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4. 14:56ㆍ만화 애니
본 스토리는 순수하게 창작된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및 무공 명칭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오로지 오락을 목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또한 본문에 묘사된 무기나 독물, 특정 행동 등은 현실에 적용될 수 없는 가상의 설정이므로 모방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제1장 서리 내린 무덤의 노래
천하의 기운이 뒤섞이는 낙양의 외곽, 북망산의 끝자락에는 이름 없는 무덤 하나가 있었다. 그곳은 한겨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시사철 서늘한 냉기가 감돌아 마을 사람들도 접근을 꺼리는 금지의 땅이었다. 무덤 앞에는 비석조차 없었으며, 오직 반쯤 부러진 녹슨 검 한 자루만이 대지에 박혀 이곳에 잠든 이의 사연을 짐작게 할 뿐이었다.
달빛조차 구름에 가려 숨죽이던 어느 날 밤, 적막을 깨고 대지를 울리는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도포를 뒤집어쓴 중년의 사내가 무덤 앞에 멈춰 섰다. 그의 눈매는 날카로운 칼날 같았고, 몸에서는 숨길 수 없는 피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바로 흑도(黑道)의 악명을 떨치던 혈풍방의 부방주, 장무기였다.
그가 이 황량한 무덤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전설로만 내려오던 무림 최고의 기서, 빙백진경(氷魄眞經)이 이곳에 묻혀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빙백진경은 천 년 전 천하를 호령했던 빙궁의 태조가 남긴 비급으로, 이를 익히는 자는 세상의 모든 화기를 제압하고 절대적인 냉기를 다스릴 수 있다고 전해졌다.
장무기가 허리춤에서 육중한 대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내공을 끌어올리자 대검에서 붉은 기운이 솟구쳤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무덤을 내리찍으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허공을 가르는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장무기의 발밑에서부터 푸른 서리가 급격히 번져나갔다. 장무기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비어 있어야 할 무덤 위, 부러진 녹슨 검 자루 위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눈처럼 하얗고,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투명했다.
너는 누구냐? 장무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년은 대답 대신 박혀 있던 녹슨 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었다. 그 순간, 부러진 칼날 위로 투명한 얼음이 맺히더니 순식간에 완벽한 검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곳은 죽은 자들의 안식처다. 산 자가 가져갈 것은 오직 자신의 목숨뿐이지.
소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지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갈라지기 시작했다. 장무기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깨운 것은 무덤이 아니라, 무림의 질서를 뒤엎을 거대한 폭풍이었다는 것을.
제2장: 깨어난 빙룡의 후예
장무기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혈풍방에서 수많은 사투를 겪으며 다져진 감각이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눈앞의 소년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만년 한빙이 의지를 가지고 형상화된 존재처럼 느껴졌다.
네놈이 빙백진경의 수호자냐? 아니면 그 비급을 먼저 가로챈 도둑놈이냐!
장무기가 소리를 지르며 대검을 휘둘렀다. 붉은 내력이 응집된 혈풍참이 소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공기가 타오르는 듯한 열기가 무덤가를 뒤덮었으나, 소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소년이 쥐고 있는 얼음 검이 가볍게 허공을 그었다.
찰나의 순간, 붉은 열기는 힘없이 흩어졌고 사방은 정적에 휩싸였다. 장무기는 자신의 대검이 소년의 얼음 검에 닿기도 전에 멈춰버렸음을 깨달았다. 검신에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앉아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손바닥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냉기에 마비되어 갔다.
소년이 검 자루에서 손을 떼자, 장무기는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혈기 왕성하던 손은 이미 시퍼렇게 죽어 있었다.
이곳에 묻힌 것은 비급 따위가 아니다. 소년이 무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것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지.
그때였다. 북망산의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안광이 번뜩였다. 장무기를 뒤따라온 혈풍방의 정예 무사들이었다. 그들은 부방주가 쓰러진 것을 보고는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었다.
방주님의 명이다! 저 묘를 파헤치고 아이를 생포하라!
수십 명의 무사가 소년을 향해 쇄도했다. 각종 기문병기와 암기가 밤하늘을 수놓으며 소년의 사방을 가로막았다. 소년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발을 한 번 내딛자, 무덤을 중심으로 반경 십 장 이내의 모든 초목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부서져 내렸다.
천지냉기, 빙하만리.
소년의 입술이 가볍게 달싹였다. 그것은 무공의 초식이라기보다 대자연에 내리는 명령에 가까웠다. 대기 중의 수분이 일제히 응고되며 수천 개의 얼음 송곳으로 변해 혈풍방 무사들의 가슴을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를 틈이 없었다. 단 한 초 만에 북망산의 한 귀퉁이는 거대한 얼음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홀로 살아남은 장무기는 이 공포스러운 광경을 목도하며 뒤로 기어갔다. 소년은 그를 죽이지 않았다. 대신 얼어붙은 무덤 옆에 서서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서 전해라. 빙궁의 후예가 돌아왔다고. 그리고 이 무덤의 주인을 깨운 대가는 무림 전체가 치르게 될 것이라고.
소년의 등 뒤로 거대한 용의 형상을 한 냉기가 치솟으며 하늘을 가렸다. 장무기는 정신없이 산 아래로 도망쳤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이제 무림의 태평성대는 끝났다는 확신뿐이었다.
제3장: 낙양의 푸른 달밤
장무기가 피칠갑이 된 채 혈풍방의 거점에 도착했을 때, 낙양의 밤은 평소보다 더욱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방주 사도천은 화려하게 장식된 집무실에서 보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장무기의 모습은 참혹했다. 한쪽 팔은 이미 검게 괴사하여 감각을 잃었고, 눈동자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로 초점이 풀려 있었다.
방주님,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장무기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사도천이 신형을 날려 그의 맥을 짚었으나, 손끝에 닿는 기운은 사람의 체온이 아니었다. 장무기의 혈관 속에는 피 대신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돌아다니는 듯했다. 사도천이 급히 내공을 주입해 한기를 몰아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의 손등에 서리가 맺히며 내력이 반탄되었다.
빙궁의 무공이라니. 백 년 전 멸문당했다던 북해빙궁이 어찌하여 이곳 북망산에 나타났단 말이냐.
사도천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는 즉시 전령을 소집했다. 낙양에 상주하는 구파일방의 세력들과 흑도의 다른 방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했다. 만약 빙궁의 후예가 정말로 나타난 것이라면, 이는 단순한 보물 찾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림의 주도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격변의 신호탄이었다.
그 시각, 북망산을 내려온 소년의 발걸음은 낙양 성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백운. 그는 천 년 전 세상을 얼려버리려 했던 빙룡의 혈맥을 잇는 마지막 생존자였다. 백운이 성문을 통과할 때마다 바닥에 깔린 돌들이 미세하게 갈라지며 서늘한 김을 내뿜었다.
성문 파수병들은 소년의 기이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히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소년은 번화한 낙양의 거리를 무심하게 걸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술 냄새, 그리고 탐욕스러운 눈빛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백운은 품속에서 낡은 노리개 하나를 꺼냈다. 무덤 속에 누워 있던 여인이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유품이었다.
이곳이 당신이 사랑했던 세상입니까.
백운의 목소리는 칼바람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거리를 걷다 멈춰 서서 가장 높이 솟은 누각, 만향루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은 낙양의 모든 정보와 권력이 모이는 곳이자, 혈풍방이 관리하는 최대의 유흥가였다. 백운은 손에 쥐고 있던 얼음 검의 자루를 고쳐 쥐었다.
오늘 밤, 낙양의 뜨거운 열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백운이 만향루의 입구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건물 전체의 유리창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깨져 나갔다. 안에서 들려오던 음악과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비명으로 바뀌었다. 붉은 등을 밝히며 화려함을 뽐내던 만향루는, 입구에서부터 푸른빛 서리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제4장: 만향루의 결빙
만향루의 거대한 정문이 얼어붙어 산산조각 났다. 파편이 비산하는 사이로 백운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술을 마시던 무객들과 기녀들은 갑작스러운 한기에 몸을 떨며 비명을 질렀다. 실내를 장식하고 있던 화로의 불꽃들이 백운의 발걸음에 맞춰 하나둘 푸른빛으로 변하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누구냐!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발을 들이느냐!
누각 2층에서 거구의 사내 셋이 뛰어내렸다. 혈풍방의 행동대장급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육중한 철퇴와 도를 휘두르며 백운을 압박했다. 하지만 백운은 검을 뽑지도 않았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공중에 떠다니던 미세한 물방울들이 순식간에 응결되어 날카로운 비수로 변했다.
빙정환영사(氷晶幻影絲).
보이지 않는 얼음 실들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거구의 사내들은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허공에 멈춰 섰다. 그들의 관절 마디마디에 투명한 얼음 실이 박혀 움직임을 봉쇄한 것이다. 사내들은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들의 피부 위로 하얀 성에가 피어올랐다.
백운은 그들을 지나쳐 누각 중앙의 화려한 무대로 향했다. 그곳에는 만향루의 주인이자 혈풍방의 책사인 '만화수' 설희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앉아 있었다. 그녀는 소매 속에서 수십 개의 독침을 장전한 채 가느다란 목소리로 물었다.
빙궁의 소공자께서 낙양의 미천한 술집에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백운이 멈춰 섰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가 설희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이곳 지하에 갇혀 있는 아이들을 내놓아라.
설희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혈풍방이 낙양의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비밀리에 독인(毒人)으로 육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방주와 자신만이 아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설희는 강제로 미소를 지으며 시치미를 뗐다.
아이들이라니요? 이곳은 오직 풍류를 아는 자들을 위한...
거짓은 한기를 부르는 법.
백운이 오른발로 바닥을 가볍게 굴렀다. 콰광! 만향루의 바닥 전체가 거대한 얼음 송곳에 뚫리며 솟구쳐 올랐다. 화려한 목조 바닥이 찢어지며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지하 통로의 정체가 드러났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 구덩이에서는 수십 명의 어린아이가 쇠사슬에 묶인 채 신음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백운의 주위로 살기가 폭발했다. 그가 들고 있던 녹슨 검이 울음을 터뜨렸다.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지를 얼리고 하늘을 가두는 빙룡의 진정한 분노였다.
오늘 밤, 낙양의 혈풍방은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다.
백운의 선언과 함께 만향루 전체가 푸른 빛에 휩싸였다. 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목격했다. 거대한 누각이 단숨에 거대한 얼음 조각상으로 변해버리는 기적과도 같은 공포를. 그리고 그 얼음 성벽 사이로, 분노한 빙룡의 포효와 같은 검기가 낙양의 밤하늘을 갈랐다.
제5장: 빙룡의 포효
만향루 전체를 뒤덮은 거대한 얼음 기둥이 달빛을 받아 시퍼렇게 빛났다. 낙양의 명물이었던 화려한 누각은 이제 누구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거대한 동토의 성벽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쿠르릉!
얼음 성벽의 한 축이 거대한 폭발과 함께 터져 나갔다. 붉은 불꽃이 섞인 광폭한 내공이 얼음을 녹이며 길을 냈고, 그 사이로 혈풍방의 방주 사도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 들린 적혈대도(赤血大刀)는 마치 핏물을 머금은 듯 기괴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애송이! 감히 내 가업을 이 꼴로 만들다니, 네놈의 골수를 얼려서 술잔으로 삼아주마!
사도천은 낙양 흑도의 정점에 선 사내답게 일류 고수의 기세를 유감없이 쏟아냈다. 그가 대도를 한 바퀴 휘두르자 주변의 얼음들이 승화되어 안개로 변했다. 그는 자신의 최상승 무공인 혈염마공(血焰魔功)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백운은 지하에서 끌어 올린 아이들을 성 밖으로 안전하게 내보낸 뒤였다. 그는 사도천의 광기 어린 외침에도 흔들림 없이 녹슨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검신을 감싼 투명한 얼음층이 사도천의 열기에 반응하며 팽팽한 기싸움을 벌였다.
네가 태운 불꽃만큼의 원혼이 발밑에서 울고 있다.
백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르게 사도천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혈염섬(血焰閃). 붉은 잔상을 남기며 쇄도한 사도천의 대도가 백운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수십 개의 초식이 찰나에 겹쳐지며 공간을 가열했다.
하지만 백운의 보법은 유려했다. 그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붉은 칼날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백운의 발이 닿는 곳마다 얼음 꽃이 피어나 사도천의 발목을 붙잡았다.
빙화만개(氷花滿開).
백운이 검을 가로로 그었다. 그러자 허공에 피어있던 서리 입자들이 일제히 폭발하며 수만 개의 날카로운 파편으로 변해 사도천을 덮쳤다. 사도천은 급히 대도를 휘둘러 원형의 방어막을 형성했지만, 파편 하나하나에 실린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다.
크윽! 이 말도 안 되는 내력은 뭐냐!
사도천의 어깨와 허벅지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그러나 그 핏방울조차 바닥에 닿기도 전에 얼음 구슬이 되어 굴러다녔다. 백운은 감정이 거세된 인형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사도천에게 다가갔다. 백운이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낙양의 온도는 눈에 띄게 떨어졌고, 구경하던 무림인들은 눈썹에 서리가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사도천은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우는 금기를 발동했다. 그의 전신이 붉은 화염으로 뒤덮이며 거대한 악마의 형상을 이루었다.
죽어라! 혈염신장(血焰神掌)!
거대한 불꽃 손바닥이 백운을 향해 짓눌러 왔다. 낙양 대지를 통째로 태워버릴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백운은 검을 거두고 왼손을 천천히 뻗었다. 소년의 손바닥 끝에서 푸른 용의 눈동자가 번뜩이는 듯했다.
빙룡토식(氷龍吐息).
몰아치는 불길이 백운의 손끝에 닿는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지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붉은 화염은 밑바닥에서부터 푸른색으로 물들며 거대한 얼음 조각이 되어 허공에 매달렸다. 사도천의 눈이 경악으로 뒤집혔다. 자신의 절초가, 생명을 깎아 만든 불꽃이 얼어붙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백운의 손이 사도천의 가슴에 닿았다.
안식하라. 뜨거운 죄악 속에서.
바스락. 사도천의 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투명한 얼음상이 되었다. 백운이 손을 떼자, 낙양의 거물이었던 사내의 육신은 수만 개의 얼음 가루가 되어 밤바람에 흩어졌다.
낙양의 밤은 고요해졌다. 무너진 만향루 터 위로 소년만이 홀로 서 있었다. 그때, 얼어붙은 잔해 속에서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사도천의 부하도, 기녀도 아니었다. 백운이 구출했던 아이들 중 가장 뒤늦게 빠져나온, 눈동자에 기이한 보랏빛이 감도는 소녀였다.
제6장: 보랏빛 눈의 아이
만향루의 잔해 위로 흩어지는 얼음 가루들은 마치 죽은 자들을 위로하는 만가처럼 보였다. 백운은 무너진 얼음 기둥 끝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낙양의 소란은 일단락되었으나, 그의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때, 얼어붙은 목조 파편 사이로 작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도망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소녀가 백운을 향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소녀의 옷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온몸에는 독인 실험의 흔적인 검은 반점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백운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소녀의 눈이었다.
깊은 밤의 어둠을 닮은 보랏빛 눈동자. 그 안에는 공포가 아니라, 타오르는 불꽃 같은 갈망이 담겨 있었다.
살려달라고 하지 않겠느냐?
백운의 차가운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얼음 바닥을 짚은 손이 쩍쩍 달라붙어 피가 흐르는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백운의 발치까지 기어와 옷자락을 붙잡았다.
데려가 주세요.
소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단호했다. 백운은 자신을 붙잡은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온기를 느꼈다. 그것은 그가 평생 잊고 살았던, 혹은 잊어야만 했던 산 자의 체온이었다.
너를 데려가면 네 인생은 얼음장 같은 고통 속에서 평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래도 좋으냐?
상관없어요. 저들을 죽인 그 힘을 가르쳐주세요. 저도... 얼려버리고 싶어요.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을.
백운은 잠시 침묵했다. 소녀의 눈에서 읽히는 것은 빙룡의 후예인 자신과 닮은꼴의 분노였다. 그는 무심하게 소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내력이 소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가며 몸 안의 독기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고통에 신음할 법도 한데,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백운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연우라고 불러요.
백운은 연우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얼음 성벽 밖에서는 이미 수많은 무림인의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낙양 성의 관군들과 정파의 명숙들이 이 전대미문의 사태를 확인하기 위해 들이닥칠 터였다. 백운은 그들과 마주할 이유가 없었다.
가자, 연우야.
백운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가 머물렀던 자리에는 차가운 서리만이 남아 소용돌이쳤다.
잠시 후, 낙양 무림의 실권자들이 만향루 터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절반쯤 녹아내린 거대한 얼음 지옥과 가루가 되어 사라진 사도천의 흔적뿐이었다. 정파 연맹 천무맹의 일원이자 낙양 제일검이라 불리는 청운검객 소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것은 일개 문파의 소행이 아니다. 무림의 재앙이 다시 깨어난 것이야.
소호의 떨리는 목소리가 낙양의 밤공기를 갈랐다. 한편, 낙양을 벗어나 북쪽으로 향하는 백운의 등 뒤로 연우는 멀어지는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이제 눈물 대신 푸른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또 다른 전설의 시작이었다.
제7장: 설산의 추격자
낙양을 벗어난 백운과 연우의 발걸음은 험준한 태행산맥의 줄기를 타고 북으로 향했다. 백운은 연우의 몸속에 남은 독기를 억누르기 위해 매일 밤 자신의 진기를 나누어 주었다. 빙룡의 차가운 내공은 연우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독을 얼려 잠재웠지만, 동시에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극심한 오한을 안겨주었다.
스승님, 춥지 않아요.
연우는 하얗게 질린 입술로 강단 있게 말했다. 백운은 대답 대신 자신의 도포를 소녀에게 덮어주었다. 그는 스승이라 불리는 것이 어색했으나, 연우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갈망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우리를 쫓는 기운이 가까워졌다.
백운의 시선이 산 아래 운무가 낀 계곡을 향했다. 낙양에서의 참변 이후, 정파 연맹인 천무맹은 전례 없는 비상소집령을 내렸다. 그들이 보낸 추격대는 단순히 숫자가 많은 것이 아니었다. '추혼오살'이라 불리는, 살수보다 더 집요하게 목표를 쫓는 다섯 명의 고수들이 백운의 뒤를 바짝 바짝 뒤쫓고 있었다.
휘이익!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다섯 개의 검은 그림자가 백운의 사방을 포위했다. 그들은 각자 특이한 형상의 병기를 들고 있었으며, 기색을 완전히 지우는 잠행술에 능했다. 그중 우두머리인 일살(一殺)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빙궁의 생존자여, 네놈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낙양성 전체를 사고도 남을 수준이다. 순순히 목을 내놓는다면 저 아이의 목숨줄은 붙여주마.
백운은 연우를 자신의 뒤로 갈무리했다. 그의 손이 허공을 훑자, 주변의 습기가 순식간에 응결되며 투명한 얼음 검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들에게 줄 목은 없다.
죽여라!
일살의 명령과 함께 다섯 명의 살수가 동시에 쇄도했다. 그들의 합격진은 빈틈이 없었다. 정면에서는 묵직한 대검이 쏟아지고, 측면과 후방에서는 독이 발린 비수와 채찍이 백운의 급소를 노렸다.
백운의 눈동자가 푸른빛으로 갈라졌다. 그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빙룡선풍(氷龍旋風).
백운의 몸을 중심으로 강력한 냉기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접근하던 살수들은 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한풍에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추혼오살은 노련했다. 그들은 냉기의 흐름을 파악하고 다시금 진형을 갖춰 백운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연우야, 눈을 감아라.
백운이 나직하게 읊조린 순간, 그의 신형이 폭사하듯 튀어 나갔다. 그것은 보법이라기보다 공간을 얼려 그 위를 미끄러지는 빛에 가까웠다.
서걱!
첫 번째 살수의 목이 채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얼어붙은 채 바닥에 굴렀다. 백운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공중에 서리 입자를 뿌려 살수들의 시야를 가린 뒤, 얼음 실을 이용해 그들의 움직임을 구속했다.
단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산비탈은 붉은 피 대신 하얀 서리로 뒤덮였다. 네 명의 동료를 순식간에 잃은 일살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는 자신이 상대하는 존재가 무림의 고수가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자연 재해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가서 전해라. 나를 쫓는 자는 이 산맥의 차가운 거름이 될 것이라고.
백운은 일살을 죽이는 대신 그의 한쪽 다리를 얼려버렸다. 평생 무공을 쓰지 못하게 하려는 자비이자 경고였다. 백운은 다시 연우의 손을 잡았다. 소녀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스승의 압도적인 무력이 깊게 각인되고 있었다.
멀리 북쪽, 만년설이 쌓인 빙궁의 고향이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제8장: 철검관의 폭풍
태행산맥을 넘어 북방으로 향하는 유일한 관문, 철검관(鐵劍關). 이곳은 험준한 절벽 사이에 세워진 천혜의 요새이자, 정파 무림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철검문이 대대로 지켜온 곳이었다. 백운과 연우가 관문 입구에 다다랐을 때, 이미 그곳에는 수백 명의 무사가 집결해 있었다.
천무맹의 전령이 벌써 다녀간 모양이군.
백운의 시선이 성벽 위를 훑었다. 성벽 위에는 '철검(鐵劍)'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들이 거세게 휘날리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철검문의 문주이자 강직하기로 소문난 '철권' 조천강이 서 있었다. 그는 거대한 철제 장갑을 낀 손으로 성벽을 짚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빙궁의 후예여! 이곳은 정파의 결계이자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땅이다. 낙양의 피바람을 몰고 온 자를 결코 통과시킬 수 없다!
조천강의 사자후가 계곡 전체를 울렸다. 백운은 대답 대신 연우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등 뒤에 매어두었던 녹슨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검신에 서린 투명한 얼음이 햇빛을 반사하며 기묘한 광채를 내뿜었다.
길을 비켜라. 내 갈 길은 저 너머에 있다.
백운이 평지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성벽 위에서 수천 발의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화살촉에는 화약이 매달려 있어 폭발적인 열기를 품고 있었다. 백운을 노린 화공(火攻)이었다.
하지만 백운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얼음 방패가 형성되었다. 화살들이 얼음 방패에 닿는 족족 힘없이 튕겨 나갔고, 폭발의 불꽃조차 차가운 한기에 먹혀 힘을 쓰지 못했다.
빙벽수호(氷壁守護).
백운의 신형이 유령처럼 관문의 정문을 향해 쇄도했다. 조천강은 성벽에서 뛰어내리며 거대한 철권을 내질렀다. 권풍에 실린 강력한 내력이 공기를 압축하며 백운의 가슴을 노렸다.
콰앙!
얼음 검과 철권이 부딪히며 거대한 충격파가 발생했다. 주변에 있던 무사들이 그 여파에 밀려나 나뒹굴었다. 조천강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철권이 닿은 얼음 검에서 전해지는 냉기가 장갑을 뚫고 뼛속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내 강맹한 내력이 얼어붙고 있다니!
조천강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지만, 백운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검 끝을 지면에 박아 넣었다.
대지결빙(大地結氷).
관문 앞마당 전체가 순식간에 은백색의 얼음판으로 변했다. 철검문의 무사들은 미끄러운 바닥에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그들의 발은 그대로 대지에 얼어붙었다. 백운은 조천강의 목전에 검을 들이댔다.
나는 죽이러 온 것이 아니다. 지나가러 온 것이다.
조천강은 자신의 가슴까지 차오른 얼음의 기운을 느끼며 절망했다. 수십 년간 닦아온 무공이 이 소년의 몸짓 한 번에 무력화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백운은 전의를 상실한 조천강을 뒤로하고 얼어붙은 성문을 가볍게 손으로 밀었다. 육중한 철문은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 나며 길을 내주었다. 연우는 스승의 뒤를 따르며, 자신들의 뒤편에서 떨고 있는 수백 명의 무사를 향해 차가운 보랏빛 시선을 던졌다.
그날 이후, 무림에는 '얼어붙은 관문'의 전설이 퍼지기 시작했다. 정파의 그 어떤 요새도, 그 어떤 고수도 빙룡의 행보를 막을 수 없다는 공포의 서막이었다.
제9장: 만년설의 수련
철검관을 지나 북방으로 향할수록 바람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살을 파고들었다. 대지는 온통 흰색으로 뒤덮였고, 생명체의 흔적은 갈수록 드물어졌다. 백운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거대한 설산의 동굴 속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세상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이자, 연우가 진정한 무공의 길로 들어서기에 적합한 극한의 땅이었다.
연우야, 무공이란 본래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다.
백운이 동굴 입구에 앉아 쏟아지는 눈송이를 손바닥 위에 올리며 말했다. 연우는 홑옷 한 장만을 걸친 채 온몸을 떨며 백운의 말을 경청했다. 독기는 억눌러졌으나,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스승이 주입한 얼음 같은 진기였다.
자연의 흐름을 네 것으로 만들어라. 추위는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네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백운이 손바닥을 뒤집자, 그 위에 놓였던 눈송이가 녹지 않고 오히려 주변의 냉기를 빨아들여 거대한 얼음 결정체로 자라났다. 연우는 스승의 동작을 따라 하려 애썼다. 하지만 평범한 소녀였던 그녀에게 자연의 기운을 다스리는 법은 아득히 멀기만 했다.
며칠이 지났다. 연우의 살갗은 터져 피가 났고, 눈꺼풀에는 성에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소녀의 보랏빛 눈동자만큼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연우는 깨달았다. 자신이 느끼는 이 고통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분노를 힘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라는 것을.
어느 날 밤, 연우의 단전에서 작은 진동이 일어났다. 백운이 심어준 냉기의 씨앗이 드디어 소녀의 내력과 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우가 내뱉는 숨결이 하얀 김을 넘어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스승님, 보이나요?
연우가 떨리는 손을 뻗어 동굴 벽을 짚었다. 그러자 손바닥이 닿은 지점부터 기이한 보랏빛 얼음 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백운의 순수한 청백색 냉기와는 달랐다. 그것은 소녀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독기와 한기가 뒤섞여 만들어진, 세상에 없던 변종 무공이었다.
빙독신결(氷毒神結).
백운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내심 경탄했다. 자신이 가르친 것은 기초적인 빙궁의 심법이었으나, 제자는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백운은 동굴 밖의 대기가 미세하게 일렁이는 것을 감지했다.
단순한 추격자가 아니었다. 눈보라 속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마치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듯한 압도적인 중압감을 담고 있었다.
연우야, 수련은 여기까지다. 손님이 왔구나.
백운이 녹슨 검을 쥐고 일어섰다. 동굴 밖,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천무맹이 보낸 암살자도, 정파의 고수도 아니었다. 백 년 전 빙궁을 멸문시켰던 장본인들이자, 지금은 무림의 막후에서 군림하는 비밀 조직 '명교(冥敎)'의 호법 중 한 명인 '혈마웅'이었다.
진정한 원수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제10장: 붉은 눈의 흉신
눈보라를 가르며 나타난 혈마웅의 신형은 가히 위압적이었다. 두꺼운 곰 가죽을 어깨에 걸친 그의 전신에서는 지독한 피 냄새와 함께 대지를 태울 듯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백 년 전, 북해빙궁의 성문을 부수고 수천 명의 빙궁 무사들을 학살했던 명교의 선봉장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빙룡의 잔당이 아직 살아 있었군.
혈마웅의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리며 연우가 피워낸 보랏빛 얼음 꽃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그는 등에 매고 있던 거대한 흑철 도끼를 꺼내 들었다. 도끼날에는 수많은 원혼의 비명이 서린 듯 기분 나쁜 붉은 광채가 감돌았다.
백운은 연우를 동굴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 짙은 푸른빛으로 타올랐다.
내 가족과 문파의 피를 마신 짐승이 발등을 드러냈구나. 오늘 네놈의 골수를 얼려 빙궁의 제단에 바치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운의 신형이 탄환처럼 튀어 나갔다. 녹슨 검 위로 서린 만년 한기가 혈마웅의 안면을 노리고 쇄도했다.
콰콰쾅!
흑철 도끼와 얼음 검이 충돌하자 산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백운의 냉기가 혈마웅의 팔을 타고 올라갔지만, 혈마웅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내공을 폭발시켰다. 그의 무공인 혈마신공(血魔神功)은 타오르는 피의 열기로 냉기를 상쇄하는 빙궁 무공의 천적이었다.
애송이! 빙룡의 힘도 백 년 전 그 늙은이보다 못하구나!
혈마웅의 도끼가 횡으로 베어 들어왔다. 백운은 허공에서 신형을 뒤틀며 회피했으나, 도끼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강기가 백운의 어깨를 스쳤다. 얼음처럼 차갑던 백운의 옷자락이 타들어 가며 붉은 선혈이 설원 위로 흩어졌다.
스승님!
연우가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오려 했다. 하지만 백운은 손을 뒤로 뻗어 보이지 않는 얼음 벽으로 동굴 입구를 봉쇄했다.
나오지 마라! 이 자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백운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내력으로 얼려 지혈했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서렸다. 백운은 검을 거두고 두 손을 합장했다. 주변의 모든 눈보라가 멈추고, 대기에 흩어져 있던 한기가 백운의 몸을 중심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빙룡강림(氷龍降臨), 만상동결(萬象凍結).
백운의 등 뒤로 거대한 얼음 용의 형상이 치솟았다. 단순히 기운으로 만든 형상이 아니었다. 설산의 눈과 얼음을 매개로 실체화된 빙룡은 대지를 짓누르며 포효했다. 혈마웅의 안색이 처음으로 창백하게 변했다.
이, 이것은... 소실되었다던 빙궁의 극의!
빙룡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극저온의 숨결이 혈마웅의 붉은 열기를 삼켜버렸다. 혈마웅은 비명을 지르며 도끼를 휘둘렀지만, 그의 팔다리는 이미 감각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백운의 신형이 빙룡의 머리 위로 솟구쳐 올랐다.
백 년의 원한, 여기서 끊어주마.
백운의 얼음 검이 혈마웅의 심장을 향해 낙하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하늘 위에서 거대한 검은 손바닥이 내려와 빙룡의 머리를 짓눌렀다. 백운의 필살 초식이 무참히 깨져나가며 백운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눈보라가 걷힌 자리, 혈마웅의 뒤편에 검은 가마 하나가 공중에 떠 있었다. 가마 안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웃음소리가 설산을 뒤덮었다.
호법 하나를 잃을 뻔했구나. 참으로 흥미로운 아이로다.
명교의 교주, 혹은 그에 준하는 절대 고수의 등장이었다. 백운은 피를 토하며 간신히 일어섰다. 이제 막 시작된 복수의 여정 앞에,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제11장: 묵신(墨神)의 강림
가마 주위로 흐르는 기운은 생명력을 갉아먹는 검은 안개와 같았다. 혈마웅조차 그 기운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마의 비단 커튼이 천천히 걷히고,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피부를 가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명교의 좌사자이자, 천하 오대 고수 중 일인으로 꼽히는 묵신(墨神) 사마휘였다.
빙룡의 기운이 제법이구나. 하지만 아직은 설익은 과실에 불과해.
사마휘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백운이 펼쳐놓았던 얼음 벽들이 단숨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백운은 가슴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정신이 혼미해졌으나, 이를 악물며 검을 고쳐 쥐었다. 자신의 뒤에는 아직 무공이 미숙한 연우가 있었다.
연우야, 내가 길을 열 테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어라.
백운은 남은 진기를 모조리 끌어올렸다. 그의 심장 부근에서 푸른 보석처럼 빛나는 빙단(氷丹)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이는 목숨을 담보로 한 최후의 수단, 빙령연소(氷靈燃燒)였다. 백운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은빛으로 변하며 전신에서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어리석구나. 스스로 명줄을 태우다니.
사마휘의 손에서 검은 먹물이 번지듯 어둠의 장막이 펼쳐졌다. 백운은 빙룡의 형상을 한 검기를 날리며 그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콰르릉! 설산의 정상이 무너져 내릴 듯한 폭발이 일어났고, 사방은 온통 하얀 눈가루와 검은 안개로 뒤덮였다.
그 혼란을 틈타 연우는 울음을 삼키며 스승이 열어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회복을 마친 혈마웅이었다.
어디를 가느냐, 꼬마 쥐새끼야!
혈마웅의 도끼가 연우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찰나, 연우의 보랏빛 눈동자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난 보랏빛 서리가 순식간에 혈마웅의 도끼날을 타고 올라갔다.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백운에게 전수받은 빙궁의 정화와 연우 자신의 몸속에 응축되어 있던 만독(萬毒)이 결합된 치명적인 기운이었다.
커헉! 이, 이게 무슨...!
도끼를 잡고 있던 혈마웅의 손등이 순식간에 보라색으로 변하며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눈 덮인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뒤에서 사마휘의 서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독과 빙공의 조화라니... 훌륭한 제물을 키웠구나, 빙룡의 후예여.
백운은 사마휘의 검은 손바닥에 가슴을 타격당하며 의식을 잃어갔다. 멀어지는 시야 끝으로 절벽 아래로 사라지는 연우의 잔상이 보였다. 백운의 눈에서 한 줄기 얼음 눈물이 흘러내렸다.
설산의 폭풍이 잦아들었을 때, 그곳에는 파괴된 동굴과 핏자국만이 남았을 뿐 백운과 연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명교의 가마는 유유히 하늘을 가로질러 사라졌고, 북방의 대지에는 오직 피비린내 나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사흘 뒤, 설산 하류의 얼어붙은 강가에서 한 노인이 보랏빛 안개에 싸인 소녀를 발견하면서 무림의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제12장: 독의 꽃, 빙화의 눈물
정신을 차린 연우의 눈앞에 보인 것은 설산의 차가운 하늘이 아닌, 낮게 가라앉은 초가집의 천장이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고통에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팔다리는 천근만근의 무게로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깨어났느냐. 보랏빛 눈을 가진 아이야.
방 한쪽 구석에서 약재를 썰고 있던 백발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노인의 손길은 투박했으나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산맥처럼 거대하고도 평온했다. 그는 한때 의선(醫仙)이라 불렸으나 무림의 추악한 암투에 염증을 느끼고 은거한 독고령이었다.
스승님... 우리 스승님은요?
연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독고령은 대답 대신 쓰디쓴 약탕을 연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 빙룡의 후예 말이냐. 명교의 좌사자에게 끌려갔다면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겠지. 흑뢰(黑牢)라 불리는 그곳은 산 자의 영혼을 갉아먹는 곳이니까.
연우의 보랏빛 눈동자에 다시금 서늘한 살기가 어렸다. 그녀는 약탕을 밀쳐내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채 세 걸음을 떼기도 전에 바닥에 고꾸라졌다. 체내의 만독과 빙공이 충돌하며 혈맥을 뒤틀어놓고 있었다.
지금의 너로는 그 산을 내려가기도 전에 숨이 끊어질 것이다. 네 몸 안의 독은 빙공에 의해 억눌려 있었으나, 이제는 그 두 기운이 서로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어.
독고령이 연우의 등에 손을 얹고 부드러운 진기를 주입했다. 연우의 등 뒤로 보랏빛 안개가 피어오르며 방 안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너는 재앙의 씨앗이자 기적의 열매다. 독을 얼려 힘으로 삼고, 냉기에 독을 섞어 상대를 무너뜨리는 무공. 내가 전해주는 만독심경(萬毒心經)과 네가 배운 빙공을 하나로 합쳐라. 그것만이 네 스승을 구할 유일한 길이다.
연우는 바닥을 움켜쥐었다. 손톱이 깨져 피가 났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명교의 검은 손에 끌려가던 백운의 마지막 모습만이 맴돌았다.
가르쳐주세요. 세상을 얼리고 녹여버릴 힘을.
그날부터 연우의 지옥 같은 수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독고령은 온갖 영물과 독충을 모아 연우를 거대한 약통 속에 집어넣었다. 살이 타들어 가고 뼈가 시리는 고통 속에서도 연우는 단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한편, 명교의 본산인 흑뢰 지하 깊숙한 곳. 백운은 사지가 쇠사슬에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내공을 봉인하는 흑정석(黑晶石) 못이 박혀 있었고, 사마휘는 매일같이 그의 빙단을 추출하기 위해 잔인한 고문을 반복했다.
말해라. 빙룡의 진정한 유산이 숨겨진 곳이 어디냐.
백운은 피 섞인 웃음을 지으며 사마휘를 응시했다.
이미 말했지 않느냐... 네놈들의 파멸이 시작될 곳이라고.
백운의 가슴 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빙단이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인을 잃지 않은 냉기의 저항이자, 멀리서 성장을 시작한 제자의 기운에 응답하는 공명이었다.
제13장: 흑뢰의 달그림자
명교의 본산 아래, 만년 설산의 심장부에 위치한 흑뢰는 빛조차 허락되지 않는 무덤이었다. 이곳의 공기는 습하고 무거웠으며, 벽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조차 죄수들의 절망을 머금어 끈적거렸다. 백운의 사지에 박힌 흑정석 못은 그의 골수를 파고들며 빙룡의 진기를 한 방울씩 갉아먹고 있었다.
사마휘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빙룡의 기운을 담기 위한 옥병이 들려 있었다.
아직도 버티는구나. 네 빙단은 참으로 질기다. 하지만 네 제자는 어떨까? 그 보랏빛 눈의 아이 말이다.
백운의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눈동자는 빛을 잃어 탁해져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살기는 사마휘조차 찰나의 소름을 느끼게 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네놈의 더러운 입에 올리지 마라.
사마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백운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흑정석 못을 통해 역류하는 어둠의 진기가 백운의 심장을 압박했다. 백운은 비명 대신 신음을 삼켰다. 그의 의식은 점차 멀어져 갔지만, 단전 깊은 곳에 남은 마지막 빙룡의 파편이 거칠게 요동쳤다.
한편, 독고령의 거처를 떠난 연우는 이제 예전의 연약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가 걷는 길목마다 풀들은 검게 타죽었고, 대지는 서늘한 보랏빛 서리에 덮였다. 연우의 등 뒤에는 독고령이 건네준 고검, '만독청염검'이 매여 있었다.
연우는 명교의 첫 번째 지부인 '적월단'의 요새 앞에 섰다. 요새를 지키던 무사들이 기괴한 차림의 소녀를 보고 비웃으며 다가왔다.
웬 기집애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느냐?
연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검을 뽑아 허공을 가르자, 투명한 냉기가 아닌 보랏빛 안개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무사들이 그 안개에 닿는 순간, 그들의 육신은 얼어붙음과 동시에 부패하기 시작했다. 비명조차 지를 새 없이 수십 명의 무사가 보랏빛 조각상이 되어 바스라졌다.
빙독신공, 제1성. 만화결빙(萬花結氷).
연우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타올랐다. 그녀는 스승이 갇힌 흑뢰의 방향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요새의 문은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얼어붙어 산산조각 났다.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명교의 고수들을 향해 연우는 차갑게 읊조렸다.
스승님을 돌려받으러 왔다. 길을 비키지 않으면, 이 산 전체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겠다.
적월단의 단주가 거대한 창을 들고 튀어 나왔으나, 연우의 신형은 이미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찰나의 순간, 단주의 목에는 보랏빛 얼음 침이 박혔다. 그는 자신의 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절망 속에 무릎을 꿇었다.
낙양의 핏바람보다 더 거대하고 치명적인 폭풍이 명교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흑뢰의 지하에서 백운은 자신을 부르는 제자의 기운을 감지했다. 그는 쇠사슬을 움켜쥐었다. 흑정석 못 주변으로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제14장: 뇌옥의 진동
흑뢰의 가장 깊은 곳, 만년 한철로 주조된 쇠사슬이 비명과 같은 금속음을 내뱉었다. 백운의 사지에 박힌 흑정석 못들이 그의 내력을 빨아들여 검게 번들거리고 있었으나, 백운의 내면에서는 예기치 못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파괴를 통한 재탄생이었다. 사마휘가 매일같이 주입한 명교의 음한한 마기가 오히려 백운의 빙룡진기와 충돌하며, 그의 단전 안에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극과 극의 기운이 맞물려 돌아가며 백운의 골격은 재배열되었고, 억눌려 있던 빙룡의 혈맥이 마기를 먹어 치우며 더욱 거대하게 팽창했다.
우드득.
백운의 어깨 근육이 뒤틀리며 박혀 있던 못 하나가 튕겨 나갔다. 흑정석은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백운의 냉기에 침식되어 가루가 되었다. 백운은 고통에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멀리서 느껴지는 연우의 기운, 그 치명적이고도 애틋한 보랏빛 파동에 응답해야만 했다.
살아야 한다. 그 아이를 혼자 두지 않겠다.
백운이 남은 세 개의 못을 향해 강제로 진기를 역류시켰다. 혈관이 터져 나가고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렸지만, 그의 전신에서는 푸른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기이한 광채가 폭발했다.
한편, 흑뢰의 입구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연우가 휘두르는 만독청염검의 궤적을 따라 보랏빛 불꽃이 설원을 태우며 나아갔다. 적월단의 정예 무사들이 방패를 앞세워 막아섰으나, 연우의 검기가 닿는 순간 방패는 부식되어 무너졌고 그 뒤의 무사들은 심장이 얼어붙은 채 절명했다.
막아라! 저 계집의 몸에 손대지 말고 원거리에서 암기를 써라!
지휘관의 외침에 수백 발의 독침과 도끼가 연우를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연우는 발끝으로 지면을 가볍게 찼다.
빙독환영무(氷毒幻影舞).
연우의 신형이 수십 개로 나뉘어 허공을 수놓았다. 각각의 잔상들은 보랏빛 안개를 내뿜으며 날아오는 암기들을 공중에서 얼려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연우는 지휘관의 바로 등 뒤에 착지했다. 그녀의 손이 지휘관의 뒷덜미를 스치자,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보랏빛 얼음 기둥으로 변했다.
연우의 시선은 거대한 바위산 전체를 뇌옥으로 쓰고 있는 흑뢰의 본문을 향했다. 그녀는 검을 거꾸로 쥐고 대지에 박아 넣었다.
만독귀원, 빙룡포효(氷龍咆哮).
지면 아래로 흐르던 냉기가 연우의 독기와 결합하여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솟구쳐 올랐다. 보랏빛 용은 흑뢰의 육중한 석문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천지를 뒤흔드는 진동과 함께 석문이 무너져 내렸고, 연우는 그 자욱한 먼지 속으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어둠이 지배하던 흑뢰 내부에 서늘한 보랏빛 광채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지하 깊은 곳, 마지막 못을 뽑아낸 백운이 쇠사슬을 끊고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의 손에는 얼음으로 빚어진 새로운 검이 맺혀 있었다. 스승과 제자, 두 빙룡의 후예가 마침내 하나의 공간에서 서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제15장: 핏빛 재회
흑뢰의 지하 통로는 비명과 한기로 가득 찼다. 백운은 사슬을 끊어낸 상처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흑정석 못이 박혔던 자리마다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점이 얼어붙어 지혈되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연우의 기운을 쫓아 어두운 복도를 질주했다.
앞을 가로막는 명교의 간수들은 백운의 손짓 한 번에 벽면에 박제되었다. 검을 휘두를 필요조차 없었다. 그의 분노는 이미 주변의 공기 자체를 살상 무기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스승님!
멀리 복도 끝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랏빛 안개를 가르며 나타난 소녀의 모습에 백운은 전율했다. 예전의 가냘프던 연우가 아니었다. 그녀의 전신에서는 치명적인 독기와 서늘한 냉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며, 그 눈동자는 스승을 향한 그리움과 세상을 향한 증오로 타오르고 있었다.
연우야.
백운의 목소리가 떨렸다. 연우는 백운의 처참한 몰골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으며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백운의 가슴에 박혔던 못 자국과 쇠사슬에 짓물린 손목을 본 연우의 보랏빛 눈에서 투명한 서리가 맺혀 떨어졌다.
늦어서 죄송해요. 이제 제가... 제가 다 죽여버릴게요.
연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살기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 있었다. 백운은 제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이 뇌옥의 진정한 주인들이 오고 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거대한 압력이 쏟아졌다. 흑뢰의 천장이 통째로 내려앉으며 사마휘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곁에는 명교의 또 다른 권력자, '혈영신마' 독고운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참으로 눈물겨운 사제지간이로구나. 흑뢰를 이토록 유린하다니, 그 대가는 오직 영혼의 소멸뿐이다.
사마휘가 손을 뻗자 검은 먹구름이 지하 통로를 메웠다. 독고운은 붉은 강기를 뿜어내며 연우의 목을 겨냥했다. 백운과 연우는 서로의 등을 맞댔다. 백운의 청백색 냉기와 연우의 보랏빛 독기가 하나로 어우러지며 거대한 태극의 형상을 그렸다.
스승님, 저들과 함께 이 무덤을 얼려버려요.
그래, 오늘 이곳이 명교의 종말이 시작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백운의 얼음 검과 연우의 만독청염검이 합쳐지며 거대한 빙룡의 날개가 펼쳐졌다. 명교의 두 괴물과 빙룡의 후예들이 부딪히는 순간, 흑뢰 전체가 굉음과 함께 붕괴하기 시작했다. 산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아비규환 속에서, 복수의 서막을 알리는 보랏빛 눈보라가 낙양을 향해 불어오기 시작했다.
제16장: 빙해(氷海)의 태극
흑뢰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 속에서 네 명의 고수는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쏟아지는 바위 파편들이 백운과 연우의 기운에 닿는 순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사마휘의 검은 마기와 독고운의 붉은 강기가 합쳐져 하늘을 검붉게 물들였으나, 그 아래 버티고 선 두 사람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연우야, 내 기운을 받아라.
백운이 연우의 등에 손바닥을 밀착시켰다. 빙룡의 순수한 정수가 연우의 혈맥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연우의 보랏빛 독기는 스승의 냉기를 머금어 더욱 투명하고 치명적으로 변했다. 두 사람의 내력이 하나로 묶이며 거대한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졌다.
빙독합일(氷毒合一), 빙천독해(氷天毒海).
연우가 검을 크게 휘두르자, 대지를 뒤덮은 눈들이 일제히 보랏빛으로 변하며 파도처럼 솟구쳤다. 단순히 차가운 파도가 아니었다. 닿는 모든 것을 부식시키고 얼려버리는 죽음의 바다였다.
사마휘는 경악했다. 자신의 묵신공(墨神功)이 이 기괴한 보랏빛 파도에 먹혀 오히려 정화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독고운 역시 붉은 강기를 쏟아내며 저항했으나, 발밑에서부터 차오르는 보랏빛 서리에 장화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두 사람의 내력이 공명하여 경지를 넘어서고 있다!
사마휘가 필사적으로 검은 안개를 뭉쳐 거대한 장막을 쳤으나, 백운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만년 한기가 그 장막의 핵을 꿰뚫었다. 연우의 보랏빛 독기가 그 균열 사이로 스며들어 사마휘의 오장육부를 공략했다.
커헉!
사마휘가 선혈을 토하며 뒤로 밀려났다. 그가 토해낸 피는 바닥에 닿기도 전에 보랏빛 얼음 결정이 되어 부서졌다. 독고운 또한 연우의 변칙적인 검초에 어깨를 관통당하며 비틀거렸다. 명교를 지탱하던 두 기둥이 단 두 명의 소년 소녀에게 처참히 무너지고 있었다.
백운은 비틀거리는 사마휘의 목전에 얼음 검을 들이댔다.
우리 가문을 멸하고 나를 뇌옥에 가둔 대가다. 이제 네놈의 교주에게 전해라. 빙룡이 그의 심장을 얼리러 갈 것이라고.
백운은 사마휘를 죽이는 대신 그의 단전을 얼려 평생 무공을 쓰지 못하는 폐인으로 만들었다. 고통에 울부짖는 사마휘를 뒤로하고, 백운은 연우의 손을 잡았다.
가자, 연우야. 이제는 우리가 쫓길 차례가 아니라, 우리가 사냥할 차례다.
무너진 흑뢰의 잔해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보랏빛으로 얼어붙은 명교 무사들의 시신만이 기괴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무림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명교의 북방 거점은 그렇게 단 하루 만에 지도에서 지워졌다.
이제 두 사람의 시선은 중원 한복판, 모든 악의 근원인 명교의 본산인 흑천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17장: 천마대의 밤
흑뢰의 붕괴 소식은 중원 무림에 거대한 해일처럼 번졌다. 명교의 본산인 흑천성에서는 일찍이 없던 비상령이 내려졌고, 교주가 아끼던 좌사자 사마휘가 폐인이 되었다는 보고는 교단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이에 교주는 명교 최강의 암살 집단이자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병기들인 천마대(天魔隊)를 출동시켰다.
백운과 연우가 중원으로 향하는 길목인 협곡의 어느 낡은 사당에서 하룻밤을 의지할 때였다. 사방을 휘감은 정적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백운은 무릎 위에 놓인 녹슨 검의 진동을 느꼈다.
연우야, 깨어나라. 그림자들이 왔다.
백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당의 지붕이 종이처럼 찢겨 나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열두 명의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하강했다. 그들은 천마대의 정예들로, 각자 전신을 기괴한 철갑으로 무장하고 쇠사슬이 연결된 낫을 휘둘렀다.
슈슉!
사방에서 낫들이 쇄도했다. 연우는 만독청염검을 뽑아 원을 그리며 막아섰다. 낫들이 부딪힐 때마다 보랏빛 불꽃이 튀었다. 하지만 천마대는 일반적인 무사들과 달랐다.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자신의 팔이 얼어붙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백운과 연우의 급소를 파고들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에요, 스승님! 시체 냄새가 나요!
연우의 말대로 그들은 명교의 금기된 술법으로 만들어진 강시와 고수가 결합된 변종이었다. 백운은 검을 수평으로 세우고 내력을 폭발시켰다.
빙환절계(氷環絶界).
사당 전체를 중심으로 투명한 얼음 고리가 퍼져 나갔다. 고리에 닿은 천마대원들의 하반신이 바닥에 고정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다리를 잘라내고 허공을 날아 달려들었다. 광기 어린 공격에 백운의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백운은 깨달았다. 이들은 죽이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연우에게 눈짓했다. 연우는 스승의 의도를 파악하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빙독폭류(氷毒瀑流)!
연우가 허공에서 쏟아낸 보랏빛 독기가 사당 안을 가득 메웠다. 천마대원들의 철갑 사이로 독기가 스며들자, 그들의 강인한 육신이 부풀어 오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백운이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빙룡참(氷龍斬).
거대한 청백색 검기가 사당을 가로질렀다. 독기에 약해진 천마대원들의 몸은 단 한 번의 검격에 수만 조각의 얼음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열두 명의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약한 악취와 보랏빛 서리만이 남았다.
백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너진 사당 밖을 보았다. 멀리 산등성이에는 여전히 수많은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천마대는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명교는 두 사람을 중원으로 보내지 않기 위해 산맥 전체를 거대한 덫으로 만들고 있었다.
스승님, 저들의 시체가 보라색으로 변하고 있어요. 제 독이 듣고 있어요.
연우의 목소리에는 이제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적들을 사냥하겠다는 포식자의 갈망이 서려 있었다. 백운은 제자의 손을 굳게 잡았다. 두 빙룡은 이제 어둠 속으로 숨지 않고, 자신들을 노리는 무수한 눈동자를 향해 정면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18장: 폭주의 보랏빛 꽃
천마대를 궤멸시키고 산맥을 내려오는 길, 연우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녀의 전신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보랏빛 독기가 뿜어져 나왔고, 투명했던 눈동자는 이제 짙은 자색으로 물들어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수많은 명교 무사들을 죽이며 흡수한 마기와 그녀 본연의 독기가 빙룡의 냉기를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연우야, 정신 차려라! 내 기운에 집중해!
백운이 급히 연우의 혈도를 짚으며 청백색의 순수한 진기를 주입했다. 하지만 연우의 몸은 스승의 기운을 거부하며 거칠게 반탄했다. 그녀의 피부 위로 기괴한 보랏빛 혈관들이 돋아났고, 입술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스승님... 뜨거워요.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요. 다... 다 얼려버리고 싶어.
연우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주변의 바위를 내리쳤다. 콰광! 바위는 단순히 깨지는 것이 아니라 보랏빛 얼음으로 변하더니 그대로 녹아내려 독물이 되었다. 빙독신공의 부작용인 ‘독혈반탄’이었다. 제어되지 않는 힘이 주인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바로 그때, 숲의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무림인이 나타났다. 명교가 아닌, 정파 연맹 천무맹의 별동대였다. 그들은 낙양에서부터 이들을 추격해온 자들이었다.
빙룡의 잔당과 독물 괴물을 찾아냈다! 저 소녀를 봐라, 이미 마교의 괴물이 다 되었다!
별동대장 육진강이 검을 뽑으며 외쳤다. 그들에게 연우는 구출해야 할 피해자가 아니라, 반드시 제거해야 할 흉물이었다. 정파 무사들이 포위망을 좁히며 병기를 겨누자, 고통에 몸부림치던 연우의 고개가 기괴하게 꺾이며 그들을 향했다.
죽여... 죽여줄게.
연우의 몸에서 폭발적인 보랏빛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백운이 말릴 틈도 없었다. 연우는 마치 한 마리의 굶주린 야수처럼 정파 무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마다 비명과 함께 보랏빛 죽음이 피어났다. 정파의 검기는 연우의 독기에 부딪혀 허무하게 흩어졌다.
안 돼! 연우야, 멈춰라!
백운은 절망했다. 이대로 두면 연우는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잃고 오직 살육만을 탐하는 독괴(毒怪)가 될 터였다. 백운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단전에 자리 잡은 빙룡의 정수, 빙단을 강제로 깨뜨렸다.
파앗!
백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극순의 냉기가 전방위를 얼려버렸다. 살육을 자행하던 연우와 공포에 질린 정파 무사들까지, 시간마저 멈춘 듯 그 자리에 빙결되었다. 백운은 비틀거리며 연우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생명력과 맞바꾼 냉기로 연우의 폭주하는 혈맥을 하나하나 잠재우기 시작했다.
스승의 따뜻한, 아니 세상에서 가장 차가우면서도 다정한 기운이 심장에 닿자 연우의 눈동자가 서서히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연우는 자신을 안아준 백운의 품에서 정신을 잃었다.
백운은 각혈하며 무릎을 꿇었다. 빙단이 깨진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연우를 등에 업고 다시 묵묵히 걸작을 내디뎠다. 정파도, 명교도 그에겐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이 아이만은 지켜야 했다.
제19장: 설해빙원의 약속
백운의 숨결은 이제 희미한 서리처럼 가냘팠다. 부서진 빙단의 파편들이 혈맥을 찌를 때마다 그의 안색은 투명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러나 그는 등에 업힌 연우가 깨어날까 봐 거친 숨조차 억눌렀다. 정파 무사들이 얼어붙은 숲을 뒤로하고, 그가 향한 곳은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설해빙원(雪海氷原)이었다. 그곳에는 만년의 한기를 머금은 영물, 만년한옥이 잠들어 있다는 전설이 있었다.
으음...
연우가 긴 신음 끝에 눈을 떴다. 폭주의 기억은 조각나 있었지만, 자신을 지탱하는 스승의 등이 평소보다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연우는 급히 백운의 등에서 내려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스승님! 몸이... 몸이 왜 이래요?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요!
백운은 힘겹게 미소 지으며 연우의 뺨을 만졌다. 그의 손등에는 이미 죽음의 기운인 회색 성에가 끼어 있었다.
빙단은 다시 만들면 된다. 하지만 네 이성이 타버리면 되돌릴 수 없었어. 이제 다 왔다. 저 앞의 푸른 빛이 보이지?
백운이 가리킨 곳은 거대한 빙벽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비로운 옥색 광채였다. 하지만 그 광채를 가로막고 서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명교의 교주가 보낸 최후의 집행자이자, 백운의 아버지와 빙궁을 배신했던 전대 빙궁의 장로, '동사' 한무진이었다.
사형, 여전히 어리석은 선택을 하셨군요. 제자를 위해 자신의 근원을 깨뜨리다니.
한무진의 손에는 빙궁의 가보였던 '한빙신검'이 들려 있었다.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르자 설해빙원의 대지가 갈라지며 거대한 얼음 가시들이 솟구쳤다.
연우는 백운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다시금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으나, 이번에는 폭주가 아니었다. 스승의 희생으로 얻은 평온 위로 지독한 증오가 겹쳐진 냉정한 분노였다.
스승님은 쉬세요. 저 배신자의 피로 스승님의 빙단을 다시 빚어낼게요.
연우가 만독청염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그녀의 검기는 보랏빛 안개를 넘어 푸른 냉기와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었다. 빙독합일의 진정한 완성, 빙화독룡(氷花毒龍)의 기운이 연우의 등 뒤에서 형상화되었다.
한무진은 코웃음을 쳤으나, 연우가 내딛는 첫걸음에 빙원이 통째로 진동하자 안색이 굳어졌다. 소녀의 발걸음마다 대지는 보랏빛 얼음 꽃으로 뒤덮였고, 그 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는 한무진의 한빙기조차 부식시키기 시작했다.
죽어라, 빙궁의 수치여!
연우의 신형이 보랏빛 광선이 되어 한무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설해빙원의 차가운 정적은 단숨에 파괴되었고, 스승을 살리기 위한 제자의 처절한 사투가 눈부신 옥색 광채 속에서 시작되었다.
제20장: 만년의 침묵, 영원한 귀환
한무진의 한빙신검이 허공을 가르며 수만 개의 얼음 파편을 흩뿌렸다. 전대 장로다운 노련한 검술은 연우의 맹렬한 기세를 교묘하게 흘려보냈다. 한무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연우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애송아, 내공의 깊이는 분노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검 끝이 연우의 어깨를 꿰뚫으려는 찰나, 연우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신을 자신의 어깨로 받아내며 한무진의 팔을 움켜쥐었다. 연우의 보랏빛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뜩였다. 그녀의 상처에서 흐른 피는 붉은색이 아닌, 진한 자색의 독액이었다.
이것이... 내가 견뎌온 고통이다.
빙화독룡의 기운이 연우의 손을 타고 한무진의 전신으로 역류했다. 한무진의 혈관은 순식간에 보랏빛으로 변하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전설적인 고수였던 그조차 자신의 무공이 내부에서부터 부식되는 공포에 비명을 질렀다. 연우는 만독청염검을 그의 가슴 깊숙이 박아 넣었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한무진의 육신은 보랏빛 안개가 되어 사라졌고, 그가 들고 있던 한빙신검만이 차가운 빙판 위에 떨어졌다. 연우는 비틀거리며 만년한옥이 잠든 동굴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영롱한 옥색 빛을 내뿜는 거대한 원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우는 자신의 손바닥을 갈라 만년한옥 위에 피를 뿌렸다. 그녀의 독기와 냉기가 원석과 공명하며, 원석 안의 순수한 생명력이 정수(精髓)가 되어 추출되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 소중한 구슬을 받아 들고 입구를 지키던 백운에게 달려갔다.
스승님! 제발... 제발 눈을 뜨세요!
백운의 몸은 이미 절반 이상이 회색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연우는 만년한옥의 정수를 백운의 입 안으로 밀어 넣고, 자신의 모든 내력을 쏟아부어 그 기운을 운기시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백운의 가슴 속에서 멈췄던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깨졌던 빙단의 파편들이 옥색 광채를 머금으며 하나로 합쳐졌고, 이전보다 수십 배는 더 맑고 거대한 새로운 빙단, 천빙주(天氷珠)가 형성되었다.
백운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투명한 푸른색을 넘어, 세상의 모든 진리를 담은 듯 깊고 고요한 빛을 띠고 있었다.
연우야... 고생했다.
백운은 자신을 붙들고 오열하는 연우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기운이 맞닿는 순간, 설해빙원의 폭풍이 멎고 찬란한 햇살이 빙벽 사이로 쏟아졌다. 백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무진이 남긴 한빙신검을 집어 들었다.
이제 가자. 낙양에서 시작된 이 여정을 끝낼 때가 되었다.
백운의 목소리에는 이제 살기가 없었다.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천리(天理)와도 같은 위엄이었다. 빙룡의 후예와 독화의 제자는 이제 명교의 본산, 흑천성을 향해 최후의 발걸음을 옮겼다.
낙양의 작은 술집에서 시작된 복수는 이제 무림의 역사를 새로 쓰는 전설이 되어, 중원 전역에 보랏빛 서리와 푸른 눈보라를 몰고 오고 있었다.
제21장: 흑천성의 종언
중원의 중심, 명교의 본산인 흑천성은 거대한 묘비처럼 대지에 우뚝 솟아 있었다. 하늘은 검은 구름에 짓눌려 빛을 잃었고, 성벽 주위로는 산 자의 접근을 거부하는 마기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하지만 그 견고한 어둠을 뚫고 두 줄기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백운과 연우가 성문 앞에 섰을 때, 수천 명의 교도들이 그들을 포위했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무기를 휘두르지 못했다. 두 사람이 내뿜는 압도적인 한기가 대기를 얼려 공기조차 숨 쉬기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길을 비켜라. 오직 교주의 목만을 취하러 왔다.
백운이 한빙신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성문이 통째로 결빙되어 산산조각 났다. 연우는 만독청염검을 바닥에 끌며 걸었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마다 보랏빛 얼음 꽃이 피어나며 성내의 마기를 정화했다.
성 중앙의 대전에 다다르자, 옥좌에 앉아 있던 명교의 교주 '천마'가 비로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은 핏빛으로 충혈되어 있었고, 손에는 만물을 부식시키는 흑마도가 들려 있었다.
빙룡의 잔당들이 여기까지 제 발로 찾아오다니. 네놈들의 해골로 내 옥좌를 장식해주마!
천마의 흑마도가 허공을 가르자 대전 전체가 검은 화염에 휩싸였다. 백운은 한빙신검을 세워 그 화염을 얼려버렸고, 연우는 보랏빛 독강을 뿜어내며 천마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무림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격전이었다. 백운의 천빙주는 무한한 냉기를 공급했고, 연우의 독기는 천마의 마공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렸다. 천마는 광기 어린 소리를 내지르며 최후의 마공을 펼쳤으나, 백운과 연우가 합작한 ‘빙독태극(氷毒太極)’의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복수는 차갑게 끝이 났다. 천마의 심장이 보랏빛 얼음으로 굳어 멈추는 순간, 흑천성을 뒤덮고 있던 검은 구름이 걷히며 새벽빛이 쏟아져 내렸다. 명교는 무너졌고, 백 년간 이어온 빙궁의 원한도 마침내 눈 녹듯 사라졌다.
두 사람은 폐허가 된 성을 뒤로하고 북으로 향했다. 낙양의 소란스러운 밤도, 설산의 처절한 수련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스승님, 이제 어디로 가나요?
연우의 물음에 백운은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눈이 내리는 곳으로 가야지. 우리들의 진짜 집으로.
눈 덮인 대지 위로 두 쌍의 발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한 명은 빙룡의 검을, 한 명은 보랏빛 독화를 가슴에 품은 채, 그들은 전설이 시작된 북해의 만년설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 갔다. 무림은 그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찬 바람이 부는 날마다 사람들은 빙룡과 보랏빛 눈의 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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