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죽이려는 영웅을 죽이기로 했다 [프롤로그] 신들이 버린 세계의 끝에서

2026. 6. 3. 11:35만화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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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믿나, 레온?”

심장을 파고드는 차가운 강철의 감촉과 함께,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기사단의 황금빛 갑옷은 이미 적들의 검은 피와 나의 붉은 피로 더러워진 지 오래였다. 한때 대륙의 구원자라 불리던 영웅, 성기사단장 카이엔. 그가 지금 내 가슴에 검을 꽂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이 세상은 매번 멸망의 도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지? 왜 인간은 고작 신들이 짜 놓은 판 위에서 꼭두각시처럼 춤춰야 하느냐는 말이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핏덩이를 삼키며 그를 노려보았다.

황궁의 대성전은 이미 지옥도나 다름없었다. 마수들의 울부짖음과 동료들의 비명.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결성된 최정예 원정대는, 믿었던 동료의 배신으로 인해 이곳에서 전멸했다.

카이엔은 천천히 검을 비틀었다. 폐부를 찢는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예언에 나온 ‘빛의 용사’는 내가 아니다, 레온. 그리고 이 세계를 구원할 방법은 신들의 뜻을 따르는 게 아니야.”
“너는…… 미쳤어…….”
“그래, 미쳤지. 신의 목을 베기 위해 마왕의 손을 잡았으니.”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불길한 흑색으로 물들었다. 마기(魔氣). 대륙에서 가장 성스럽던 자가, 가장 추악한 심연의 힘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다려라. 신들의 정원을 불태우고, 이 빌어먹을 운명의 굴레를 내 손으로 부숴버릴 테니.”

스윽.

가슴을 관통했던 검이 무자비하게 뽑혀 나갔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와 함께 내 몸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심장의 고동이 느려졌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 빌어먹을 세상을 지키기 위해 밑바닥에서부터 구르고 구르며 마침내 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결말은 믿었던 동료의 배신과 허무한 죽음뿐이었다.

눈물이 피와 섞여 뺨을 타고 흘렀다. 신이시여,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왜 우리를 방관하십니까. 왜 이 비극을 지켜만 보십니까.

모든 빛이 꺼지고, 완벽한 어둠이 나를 집어삼키기 직전.
귓가에 기괴하고 정체 모를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시스템] 세계의 파멸을 감지합니다.
[시스템] 인과율의 균열이 발생했습니다.
[시스템] 고유 특성 ‘복수귀(EX)’가 각성합니다.

[시스템]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플레이어 ‘레온’의 시간을 강제로 회귀합니다.

“……윽!”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도, 가슴을 찌르는 통증도, 사방을 가득 채웠던 피비린내도 없었다.

쾌적하고 좁은 방. 낡은 나무 침대.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성기사단의 신성검이 아닌, 용병 시절 쓰던 이 빠진 철검이었다.

거울 속에는 10년 전, 모든 비극이 시작되기 전의 앳된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내가 돌아온 것이다.
세계가 멸망하기 10년 전, 그리고 그 배신자가 아직 '영웅'으로 추앙받기 전의 시간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며 철검의 자루를 쥐었다. 이번 생의 목적은 세계의 구원 따위가 아니다.

“카이엔…… 네가 신의 목을 베겠다면, 나는 네 목을 베겠다.”

신마저 기만한 회귀자의 복수극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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