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1. 13. 09:32ㆍ만화 애니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삭풍의 계곡, 좁은 협곡 입구에서 청운검문(靑雲劍門)의 삼대제자 서하가 검을 고쳐 잡았다. 마주 선 사내, 혈의문의 부문주 독고표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 사이로 세 자루의 비수를 굴렸다.
비켜라. 너 같은 애송이가 막아설 길 아니니.
독고표의 목소리는 쇠가 긁히는 듯한 불쾌한 소리를 냈다. 서하는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답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지. 혈의문의 개들이 지나가면 온 마을에 썩은 내만 남는다고.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나간다.
오냐, 그 호기가 언제까지 가는지 보자꾸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독고표의 손에서 비수가 발사되었다.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이 협곡을 울렸다. 서하는 신형을 낮게 깔며 청운보법을 밟았다. 챙강, 하는 소리와 함께 비수 두 자루가 암벽에 박혔다. 나머지 한 자루는 서하의 어깨 끝을 스치며 옷자락을 찢었다.
빠르군. 하지만 이건 어떠냐?
독고표가 소매 안에서 붉은 연무를 뿌리며 도약했다. 서하는 숨을 멈추고 검기를 끌어올렸다. 청운검법 제삼초, 운해추월(雲海追月). 검 끝이 반원을 그리며 붉은 안개를 갈라냈다.
천박한 수작질은 그만두시지. 부문주라는 자가 정면 승부도 못 하는가?
정면 승부? 무림은 죽이는 자가 정의다. 네놈의 그 고결함이 목숨을 부지해줄 것 같나?
독고표의 장법이 서하의 가슴팍을 향해 들이닥쳤다. 서하는 왼손으로 장풍을 받아내며 오른손의 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콰앙, 하는 진각음과 함께 주변의 낙엽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서하의 입가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다.
서하, 뒤를 조심해!
협곡 위쪽에서 사형 진운의 외침이 들렸다. 서하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등 뒤에서 싸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또 다른 혈의문의 자객이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서하는 몸을 뒤로 젖히며 검을 휘둘렀다.
두 놈인가. 아니, 세 놈이군.
절벽 위에서 세 명의 흑의인이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독고표는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떨어진 비수를 다시 집어 들었다.
오늘이 청운검문의 명맥이 끊기는 날이다. 서하, 네 목은 내가 직접 가져가마.
그럴 순 없지. 내 목이 그렇게 탐나면 어디 직접 와서 가져가 보라고.
서하는 가슴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내력을 검신으로 집중시켰다. 검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청운검문의 비전, 심검(心劍)의 입문 단계였다. 독고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검? 그 나이에 벌써? 허튼소리!
독고표가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비수가 아니라 품에서 꺼낸 두 자루의 단창이었다. 짧고 묵직한 공격이 서하의 검과 맞부딪혔다. 불꽃이 튈 때마다 서하의 발 아래 지면이 움푹 패였다.
막아봐라! 이것도 막을 수 있겠느냐!
단창의 회전이 빨라지며 서하를 압박했다. 서하는 뒤로 밀려나면서도 눈을 매섭게 떴다.
보인다. 네놈의 초식, 그 틈새가.
서하의 검이 단창의 회전축을 파고들었다. 예리한 금속 마찰음이 들리더니 독고표의 오른쪽 단창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뭐라고?
당황한 독고표의 가슴을 향해 서하의 발길질이 작렬했다. 윽, 소리와 함께 독고표가 뒤로 대여섯 걸음 물러났다. 그 사이 흑의인들이 서하를 포위하며 좁혀왔다.
사제, 버텨라! 내가 간다!
진운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며 검을 휘둘렀다. 낙엽이 흩날리며 진운의 검기가 흑의인 한 명의 어깨를 꿰뚫었다. 진운은 서하의 등을 맞대고 섰다.
늦었잖아, 사형.
말 마라. 위쪽에 복병이 더 있더군. 겨우 따돌리고 왔다.
독고표는 가슴을 움켜쥐며 침을 뱉었다.
흥, 둘이 모였다고 상황이 변할 것 같나? 내 수하들은 끊임없이 몰려올 것이다.
그전에 네놈 목을 따면 그만이지.
진운이 냉소하며 검을 고쳐 잡았다. 독고표는 품속에서 신호탄을 꺼내 하늘로 쏘아 올렸다. 붉은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이제 시작이다. 혈의문의 정예들이 이 골짜기를 포위할 거다.
포위당하기 전에 돌파한다. 사제, 준비됐나?
언제든지.
서하와 진운이 동시에 지면을 박찼다. 독고표와 흑의인들이 그들을 맞이하며 다시 무기를 휘둘렀다. 검과 창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협곡 전체를 진동시켰다. 서하의 검은 더욱 빨라졌고, 진운의 검은 더욱 묵직해졌다.
죽어라!
독고표가 남은 단창을 서하의 미간을 향해 던졌다. 서하는 고개를 살짝 돌려 피하며 그대로 독고표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서하의 검 끝이 독고표의 목덜미를 겨냥했다. 하지만 그 순간, 숲속에서 수십 발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사제, 피해!
진운이 서하의 멱살을 잡아채며 뒤로 굴렀다. 화살들이 서하가 방금 서 있던 자리에 고슴도치처럼 박혔다. 화살촉에는 검은 독이 발려 있었다.
비겁하게 궁수까지 동원하다니!
무림에 비겁한 게 어딨나. 이기는 놈이 산다고 말했을 텐데?
독고표는 유유히 멀어지며 숲속으로 몸을 감췄다. 대신 숲에서 갑옷을 입은 무장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혈의문 놈들만이 아니야. 관군인가?
관군이 왜 우리를?
서하의 물음에 진운은 대답 대신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무리를 응시했다. 무장병들의 방패에는 청운검문이 예전에 척살했던 부패 관리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복수인가 보군. 일이 커졌어.
사형, 저기 동굴 쪽으로 유인하자. 입구가 좁으면 숫자는 의미 없어.
좋은 생각이다. 가자!
두 사람은 쏟아지는 화살을 튕겨내며 협곡 깊숙한 곳의 동굴로 달렸다. 뒤에서는 독고표의 비웃음 섞인 명령이 들려왔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굴 안까지 쫓아가서 숨통을 끊어라!
동굴 입구에 도달한 서하가 입구 근처의 바위를 검기로 내리쳤다. 거대한 바위가 무너져 내리며 입구 절반을 막았다.
일단 시간을 벌었어. 하지만 여긴 막다른 길인데?
사형, 저 안쪽에서 바람이 불어와요. 분명 반대편 출구가 있을 겁니다.
서하는 검을 들고 어두운 동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운도 뒤를 따르며 검의 혈조를 닦아냈다. 동굴 안은 차갑고 습한 기운이 가득했다. 멀리서 추격자들의 고함과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하, 아까 그 심검 말이다. 언제 배운 거냐?
독학이에요. 스승님 서재에서 비급을 몰래 봤거든요.
이 자식이, 그러다 주화입마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래도 덕분에 살았잖아요.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았지만, 손은 여전히 검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동굴은 점점 깊어졌고, 어느 순간부터 바닥에 하얀 뼈들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이 뼈들은 뭐야? 짐승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진운이 뼈 하나를 들어 올렸다. 사람의 두개골이었다. 그 이마에는 기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고대 마교의 표식이잖아?
서하의 눈이 커졌다. 마교는 백 년 전 사라진 조직이었다. 그런데 왜 그들의 흔적이 이 동굴에 남아 있는 걸까. 그때, 동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누구냐!
서하가 소리쳤다. 어둠 속에서 푸른 안광 두 개가 번뜩였다. 거대한 체구의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몸 전체가 털로 뒤덮여 있고 손톱은 검보다 길었다.
강시인가? 아니, 이건...
괴물이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진운이 먼저 검을 휘둘렀으나 괴물의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진운의 검이 튕겨 나갔다.
사형!
서하가 괴물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검 끝이 겨우 살갗을 뚫었을 뿐이었다. 괴물은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지 서하를 향해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피해!
진운이 서하를 밀쳐내며 대신 일격을 허용했다. 진운의 몸이 동굴 벽에 부딪히며 피를 토했다.
사형! 이 괴물 같은 놈이!
서하는 분노하며 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검신이 푸른 빛을 넘어 백색에 가깝게 변했다. 운해추월의 변초, 운해폭멸(雲海暴滅).
서하의 검이 괴물의 가슴을 관통했다. 폭발적인 검기가 괴물의 내부를 찢어발겼다.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서하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었다.
사형, 괜찮아요?
...뼈가 몇 개 나간 것 같군. 그런데 서하, 저길 봐.
진운이 가리킨 곳에는 괴물이 지키고 있던 거대한 석문이 있었다. 석문 위에는 붉은 글씨로 '만마귀원(萬魔歸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만마귀원... 모든 마공의 근원이라는 뜻인가?
동굴 밖에서는 독고표와 무장병들이 동굴 입구의 바위를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에는 정체불명의 마공 비지가, 뒤에는 죽이려 달려드는 적들이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군.
진운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서하는 석문의 고리를 잡았다. 묵직한 진동과 함께 석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차가운 냉기가 아니라, 뜨겁고 기괴한 마기(魔氣)였다.
들어가면 다시는 예전으로 못 돌아갈지도 몰라. 그래도 갈 거냐?
사형, 죽는 것보다야 낫잖아요. 그리고 저놈들 목은 따야죠.
서하가 먼저 석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진운도 쓴웃음을 지으며 그 뒤를 따랐다. 석문이 닫히는 순간, 독고표 일행이 동굴 안으로 들이닥쳤다.
어디 갔어? 분명 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부문주님, 여기 석문이 있습니다!
독고표가 석문을 살피며 경악했다.
이 문양은... 전설로만 듣던 만마전인가? 이 애송이들이 제 발로 무덤에 들어갔구나!
독고표는 문을 열려 했으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는 서하와 진운의 기척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군. 일단 포위해라! 쥐새끼처럼 튀어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석문 너머, 서하와 진운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계단 양옆에는 수천 자루의 검이 바닥에 꽂혀 있었다. 마치 검들의 공동묘지 같았다.
사형, 기분이 이상해요. 검들이 울고 있는 것 같아요.
나도 들린다. 이건 단순한 환청이 아니야.
그때, 계단 끝 광장에서 한 노인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두 사람이 다가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백 년 만에 손님이 왔군. 그것도 청운검문의 핏줄이라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노인이 붓을 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노인의 눈은 눈동자가 없이 백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이곳의 문지기이자, 너희가 찾는 그 무서운 힘의 기록자다.
우리는 힘을 찾으러 온 게 아닙니다. 살기 위해 들어왔을 뿐이죠.
서하의 말에 노인이 허허거리며 웃었다.
살기 위해 마도(魔道)의 심장부로 들어왔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하지만 재미있구나. 너희 둘 중 하나만 이 길을 나갈 수 있다면 어쩌겠느냐?
무슨 헛소리야! 우린 같이 나간다!
진운이 검을 겨눴다. 노인은 손가락 하나를 튕겼다. 그 순간 진운의 검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내 앞에서는 그 쇠막대기가 무용지물이다. 자, 시험을 시작하지. 이 수천 자루의 검 중에서 단 한 자루, '진실'을 베는 검을 찾아내라.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영원히 이 검총의 일부가 될 것이다.
노인의 뒤로 수천 개의 검이 일제히 공중에 떠올라 서하와 진운을 겨냥했다.
사제, 이번엔 진짜 위험한 것 같다.
알아요. 그래도 해봐야죠.
서하는 빈손을 뻗었다. 검이 없어도 검기가 느껴졌다. 공중에 떠 있는 수천 개의 검 중 하나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건가?
서하가 도약했다. 수백 자루의 검이 서하를 향해 쏟아졌다. 진운은 부러진 검자루를 들고 서하의 길을 열기 위해 몸을 던졌다.
가라, 서하! 네가 찾아내!
서하의 손이 떨리는 검자루를 잡으려는 찰나, 동굴 전체가 거대한 진동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위쪽에서 독고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열리면 부수면 그만이다! 화약을 더 가져와!
석문이 파괴되면서 거대한 폭발음이 지하 광장을 뒤덮었다. 노인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외부의 침입자인가. 판이 커지는군.
서하는 폭발의 잔해 속에서 마침내 검을 손에 쥐었다. 검을 잡는 순간, 서하의 머릿속으로 수만 명의 비명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게... 진실을 베는 검이라고?
검신에는 붉은 혈관 같은 무늬가 요동치고 있었다. 서하는 그 검을 들고 입구를 향해 돌아섰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독고표가 수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드디어 찾았군. 그 검이 바로 만마검인가? 내놓아라, 애송아!
오고 싶으면 와라. 이 검이 네놈의 진실을 보고 싶어 하니까.
서하의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진운은 그 모습을 보며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서하, 안 돼! 그 검에 먹히지 마!
하지만 서하는 이미 검과 하나가 된 듯 기괴한 속도로 독고표를 향해 쇄도했다.
서하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자 붉은 검기가 독고표의 안면을 스쳤다. 독고표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으나, 왼쪽 귀 끝이 잘려 나가며 피가 솟구쳤다.
네, 네놈 눈이 왜 그 모양이냐! 그 검에서 손 떼지 못해!
독고표가 공포에 질려 단창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서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검자루를 타고 흐르는 기괴한 박동이 서하의 심장 박동과 맞물려 온몸의 혈관을 뒤틀어놓고 있었다.
사제! 정신 차려! 그건 정파의 무공이 아니야!
진운이 서하의 팔을 잡으려 했으나, 서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진운을 뒤로 퉁겨냈다. 서하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려 독고표를 가리켰다. 검신에 새겨진 혈관 문양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빛을 발했다.
보인다. 네놈이 죽여온 사람들의 원혼이. 이 검이 그것들을 먹고 싶어 해.
서하의 목소리는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수천 명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기괴한 공명음이었다. 독고표는 뒷걸음질 치며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뭐 해! 저 괴물 놈을 죽여! 화살! 화살을 쏴라!
무장병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수십 발의 화살이 좁은 석실 안을 가득 메우며 서하를 향해 쏟아졌다. 서하는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저 검을 바닥에 꽂았을 뿐이다.
만마포효(萬魔咆哮).
서하를 중심으로 검은 충격파가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날아오던 화살들이 허공에서 산산조각 났고, 다가오던 무장병들은 가슴팍이 함몰되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독고표는 방패 뒤로 숨어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방패는 이미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인간의 무공이 아니야! 마두다! 마두가 나타났다!
독고표가 비명을 지르며 석문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서하는 이미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검 끝이 독고표의 뒷덜미를 차갑게 훑었다.
어디 가나. 네가 시작한 사냥인데, 끝은 보고 가야지.
살려주게!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혈의문주가, 문주 그자가 시킨 일이라고!
문주? 그자의 이름도 이 검에 새겨주마.
서하가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백발 노인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그쯤 해두거라. 그 검에 완전히 먹히면 너는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
노인이 서하와 독고표 사이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서하의 붉은 눈이 노인을 향했다.
방해하지 마라. 이놈은 죽어야 한다.
죽여야지. 하지만 네 손이 아닌 검의 의지로 죽인다면, 너는 그저 검의 노예일 뿐이다. 청운검문의 제자라더니, 고작 쇠붙이 하나 이기지 못하는 거냐?
노인의 일갈에 서하의 신형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하의 머릿속에서 검의 환청과 자신의 의지가 충돌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내 머리에서 나가!
서하가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붉은 검기가 서하의 몸을 갈가리 찢어놓을 듯이 요동쳤다. 진운이 그 틈을 타 서하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서하야! 나를 봐라! 사형이다! 그 검을 놓아! 제발!
사, 사형... 도망쳐... 내가...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없어...
서하의 눈에서 붉은 눈물과 맑은 눈물이 섞여 흘러내렸다. 독고표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품 안의 마지막 독침을 서하의 가슴을 향해 날렸다.
죽어라, 이 마두 놈아!
챙!
독침은 서하의 가슴에 닿기도 전에 튕겨 나갔다. 서하가 잡고 있던 검이 스스로 움직여 침을 막아낸 것이었다. 검은 마치 주인인 서하를 지키려는 듯, 아니면 제물을 보호하려는 듯 독고표를 향해 검은 안개를 뿜어냈다.
히익!
독고표가 안개에 닿자마자 그의 팔이 검게 썩어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팔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며 동굴 밖으로 달아났다. 노인은 도망가는 독고표를 내버려 둔 채 서하를 응시했다.
흥미롭군. 검이 주인을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주인이 검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인가.
노인이 손을 뻗어 서하의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순간, 서하를 휘감고 있던 검은 기운이 썰물처럼 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하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진운의 품으로 쓰러졌다.
어르신, 제 사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진운이 절박하게 물었다. 노인은 서하가 쥐고 있는 검을 유심히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검의 기운은 잠시 억눌렀으나, 이미 이 아이의 단전에 마기가 뿌리를 내렸다. 정(正)과 마(魔)가 한 몸에 공존하게 된 것이지. 앞으로 이 아이의 인생은 평탄치 않을 게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다시 예전으로 돌릴 방법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천산(天山)의 빙궁으로 가라. 그곳의 만년한옥(萬年寒玉)만이 이 아이의 들끓는 마기를 다스릴 수 있을 게다.
천산이라니... 여기서 수만 리 길 아닙니까.
죽이고 싶으면 여기 두고 가든가. 선택은 네 몫이다.
노인은 말을 마치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붓을 잡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진운은 입술을 깨물며 서하를 등에 업었다. 서하의 손에는 여전히 그 기괴한 검이 접착제라도 붙은 듯 떨어지지 않은 채 쥐어져 있었다.
가자, 서하야. 사형이 어떻게든 너를 살릴 거다.
진운은 무너진 석문을 넘어 밖으로 향했다. 동굴 밖은 이미 동이 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협곡 입구에는 도망쳤던 독고표가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왔구나! 저놈들을 당장 잡아라! 저 검을 뺏어야 한다!
독고표는 잘려 나간 귀를 천으로 감싼 채 악에 받쳐 소리쳤다. 진운은 등에 업힌 서하의 무게를 느끼며 검을 고쳐 잡았다.
비켜라. 내 사제 길 막는 놈은 누구든 죽인다.
진운의 눈에도 서하에게서 전이된 듯한 푸른 살기가 감돌았다. 청운검문의 유일한 생존자들, 그들의 처절한 탈출극이 다시 시작되었다.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진운은 서하가 깨어나지 않도록 몸을 고정하고, 한 팔로만 검을 휘둘렀다.
청운검법 제칠초, 유운참(流雲斬)!
구름처럼 부드럽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검초가 병사들의 목을 벴다. 독고표는 뒤에서 활을 쏘라고 종용했다. 화살 비가 다시 쏟아졌지만, 진운은 서하의 몸을 방패 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어깨와 다리로 화살을 받아내며 전진했다.
사형... 그만해...
서하가 희미하게 눈을 떴다. 진운의 등 뒤가 자신의 피와 사형의 피로 젖어가는 것을 느꼈다.
조용히 해, 임마. 사형이 간다고 하면 가는 거야.
서하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봤다. 검은 다시금 붉은 빛을 내며 그에게 속삭였다. '나를 써라, 그러면 모두를 죽여주마.'
서하는 이빨을 악물고 검을 진운의 허리띠에 꽂았다. 그리고 진운의 어깨너머로 손을 뻗어 다가오는 병사의 얼굴을 움켜쥐었다.
으아악!
서하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병사의 생명력을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서하의 몸에 다시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사제, 너!
미안해요, 사형. 정파의 길은 여기까지인가 봐요.
서하가 진운의 등에서 내려왔다. 그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반쯤 백발로 변해 있었다. 서하는 진운의 허리에 꽂힌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독고표, 네놈이 그렇게 원하던 마두의 힘을 똑똑히 보여주마.
서하가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의 신형이 검은 그림자가 되어 독고표의 진영 한복판으로 떨어졌다. 대지를 가르는 굉음과 함께 붉은 폭발이 일어났다. 독고표의 비명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거대한 파괴의 물결이었다.
진운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자신이 알던 순수했던 사제 서하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하지만 서하는 적들을 몰살한 뒤, 피 칠갑이 된 얼굴로 진운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가요, 사형. 천산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 위로 차가운 아침 안개가 내려앉았다.
천산으로 향하는 길목, 황량한 객잔의 낡은 탁자 위로 서하의 검이 놓였다. 검신을 감싼 낡은 천 사이로 기괴한 박동이 새어 나왔다. 진운은 마른침을 삼키며 서하의 안색을 살폈다. 서하의 왼쪽 뺨에는 붉은 혈관 문양이 문신처럼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사제, 몸은 좀 어떠냐. 단전의 기운이 뒤섞이는 게 느껴져?
서하는 대답 대신 찻잔을 들어 올렸다. 찻물이 검게 변하더니 이내 얼어붙어 버렸다.
내력이 제멋대로예요. 정파의 심법을 운용하려 하면 마기가 길을 막고, 마기를 억누르려 하면 온몸의 뼈가 마디마디 부서지는 것 같아요.
노인의 말이 맞았어. 빙궁의 만년한옥이 없으면 네 몸은 내부에서부터 타버릴 거다. 서둘러야 해.
진운이 짐을 챙기려 일어설 때, 객잔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차가운 눈바람과 함께 삿갓을 깊게 눌러쓴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허리춤에는 은색 방울이 달린 단검 두 자루가 매여 있었다.
거기 두 사람, 청운검문의 생존자들이 맞나?
여인의 목소리는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웠다. 진운이 즉시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누구냐. 혈의문의 사냥개냐?
사냥개라니, 실례군. 나는 빙궁의 전령, 설영이라고 한다. 너희가 찾는 만년한옥의 주인이지.
서하와 진운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설영은 객잔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하의 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검, 만마검이군. 백 년 전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재앙의 파편. 그걸 들고 천산에 오겠다고? 빙궁을 피바다로 만들 작정인가?
살기 위해서다. 다른 방법이 없다고 들었다.
서하의 말에 설영이 비웃음을 흘렸다.
살기 위해서 마검을 쥐었다라. 전형적인 변명이군. 하지만 만년한옥은 공짜가 아니다. 빙궁에 도달하기 전에 너희를 노리는 놈들부터 해결해야 할 거야.
무슨 소리냐. 독고표는 이미 죽었을 텐데.
진운의 물음에 설영이 삿갓을 벗었다. 그녀의 은색 눈동자가 서하를 꿰뚫어 보듯 빛났다.
독고표는 잔챙이에 불과해. 진짜 문제는 혈의문주, '혈왕'이다. 그자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어. 지금 이 객잔 주위로 혈의문의 정예 암살대인 '혈영대'가 포위망을 좁히고 있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객잔의 창문들이 일제히 깨지며 검은 그림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혈영대였다. 그들은 인간이라기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살인 기계에 가까웠다.
서하, 검 뽑지 마! 내가 막으마!
진운이 비호처럼 몸을 날려 청운검법의 정수를 펼쳤다. 하지만 혈영대원들의 협공은 매서웠다. 그들의 검은 진운의 검로를 정확히 읽어내며 그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윽!
진운의 허벅지에서 피가 뿜어졌다. 수적으로 너무 불리했다. 서하는 떨리는 손으로 탁자 위의 검을 쳐다봤다. 검이 다시 속삭였다. '베어라. 그러면 살려주마.'
안 돼...
서하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때 설영이 단검을 휘두르며 진운의 곁으로 뛰어들었다.
검을 쓰지 못하는 검사라니, 짐덩이가 따로 없군! 진운, 왼쪽으로 피해!
설영의 단검이 은색 궤적을 그리며 혈영대원 두 명의 목을 그었다. 하지만 적들은 끝도 없이 몰려왔다. 객잔 밖에서는 붉은 가마 하나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느냐.
가마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만으로 객잔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혈왕이었다. 그가 가마 밖으로 발을 내딛자 주변의 눈들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서하, 그 검은 원래 내 것이어야 했다. 네놈 같은 애송이의 장난감이 아니란 말이다.
혈왕이 손을 뻗자 강력한 흡자결이 발생했다. 서하의 손에 있던 만마검이 요동치며 혈왕에게 끌려가려 했다.
뺏길 순 없어!
서하가 본능적으로 검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서하의 단전에서 정체되어 있던 마기가 폭발했다. 서하의 눈이 다시 붉게 변하며, 그의 몸에서 검은 촉수 같은 기운이 뻗어 나와 혈왕의 흡자결을 끊어냈다.
오호, 마기와 공명하기 시작했나. 하지만 그게 네 파멸의 시작임을 모르느냐!
혈왕이 직접 도약했다. 그의 손바닥에는 피처럼 붉은 광기가 서려 있었다. 혈왕공 제구성, 혈해침식(血海浸蝕).
서하는 만마검을 휘둘러 그 공격을 받아냈다. 콰아앙! 객잔 건물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진운과 설영은 충격파에 밀려 밖으로 튕겨 나갔다.
사제!
진운이 소리쳤지만, 자욱한 먼지 속에서는 검은 기운과 붉은 기운이 미친 듯이 충돌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서하와 혈왕의 대결은 처절했다. 서하는 검의 의지에 몸을 맡긴 채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검을 휘둘렀고, 혈왕은 노련한 내공으로 서하의 초식을 흘려내며 그의 급소를 노렸다.
애송아, 검의 힘은 대단하다만 네 그릇이 너무 작구나!
혈왕의 손가락이 서하의 가슴팍을 찔렀다. 서하가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났다. 만마검의 빛이 급격히 약해졌다.
역시 무리인가...
서하가 정신을 잃어가려 할 때, 설영이 나타나 서하의 등에 손을 얹었다.
정신 차려! 내 빙궁의 진기를 네 단전에 주입하겠다. 마기를 억누르고 네 원래의 내공을 이끌어내!
설영의 차가운 진기가 서하의 체내로 흘러 들어왔다. 뜨겁게 타오르던 마기가 순간적으로 진정되었다. 서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청운 진기를 끌어올려 만마검의 마기와 융합시켰다.
이것은 마공도, 정파의 무공도 아니다...
서하의 검 끝에서 보랏빛 불꽃이 피어올랐다. 정(正)과 마(魔)가 합쳐진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빛이었다.
청운만마(靑雲萬魔) - 일검종결(一劍終結).
서하가 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보랏빛 검기가 반원을 그리며 수평선을 갈랐다. 혈왕은 경악하며 전력을 다해 방어막을 쳤으나, 보랏빛 검기는 그 방어막을 종잇장처럼 찢고 혈왕의 가슴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 이런 힘이... 있을 수 없다!
혈왕이 피를 쏟으며 뒤로 물러났다. 혈영대원들이 급히 달려와 혈왕을 보호하며 연막탄을 터뜨렸다.
오늘의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마! 서하, 네놈은 결국 검에 먹혀 죽을 것이다!
적들이 사라진 뒤, 서하는 검을 짚고 버티다 결국 바닥에 고꾸라졌다. 설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하를 바라봤다.
정말 미친놈이군. 정마합일(正魔合一)을 현장에서 성공시키다니.
진운이 절뚝거리며 다가와 서하를 부축했다. 서하의 백발이 아까보다 더 짙어져 있었다.
설영, 이제 우리를 빙궁으로 데려다줄 건가?
데려가야지. 저런 괴물을 무림에 그냥 풀어둘 순 없으니까. 하지만 명심해. 빙궁의 대설산은 이 객잔에서의 싸움보다 백 배는 더 가혹할 거야.
설영은 서둘러 말을 준비했다. 진운은 서하를 말에 태우고 자신도 말에 올랐다. 서하는 의식을 잃은 채로도 만마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검은 마치 주인을 위로하듯 은은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사제, 조금만 참아라. 이제 곧 천산이다.
세 사람은 눈보라가 치는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멀리 산맥의 그림자가 보였지만, 그곳에는 혈왕보다 더 무서운 빙궁의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도망친 혈왕은 자신의 가슴에 남은 보랏빛 상처를 보며 몸을 떨었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내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서하... 그놈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무림 맹주에게 연락해라. 새로운 마황(魔皇)의 탄생을 알려야겠다.
혈왕의 음모는 무림 전체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서하는 단순히 목숨을 구걸하는 도망자가 아니라, 전 무림의 공적이 될 위기에 처했다.
대설산의 입구에 도착한 서하 일행. 눈앞에는 끝도 없는 얼음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말로 갈 수 없다. 직접 걸어 올라가야 해. 만약 올라가다 멈추면 그대로 얼음 조각이 될 거다.
설영의 경고에 진운은 서하를 다시 등에 업었다. 서하가 희미하게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사형, 나를 버리고 가요. 내 안의 마귀가 자꾸 사형을 죽이라고 시켜요...
헛소리하지 마. 내가 죽으면 누가 네 제삿상에 술을 올리겠냐. 닥치고 붙잡기나 해.
진운은 이를 악물고 얼음 계단을 밟았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얼어붙는 고통이 전해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서하의 손에 든 만마검이 눈보라 속에서 붉게 빛나며 길을 인도하는 유일한 등불이 되어주었다.
계단의 끝, 거대한 얼음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 위에는 수백 명의 빙궁 무사들이 활을 겨누고 있었다.
멈춰라! 마기를 품은 자는 이 성을 넘을 수 없다!
성주가 직접 나와 소리쳤다. 설영이 앞으로 나섰다.
성주님, 이 아이는 제 손님입니다! 만년한옥의 시험을 받게 해주십시오!
만년한옥의 시험? 그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진운의 등에 업힌 서하가 스스로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만마검을 지팡이 삼아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죽음이 두려웠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습니다. 길을 여십시오.
서하의 눈에서 보랏빛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성주는 서하의 기세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길을 내주었다.
얼음 성의 지하 심처, 영롱한 푸른 빛을 내뿜는 거대한 옥덩어리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만년한옥이었다.
저 위에 앉아라. 하지만 기억해. 네 안의 마기와 한옥의 냉기가 싸우는 동안, 네 영혼은 지옥을 맛보게 될 거다.
서하는 말없이 만년한옥 위로 올라가 가부좌를 틀었다. 차가운 냉기가 그의 꼬리뼈를 타고 척추를 따라 뇌로 치솟았다. 서하의 입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터져 나왔고, 만마검은 그를 방해하듯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한옥과 충돌했다.
광장 전체가 진동하며 얼음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진운은 성벽을 붙잡고 사제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버텨라, 서하야! 제발 버텨!
서하의 의식 속에서, 그는 거대한 어둠의 심해를 헤엄치고 있었다. 그곳에는 만마검의 본체인 거대한 악마가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영혼을 팔아라. 그러면 이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악마의 유혹이 뇌리를 때렸다. 서하는 청운검문의 심법을 떠올렸다. '구름은 흐르되 형체에 얽매이지 않고, 검은 베되 마음은 베지 않는다.'
서하는 어둠 속에서 푸른 검 한 자루를 빚어냈다. 청운검문에서 처음 배웠던 나무 칼이었다.
내가 벨 것은 네놈이 아니라, 너를 두려워하는 내 마음이다!
서하의 목질 검이 악마의 심장을 꿰뚫었다. 현실의 서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기운이 일순간 청량한 푸른 빛으로 바뀌었다. 만년한옥의 냉기가 서하의 혈맥을 타고 흐르며 마기를 정화하고, 다시금 정마합일의 기운을 완성해갔다.
서하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은빛으로 변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붉지도, 푸르지도 않은 투명한 보석처럼 빛났다.
성공한 건가?
진운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하는 만마검을 가볍게 휘둘러 손목을 그었다. 흐르는 피는 붉었지만, 그 안에는 은색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사형, 이제야 검이 제 말을 듣네요.
하지만 평화는 짧았다. 빙궁의 성벽 너머로 수천 개의 횃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혈왕의 선동에 넘어간 정파 무림맹의 군대와 혈의문의 연합군이 대설산을 포위한 것이었다.
마두 서하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빙궁을 초토화하겠다!
무림맹주의 사자후가 산맥을 울렸다. 서하는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성벽 위로 올라갔다.
사형, 이번엔 제가 사형의 길을 열게요.
서하의 손에 든 만마검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신성하고도 파괴적인 진동을 시작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정마성자'의 강림이었다.
서하는 성벽에서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수천 명의 적군 한복판을 향해 떨어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떨어지는 유성 같았다.
서하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적진 한복판에 박혔다. 콰앙! 하는 파열음과 함께 대지가 뒤집혔고, 은빛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무림맹 무사 수십 명을 단숨에 튕겨냈다. 먼지 구름 속에서 서하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은발이 눈바람에 흩날리며 기묘한 광채를 내뿜었다.
무림맹주 제갈휘가 황금색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이 괴물 같은 놈, 빙궁의 성물까지 훔쳐 먹고 기어이 마두의 형상을 갖추었구나!
서하는 만마검의 검신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맑은 공명음이 대설산의 냉기를 갈랐다.
맹주님, 당신의 눈에는 제가 마두로 보이십니까? 아니면 당신의 권좌를 위협할 변수로 보이십니까?
시끄럽다! 정마(正魔)의 도는 섞일 수 없는 법. 네놈의 존재 자체가 무림의 재앙이다!
제갈휘의 검에서 황금빛 검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무림맹의 정종대법인 금강보검(金剛寶劍)이었다. 서하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검을 수직으로 세워 가볍게 휘둘렀다. 보랏빛과 은빛이 뒤섞인 검로가 황금빛 검기를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쿠르릉!
산맥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성벽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진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설영이 그의 어깨를 짚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 지금 저 싸움에 끼어드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야.
사제가... 사제가 저렇게 변했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습니까!
변한 게 아니야. 진화한 거지.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일지는 아무도 몰라.
적진 한가운데서 서하는 제갈휘의 맹공을 여유롭게 막아내고 있었다. 혈왕이 그 틈을 타 서하의 등 뒤를 노리며 혈조(血爪)를 들이밀었다.
죽어라, 서하!
서하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왼손을 뒤로 뻗었다. 혈왕의 붉은 마기가 서하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마치 늪에 빠진 듯 힘없이 사라졌다.
혈왕, 당신의 마기는 너무 탁하군요.
뭐라고?
서하가 손목을 비틀자 혈왕의 팔 뼈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서하는 그대로 혈왕을 걷어차 제갈휘 쪽으로 날려버렸다. 정파의 맹주와 마도의 거물이 한자리에 엉켜 나동그라졌다.
이게 무슨... 저놈의 내공은 대체 끝이 어디란 말이냐!
제갈휘가 입가에 고인 피를 닦으며 소리쳤다. 서하는 만마검을 낮게 깔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의 얼음들이 꽃 모양으로 피어났다.
저는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길을 비키라고 말하러 온 것이죠. 청운검문은 멸문당했지만, 그 정신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웃기지 마라! 멸문당한 문파의 찌꺼기가 감히 무림의 질서를 논하느냐!
제갈휘가 품 속에서 무림맹의 비기인 천라지망(天羅地網)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러자 매복해 있던 수백 명의 궁수들이 독화살을 퍼부었다.
사제! 위험해!
진운이 성벽에서 뛰어내리려 했으나, 서하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서하의 주변으로 거대한 은빛 구체가 형성되었다. 화살들은 구체에 닿자마자 미세한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제갈휘, 당신은 무림의 평화보다 자신의 권위가 더 중요한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그 권위, 제가 오늘 여기서 꺾어드리겠습니다.
서하의 신형이 사라졌다. 쾌검(快劍)의 단계를 넘어선 신법이었다. 제갈휘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으나 이미 서하의 만마검은 그의 목줄기에 닿아 있었다.
멈춰라!
그때, 대설산 위쪽에서 노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하의 검 끝이 제갈휘의 피부를 살짝 긋고 멈췄다.
빙궁의 태상교주였다. 수십 년간 폐관 수련 중이던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든 무사가 무릎을 꿇었다.
그 검을 거두게, 젊은이. 자네의 분노는 이해하나, 여기서 맹주를 죽이면 무림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네.
태상교주님, 이 자들은 제 사제와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진운이 달려와 서하의 곁에 섰다. 태상교주는 서하의 은발과 투명한 눈동자를 유심히 살피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군. 정마합일의 완성이라... 백 년 전 그분도 이루지 못한 경지네. 하지만 그 힘을 쓸수록 자네의 인간적인 감정은 메말라갈 걸세. 결국 차가운 신상(神像)처럼 변하게 되겠지.
그게 제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서하가 검을 거두었다. 제갈휘는 공포와 수치심에 몸을 떨며 부하들을 데리고 퇴각했다. 혈왕 역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다음 기회를 노리는 듯 사라졌다.
상황이 정리되자 서하는 긴장이 풀린 듯 비틀거렸다. 진운이 급히 그를 부축했다.
서하야, 괜찮아? 정신이 들어?
사형... 이제 배고파요.
서하의 말에 진운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은발의 마두니 정마성자니 해도, 결국 자신의 철부지 사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태상교주는 두 사람을 빙궁의 밀실로 안내했다.
여기서 자네들의 신분을 숨겨주겠네. 하지만 소문은 금방 퍼질 거야. 전 무림이 자네를 노릴 테니, 당분간은 이곳에서 힘을 완벽히 통제하는 법을 배우게.
태상교주님, 저 검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진운이 탁자 위에 놓인 만마검을 가리켰다. 검은 이제 붉은 빛을 잃고 은은한 보랏빛 광채만 내고 있었다.
저 검은 마도의 무기가 아니네. 원래는 '천명검'이라 불리던 성검이었지. 주인의 마음이 비뚤어지면 마검이 되고, 주인의 마음이 맑으면 성검이 되는 거울 같은 존재일 뿐이야. 서하 군이 자신의 어둠을 이겨냈기에 저 검도 본연의 모습을 찾은 걸세.
서하는 검자루를 쓰다듬었다. 검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사형, 저는 무림을 제패할 생각 같은 건 없어요. 그저 우리 문파를 망가뜨린 놈들에게 복수하고, 사형이랑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에요.
나도 안다. 하지만 세상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진운의 말대로, 빙궁 밖 무림은 이미 서하의 이야기로 들끓고 있었다. 정파에서는 그를 '은발마황'이라 부르며 토벌대를 조직하려 했고, 마도 세력은 그를 새로운 주군으로 모시겠다며 혈안이 되었다.
며칠 뒤, 설영이 밀실로 들어와 급박한 소식을 전했다.
서하, 진운. 큰일 났어. 중원 본토에서 청운검문의 생존자가 발견됐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너희 말고 또 다른 제자가 살아있대.
뭐라고? 누구지? 설마 소천 사제인가?
진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확한 건 몰라. 하지만 혈의문에서 그 제자를 미끼로 너희를 유인하려 한다는군. 장소는 낙양의 낙화곡이야.
함정인 걸 알면서도 가야겠군요.
서하가 만마검을 등에 메었다. 아직 내공이 완벽히 안정되지 않았지만, 형제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도 간다. 이번엔 절대로 네 등 뒤에서 구경만 하지 않아.
진운이 새로운 검을 고쳐 잡았다. 설영도 단검을 챙기며 덧붙였다.
나도 동행하지. 빙궁의 전령으로서 이 사건의 끝을 확인해야겠어.
세 사람은 태상교주의 배웅을 받으며 대설산을 내려왔다. 이번엔 도망자가 아니라, 무림의 폭풍 속으로 직접 뛰어드는 도전자로서의 발걸음이었다.
낙양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자객들이 습격해왔다. 하지만 은발의 서하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적들은 낙엽처럼 쓰러졌다. 서하의 검술은 점점 더 간결해졌고, 살기는 사라진 대신 압도적인 위압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
낙화곡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수천 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혈의문뿐만 아니라, 서하의 힘을 탐내는 수많은 중소 문파가 연합해 있었다.
서하! 네 이놈, 드디어 나타났구나! 사제의 목숨을 구하고 싶으면 검을 버리고 항복해라!
곡개 안쪽, 십자가에 묶인 어린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청운검문의 막내 제자, 소천이었다. 소천의 몸은 이미 모진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사형들... 오지 마세요! 함정이에요!
소천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하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보랏빛으로 타올랐다. 주변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서하의 발밑에서부터 얼음꽃이 피어올랐다.
사형, 설영 낭자. 소천이를 부탁해요. 적들은 제가 상대합니다.
서하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내력이 하늘을 뒤덮어 태양마저 가려버렸다.
오늘, 낙화곡은 피가 아니라 얼음으로 뒤덮일 것이다.
서하의 선언과 함께 만마검이 울부짖었다. 수천 명의 무사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달려들었지만, 서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검을 허공에 던졌고, 검은 수십 개의 환영으로 나뉘어 적진을 유성처럼 타격하기 시작했다.
이게 정녕 인간의 무공이란 말인가!
적들의 비명이 곡곡마다 울려 퍼졌다. 서하는 그 지옥 같은 풍경 속을 유유히 걸어 소천에게 다가갔다. 그를 막아서는 자는 누구든 얼음 조각이 되어 부서졌다.
드디어 소천의 앞에 도달한 서하가 줄을 끊어냈다. 소천을 등에 업은 진운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미안하다, 늦어서.
이제 가요. 우리 집으로.
하지만 그때, 곡개 깊은 곳에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검은 그림자가 솟구쳤다. 혈왕이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이전과는 달랐다. 온몸이 기괴한 갑옷으로 덮여 있었고, 그에게서는 서하와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불길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서하, 나도 얻었다. 만마검의 짝인 '천마갑'을! 이제 진정한 마황이 누구인지 가려보자꾸나!
혈왕의 거대한 주먹이 서하를 향해 쏟아졌다. 서하는 소천과 진운을 뒤로 밀쳐내며 검을 수평으로 세웠다.
사형, 먼저 가세요. 이놈은 제가 끝내야 할 업보예요.
서하와 혈왕의 진정한 결전이 시작되려는 찰나, 하늘에서 거대한 구름 소용돌이가 치며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림의 이면에서 세상을 조종하던 '천외천(天外天)'의 감시자들이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이 태어났군. 하지만 균형을 깨뜨리는 자는 제거해야지.
그들의 손끝에서 서하와 혈왕을 동시에 겨냥한 거대한 뇌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찢는 뇌전이 서하와 혈왕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천외천의 감시자들이 내린 심판이었다. 서하는 찰나의 순간, 만마검을 허공으로 던졌다. 은빛 검기가 나선형을 그리며 솟구쳐 벼락을 받아냈고, 지면은 폭발적인 진동과 함께 움푹 패였다.
혈왕은 천마갑의 검은 기운을 방패 삼아 버텼으나, 갑옷 곳곳에 균열이 가며 검은 피를 토했다.
네놈들... 감히 내 결투를 방해해!
혈왕이 하늘을 향해 포효했지만, 구름 위 감시자들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무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과분한 힘은 회수한다. 그것이 천명의 뜻이다.
서하는 입가에 고인 피를 닦아내며 만마검을 다시 쥐었다. 검신은 이제 투명할 정도로 맑은 은색을 띠고 있었다.
천명?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자들이 감히 천명을 논하는가.
서하가 땅을 박차고 올랐다. 그는 혈왕이 아닌, 구름 위의 감시자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보랏빛과 은빛이 융합된 일격이 하늘의 구름을 양단했다.
무례하구나!
감시자 중 한 명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거대한 황금빛 장인(掌印)이 하늘에서 내려와 서하를 압박했다. 서하의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곡예 안에 울려 퍼졌다.
사제!
진운이 소천을 설영에게 맡기고 검을 뽑아 들었다.
저 놈들이 우리 인생을 망치게 두지 마라! 청운검법 최종장, 만운귀일(萬雲歸一)!
진운의 검기가 서하의 뒤를 받쳤다. 사형제의 내력이 하나로 합쳐지자, 하늘을 덮던 황금빛 장인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혈왕은 그 광경을 보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천외천의 개들도 당황하는구나! 좋다, 서하! 오늘만은 네놈과 손을 잡으마! 천마폭멸(天魔爆滅)!
혈왕이 자신의 심장을 쥐어짜 내력을 폭발시켰다. 검은 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천외천의 감시자들을 덮쳤다. 정(正), 마(魔), 그리고 그 경계를 허문 힘이 하나로 모여 하늘의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낙화곡 상공에서 전무후무한 폭발이 일어났다. 빛이 세상을 삼켰고, 잠시 동안 정적만이 흘렀다.
먼지가 걷히자, 하늘의 구름은 사라졌고 감시자들의 기척도 끊겨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혈왕은 천마갑이 산산조각 난 채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헐떡였고, 진운은 서하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서하 역시 온몸의 혈맥이 터져 은발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겼... 나요?
소천이 기어가 서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서하는 대답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감시자들은 물러갔으나, 그들이 남긴 기운은 여전히 서하의 체내에서 마기와 싸우며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서하, 정신 차려! 네 내공이 역류하고 있어!
설영이 다급히 다가와 서하의 혈도를 짚으려 했으나, 서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녀의 손을 밀쳐냈다.
설영 낭자... 사형과 소천이를 데리고 멀리 가세요. 놈들이 다시 올 겁니다.
무슨 소리야! 너를 두고 어디를 가!
서하는 천천히 일어섰다. 만마검이 지면을 긁으며 불꽃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투명함을 넘어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허공처럼 변해 있었다.
저는 이제 인간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힘을 다 쓰면, 저는 저 검의 일부가 되겠지요.
서하가 검을 휘두르자 바닥에 박혀 있던 수천 자루의 검들이 일제히 공중에 떠올랐다.
가세요. 제가 길을 막겠습니다.
곡예 입구로 무림맹의 잔당들과 새로운 자객들이 개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의 이변을 보고도 서하의 힘을 탐내며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진운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서하야... 안 된다. 같이 가기로 했잖아...
사형, 청운검문을 다시 세워주세요. 그게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서하가 진운의 가슴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진운과 소천, 설영은 서하가 만든 기류에 휩쓸려 곡예 밖으로 밀려 나갔다.
서하는 홀로 남은 낙화곡 중앙에서 만마검을 두 손으로 잡았다.
오너라. 무림의 탐욕들아. 오늘 이 곡예를 너희의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서하의 전신에서 은색 빛줄기가 수만 갈래로 뻗어 나갔다. 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서하의 주변 십 장 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소리도 없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한편, 곡예를 빠져나온 진운 일행은 멀리서 무너져 내리는 산맥을 바라보았다. 굉음과 함께 낙화곡 전체가 거대한 얼음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건 서하의 마지막 초식이었다. 자신의 모든 생명력과 내력을 얼려 적들과 함께 영원히 잠드는 초식.
사제... 서하야!
진운의 통곡이 눈 덮인 대지를 울렸다.
세월이 흘러, 무림에는 '은발의 검신'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무림맹은 해체되었고, 혈의문 역시 그날 이후 종적을 감췄다.
중원 변방의 어느 산자락, 청운검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작은 도관에서 진운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이제는 장성한 소천이 검술을 지도하고 있었다.
스승님, 저기 대설산 쪽에 은색 빛이 났어요!
한 아이가 산맥 너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진운은 하던 일을 멈추고 북쪽을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있나. 그저 눈에 반사된 햇빛이겠지.
하지만 진운의 손에 들린 낡은 목검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멀리 있는 누군가의 부름에 응답하듯.
같은 시각, 얼음으로 뒤덮인 채 폐쇄된 낙화곡 깊은 곳. 수천 년간 녹지 않을 것 같던 얼음 속에서 누군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곁에 꽂혀 있던 은색 검이 공명을 시작했다.
서하의 투명한 눈동자가 천천히 열렸다. 그의 머리카락은 이제 눈보다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사형... 약속은 지켰어요.
서하가 얼음을 깨고 걸어 나왔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겨울이 물러가고 푸른 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정마합일을 넘어, 생과 사의 경계마저 허물어버린 자의 귀환이었다.
하지만 서하의 앞에는 예전보다 더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천외천의 본체가 직접 무림으로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서하는 만마검을 고쳐 메며 하늘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엔 내가 올라가지.
서하의 신형이 한 줄기 빛이 되어 하늘로 솟구쳤다. 무림의 전설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천상(天上)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 위, 거대한 황금 궁전의 문 앞에 선 서하.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수만 명의 천병(天兵)들이었다.
이곳은 필멸자가 발을 들일 곳이 아니다!
서하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궁전의 거대한 문이 종잇장처럼 베여 나갔다.
필멸자가 아니라, 너희가 잊고 있던 공포가 돌아온 것이다.
서하의 은빛 검기가 황금 궁전을 뒤덮으며, 진정한 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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