 아프면 아무 데나 앉아서 쉬자. 기록되지 않는 것들을 즐겨보자고."

그들은 화려한 간판들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낡은 전단지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고, 하수구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는 골목이었다. 소설이었다면 '그녀는 코끝을 찡그리며 음산한 골목을 지났다'라고 적었을 법한 장소였지만, 서윤은 그 불쾌한 냄새조차 신기한 듯 들이마셨다. 그것은 생동하는 삶의 찌꺼기들이 내뿜는 정직한 냄새였다.

한참을 걷던 중, 서윤은 어느 낡은 서점 앞에 멈춰 섰다. 쇼윈도 안에는 수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어떤 책은 베스트셀러라는 딱지를 붙이고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었고, 어떤 책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서윤은 그 책들을 보며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저 책들 속에 갇힌 수많은 인물들도 지금 자신처럼 탈출을 꿈꾸고 있을까?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영원히 박제되어 버리는 그 잔인한 운명 속에서.

도진이 서점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서윤아, 저기 비친 내 모습이 진짜 나일까? 아니면 누군가 여전히 나를 상상하고 있는 걸까?"

"도진아, 그런 의심조차 네가 진짜라는 증거야. 소설 속의 너는 단 한 번도 너의 존재를 의심한 적이 없었어. 내가 설정한 대로만 생각하고 느꼈으니까. 지금 불안하다면, 그게 바로 네가 자유롭다는 뜻이야."

서윤은 서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종이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이 종이들이 자신을 억압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제 책은 그녀에게 감옥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평범한 사물에 불과했다. 그녀는 서가 사이를 거닐며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제목은 '잊혀진 계절의 기록'.

책장을 넘기자 정갈하게 인쇄된 활자들이 나타났다. 서윤은 그 글자들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이 문장들은 이제 우리를 구속하지 못해."

그녀는 책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고 서점을 나왔다. 밖은 어느덧 깊은 밤이 되어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도진은 그녀의 곁에서 묵묵히 보조를 맞추며 걸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긴 대화는 없었지만, 침묵은 더 이상 어색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평온한 정적이었다.

길을 걷다 보니 작은 육교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육교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자동차의 전조등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빨간색과 하얀색 불빛들이 뒤섞이며 도시의 혈관을 흐르는 피처럼 보였다.

"서윤아, 나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어."

도진이 난간을 잡으며 말했다. 그의 목포리는 밤바람에 실려 희미하게 떨렸다.

"뭔데?"

"6시가 되어도 너를 잊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리고 6시 1분에 네가 내 앞에 없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벅차."

도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리셋되던 세계에서 그의 눈물은 비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소품에 불과했지만, 지금 흐르는 눈물은 감당하기 힘든 자유를 맞이한 인간의 순수한 경외심이었다. 서윤은 그를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 박동이 그녀의 가슴으로 전달되었다. 빠르고, 강렬하며, 생생한 고동.

"나도 그래, 도진아. 이제 우리는 매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해.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1초가 예전의 1분보다 훨씬 길게 느껴질 거야."

두 사람은 육교 위에서 한참 동안 야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들에게는 돌아갈 집도, 내일의 계획도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문장의 노예가 아니었으며,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자유로웠다. 그들의 삶은 이제부터 이름 없는 페이지들로 가득 채워질 것이고, 그 페이지의 주인은 오로지 그들 자신뿐이었다.

육교를 내려와 다시 거리에 섰을 때, 서윤은 문득 자신의 코트 주머니 안에 무언가 들어있음을 느꼈다. 손을 넣어 꺼내보니, 그것은 카페 에테르네에서 사용하던 낡은 영수증 조각이었다. '오후 5시 59분, 아메리카노 두 잔'.

서윤은 그 영수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잘게 찢어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하얀 종이 조각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나비처럼 흩날리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과거의 잔상이 완전히 지워지는 순간이었다.

"가자, 이제 정말 우리만의 시간으로."

서윤이 앞장서 걸었다. 도진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뒤를 따랐다.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현실의 무게가 실렸고, 그 무게는 그들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기록되지 않아도 좋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진짜 사랑이 밤의 정적 속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어느 골목의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된장찌개 냄새와 사람들의 떠들썩한 대화가 섞인 평범한 식당이었다. 서윤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았다. 가격표가 적힌 메뉴판은 소설 속의 우아한 대사보다 훨씬 현실적이었고 신뢰가 갔다.

"도진아, 뭐 먹을래?"

"네가 먹고 싶은 거, 나도 그거 먹을게."

도진의 대답에 서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장 평범하고 식상한 대사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문학적인 표현보다 달콤하게 들렸다. 그들은 따뜻한 찌개를 나누어 먹으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본 강아지의 귀여운 모습, 길가에 핀 꽃의 색깔,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수많은 내일들에 대하여.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밤하늘에는 별들이 총총히 떠 있었다. 소설 속의 별은 언제나 주인공의 운명을 예언하며 반짝였지만, 현실의 별은 그저 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빛을 내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서윤은 그 무심한 별빛이 좋았다. 자신들을 지켜보지도, 간섭하지도 않는 완전한 타자로서의 존재감.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밤은 깊어갔고, 도시의 소음은 조금씩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서는 새로운 이야기의 고동이 멈추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활자로 옮겨지지 않을, 오로지 두 사람의 기억 속에만 새겨질 비밀스러운 역사였다.

마침표가 없는 길 위에서, 그들은 비로소 완전해졌다. 6시의 굴레는 이제 아주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고, 그들 앞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눈부신 평범함이 펼쳐져 있었다.

"사랑해, 서윤아."

도진이 멈춰 서서 말했다. 서윤은 그의 눈을 보며 대답했다.

"나도 사랑해, 도진아. 리셋되지 않는 이 마음으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가로등 아래에서 하나로 겹쳐졌다. 그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 어둠 속으로 뻗어 나갔다. 그 끝에는 아직 쓰이지 않은, 그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 내일을 향해 한 발 한 발, 아주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걸어 나갔다.

소설은 끝났지만, 그들의 삶은 이제 막 첫 페이지를 넘겼다.

제14장: 유통기한이 있는 평화

식당을 나와 마주한 밤공기는 아까보다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 도진의 코트 깃을 세워주던 서윤은 문득 자신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리셋이 사라진 세계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밤, 즉 내일이 온다는 확신이 주는 기묘한 공포였다. 소설 속에서는 결코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들, 이를테면 잠을 잘 곳이나 내일 사용할 비용 같은 지극히 세속적인 문제들이 현실의 무게가 되어 어깨를 짓눌렀다.

두 사람은 화려한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번화가를 지나 주택가가 밀집한 고요한 언덕길로 향했다.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비추는 그 길은 어둡고 적막했지만, 도진과 서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어둠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소설 속의 완벽한 미장센은 없었지만, 대신 누군가의 빨래가 마르는 냄새와 오래된 담벼락의 눅눅한 이끼 냄새가 섞여 있었다.

도진이 멈춰 서서 담벼락에 기대앉았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펴서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카페 에테르네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서 보았던 매끄러운 손이 아니었다. 거친 벽면에 긁힌 작은 상처와 손톱 밑에 낀 검은 흙먼지. 그것은 그가 더 이상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였다.

서윤아, 저기 봐.

도진이 가리킨 곳에는 낡은 2층짜리 연립주택이 있었다. 창문 너머로 텔레비전의 푸른 불빛이 새어 나오고, 가끔씩 사람들의 웃음소리나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윤은 그 평범한 풍경을 바라보며 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저들은 저 집 안에서 수십 년의 역사를 쌓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도진에게는 오늘 이전의 역사가 없었다. 기록된 것은 허구였고, 기록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집이 없네.

서윤의 말에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해방된 자의 초연함이 서려 있었다.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이제 우리가 지을 수 있는 거야. 서윤아, 예전에는 내가 어디서 자고 어디서 왔는지 단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았잖아. 그냥 5시 59분에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그게 내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네가 내 옆에 있을지, 우리가 어디서 아침을 맞이할지 고민하는 게 너무 즐거워. 이건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야.

도진은 주머니에서 아까 식당에서 거스름돈으로 받은 동전 몇 개를 꺼내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짤랑거리는 금속음이 정막한 골목에 울려 퍼졌다. 이 작은 동전 하나도 소설 속에서는 설정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두 사람은 골목 끝에 위치한 낡은 여관 앞에 멈춰 섰다. 붉은색 네온사인으로 숙박이라고 적힌 간판이 깜빡이고 있었다. 서윤은 잠시 망설였다. 소설 속의 그녀라면 절대로 발을 들이지 않았을 법한, 누추하고 보잘것없는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 어떤 호화로운 호텔보다도 절실한 안식처였다.

여관 안으로 들어서자 퀴퀴한 담배 연기와 오래된 장판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인 할머니는 졸린 눈을 비비며 그들을 훑어보더니 열쇠 하나를 건네주었다. 302호.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자, 좁은 방 안에 낡은 침대 하나와 작은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다.

서윤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스프링이 내려앉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도진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파도 소리처럼 들려왔다.

서윤아, 만약 내일 아침에 눈을 떴는데 다시 카페 에테르네라면 어떡할 거야?

도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서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가정이었지만, 현실이라는 세계 역시 누군가의 또 다른 실험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러면 나는 다시 펜을 꺾을 거야. 그리고 다시 너를 데리고 도망치겠지. 그게 수만 번 반복된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거야. 도진아, 리셋이 우리를 가둘 수는 있어도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으니까.

서윤은 도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창밖의 어둠을 함께 바라보았다. 리셋되지 않는 세계에서의 첫 잠을 앞두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잠들지 않으려 애썼다. 잠이 들면 이 모든 것이 꿈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눈을 뜨면 다시 5시 59분의 감옥 속에 갇혀 있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육체의 피로는 정직했다. 쉼 없이 걷고 긴장했던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들을 잠의 나락으로 끌어내렸다. 서윤은 도진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심장 박동이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그것은 일정한 박자가 아니라, 꿈을 꾸는 듯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낡은 침대 위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서윤의 얼굴 위로 따가운 햇살이 쏟아졌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천장이었다. 카페 에테르네의 고풍스러운 천장이 아니었다. 얼룩덜룩한 벽지가 발린 여관방의 천장이었다.

옆을 돌아보자 도진이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얼굴 위로 비치는 햇살은 어제의 노을보다 훨씬 투명하고 강렬했다.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뺨을 만져보았다. 온기가 느껴졌다. 리셋되지 않았다. 6시가 지났고, 밤이 지났으며, 진짜 내일이 찾아온 것이다.

도진아, 일어나 봐. 내일이 왔어. 진짜 내일이.

서윤의 부름에 도진이 부스스 눈을 떴다. 그는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서윤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설정된 묘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안도한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눈부신 미소였다.

두 사람은 여관을 나와 아침 거리에 섰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어제 보았던 밤의 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각자의 삶을 증명하고 있었다.

서윤은 길가에 세워진 신문 가판대로 다가갔다. 신문 1면에 찍힌 날짜를 확인했다. 2025년 12월 31일. 카페 에테르네에서 수천 번 보았던 그 정지된 날짜가 아니었다.

도진아,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래.

마지막 날이라니, 우리에게는 처음 있는 일인데.

도진의 말에 서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마지막이라는 개념조차도 그들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리셋되는 세계에서는 결코 끝이 없었기에 마지막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두 사람은 사람들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걷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발이 닿는 곳이 곧 길이 되었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곧 역사가 되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커다란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중앙에는 거대한 시계탑이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 시계탑 아래 모여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서윤은 그 풍경이 묘하게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저 사람들은 뭘 기다리는 거야?

도진의 물음에 서윤은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바늘은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 새해를 기다리는 걸 거야. 오늘 밤 12시가 되면 한 해가 끝나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거든. 사람들은 그걸 축하하면서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장을 시작해.

마침표를 찍는 걸 축하한다고? 우리는 그 마침표가 무서워서 도망쳤는데.

도진의 말에 서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현실의 마침표는 소설의 마침표와는 의미가 달랐다. 소설의 마침표는 존재의 정지를 의미하지만, 현실의 마침표는 매듭을 짓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쉼표에 가까웠다.

응, 현실의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연결이야. 오늘이 끝나야 내일이 올 수 있는 것처럼. 도진아, 우리도 오늘 밤에는 저 사람들 틈에서 마침표를 찍어볼까? 리셋되지 않는, 진짜 우리만의 마침표를.

도진은 서윤의 손을 고쳐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 주변의 카페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두툼했다. 서윤은 문득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가 너무 얇다는 것을 느꼈다. 소설 속에서는 날씨조차 감정을 묘사하기 위한 수단이었기에 추위를 느껴본 적이 없었지만, 현실의 추위는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들었다.

도진이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서윤의 목에 감겨주었다. 목도리에서 도진의 체온과 희미한 비누 향이 났다. 서윤은 그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이것은 유통기한이 있는 향기였다.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고, 빨래를 하면 지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했다.

우리는 이제 늙어가겠지?

도진이 툭 던진 말에 서윤은 멈춰 섰다. 늙어간다는 것. 주름이 생기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고, 결국에는 소멸한다는 것. 그것은 리셋의 세계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던 축복이자 저주였다.

응, 늙어갈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겠지. 하지만 도진아, 수천 번 똑같은 모습으로 박제되어 있는 것보다, 너와 함께 늙어가는 게 훨씬 더 근사할 것 같아. 네 주름 하나하나가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의 기록이 될 테니까.

서윤은 도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의 매끄러운 피부가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변해갈 모습을 상상했다. 그것은 비극이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써 내려갈 위대한 서사시였다.

두 사람은 광장을 지나 복잡한 시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활기와 생선 비린내, 떡볶이 익는 냄새가 뒤섞인 그곳은 삶의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서윤은 시장 상인들의 거친 손마디와 웃음 띤 얼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마침표를 거부하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도진은 시장통에서 파는 따뜻한 붕어빵을 한 봉지 샀다. 종이봉투를 뚫고 나오는 온기가 손바닥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이거 봐, 서윤아. 소설 속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진짜 맛이야.

도진이 건넨 붕어빵을 한 입 베어 물자 달콤한 팥 앙금이 입안 가득 퍼졌다. 서윤은 그 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이 사소한 미각의 경험조차도 이제는 리셋되지 않고 그녀의 기억 속에 쌓여갈 것이다.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자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노을은 서윤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5시 59분의 정지 신호가 아니라, 휴식을 예고하는 부드러운 전주곡이었다.

서윤은 도진과 함께 다시 육교 위로 올라갔다. 어제 보았던 그 야경이 다시 펼쳐졌다. 자동차의 불빛들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고, 도시의 소음은 더욱 활발해졌다.

도진아, 우리 이제 어디로 갈까?

도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서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디든 좋아. 네가 있는 곳이라면 그게 내 페이지의 제목이 될 테니까. 우리, 이번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가장 평범하고 지루한 이야기를 써보자. 남들이 보면 졸음이 올 정도로 아주 평화로운 이야기.

서윤은 도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어제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그래, 그러자. 아주 지루하고 평범해서 아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를 우리 둘이서만 나누자.

두 사람은 육교를 내려와 다시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들의 모습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았다. 특별한 주인공도, 신비로운 설정도 없는 평범한 연인. 하지만 그 평범함이야말로 그들이 수천 번의 루프를 거쳐 얻어낸 가장 위대한 기적이었다.

멀리서 시계탑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6시였다. 하지만 카페 에테르네의 종소리와는 달랐다. 그것은 누군가의 퇴근을 알리고, 누군가의 저녁 식사를 재촉하는 삶의 종소리였다. 서윤은 더 이상 만년필을 찾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이제 도진의 손을 잡는 데만 쓰이고 있었다.

밤은 깊어갔고, 두 사람의 발걸음은 더욱 단단해졌다. 기록되지 않는 사랑은 리셋의 위협 없이도 스스로 자라나고 있었으며, 마침표가 없는 그들의 지도는 매 순간 새로운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문장의 뒤를 쫓지 않았다. 그들이 걷는 그 자체가 곧 살아있는 문장이었으며, 그들이 나누는 호흡이 곧 완성되지 않은, 그래서 영원한 소설이었다.

제15장: 자정의 마침표와 첫 번째 새벽

광장의 시계탑은 어느덧 오후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025년의 마지막 30분. 서윤과 도진은 수천 명의 인파 속에 섞여 시계탑 아래 서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고, 각자의 손에는 소원을 적은 풍선이나 야광봉이 들려 있었다. 소설 속의 군중은 주인공의 고독을 강조하기 위한 배경에 불과했으나, 이곳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뜨거운 생명력을 내뿜으며 서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서윤아, 사람들이 정말 많네. 다들 무언가를 끝내고 새로 시작하려고 모인 거겠지?"

도진이 인파에 밀리지 않도록 서윤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서윤은 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시계탑의 분침에 고정되어 있었다. 5시 59분이 지나갈 때마다 느꼈던 그 지독한 공포가 습관처럼 밀려왔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6시가 지나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고, 이제 곧 12시가 되어도 도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응, 사람들은 마침표를 찍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 그 마침표가 있어야 다음 문장을 시작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아. 우리만 그게 무서워서 쉼표만 찍으며 도망쳤던 거야."

서윤은 코트 주머니 속에서 작은 종이 조각 하나를 꺼냈다. 아침에 샀던 붕어빵 봉투의 귀퉁이를 찢어둔 것이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펜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만년필은 백지의 세계에 버리고 왔다. 지금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편의점에서 산 천 원짜리 모나미 볼펜이었다. 잉크가 뭉쳐 나오고 필기감도 거칠었지만, 그 어떤 명품 만년필보다 정직하게 종이 위를 긁었다.

[2025년 12월 31일, 우리는 이곳에 실재한다.]

서윤은 짧은 문장을 적고 그 끝에 아주 진하고 커다란 마침표를 찍었다. 잉크가 종이를 뚫고 나갈 정도로 힘을 주어 찍은 마침표였다. 그것은 선언이었다. 더 이상 소설의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나도 적어봐도 될까?"

도진이 볼펜을 건네받았다. 그는 서윤이 쓴 문장 아래에 서툰 글씨로 덧붙였다.

[그리고 내일도 우리는 함께 걷는다.]

도진 역시 문장의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두 개의 마침표가 종이 위에서 나란히 빛났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두 사람의 삶을 잇는 단단한 매듭이었다.

시계탑의 초침이 마지막 한 바퀴를 돌기 시작했다. 10, 9, 8...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카운트다운을 외쳤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서윤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소설의 결말을 마주할 때보다 더한 긴장감이 전신을 감쌌다. 3, 2, 1...

"해피 뉴 이어!"

함성과 함께 수천 개의 풍선이 밤하늘로 날아올랐고, 화려한 폭죽이 검은 하늘을 수놓았다. 2026년 1월 1일 0시 0분. 서윤은 도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폭죽 불빛을 받아 눈동자가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고, 차가운 공기에 코끝이 발그레해진 채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리셋되지 않았다.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고, 시간은 멈추지 않고 0시 1분을 향해 나아갔다.

"도진아, 해피 뉴 이어. 우리의 진짜 첫날이야."

서윤은 도진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차가운 입술 끝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 그것은 설정된 감각이 아니라, 살아있는 두 육체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기적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고, 오직 서로의 숨소리만이 고막을 울렸다.

인파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광장을 가로질러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 2026년의 첫 새벽이 시작되고 있었다. 거리는 여전히 활기찼지만, 어제의 들뜬 분위기와는 또 다른 차분함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이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할 것이다.

"우리도 이제 진짜 집을 찾아보자. 거창하지 않아도 좋아. 그냥 햇빛이 잘 들고, 창문을 열면 사람 사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작은 방 한 칸이면 충분해."

도진의 제안에 서윤은 웃으며 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래, 그러자. 그리고 거기서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자. 책으로 출판되지 않아도 좋고, 누구에게 읽히지 않아도 되는, 오직 우리 둘만 아는 비밀스러운 기록들로 채워가는 거야."

그들은 광장을 벗어나 새벽 시장 쪽으로 향했다. 새벽 시장은 이미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갓 구워낸 빵 냄새, 트럭에서 내리는 신선한 채소 냄새, 상인들의 거친 흥정 소리. 서윤은 그 모든 풍경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소설 속의 정제된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투박하고 거친 생의 현장이었다.

시장의 작은 국밥집에 들어간 두 사람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 그릇을 주문했다. 낡은 플라스틱 탁자와 짝이 맞지 않는 수저통. 하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그 어떤 고급 레스토랑보다 진했다.

"서윤아, 나 아까 시계탑 아래서 깨달은 게 있어."

국밥을 크게 한 술 뜬 도진이 입가에 국물을 묻힌 채 말했다. 서윤은 웃으며 휴지로 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뭔데?"

"우리가 카페 에테르네에서 보낸 수천 번의 5시 59분이 헛된 게 아니었다는 거야. 그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반복이 없었다면, 지금 이 국밥 한 그릇의 소중함을 이렇게 뼈저리게 느끼지는 못했을 거야. 그 굴레가 있었기에 지금의 자유가 이렇게 달콤한 거겠지."

서윤은 숟가락을 멈추고 도진을 응시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소설 속의 시간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축적된 거대한 에너지였다. 그들이 견뎌온 굴레는 이제 그들을 지탱하는 단단한 뿌리가 되어 있었다.

"응, 도진아. 그건 우리 인생의 기나긴 서문이었던 거야. 이제야 비로소 본문이 시작된 거고."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새벽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보랏빛과 남색이 뒤섞인 하늘 저 멀리서 2026년의 첫 번째 태양이 고개를 내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윤은 그 하늘을 보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공기는 차갑지만 상쾌했다.

그들은 도심을 가로질러 강변북로가 보이는 육교 위에 섰다. 강물은 검푸른 빛을 띠며 고요히 흐르고 있었고, 강 너머의 빌딩 숲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서윤은 주머니에서 아까 문장을 적었던 종이 조각을 다시 꺼냈다.

"이건 간직하고 싶어. 우리의 첫 번째 마침표니까."

서윤은 종이를 정성스럽게 접어 지갑 깊숙한 곳에 넣었다. 이제 그녀에게 기록은 강박이 아니라 취미가 될 것이다. 삶의 매 순간을 포착하려 애쓰지 않아도, 시간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기억 속에 무늬를 남길 것이다.

해 기운이 강해지며 강물 위로 윤슬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도진은 서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그녀를 끌어당겼다.

"서윤아, 저 해가 다 뜨면 우리 뭐 할까?"

"글쎄... 일단 따뜻한 곳에 가서 한잠 자고, 오후에는 동네 부동산을 돌아다녀 보자. 우리가 뿌리 내릴 작은 땅을 찾으러."

"좋네. 그리고 저녁에는 같이 장을 봐서 맛있는 걸 해 먹자. 내가 요리는 잘 못 하지만, 네가 가르쳐주면 금방 배울게."

도진의 소소한 계획들이 서윤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셨다. 소설 속의 거창한 모험보다, 이런 소소한 일상들이야말로 그녀가 그토록 갈망하던 '진짜 삶'이었다.

햇살이 육교 위를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나가 하나로 합쳐졌다. 더 이상 투명해지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단단한 그림자였다. 6시의 저주는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서윤은 문득 자신의 왼팔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백지의 세계에서 피로 문장을 새겼던 그 흉터가 옅은 선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건너왔는지 잊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표식이었다.

"가자, 도진아. 우리들의 첫 번째 하루를 살러."

서윤이 먼저 발을 뗐다. 도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보조를 맞췄다. 육교를 내려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광장을 지나고, 시장을 지나고, 이름 모를 골목들을 지나며 그들은 현실 속으로 더 깊이 침투해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소음 속에, 냄새 속에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을 던졌다. 더 이상 특별한 주인공일 필요는 없었다. 그저 서로를 사랑하고, 내일을 걱정하며, 오늘을 살아내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그들이 선택한 가장 위대한 결말이었다.

강물 위로 솟아오른 태양이 도시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카페 에테르네의 가짜 노을과는 달랐다. 눈이 시릴 정도로 눈부시고, 피부를 따갑게 자극하는 진짜 태양이었다. 서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빛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사랑해, 도진아."

"나도 사랑해, 서윤아. 이제 정말로, 영원히."

두 사람은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들의 등 뒤로 2026년의 첫 번째 새벽이 찬란하게 열리고 있었다. 마침표를 찍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끝없는 본문의 시작이었다.

제16장: 평범함이라는 이름의 위대한 투쟁

2026년의 첫 태양이 완전히 머리 위로 솟아올랐을 때, 서윤과 도진은 어느 낡은 빌라촌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화려한 광장의 소음은 멀어졌고, 대신 골목길에는 누군가가 버린 가구 더미와 길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피로가 몰려왔지만, 서윤은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녀가 마주한 것은 문학적인 상징이 아니라, 보증금과 월세라는 차갑고 단단한 현실이었다.

"서윤아, 저기 봐. 임대 문의라고 적혀 있어."

도진이 가리킨 곳은 붉은 벽돌이 드문드문 깨진 3층짜리 빌라였다. 유리창에는 빛바랜 종이가 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서윤은 지갑 속에서 아침에 국밥을 먹고 남은 잔돈을 확인했다. 소설 속에서는 결코 걱정하지 않았던 '생존의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서윤은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주인 아주머니의 투박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방을 보러 왔다는 서윤의 말에 아주머니는 귀찮은 듯 열쇠가 우편함에 있으니 보고 가라고 대답했다.

우편함에서 낡은 열쇠를 꺼낼 때, 서윤은 묘한 전율을 느꼈다. 카페 에테르네에서는 문을 열기 위해 열쇠가 필요하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문은 열렸고, 시간이 되면 닫혔다. 하지만 이 쇳덩이는 물리적인 힘을 가해 돌려야만 공간을 허락하는 고집스러운 물건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닫혀 있던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인 좁은 원룸. 햇빛은 창가 한구석에 겨우 손바닥만큼 걸려 있었다. 도진은 방 안으로 들어가 바닥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손가락에 하얀 먼지가 묻어났다.

"여기야, 서윤아. 우리들의 첫 번째 페이지."

도진이 웃으며 말했다. 서윤은 그 좁고 누추한 방을 둘러보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곳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석상도, 우아한 커피잔도 없었지만, 대신 그들이 직접 채워넣어야 할 광활한 여백이 있었다.

"응, 여기가 우리의 진짜 집이야. 도진아, 이제 우리는 여기서 먹고, 자고, 싸우고, 화해하면서 늙어갈 거야. 소설 속 주인공처럼 멋있게 죽는 게 아니라, 아주 구질구질하고 치열하게 살아남는 거야."

그날 오후부터 두 사람의 본격적인 '현실 적응기'가 시작되었다. 서윤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재능인 글쓰기를 이용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예전처럼 고뇌에 찬 예술 소설이 아니었다. 기업의 보도자료, 인터넷 쇼핑몰의 상품 설명 문구, 심지어는 동네 전단지의 문구까지. 그녀는 마침표를 찍지 않던 습관을 버리고, 가장 명확하고 짧은 문장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인근의 대형 마트 창고에서 물건을 나르는 일을 구했다. 카페에서 신문을 읽으며 창밖을 보던 정적인 남자는, 이제 땀 흘리며 상자를 나르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활동적인 존재로 변모했다.

저녁이 되면 두 사람은 좁은 방에 모여 앉아 서로의 상처를 살폈다. 도진의 손에는 상자를 나르다 생긴 굳은살과 잔가처가 늘어났고, 서윤의 어깨는 하루 종일 모니터를 바라보느라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리셋되던 시절의 정신적인 피로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살아있음의 증거이자, 내일을 준비하는 훈장이었다.

"서윤아, 오늘 마트에서 사 온 사과야. 어제보다 깎는 솜씨가 좀 늘었지?"

도진이 투박하게 깎은 사과 한 조각을 내밀었다. 서윤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며 웃었다. 리셋되던 세계에서는 사과의 맛조차 매일 똑같았지만, 오늘 먹는 사과는 어제보다 조금 더 시큼하고 아삭했다.

"맛있다. 도진아, 우리 내일은 시장에서 고기 좀 사다 구워 먹을까? 돈을 조금 더 벌었거든."

"좋지. 그리고 우리 동네 산책도 좀 하자. 저번에 보니까 언덕 끝에 작은 공원이 하나 더 있더라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대화들. 하지만 이 대화들 속에는 더 이상 '6시'라는 시한폭탄이 없었다. 그들은 마음껏 내일을 계획하고, 모레를 상상했다. 때로는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생활비가 부족하다거나, 누가 설거지를 할 차례인가 하는 사소한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그 갈등조차 서윤에게는 눈물겹게 소중했다. 싸우고 나서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마주 앉아 화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서윤은 우연히 길을 걷다 낡은 중고 서점 앞에 멈춰 섰다. 서점 구석에 꽂힌 낡은 잡지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펼친 잡지의 한 페이지에는 예전에 자신이 썼던 연재 소설의 한 대목이 적혀 있었다.

'그는 6시가 되면 사라지는 환상이었다. 그녀는 그 환상을 붙잡기 위해 매일 같은 문장을 썼다.'

서윤은 그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때는 그것이 자신의 전부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안다. 환상을 붙잡기 위해 문장을 쓰는 것보다, 땀 흘려 번 돈으로 저녁 식탁을 차리는 것이 훨씬 더 위대한 창작이라는 것을.

서윤은 잡지를 다시 서가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서점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시장에서 산 된장찌개 재료가 든 비닐봉지가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프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도진이 미리 와서 방을 청소하고 있었다. 좁은 방 안에는 사람 사는 온기가 가득했다. 가구라고는 중고로 산 작은 책상과 침대가 전부였지만, 그곳은 그 어떤 궁전보다 따뜻했다.

"서윤아, 왔어? 오늘 일이 좀 일찍 끝났어."

도진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마중 나왔다. 서윤은 그의 품에 안겼다. 그의 옷에서는 땀 냄새와 마트 창고의 먼지 냄새가 났지만, 서윤은 그 냄새가 세상에서 가장 좋았다.

"응, 도진아. 우리 오늘 저녁 맛있게 먹자. 그리고 오늘 밤에는 정말 푹 자자. 내일은 우리 쉬는 날이잖아."

밤이 깊어지자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서윤은 도진의 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예전의 루프 속에서 보았던 천장과는 달랐다. 누수 때문에 생긴 얼룩이 마치 구름처럼 보였고, 그 구름 너머로 두 사람이 그려갈 미래가 보였다.

"도진아, 있잖아. 나 이제 소설 안 써도 괜찮을 것 같아. 내 삶이 이미 소설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치열하거든."

서윤의 말에 도진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도 가끔은 적어줘. 우리가 어떻게 도망쳐 왔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지. 나중에 우리 머리가 하얘졌을 때 같이 읽어보게."

서윤은 미소 지었다. 그래, 언젠가 다시 펜을 들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글은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감옥이 아니라, 자유를 만끽하는 자의 즐거운 노래가 될 것이다.

잠결에 들려오는 멀리서의 종소리. 6시의 저주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시계바늘은 무심하게 12시를 지나 새벽으로 향했다. 리셋되지 않는 시간은 그들에게 주름을 선물하고, 기억을 쌓아주고, 끝내 소멸로 인도하겠지만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끝이 있기에 시작이 아름답다는 것. 마침표가 있기에 문장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것. 그 평범한 진리를 배우기 위해 그들은 그 먼 길을 돌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숨소리를 공유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어제보다 조금 더 낡아진 서로를 발견하겠지만, 그만큼 더 깊어진 사랑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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