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6. 5. 14:22ㆍ만화 애니
지하 창고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밀러의 지팡이 끝에서 일렁이던 화염 주문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노인의 머릿속은 지독한 혼란으로 뒤엉키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건 분명 마을에서 부모 없이 빌어먹던 고아 꼬맹이가 맞다. 매일 흙바닥에서 나뭇가지나 휘두르며 어른들의 비웃음을 사던 녀석.
하지만 지금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 서늘한 안광과 온몸을 짓누르는 기묘한 압박감은 결코 열 살짜리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제국 마탑의 내로라하는 천재 마법사들도 이런 눈빛을 하진 못했다.
“……네까짓 꼬맹이가 내 복수를 대신해 주겠다고?”
밀러가 씹어뱉듯 물었다. 지팡이 끝의 불꽃이 다시금 거세게 타올랐다.
“주둥이만 살아 숨 쉬는 핏덩이 치고는 제법 대담하구나. 하지만 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네놈은 잿가루가 된다. 그런 협박이 통할 거라 생각했느냐?”
“협박이 아니라 제안이야, 영감님.”
레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플라스크를 가볍게 흔들었다. 보랏빛 액체가 유리벽을 타고 매끄럽게 흘러내렸다.
“당신이 마탑에서 도망친 지 벌써 7년이 넘었지. 평생을 숨어 살며 복수의 기회만 노렸겠지만, 늙고 병든 당신의 육체로는 마탑의 문턱도 넘지 못해. 이 비약도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위해 아끼고 아껴둔 마지막 보루였겠지.”
“……!”
“근데 어쩌나. 당신한테는 더 이상 시간이 없는데.”
레온의 다정한 속삭임에 밀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밀러는 마탑의 추적자들에게 입은 영혼의 상처 때문에 마력을 쓸 때마다 수명이 깎여 나가고 있었다. 3년 뒤 마수 습격 때 마법을 쓰지 못하고 죽은 것도, 사실은 손을 쓰지 ‘않은’ 게 아니라 몸이 망가져 쓰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레온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작은 발소리가 지하 창고에 묵직하게 울렸다.
“이 아까운 비약을 품에 안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바에는, 차라리 판을 바꿀 수 있는 말(駒)에게 투자하는 게 낫지 않겠어?”
“……너, 도대체 정체가 뭐냐?”
밀러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살기는 어느덧 경계와 경외감으로 변해 있었다.
“말했잖아. 당신의 복수를 대행해 줄 괴물.”
레온은 주저 없이 플라스크의 마개를 뽑았다. 그리고 밀러가 채 손을 쓰기도 전에, 보랏빛 액체를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이 미친……!”
밀러가 경악하며 지팡이를 치켜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화아아아악!
비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레온의 뇌리가 번쩍했다. 단순히 열이 오르는 수준이 아니었다. 전신을 흐르는 혈관마다 수천 개의 바늘이 동시에 돋아나 안쪽을 사정없이 긁어대며 파고드는 듯한 극통(極痛)이었다.
“크윽……! 으아아악!”
레온은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평범한 인간의 몸에 강제로 마력 회로를 이식하고 개화시키는 과정. 성인의 육체로도 버티기 힘든 연수(鍊髓)의 과정을, 고작 열 살짜리 연약한 육체가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피부가 찢어지며 검붉은 피와 체내의 노폐물이 땀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바보 같은 놈! 준비도 없이 마력 개화의 비약을 통째로 삼키다니! 당장 심장이 터져 죽을 게다!”
밀러가 급히 다가와 레온의 상태를 살피려 했다. 당장 마력 억제 주문을 외우지 않으면 이 오만한 꼬맹이는 그 자리에서 시체가 될 터였다.
하지만 밀러는 레온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바닥을 구르며 고통에 겨워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레온의 양손은 정확하게 단전(丹田)의 위치에 모여 인(印)을 맺고 있었다.
마력의 폭주를 막고, 제멋대로 날뛰는 에너지를 강제로 뼈와 장기에 흡수시키는 정밀한 마력 제어법. 제국 황실 극비 전승에나 나올 법한 ‘황가 역천공(皇家 逆天功)’의 호흡법이었다.
‘말도 안 돼…… 저 나이에 마력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다고?!’
밀러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비약의 거대한 마력이 레온의 앙상한 육체를 파괴하려 들 때마다, 레온의 영혼에 각인된 전생의 경험이 그 마력의 머리통을 찍어 누르며 강제로 길을 들였다.
[시스템] 경고! 플레이어의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과부하가 발생합니다. [시스템] 고유 특성 ‘복수귀(EX)’가 발동합니다! [시스템] 고통 저항력이 50% 상승하며, 육체의 붕괴를 강제로 억제합니다.
[시스템] 축하합니다! 마력 회로 각성에 성공했습니다!
- 마력 수치 : 0 ➔ 15
- 새로운 속성 : ‘공허(Void)’의 싹이 트기 시작합니다.
스우우우우…….
지하 창고를 가득 채웠던 폭발적인 마력이 순식간에 레온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바닥에 엎드린 레온의 온몸은 검은 노폐물과 피로 뒤덮여 엉망진창이었지만, 그의 피부 밑으로 흐르는 숨결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단단해져 있었다.
레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아주 미세하게 자란 듯했고, 가라앉은 눈동자 깊은 곳에는 보랏빛 잔상이 흐릿하게 맴돌고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고른 레온이 자신을 유령 보듯 바라보는 밀러를 향해 씩 웃었다.
“거봐, 안 죽는다고 했잖아. 영감님.”
밀러는 스르륵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괴물. 눈앞에 있는 것은 아이의 탈을 쓴 괴물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이 녀석이라면 마탑을 통째로 불태워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오한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노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평생 누구에게도 숙이지 않았던 고개를 나직하게 숙였다.
“……좋다. 내 모든 지식을 네놈에게 전수해주지. 대신 약속해라, 레온.”
“마탑의 현 수장, 그 위선자의 목을 가져다 달라는 거겠지.”
레온이 땀을 닦아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걱정 마. 내 리스트에 적힌 배신자들에 비하면, 마탑주 그 노인네는 순번이 한참 뒤니까.”
카이엔을 죽이러 가는 길. 그 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해물은 마탑이든 제국이든 상관없이 전부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첫 번째 기연을 성공적으로 집어삼킨 회귀자의 눈이, 어둠 속에서 더욱 서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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